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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60화 (161/194)

160화

“약점이라고 표현한 거 보니, 그게 무엇인지는 말해 줄 마음이 없나 보네.”

샤를리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눈에 어린 의심 자락을 보게 된 이안은 그저 나지막하게 웃었다. 힘없는 미소였다.

“궁금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먼저 하지 못한 이유는 제가 부친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됐어. 자식의 도리라는데 그 도리를 무시할 순 없지.”

샤를리즈는 대답하는 동시에 이안이 그녀가 궁금해한다면 언제든 알려 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지그시 집요하게 꽂히는 시선의 열기가 말해 주고 있었다.

이안은 애써 미지근한 척 숨기려 들었지만 숨길 수가 없는 시선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예, 말씀해 주십시오.”

“너, 이렇게 모든 걸 말하는 건, 나더러 네 편에 서 달라는 뭐, 한 차원 높은 회유책이니?”

“아닙니다.”

이안의 얼굴로 쓴웃음이 흘렀다.

이런, 현재 그녀는 그의 고백을 싹 잊은 듯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3분 전에 한 고백을 말이다.

샤를리즈는 알고 있을까?

그녀의 매력은 사람들이 말하는 제국 제일의 외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에게도 적을 내어 주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하고도 표독스러운 인상 아래, 조금이라도 정이 들면 누그러지고 마는 연약하고도 사랑스러운 성격이었다.

이안은 짜증도 내고 경계도 하고 진심으로 욕까지 짓씹던 샤를리즈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자그마한 틈을 내주었단 걸 알았다.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아무도 모르는 샤를리즈의 모습은 샤를리즈를 흥밋거리로 생각했던 이안에게 낭패감을 안겨 주었다.

흰 도화지가 물들 듯 물들고 말았으며 마침내 감화되어 헤어나올 수 없이 빠지고야 말았다.

“그럼 이제 나도 적이니 조심해라, 뭐 이런 말이라도 하고 싶었니? 자신감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샤를리즈는 자신에게 어떤 매력이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그 점이 이안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가랑비같이 시작한 흥미는 이제 애정과 사랑이란 늪이 되어 기어이 그의 미래마저 바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모르는 듯하지만 말이다.

“제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샤를리즈는 이안의 눈망울에 가득 차오르는 것을 보며,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손에 쥔 와인 잔으로 기울어지는 고개를 툭 받쳐 원래 각도로 만들었다.

“이안 차일드.”

“이안이라 불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안은 씩 웃으며 자연스럽게 와인 잔을 가져가더니, 잔에 거의 남지 않은 술을 입술에 적혔다.

와인을 음미하는 이안의 눈꼬리가 살랑살랑 휘어졌다.

오묘하게 생긴 눈매 탓에 마치 한 마리 여우가 꼬리를 바지런히 흔드는 것만 같았다.

“공녀님의 말씀이라면 뭐든 늘 경청하고 있습니다.”

샤를리즈는 저를 유혹하듯 눈을 휜 남자를 보며 낮게 물었다.

“이안.”

“…….”

“만약 내가 이대로 오늘 들은 모든 말을 황제에게 고하여 네 가문을 친다면 넌 어떡할 거니?”

샤를리즈에게서 처음 나온 그의 이름은 애석하게도 지독한 질문과 함께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안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드물게도 뒤를 생각하지 않고 드린 말씀이어서요.”

“그래, 네가 여기서 나와 만난 것 자체가 우연의 산물이겠지.”

“예. 하지만…… 폐하께 고하신다 하여도, 글쎄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걸 바란 걸지도 모르겠네요.”

샤를리즈가 작게 웃었다.

“재밌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될 운명이라면 내가 죽어 줘?”

“공녀님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절대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샤를리즈의 농에 이안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알아. 엄밀히 말하자면 너도나도 결국 부모의 손에 혹은 조부의 손에 휘둘리던 신세였던 것 같으니까. 만약 내가 할아버지의 계획을 깽판 놓지 않았다면 너랑 내가 꼼짝없이 약혼할 뻔했잖아?”

“음, 약혼 자체는 싫지 않았는데요…….”

“약혼, 그대로 진행했다면 넌 내 시체나 안게 됐을걸.”

이안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샤를리즈는 아스킨과 파혼하는 그날 죽었을 테니 직설적 의미 그대로 말한 것이었지만, 이안은 관용적 의미로, ‘너랑 억지로 약혼했다간 평생 마음 주는 일은 없었을 거다’라고 해석했다.

“그래. 어쨌든 잘 알겠어.”

“공녀님, 이제 와서 말하기 민망하지만 조금 전에 제가 고백했단 사실도 기억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만…….”

“알아.”

샤를리즈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까먹는단 말인가.

물론 찔려서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아니었다. 암, 아니지.

“……네 뒷말이 오죽 충격적이었어야 말이지.”

“그건 그렇습니다.”

이안이 순순이 수긍하자, 샤를리즈의 시선이 이안에게 닿았다.

붉은 눈동자로 복합적인 것이 일렁거렸다.

“뭐, 아무튼…… 힘내.”

“…….”

“힘내라고 할 상황은 아니지만.”

샤를리즈는 머쓱함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가게를 이렇게 비웠는데. 주인도 보이지 않는 게 말이 되나?’

샤를리즈는 자신의 목적을 떠올렸다.

“그보다 혹시…… 상황에 맞진 않는 질문인데, 너 여기 주인과 아는 사이야?”

“주인? 마스터 말입니까?”

“아니, 음…….”

이안은 샤를리즈를 빤히 보다 달리 물었다.

“이 건물 안쪽에 있는 ‘것’의 주인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안은 숨겨진 뜻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동시에 샤를리즈의 목적 또한 알아차린 셈이었다.

하기야 제국의 공녀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나타난 이유가 몇가지나 되겠는가.

“……역시 알고 있었네. 너도 거기 볼일이 있었던 거니?”

샤를리즈 또한 자신의 목적이 이곳에 있는 정보 길드임을 숨기지 않았다.

“아뇨. 분명 이 건물에 다른 것이 있긴 하지만 저는 여기 한잔하러 온 거였습니다. 길드와는 별개로 여기 술맛이 좋거든요.”

“그래?”

그 말을 듣고도 샤를리즈에게선 미심쩍은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막 반란 계획을 들은 참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그럼 공녀님께서는 어째서 여기 계셨던 겁니까? 들어가지 않으시고…….”

“하하, 그게 말이지…….”

샤를리즈는 드디어 자신이 원한 질문이 나오자 머쓱함에 눈을 우아하게 돌렸다가 이내 휙 다시 그를 향했다.

“너, 안쪽으로 들어가는 방법 알아?”

* * *

2시간 뒤.

내가 밖으로 다시 나왔을 땐 여전히 한밤중이었다.

건물을 나서며 본 시간이 약 1시였으니, 아마 지금은 1시 10분 쯤이려나.

“고마워.”

나는 이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금 전의 일을 돌이켜 본다.

“너, 안쪽으로 들어가는 방법 알아?”

예상대로 이안은 안쪽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길드 주인을 만나고 싶다는 내 말을 흔쾌히 들어주었고, 나는 마침내 길드 주인을 만나 나머지 정보와 함께 원하던 증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길드 주인은 내가 누군지 알아차리고 몹시 놀란 기색이었지.’

길드 주인과의 대화는 순조로웠다.

남자는 내가 의뢰인이라는 것을 증명하자, 아무런 내색 없이 모든 것을 알려 주고 건네주었으니까.

내가 할 일은 잔금을 치르는 것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안은 밖으로 나가 있어 달란 내 말 또한 순순히 들어주었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에스코트 할 것을 자청했다.

‘……도움을 받았는데.’

나는 길드에 들어가기 직전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눈으로 이안을 응시했다.

“좋아합니다.”

항상 화려하고도 유려한 언변을 가진 남자의 고백은 평소와는 다르게 담백하고도 담담했다.

살짝 미소 지은 낯엔 마치 처음부터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도전한 자의 체념이 어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절벽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자의 간절함마저 엿보여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게끔 만들었다.

바로 이어진 반란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과연 어떤 대답을 했을까?

‘거절했겠지.’

어쩐지 최근에 아스킨과 나름대로의 달달하고도 간지러운 기분을 만끽했던 것이 차갑게 식은 기분이었다.

‘어차피 난 돌아갈 거잖아.’

아스킨 눈에 어리기 시작한 것을 슬쩍 모른 척해 왔듯이 이젠 이안에게도 똑같이 할 때였다.

그저 모른 척하기 조금 힘들었던 건, 이안이 불가능할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부딪쳐 보려 했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든 발버둥치던 모습이 겹쳤으니까.

“난 이제 돌아갈 거야. 저기 저걸 타고.”

밖으로 나오자, 오래 기다렸을 벤과 마부, 마차가 보였다.

벤은 나를 보자마자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가오려다 말고 이안을 보고 멈칫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손짓으로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낸 뒤 이안을 향했다.

“설마 여기서도 데려다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하하하, 제가 할 말을 빼앗겨 버렸네요.”

“그래. 마음만 받을 테니까. 가.”

“이 마음 말고 다른 마음을 받아 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뭐? 이렇게 직구를 던진다고? 당황해서 찡그리는 순간이었다.

조용한 길거리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의 주인은 어디론가 가 버렸는지,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돌아본 방향해서 묘한 것을 발견했다.

‘저건…….’

정보 길드가 있는 술집은 제국의 번화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나는 벤에게 그 자리에 있으란 손짓을 하고는 나도 모르게 성큼 걸어갔다.

“공녀님?”

그런 내 뒤로 이안이 쫓아오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늦은 시간이라 가장 발달한 번화가임에도 깜깜한 거리는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지만, 이와 별개로 가까워질수록 눈에 명확하게 보이는 저것에 나는 놀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줄줄이 보이는 의상숍. 유일하게 몇몇 의상실만이 이 밤거리를 모두 밝혀 버릴 듯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저 휘황찬란한 마법등 대신 의상숍 앞에 도열해 있는 마차들, 그리고 그 마차에 찍혀 있는 문양에 주목했다.

‘이 밤에 무슨 난리지? 저건…… 황실 문양이잖아.’

그랬다. 의샹숍 앞에 서 있는 화려한 마차.

거기에 찍힌 문양은 내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게다가 저 마차는 분명 록시디언이 직접 타는 마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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