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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53화 (154/194)

153화

한편 플로리아가 이렇게 말하는 사이, 레무트 성문으로 마차 한 대가 들어왔다.

경비병들은 자연스럽게 출입구를 열어 주고 마차는 정문 앞에 도달했다.

문이 열리자 뚱한 표정의 샤를리즈가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왔다.

‘아으, 몸이 고급에 길들여졌나.’

레무트 가문의 마차는 아무래도 알츠베이트 가문의 마차보다는 평범한 마차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타고 나갈 땐 아무 생각 없었건만 돌아올 때는 유달리 허리가 쑤셨다.

……이래서야 지구로 돌아가게 되어도 괜찮은 걸까?

‘당연히 괜찮지. 내 사랑 코인이 있는데.’

샤를리즈는 콧방귀를 뀌며 사뿐사뿐 걸었다.

허리가 욱신대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은 정갈한 걸음이었다.

‘아리아가 지금은 깨어 있으려나? 본래 이 시간엔 정원을 산책한다고 했는데.’

만약 깨어 있다면 필시 자주 머무르는 후원에 있을 터였다.

샤를리즈는 자연스럽게 정원 쪽으로 향하며 정원 반대편에 위치한 아스킨의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 갔다.

‘내가 뭘 하는 거람.’

솔직히 말하자면 샤를리즈도 사람이기에 어제 있었던 그 공기, 분위기를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도 딱히 나쁘진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그 남자와 1년이란 약혼 기간을 완수해야 했다.

이런 상황일진데, 기왕 파트너와 사이가 좋아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아스킨 또한 자신이 싫은 건 아닌 듯했으니까. 오히려…….

‘눈치가 빠른 건 꼭 좋지만은 않다니까.’

샤를리즈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 뺨이 조금 달아올랐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는 빠르게 정원 쪽을 향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귀여운 데이지꽃이었다.

새하얀 눈꽃 같은 꽃을 보니 괜스레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우리 눈토끼 아가씨랑 닮은 꽃이라니까.’

꽃 뒤로 아리아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혹시 지금은 깨어 있을까? 고개를 든 순간 꽃밭 뒤로 저 멀리 여인의 형체가 아른거렸다.

‘아리아? 깨어났나 보네.’

당연히 이 정원의 주인인 아리아가 아닐까 싶었다.

샤를리즈는 아리아를 얼른 불러 볼까 고민했지만 어쩐지 아리아의 깜짝 놀란 두 눈을 보고 싶었다.

샤를리즈는 아리아 앞에서만큼은 짓궂은 소녀 같은 사람이 되곤 했다.

그녀는 높은 굽의 구두를 망설임 없이 벗었다.

그러고는 구두를 가볍게 손에 든 채 발끝으로 흙을 밟으며 사뿐사뿐 허리까지 살짝 숙인 채 아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소곤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으레 아리아 옆을 보조하는 시종일 거라 생각했다.

가끔은 아스킨의 부관인 벤이 함께하기도 했기에 벤의 목소리란 걸 알고서도 놀라지 않았다.

마침내 샤를리즈가 허리를 펴 아리아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아리…아….”

“너,”

“앗, 공녀님!”

샤를리즈는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왜 네가 거기서 나와?

아리아와는 착각할 수가 없는 머리 색이었건만 볕과 키 큰 꽃들에 가려 착각했던 걸까.

플로리아는 샤를리즈를 본 순간 마치 10년 만에 헤어진 가족을 본 듯 몹시도 반가워하는 얼굴이었다.

마치 주인을 다시 만난 강아지 같기도 하였다.

“세상에, 공녀님께서 여기 계신 줄은 몰랐어요. 간밤은 잘 지내셨을까요? 아, 절 기억하실까요?”

샤를리즈는 눈을 깜빡였다.

기억하지 그럼. 당신 같은 미모를 기억 못하는 머저리가 있을까 봐?

“알아요, 플로리아 양.”

“……!!”

플로리아가 자신의 입을 양손으로 가로막았다.

샤를리즈는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을 했다. 저거 꼭 흡사…… 팬 싸인회에서 연예인을 본 팬의 모습……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미안, 내가 좋은 시간을 방해했니?”

샤를리즈는 이렇게 말했지만 이리 말하는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건 전혀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시시덕거릴 법한 분위기가 될 수 없는 분위기랄까.

아스킨의 얼굴에 서리가 끼어 있는지 살펴보고 싶을 정도로 그는 차갑고 서늘한 얼굴이었다.

‘와, 쟤 저거 제일 빡쳤을 때 나오는 표정이잖아?’

구(舊) 철천지원수였던 입장으로서 샤를리즈는 아스킨의 표정을 대번에 알아봤다.

샤를리즈는 대체 이 조합이 어떡하다가 조우하게 되었으며, 대체 무슨 대화가 오갔을지 고민했…… 잠깐만.

‘잠시만, 잠시만.’

원작에서 아스킨과 주인공 플로리아가 만났을 때는 샤를리즈의 파멸을 청부할 때뿐이라는 걸 떠올렸다.

원작에서 그렇게 된 원인은 ‘아리아의 죽음’이었으니, 아리아가 멀쩡한 지금 이것과 연결 지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등골이 오싹했다.

‘혹시 내가 플로리아만 보면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쾌감과 거부감을 느끼는 건 원작에서 날 죽이는데 일조하는 인물이어서인가?’

운명을 몸이 먼저 느낀다거나……. 여기까지 생각한 샤를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비약이었다.

“공녀, 잠시 기다려라. 그게 아니라 이건.”

“나한테 무슨 설명을 하니? 나도 어차피 아리아를 보러 온 건데. 난 이만 갈게.”

샤를리즈는 오해는 무슨, 오해의 ‘오’자도 하지 않아 놓고선 마치 커다란 오해라도 한 사람처럼 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얼른 돌아섰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손목을 잡혔다.

“공녀.”

샤를리즈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사실 어떤 얼굴로 쟤 얼굴을 봐야 하나, 정해지지 않은 채였지만 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 무슨 말을 하든 이건 좀 놓고 하지?”

샤를리즈가 붙잡힌 손목을 흔들자, 아스킨은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서둘러 손을 놓았다.

“이건, 급한 마음에…… 미안하다. 아프진 않았나? 고통을 느꼈다면 사과하지.”

“고통은 없었는데 네 무례함에 마음을 다쳤어.”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다행히 손목은 아프지 않은가 보군.”

“뭐야?”

샤를리즈의 얼굴이 험악해지자 아스킨은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샤를리즈.”

……이 XX 뭐지? 뭐야. 뭔데, 내 이름을 부르는 걸 잘 써먹어?

샤를리즈는 스스로가 이름을 허락했다는 것도 잠시 잊은 채 말을 잃었다.

아스킨에게서 흘러나오는 제 이름이, 어쩐지 디저트를 입에 문 듯 단맛이 나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묘한 기분이 또 한 번 제 몸을 휘어 감았다.

좋지 않은 예감에 샤를리즈는 찌푸리고 말았다.

“내 말을 한 번만 들어 줘.”

“내가 무슨 말을 들어야 하는데?”

“조금 전에 네가 본 장면엔 오해가 있었다.”

조금 다급한 아스킨의 말에 샤를리즈는 할 말이 없어졌다.

‘오해할 게 있었어야 말이지…….’

샤를리즈가 어찌 모르겠나?

조금 전 아스킨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겨우 참는 얼굴이었던 것을.

‘얜 나를 너무 모르는 거 아니야? 아무렴 내가 본인 표정도 못 알아볼까 봐. 아니면 스스로가 그렇게 빡쳤던 건지도 몰랐던 건가?’

샤를리즈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평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무슨 오해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저 여인이 정원의 꽃 때문에 상처를 입어서 치료하게 두었던 것뿐이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해명하는데?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

“설마, 내가 질투라도 한다고 생각한 거니?”

아스킨과 샤를리즈의 눈이 마주쳤다.

샤를리즈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우리가 다시 약혼하기로 한 건 사실인데 말이야, 정확히는 연기하는 데에 너도 동의한 거 아니었어?”

“…….”

사실이었다.

아스킨은 샤를리즈가 어제와 그제 ‘연기’라는 단어를 무수히 많이 담을 동안 말없이 동의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이를 표현해야 하는가?

아스킨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정과 그 감정의 선택지 앞에서 망설였다.

전쟁터에서 본능적인 선택과 다르게 어떡해야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우선, 오해한 게 아니라면 다행이군.”

아스킨이 샤를리즈의 손목을 염려하는 시선으로 보았다.

샤를리즈가 걸음을 물리려고 하는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오늘 아침 네가 탄 마차가 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아침에 쇼핑을 나갔던 것을 말하는 듯했다.

소문을 퍼트리는 동시에 겸사겸사 제트를 만났던 일 말이다.

제트와는 내일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 아마 그녀가 시킨 또 다른 일의 결과 또한 금방 들을 수 있을 터였다.

“그게 왜?”

“네가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을 보며…… 떠나는 거라, 아니, 도망가는 건가 생각했다.”

“도망? 대체 내가 왜?”

뭐 아쉬울 게 있다고 그녀가 도망간단 말인가?

샤를리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자 아스킨이 살짝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이 잘못을 저지르고서 회피하는 반려동물 같이 느껴져, 샤를리즈는 더욱 황당함을 느꼈다.

“그래, 네가 그럴 리가 없단 걸.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날 찾아와 어깃장을 놓았을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뭐. 솔직하게 말했으니 한 번은 참아 줄 테니까 남을 대뜸 재워 준 고마움도 모르고 도망가는 인간을 만든 이유라도 알자.”

“……부족함이 있나, 걱정했다.”

“부족함?”

“그래, 내 성이 네게 부족하여 당장 떠나는 건가 생각했어.”

“…….”

생각지 못한 말에 샤를리즈의 입술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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