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찬찬히 보던 나는 벤이 아스킨보다는 꽤 연장자란 점을 상기했다.
“일찍 선대 공작님과 공작 부인을 여의시고 공작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 결정이 가신들의 목숨, 아리아 님의 목숨, 나아가 공작님 스스로의 목숨까지 책임지게 되니…… 지나치게 신중하지 않을 수가 없으셨을 겁니다.”
저 얼굴에 어린 건 회한과 안타까움이었다.
따뜻한 눈이었기에 나는 아스킨의 가족을 눈앞에 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대신 결정하신 뒤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행동하시지요. 지금처럼 말입니다.”
“……아니 뭐, 나는 그 결정이 어떻게 왜 일어난 건지 궁금한 건데.”
“그건 저도 모릅니다.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공녀님께서 문득 갑자기 저희 공작님께 사과하고자 하셨던 것처럼.”
글쎄다. 진짜 ‘샤를리즈’는 죽는 그 순간까지 아스킨에게 사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 몸에 빙의했기 때문에 아스킨의 삶은 나아졌을 것이다.
아리아를 잃지 않아도 될 테니까.
‘듣고 있냐, 아스킨아. 내가 네 귀인이라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그렇지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평생에 공작님께서 여성에게 이토록 분노를 품은 것도…… 현재처럼 깊은 관심을 품은 것도 모두 공녀님 하나라는 사실 말입니다.”
하마터면 손이 삐끗 흘러내릴 뻔했다.
이게 좋은 말이야, 욕이야.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공작님께서는 항상 하나를 선택하시면 설사 더 좋은 물건과 방안이 있더라도 다른 것은 재고하지도 않습니다. 이를 사람으로 빗댄다면…….”
찡그리려는 찰나 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유일무이한 분이라는 점이지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왜일까, 맞은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슬쩍 머리카락을 흘려 귀를 가렸다.
어째 귀가 화끈한 기분이었으니까.
이미 알고 있던 정답지라 채점조차 하지 않았건만, 강제로 가채점 결과가 눈앞에 들이밀어진 기분이었다.
* * *
이안은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진지하게 이룰 수 있다 믿고 계신단 말인가…….’
정확히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상태였지만, 한편으로는 제게 주어진 ‘차일드’라는 성 탓에 당장 반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도 싫었다.
저택을 떠나 말에 올라 거리로 나올 때까지 머릿속으로 샤를리즈가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지금 자신의 마음으로는 온전히 샤를리즈를 볼 자신이 없었다.
울적한 마음에 술이라도 한잔 기울일까 하는 생각으로 자신이 자주 찾던 술집에 다다랐을 때, 이안은 때아닌 소란이 일어난 가게를 보고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가게가 매우 어수선했다.
가게의 마스터가 있던 펍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성들의 고성이 마구 들려왔다.
‘어떤 술주정뱅이인지는 몰라도 오늘 잘 걸렸군. 지금 당장 모든 걸 부숴 버리고 싶은 기분이니.’
주정뱅이를 말리는 명목으로 쌓였던 스트레스를 해소할까 싶었던 이안은 이도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두툼한 남성들 사이에서 서 있는 가녀린 여성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얼굴은 로브 모자로 가린 채 손만 내민 상태였지만, 이안은 실루엣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샤를리즈였다.
‘공녀님? 어째서 이곳에……?’
이곳은 샤를리즈와 같이 무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여성이 홀로 드나들기엔 위험한 장소였다.
겉은 술집이요, 이면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러했다.
다행히 완전히 혼자는 아닌 듯 옆으로 샤를리즈처럼 로브를 뒤집어쓴 남성이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이 사나운 분위기 속에서 나설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문제는 그냥 있어도 그리 안전하지 않은 이곳에 이미 불콰하게 취한 취객들이 꽤 많았다는 점이었다.
“에이 씨, 이 빌어먹을 세상!”
샤를리즈가 술을 마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마치 술을 잔뜩 마신 것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
취객들은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쩐지 샤를리즈에게 그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은 채 술에 취한 듯한 그녀의 난동을 지켜보는 기색이었다.
“공…… 아니, 샤를리즈 님?”
“뭐야?”
“이안 차일드입니다.”
그제야 샤를리즈의 고개가 이안을 향했다.
푹 뒤집어쓴 모자에 눌려 눈이 전혀 보이지 않고 하관만 드러난 채였지만 왜일까.
이안은 아주 찰나지만 샤를리즈의 표정으로 스친 놀람과 당혹을 똑똑히 읽어 냈다.
아마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느끼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오, 원숭이 씨?”
이안이 호수 공원에서 냅다 누워 버린 뒤로, 샤를리즈는 아주 가끔 그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
대체로 수틀릴 때 말이다.
이안은 취객들 사이를 해치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머릿속으로는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인지 수많은 가정이 스쳤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보고 싶었다는 마음이 이런 생각과 이성을 이기고 머리와 가슴을 차지했다.
‘아무래도 공녀님 곁에 아무도 가지 않았던 이유가 저 사내 때문인 것 같은데. 호위인가.’
샤를리즈 곁에 벽처럼 서 있던 듬직한 사내는 이안의 접근을 용인했다.
샤를리즈의 호위인가 싶었지만, 이안이 알기로 샤를리즈가 믿고 등을 맡기는 듯한 호위는 제트라는 기사뿐이었고, 저 남자의 덩치는 제트보다 작았다.
“이곳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이안이 응당 당연한 질문을 던졌지만 샤를리즈는 대답하는 대신 툭 이안의 뺨 쪽을 건드리고 떨어졌다.
이안은 쿵,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찰나간 스쳤건만 그녀가 건드린 부분에서 데인 듯한 화상을 입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화끈화끈한 열기가 해석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퍼졌다.
‘허…….’
이안이 숨을 고르는 사이 샤를리즈는 재밌다는 듯 이안의 어깨마저 툭툭 두드리고는 배시시 웃었다.
마치 정말 술에 취한 듯한 미소였다.
“너도 내가 우습니?”
“네? 그게 무슨,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럼 됐어. 꺼져 버려.”
샤를리즈는 비틀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미 샤를리즈의 자리엔 와인과 와인 잔이 차려져 있었다.
어째서 새로 온 듯한 호위는 샤를리즈를 만류하지 않는가.
그녀의 성정상 만류하는 것에 더욱 반발할 사람이라서?
이안은 자연스럽게 샤를리즈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그는 샤를리즈에게 크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평소 예리하게 갈아 두던 감이 무뎌졌다.
덕분에 샤를리즈가 따르는 술에서 술 내음이 거의 나지 않는단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샤를리즈가 와인을 원샷한 뒤 다시 잔에 술을 따르려 하자, 이안이 샤를리즈의 손을 아프지 않게 쥐더니 그 손에서 병을 넘겨받았다.
“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
“흐응, 그래? 그럼 어디 한잔 따라 봐.”
잔을 내미는 샤를리즈의 모습은 취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안은 샤를리즈에 대한 소문 중에 소문난 주당이란 것과 그런 주당이 무색하게 엄청나게 술을 많이 마시는 거의 중독자 수준의 애주가란 것을 함께 떠올렸다.
하지만 공녀가 어째서 자신의 집 혹은 타운하우스, 하다못해 어울리던 파티 자리를 마다하고 수도 한구석 술집에서 이러고 있단 말인가?
잠시 감정에 삼켜졌던 이안의 이성이 기지개를 켜고 뇌를 두드렸다.
“……술이 강하시다 들었는데, 취하신 걸 보니 저처럼 괴로운 일이 있으셨나 보군요.”
“응? 괴로운 일? 그런 거 없는데? 그러고 보니 넌 왜 여기 있니?”
샤를리즈가 턱을 괬다.
정말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다는 듯한 목소리.
저건 과연 관심 어린 진심일까. 아니면 교묘하게 가장한 예의 차리기일까.
“가끔 밖에서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여긴 좋은 장소죠.”
“음, 그래. 뭐. 그래 보이네. 나쁘지 않아.”
샤를리즈가 잔에 든 술을 홀짝 마셨다.
이안은 자세히 본 샤를리즈의 뺨이 붉게 달아오르지 않았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느릿한 어투, 늘어지는 말.
취기가 어린 목소리는 취객이라 해도 손색없었다.
“그래서 무슨 힘든 일이 있으셨기에 고귀한 분께서 이런 곳까지 걸음하셨나요?”
“그런 거 없대도. 너 나 모르니?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거니?”
신기하게도 취기 어린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오만함이 어려 있었다.
이안은 평소 고압적이고 거만한, 다른 말로는 ‘귀족적인’ 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체로 내실 없이 가문의 힘으로 약자를 휘두르려 하는 이들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으니까.
물론 이안 자신도 깨끗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순 없으며 이러한 이들 사이에서 역겨운 내음 맡으며 산 주제에 남에게 훈계할 생각도 없었다.
이안이 어린 시절엔 차일드 가문이 지금과 같은 위세는 아니었기 때문일까?
약자로서 억압당한 적 있는 이안으로서는 쉬이 그 감각을 잊을 수 없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샤를리즈는 웃어 반기는 척할지언정 경멸해야 마땅한 부류임에 분명했다.
그녀의 과거를 알아갈수록 그래야 했다.
그래야 마땅했는데…….
“술에 강하시다던 당신이 취한 것처럼 오늘도 세상의 기준이 늘 맞지는 않다는 걸 새삼 확인하네요.”
“……뭐야. 너 왜 이렇게 진지해?”
샤를리즈의 입가가 살짝 삐뚤어졌다.
“왜, 너도 나 좋아하니?”
이안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