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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59화 (160/194)

159화

‘너도……?’

찰나간 그의 머리로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샤를리즈의 질문에 이안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샤를리즈의 만행을 지켜보던 취객들에게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마스터.”

자리를 비웠던 가게 주인은 어느새 취객들 뒤에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이안은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늘은 그만 장사하는 게 어떻겠소?”

“차일드 소백작님, 그건 곤란합니다.”

덩치가 큰 이 술집의 주인은 조금은 비굴한 듯 무심한 시선으로 서 있는 취객들을 눈짓했다.

“아직 손님들이 계시기 때문에…….”

그러나 손님들 몇몇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안으로서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저들이 먹은 걸 10배로 배상하겠소. 그럼 어떤지?”

“하지만 저 중에는 귀족 자제분이 섞여 있습니다. 한낱 가게 주인인 제가 마음대로 하기엔…….”

이안은 더 듣는 대신 주인을 뒤로하고 서 있던 이들 중 몇 사람에게만 다가가 무언갈 전달했다.

그러자 잠시 뒤, 샤를리즈를 안주 삼아 지켜보던 이들이 썰물처럼 가게를 빠져나갔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이안은 의자를 빼서 앉았다.

이안은 기어이 샤를리즈 근처에 있던 호위 또한 문 밖으로 내보냈다. 이는 샤를리즈의 허락이 있기에 가능했다.

한편으로는 샤를리즈의 이런 상태를 두고서 나가는 호위의 모습이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이안은 그 이상함을 짚는 대신 시선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무슨 영문인지 이안은 한참 동안이나 샤를리즈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테이블 아래만 쳐다보았다.

“공녀님께서는 이곳에 그저 술을 마시러 오신 겁니까?”

평온한 이안의 말에 샤를리즈는 푹 고꾸라진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들어 올렸다.

“아니…… 사실 이곳 주인을 만나서 할 얘기가 있었는데, 용건을 들어 주질 않네…….”

이안은 샤를리즈의 웅얼거림을 가만히 경청했다.

그러다 문득 샤를리즈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녀님. 공녀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용해진 술집에서 이안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샤를리즈에게 닿았다.

“그래? 해 봐.”

“저는…….”

샤를리즈는 속으로 살짝 놀란 상태였다.

평소 보던 이안 차일드답지 않게 지나치게 무게를 잡는 모습이었으니까.

사람의 급격한 태도 변화에서 오는 본능적 긴장감을 고삐 쥐듯 통제한 샤를리즈가 속마음을 숨기며 평온하게 대답했다.

“뭘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거니? 누가 보면 나한테 고백하는 줄 알겠다.”

톡 쏘는 까칠한 대답에 이안은 마치 작살에 꿰인 물고기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곧 이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고백하려 했던걸.”

“…….”

“좋아합니다.”

느릿하듯 진지하고도 진중한 목소리.

중저음의 그것도 운율 있는 음성은 샤를리즈가 품고 있던 긴장감과 겹쳐 팽팽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공녀님은 제가 감히 좋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샤를리즈는 그제야 턱을 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완전히 들어 올렸다.

샤를리즈가 자신의 모자를 들췄을 때, 취기라고는 전혀 없는 명료하고도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

샤를리즈는 이안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에 이안은 절로 시선을 내렸다.

“……감히 좋아해서 죄송합니다.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샤를리즈가 아는 이안 차일드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백을 할 때도 장난스러운 듯하지만 자신만만하고도 능글맞게. 그래. 물 흐르듯이 할 사람이었다.

샤를리즈는 이토록 여유를 잃은 이안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이제까지 멋대로 행동하고선 뭘 새삼스럽게 사죄하는 거야? 그리고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샤를리즈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작게 한숨 쉬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를 정말 싫어한다고 생각했지만…… 멋대로 미운 정이 들어 버린 게 틀림없었다.

여유를 잃은 모습이 불쌍해 보인다니.

“이건 좀, 당신답지 않네.”

“…….”

샤를리즈의 말에 이안이 빙긋 웃었다.

평소와는 다른 힘이 빠진 미소였다.

“평소의 여유는 다 어디 간 거야?”

“음, 그러게요. 제가 생각한 순간은 이런 때가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공녀님.”

샤를리즈는 술을 마신 건 자신이 아니라 저쪽인가 헷갈렸다.

“여유 있는 자에게서 여유를 앗아가는 것이 바로 사랑인가 봐요.”

“…….”

“저는 글로서 책으로서 입을 통해서 전해 온 모든 사랑에 대한 것들을 부정해 왔건만. 당신을 만나고서야 가슴으로 이걸 느끼는 방법을 깨달은 것 같아요.”

샤를리즈는 자신이 이안과 약혼할 뻔 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어디까지나 알츠베이트 공작과 차일드 백작이 만들어 낸 정략혼이었지만, 만약 자신이 이 남자와 함께 하는 쪽을 택했다면 아마도 이런 말을 들으며 살 예정인 듯했다.

‘낭만적이네.’

이안의 말은 샤를리즈에게는 저 먼 고전이나 중세풍 로맨스 속 대사로 들렸다.

한마디로 꽤 멀게 들렸다는 소리였다.

샤를리즈는 현재 주요한 정보와 증거를 직접 받기 위해 정보 단체에 직접 왔다.

정보 단체는 겉보기로는 술집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특정 암호를 대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이게 웬걸.

‘원작에서랑 암호가 달라진 줄 몰랐지.’

정확하게는 샤를리즈가 원작 시기보다 이르게 온 탓에 비밀번호가 달랐다고 할 수 있었다.

들어가서 길드 수장이랑 대화를 나눠야 하건만 도통 들어갈 방법이 없어, 일단 다른 방안을 쓸 생각이었다.

그러다 이곳에서 이안을 보게 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말씀드렸듯 제 고백이 왜곡될까 봐 걱정되고 이 마음을 오해하실까 봐 두렵습니다.”

‘근데 얜 무슨 고백을 왜곡이니 오해니 이런 말들을 같이 한대?’

샤를리즈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졌다.

“……하고 싶은 말은 알겠는데, 단어 선택이 왜 그래? 왜 갑자기 죄인처럼 구는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상대방이 똑바로 알아 듣게는 해야 할 거 아니야.”

이안은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마음의 결심을 굳히고 샤를리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안을 바라본 순간, 샤를리즈는 이안이 진정 하고 싶은 말이 곧 나올 것이란 걸 깨달았다.

“저희 가문이 아무래도 반역을 준비하는 듯합니다.”

“……뭐?”

반역? 생각지 못한 단어에 잠시 두뇌 활동이 멈추는가 싶더니, 당황은 곧 가라앉았다.

능글맞은 인간이었지만 선을 아는 작자였다.

‘이런 걸로 농 따위 하지 않을 사람이긴 해.’

“반역이라면, 황제를 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샤를리즈는 순간 자신이 알던 책 속 내용과는 전혀 다른 전개에 심장이 떨려 왔지만, 침착하게 이안을 응시했다.

‘아. 심장이야……. 이러다 흔들다리 효과인가 뭔가로 쟤한테 떨리는 줄 착각이라도 하겠네.’

진정하자. 진정하자. 샤를리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혹시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술집엔 아무도 없었다. 이안이 술집 주인조차 어디론가 보내 버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안은 호위로 있던 벤조차 문 밖으로 쫓아냈지 않았던가.

물론 샤를리즈가 허락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벤은 처음부터 샤를리즈가 취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이걸 나한테 말해 주는 이유가 뭔데? 지금 당장 내가 오빠, 아니. 황제 폐하에게 가서 일러바치면 어쩌려고?”

이안의 가문이 박살 나는데, 이안 자신이 무사할 리 없었다.

그러나 이안은 쓴웃음을 짓되 무덤덤한 낯이었다.

“제 안위를 생각했다면 이 이야기를 꺼냈겠습니까?”

“……허, 정말 일러바치고 그 반역을 막아 주길 바라는 거야?”

“그건 공녀님 자유이십니다.”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먼 옛날엔…… 열심히 사는 제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던 때도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가문과 가족이 파멸하길 바라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저.”

“…….”

“제가 할 수 있는 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샤를리즈가 눈을 크게 깜빡였다.

이안의 말을 이해하는 동시에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눈앞의 이안에게 측은함이 들었다. 무력감에 물든 저 얼굴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늘 거울 속에서 보던 얼굴이었다.

가슴에서 울컥 올라오는 심정은 다시 보아도 동정과 측은지심이었다.

감정이란 것은 참으로 무서워서 빨갛고 푸르는 색을 가졌다가도 섞여서 어느새 어떤 색을 지닐지 모르게 되는 것이었다.

샤를리즈는 수많은 정보와 감정이 혼란한 상태로는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잔에 남아 있던 것을 전부 삼켰다.

그러고는 조금 전보다 명료한 시선으로 앞을 응시한 채 다시 질문을 이어 갔다.

“황제의 무력을 알 텐데 반란을 꿈꾼다고? 이거, 너무 바보 같은 짓 아닌가?”

“황제의 약점을 이용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약점. 샤를리즈는 어렵지 않게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바로 자신의 덤과 같던 폭군 오빠의…… 폭주하는 ‘저주’ 말이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원작 내용과 함께 떠오른 인물 또한 있었다.

‘플로리아.’

바로 원작 속 여주인공이었다.

차일드 가문과 플로리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몰라도, 원작에서 플로리아는 폭군 오빠에게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아니, 어떻게 차일드 가문에서 그녀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길한 예감은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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