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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54화 (155/194)

154화

정확히는 이 남자가 고려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아리아의 잠자리라면 모를까 어디 이 인간이 제 잠자리를 신경 쓸 인물이었던가.

달라진 아스킨의 모습을 찾아낼수록 샤를리즈는 당황과 동시에 그렇게까지 싫지 않은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이런 발견은 기쁘기는커녕 더욱 큰 당황만 안겨 주었지만.

“일단…… 떠나는 거였다면 네게 말은 하고 갔을 거야.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진 모르겠는데, 난 적어도 어제부로 너와 나는 공범이자 동업자가 됐다고 생각했거든?”

다시 약혼 관계를 선언한 이상 게다가 연회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상 여기서 한 번 더 파투 나기라도 한다?

샤를리즈의 위신은 그때야말로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게다가 신이 건 조건 때문에 목숨이 걸려 있는 건 말해 무엇하나.

다시 말해 아스킨에게는 샤를리즈의 사회적 생명과 진짜 생명 둘 모두가 걸려 있었다.

‘절대 이걸 말해 줄 생각은 없지만 말이지.’

애석하게도 말이다.

샤를리즈는 더는 이 남자에게 제 고삐를 모두 내주는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배신감은 한 번으로 족했다.

“네가 나를 얼마나 가벼운 사람으로 보는지 아는데, 나도 얕은 각오로 내뱉은 일이 아니란 말이야.”

“널 가볍게 보지 않는다.”

“그래그래, 말은 그렇게 하겠지.”

“아니, 나는……!”

아스킨이 더는 참지 못하고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을 꺼내는 찰나였다.

“오빠? 언니……?”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들의 틈을 가르고 들려왔다.

샤를리즈와 아스킨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돌린 곳엔 하얀 원피스를 걸친 아리아가 서 있었다.

아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며칠 전보다 조금 해쓱해진 채 두툼한 숄을 걸친 모습이었다.

“아리아!”

샤를리즈는 이 순간 아스킨과의 긴장감도 잊고 밝게 외쳤다.

이도 모자라 한달음에 아리아에게 불쑥 다가가 손을 잡았다.

“이제 몸은 괜찮은 거예요? 아팠다고 들었어요? 약은? 먹었어요?”

“네? 네. 네! 언니, 저 이제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헤헤…….”

아리아는 샤를리즈의 질문에 반갑고 기쁘게 대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멀리 멀뚱히 서 있는 제 오빠를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한달음에 달려왔을 텐데…….’

신기하게도 평소 아리아가 아프고 난 뒤 서둘러 걸어오던 오빠답지 않게, 어딘가 넋이 나간 모습.

게다가 자신과 같은 색의 새파란 눈은 현재 아리아가 아니라 샤를리즈로 꽂혀 있었다.

아리아는 속으로 눈을 크게 깜빡이다가 이내 아스킨과 샤를리즈를 묘한 얼굴로 번갈아 보았다.

‘……언니가 이제 새언니가 되는 걸까?’

오래 누워 있었다고는 하나 아리아는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픈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치가 있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아픈 사람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법이니까.

놀랍게도 아리아는 아스킨이 제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기 전부터 제 오빠의 모습에서 눈치챈 지 오래였다.

‘하지만 오빠는 언니를 고생시켰으니까…… 조금 더 고생 좀 해야 돼.’

오빠에게 하는 생각치고는 짓궂은 생각을 하던 그녀는 곧 예쁘게 웃었다.

마음에서 분홍빛 희망이 불쑥 치솟았다.

우리 언니 웨딩드레스는 아주아주 새하얬으면 좋겠다!

* * *

폭군 록시디언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록시디언의 표정은 더욱 가라앉았고, 이에 따라 그의 곁에서 자리를 지키는 노아의 표정도 어두워져만 갔다.

“노아.”

낮은 부름에 노아는 정갈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여자, 네가 보기엔 어땠지?”

어떤 수식어도 설명도 없었지만 노아는 기민하게 눈치챘다.

록시디언이 누굴 말하는지 말이다.

“‘플로리아’란 여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록시디언은 대답 대신 노아를 지그시 응시했다.

말이 쳐다본 것이지, 거의 무섭게 노려보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앵무새처럼 되묻기나 하라고 널 옆에 두는 것이 아닌데. 그 능력은 어디다 써먹으려고?”

“당연히 제 능력은 주군을 위해 존재합니다.”

노아는 최대한 정중한 표정으로 슬쩍 주군의 눈치를 보았다.

록시디언은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최근 여동생인 샤를리즈와 자주 보면서 어찌 보면 놀라우리만치 악동 같거나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노아는 이쪽이 늘상 보아 온 록시디언의 모습이자 황제로서의 모습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진실을 말씀드리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주군의 이 무거운 시선을 감히 감당하는 쪽이 좋겠습니까.”

“이미 대답을 한 거나 다름없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록시디언은 노아의 말에 픽 웃었다.

눈은 웃지 않은 채 차가운 예기를 띤 채였다.

록시디언의 눈앞으로 차일드 백작의 연회에서 보았던 여성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됐어. 그 여인을 황성으로 초대해.”

“……예, 명을 받듭니다.”

노아는 실로 오랜 시간을 록시디언 곁에서 지켜보았지만, 오늘만큼은 주군의 눈 속에 일렁이는 저 감정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는 폭군의 부관이자 동시에 그림자로서 온갖 정보를 취급했지만…….

이 순간 신하로서 명을 받들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신분을 새삼 실감했다.

‘대체 그 여성에게서 무엇을 느끼신 것입니까?’

* * *

야심한 시각, 아침으로 향하는 시간이었지만 하늘은 아직 어두운 새벽녘이었다.

철옹성 같은 레무트 성의 성벽 쪽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마치 벽을 타는 재규어처럼 날렵하게 성벽에서 뛰어내린 것으로 모자라 풀숲에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소리 없이 걸어 도착한 곳은 샤를리즈가 있는 건물이었다.

고개를 들면 저 3층 창문이 샤를리즈가 사용하는 방일 터다.

‘3층 네 번째 창문…….’

속으로 정보를 되새기던 남자가 이윽고 벽을 타기 위해 손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그의 목 끝으로 날카로운 검이 내밀어졌다.

“멈춰라.”

겨눠진 검에 남자가 그대로 자리에 멈췄다.

그러나 표정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듯 평온했다.

검을 겨누고 있던 아스킨을 태연하게 쳐다볼 정도로.

“모자를 벗도록.”

남자가 천천히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짙은 갈색 머리와 더불어 진한 암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짙은 피부색을 가진 남자는 다름 아닌 제트였다.

“돌아가라.”

아스킨의 차가운 일갈에 제트는 눈을 살짝 내렸다.

“제 주인께 꼭 전달드릴 말씀이 있어 급히 찾아왔습니다.”

“내일 그녀가 깨어나면 전달해 주지. 이만 돌아가라. 내 성은 불청객을 허락지 않는다.”

아스킨이 기억하는 제트는 샤를리즈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이던 호위 기사였다.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으며,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인간이기도 했다.

“급한 용건은 내게 전하든지.”

성기사들만 쓰는 검술을 구사하며, 고위 성기사들만 손에 넣을 수 있는 마법 가루를 아스킨 그에게 주기도 했다.

“과거의 호의를 보아 마치 암살자처럼 잠입한 건 한번 넘어가 주겠다. 당장 돌아가라.”

아스킨이 천천히 검을 거두려는 때였다.

“……싫다고 하면 어찌됩니까?”

“뭐?”

“저는 반드시 제 주인을 뵈어야 합니다. 제게 명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입니다.”

두 남자의 고요한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경고는 한 번뿐이다.”

제트는 대답 대신 자세를 고쳐 잡았다.

허리춤의 검을 잡은 건 자신의 말이 허세가 아닌 진심인 것을 보여 주는 행동이었다.

심지어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제국 제일의 검사임을 알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스킨은 제트의 도움을 떠올리며 씁쓸함을 느꼈지만 검을 고쳐 쥐었다.

‘샤를리즈에게는 암살자가 나타났었다.’

그것을 아는 이상 제아무리 호위라 한들 이 야심한 시간에 나타난 사람을 샤를리즈 방에 들일 수는 없었다.

손님으로 모신 이상, 그는 그녀의 편안한 밤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고 그러기로 결심했다.

또한 적어도 앞으로는 그녀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다고, 대가 없이 그러고 싶노라고 마음으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방법이 없군. 선공은 양보하지.”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제트는 검을 검집에서 뽑지 않은 채로 아스킨에게 달려들었다.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주인을 보기 위한 과정으로 제압하기 위함이니만큼 검을 뽑을 이유는 없었다.

아스킨은 제 말을 지키기 위해 제트에게 선공을 양보했다.

그 또한 제트가 검을 검집에서 뽑지 않는 것을 보며 살의가 없음을 알아차렸지만 샤를리즈에게 가게 둘 수는 없었다.

연속으로 들어온 제트의 공격을 가볍게 혹은 아슬아슬한 틈을 두고 흘려보낸 아스킨은 곧 다시 제트와 대치했다.

“전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저 제 주인을 뵙는 걸로 족합니다.”

“역시 성기사였군. 그 간결하고도 특유의 동작을 보건대, 상급….”

제트는 더는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다시 한번 아스킨을 몰아붙였다.

두 사람 모두 검을 뽑지 않은 채였지만 상당한 실력을 가진 두 사람의 결투였기에 두 남자의 몸 곳곳에 생채기가 생겼다.

제트는 잠시 떨어져 숨을 골랐다.

‘역시 제국 최강이라는 건가…….’

가볍게 움직였을 뿐이지만 제트는 아스킨의 수준이 제 위에 있음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충성심인가? 아니면, 혹시…….”

“더 이상 말을 하시면 이 자리에서 끝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스킨은 그저 정말 네가 암살자라도 되느냐고 묻고 있었던 것이나, 제트는 샤를리즈에게 불경한 마음이라도 품고 있으냐는, 불편한 이야기로 이해했다.

더는 들을 수 없었다.

제트의 얼굴로 달빛이 잠식될 만큼 깊은 그림자가 졌다.

아스킨은 앞에 선 제트가 내뿜는 기운에 언뜻 살기가 내비친 것을 깨닫고, 이대로 방치하다간 위험한 수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찌푸렸다.

샤를리즈가 아끼는 호위 기사로 보였다.

과연 상해를 입혀도 되는가?

하지만 저 정도의 기운이 되자 더는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아스킨이 검을 드는 순간 누군가 그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아야야, 내 발목이야…….”

벚꽃을 닮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거칠게 춤을 추었다.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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