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샤를리즈.”
“공녀님….”
“누가 나 부르래? 지금 뭣들 하는 짓이냐고.”
샤를리즈는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나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문득 창문 아래에서 둔탁한 소리가 나길래 흘끗 보았더니 세상에, 익숙한 두 남자가 싸우고 있는 게 아닌가.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것들이!’
그리하여 서둘러 달려온 것이었다.
심지어 외출화로 갈아신지도 못해 실내화를 신은 채였다.
얇은 바닥을 가진 신발이라 뾰족한 돌이라도 박힌 듯 발이고 발목이고 시큰거렸다.
“뭣들 한 거냐고 물었어. 왜 대답이 없어?”
차갑고 짜증 어린 목소리에 두 남자는 채근이 이어짐에도 답을 못한 채로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제트, 너는 이 야심한 시간에 어쩐 일이야?”
“공녀님께 급히 전달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럼 들어와서 하면 되지, 왜 집주인이랑 싸우고 있어?”
그러자 제트가 드물게도 난감한 얼굴을 했다.
샤를리즈의 얼굴을 한 번, 아스킨의 얼굴을 한번. 그리고 다시 샤를리즈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이 아무래도 아스킨이 들으면 안 될 이야기가 있다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샤를리즈가 괜찮다는 듯이 끄덕였지만 제트의 입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샤를리즈는 일단 교통정리부터 했다.
“제트는 그렇다 치고 너는 왜 또 싸움을 받아 줬니?”
이렇게 말하고 보니 마치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네가 피곤해 보였다. 푹 잠든 사람을 깨우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아스킨은 확실하지 않은 암살자에 대한 의심은 뒤로 미뤄 둔 채 반만 정확하게 대답했다.
“내가 피곤하다고?”
“오늘 반나절 이상 외출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
“게다가 오후엔 아리아와 온종일 정원을 산책하거나 물을 주며 움직였지.”
“그것도 그런데…….”
샤를리즈의 표정이 묘해지다가 끝에 가서는 얼떨떨해졌다.
쟤가 날 생각해 준 건 맞는 것 같은데…… 듣다 보니 어느 쪽도 탓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샤를리즈는 어이없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 두 남자의 몸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한 참이라 선명하게 잘 보였다.
“어쨌거나 내가 피곤해 보인다고, 또 한쪽은 무작정 쳐들어와서 이렇게 치고받고 싸웠다고?”
이유가 어찌 됐건, 인간에게는 대화라는 훌륭한 수단이 있건만…….
“대화는커녕 제 몸들에 상처까지 내 가면서. 진짜 꼴불견들이네.”
이유는 충분히 이해한다마는, 자신도 모르게 적나라한 표현이 흘러나갔다.
“……죄송합니다.”
“미안하다.”
“됐고, 두 사람 다 빨리 가서 치료부터 받아. 아스킨, 설마 치료도 안 해 주고 쫓아 보내지는 않겠지? 부탁할게.”
“이 정도 상처는 내일 아침이면 아물 것이다. 하지만 네 호위를 치료하는 건 허락하지.”
“아닙니다, 공녀님. 저 또한 이런 상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트, 치료받아. 아스킨 너도.”
제트는 속으로 스스럼없이 아스킨을 부르는 샤를리즈의 모습에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공녀님…….”
“이건 명령이야.”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곧이어 아스킨이 부른 집사가 이 자리로 찾아왔다.
제트는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주인의 명을 거절할 순 없었기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애석하게도 상처는 약간이지만 제트가 더 많았기에 고집조차 부리지 못했다.
제트가 사라지고 샤를리즈와 아스킨은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마주 보았다.
새벽이라는 시간 때문일까, 샤를리즈는 쉬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마치 그저께 밤의 야릇하고도 묘한 분위기가 재현된 것같이, 긴장감이 흘렀다.
두 사람은 눈빛으로 대화를 시도하려는 듯 서로를 응시하기만 했다.
“뭐, 할 말 있어? 뭘 그리 쳐다봐?”
샤를리즈는 말하고서야 시비 거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투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몸에 배어 버린 버릇이라 어찌할 수 없었다.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닦아 보려 고민하는 사이 아스킨이 입을 열었다.
“샤를리즈……. 뜬금없는 말이지만 하나 물어봐도 되겠나?”
한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고민하던 샤를리즈가 잠시 압도될 만큼.
“넌 죽음이 두려웠던 적 있었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진지한 표정에 기대했던 것과 달리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샤를리즈는 황당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나는 검사로서, 또 지휘관으로서 수많은 전장에 있었음에도 죽음이 두려웠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뭐?”
“처음으로 이번 토벌에서 죽음이 두려웠다.”
그 말에 샤를리즈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아리아는 그가 없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항상 이런 생각을 속에 품고 살았을 텐데,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니. 신기하기도 하였다.
“이제 철이 들었나 보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이 두려운 거야.”
이 말만큼은 진심으로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눈을 뜬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문제였으니까.
난 너 아니면 죽어.
차마 뱉을 수 없는 고백을 삼키며 샤를리즈는 아스킨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조금 늦은 이야기지만, 이번 토벌에서 나는 독으로 죽을 뻔했다.”
“……뭐?”
“누군가 조금씩 타 놓은 독을 회복하며, 독에 중독되어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살아 돌아오라는 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두렵더군.”
“…….”
아스킨이 한 걸음 다가섰다.
“돌아오자마자 이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군.”
고요한 고백이 귀를 적셨다.
샤를리즈는 말을 잇는 대신 눈을 깜빡였다.
“반성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죽음을 입에 담는 남자의 눈에 아이러니하게도 후회가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쯤 네가 외치는 그 순간에 귀를 기울여 볼 것을.”
“…….”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었다고.”
“…….”
“네네, 빗속에서 흐르던 네 눈물이 잊히지 않았다.”
“…….”
아스킨이 쓰게 웃었다.
“네겐 가증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말이지만.”
그 얼굴에 참으로 지독하리만큼 깊은 후회가 담겨 있어 샤를리즈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속으로는 아스킨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원망은 깊이 했지만 사실 아스킨은 ‘샤를리즈’ 안의 영혼이 바뀐 줄도 모르지 않던가?
“네 얘기를 듣지 않아서, 미안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서럽고 참 서러웠다.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
샤를리즈는 제 뺨에서 툭 흘러내리는 무언가를 느끼고 당황했다.
뭐야, 뭔데. 이게 뭐라고.
뭐 울 일이라고 내 눈은 눈물을 뱉어내고 있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샤를리즈는 자신의 기분을 알 수가 없어서 쉬운 길을 택했다.
아스킨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눈에는 평소와 같은 독기도 분노도 없었다.
“날 용서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용서는 상처를 입힌 사람이 꺼낼 말은 아니니.”
아스킨은 조심스럽게 용기를 냈다.
“……한 번만 안아 봐도 되겠나?”
샤를리즈는 달빛마저 가려 버릴 듯한 커다란 체구의 남성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어떤 거절의 말도 뜻도 내비치지 않았다.
뜨거운 체온이 덮쳐 올 때까지.
* * *
차일드 백작의 집무실엔 적막하리만치 깊은 침묵만이 맴돌고 있었다.
백작의 지시로 보좌관마저 빠져나간 방이었다.
그 방엔 차일드 백작와 그의 장자인 이안 차일드. 단 두 명의 사람만이 자리했다.
부자는 마주 앉았지만 서로의 눈조차 마주하지 않은 채 깊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복잡하고 신중한 표정을 짓던 백작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해일 같은 고민이 덮쳤던 얼굴에는 독기와 비장함만이 어려 있었다.
백작은 그 어떤 때보다도 독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안, 나는 널 제국 최고의 존재로 만들어 주고 싶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이안 또한 고개를 들었다.
사실 그는 제 부친이 무슨 말을 하든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으나 겉으로는 신중한 척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
“넌 이번에 레무트 공작이 데려온 ‘플로리아’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느냐.”
플로리아. 토벌에서 데려온 포로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분명 제 아버지와 무언가 깊은 관련이 있는 존재였지만 이안에게는 그녀가 어떤 존재이든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글쎄요, 아버지께 대의가 있으심이 충분히 느껴집니다만. 그 이상은 모르겠군요.”
“모르는 척하는 것이냐?”
“…….”
“외모만 보아도 일국의 황제라도 홀릴 수 있는 대단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지.”
“…….”
“게다가 가진 능력은 더욱 대단할 것이다.”
“어떤 능력을 가졌습니까?”
그 말에 차일드 백작이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