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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61화 (162/194)

161화

내가 멈춰 선 동안 바로 곁까지 다가온 기척이 느껴졌다.

미처 거절할 새도 없이 나를 쫓아온 이안의 기척이다.

내가 보고 있는 걸 이안 또한 보고 있겠지.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이곳에 황제가 있다.’

게다가 숨길 생각도 없다.

들어 본 적 있다. 이렇게 야심한 시각, 의상실의 불을 밝히는 건 대체로 하나.

귀족 남성이 자신의 정부 혹은 떳떳하지 못한 상대에게 물건을 사 줄 때.

보통은 이럴 때 아무런 무늬가 없는 마차를 타고 온다.

그러나 록시디언 그놈은 제가 여기 온 걸 숨길 생각이 없으니, 그냥 번잡한 시간이 싫어 이 시간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황실 모양을 빤히 노려보다 말고 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다음 순간 문을 열고 나타난 인물들의 모습에 그대로 발이 묶였다.

‘허어…….’

록시디언과 플로리아였다.

대체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언제 저렇게 가까워질 틈이 있었던 것인지.

퍽 가까운 거리였다. 적어도 평범한 퍼스널 스페이스는 확 뛰어넘은 거리.

‘원작은 원작이라는 걸까? 아니 그런 거라면 왜 플로리아는 거절 안 하는 건데?’

이 원작은 폭군이 먼저 반하고, 여주는 계속 거절하다가 폭군의 집착 끝에 그의 사랑을 받아 주는 내용이라고.

아니, 원작대로 진행될 거면 아예 원작대로만 진행되든가.

이렇게 어중간하게 되다 말면 나 같은 빙의자는 어떡하라고요.

네? 거 신님 듣고 있습니까?

게다가 달갑지 않게도 플로리아를 본 순간, 플로리아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불유쾌한 거부감을 느꼈다.

마치 이 몸이, 영혼이 플로리아를 거부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게다가 이안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플로리아는 차일드 가문과 관계가 있고 그 차일드는 반역을 꾸미고 있지.’

그렇다면 저 폭군을 이대로 플로리아와 붙여 줘야 하는가?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탄식했다.

‘아, 혈육의 애정 전선을 방해하는 역할 따위 맡고 싶지 않다고…….’

기왕이면 저런 놈도 연애를 해? 으으, 하면서도 팝콘이나 먹고 싶다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뒤를 돌아 이안을 보았다. 록시디언이 있는 쪽을 고갯짓했다.

“난 지금부터 내 오빠랑 이야기를 나눌 건데……. 우리 대화에서 네가 오늘 해 준 이야기가 나올지도 몰라.”

“예, 괜찮습니다.”

“……진짜 괜찮겠어?”

이안이 작게 미소했다.

“예, 물론입니다. 홧김에 말하게 된 것이 없잖아 있습니다만, 생각하지 않고 내뱉은 말은 아닙니다. 공녀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

나는 말을 마치는 동시에 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옷을 걸친 기사들이 나를 막았지만, 곧 로브 아래로 드러난 내 얼굴을 보고서 서둘러 물러났다.

나는 그렇게 폭군 오빠 놈과 플로리아 앞에 다가갔다.

놀랍게도 록시디언은 한껏 들떠 있는 표정이어서, 생경한 한편…….

‘아, 보기 싫다.’

남매란 건 여기나 저기나 어쩔 수 없는지.

딱히 보고 싶은 모습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와 별개로 입술을 한껏 끌어올렸다.

“어머, 폐하께선 이 야심한 시간에 어쩐 일로 여기까지 행차하셨는지요?”

사근사근해서 오히려 놀리는 것이 확실한 내 목소리에 록시디언이 찌푸렸다.

나를 휙 훑어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건 저쪽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너는, 왜 기사도 없이 혼자야? 설마 술 취해서 돌아다니다 여기까지 온 거냐?”

“허어, 과거에도 그런 적은 없거든? 그나저나 요즘 밤에 잠이 잘 안 오시나 보네?”

내 시선이 플로리아를 향하자, 플로리아의 뺨이 발긋 달아올랐다.

……달아올라요? 내가 당황하는 사이 플로리아의 눈이 동경으로 반짝반짝 빛나며 얼른 인사했다.

“알츠베이트 공녀님을 뵙습니다.”

나는 플로리아에게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록시디언을 향했다.

“혹시 여동생에게 옷이라도 한 벌 더 해 주려고?”

“주면 갖다 버릴 사람한테 왜 주냐? 그보다 너, 왜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왜 무시하지?”

“이야……. 벌써 보이는 게 없어? 천년의 사랑이야?”

“뭐?”

“아니아니. 내가 언제 인사를 안 받았다고 그래.”

록시디언의 표정이 웃고 있지만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정말 이렇게 순식간에 변할 수 있나?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아무리 운명과도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해도 그렇지…….

내가 팔짱을 끼는 사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이안이 내 옆에 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록시디언의 눈이 조금 커지는가 싶더니, 나와 이안을 번갈아 보았다.

“허, 너. 레무트 그놈과 다시 만나는 거 아니었냐?”

번갈아 보던 눈이 씩 휘어졌다. 한 건 크게 잡았다는 얼굴이었다.

왜일까 그 얼굴이 내가 알던 폭군 오빠 같은 얼굴이라 도리어 안도감을 느꼈다.

“이야, 내 동생. 능력 좋은데? 대체 이 밤에 차일드 영식이라는 뭐 하는 거냐?”

“웃든지, 비웃든지 하나만 해. 내가 누구랑 있던 무슨 상관이야? 일국의 황제께서 다망하시기는커녕 그림자처럼 데려 다니던 비서관도 두고서 이렇게 야밤에 쇼핑이나 다니실 정도로 한가하셨나?”

“허, 숨이나 쉬고 말하지 그러냐?”

“저어, 공녀님……, 그게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황송하옵게도 별자리를 설명해 주신다기에 나왔다가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르게 되었습니다……!”

별자리. 이건 원작에서도 록시디언이 플로리아와 산책을 나가기 위해 이용해 먹던 것이었다.

원작을 읽을 땐 ‘별자리라니, 폭군 주제에 이런 건 낭만적이네.’ 생각했던 부분이었건만.

이렇게 알게 되자, 떨떠름하기 그지 없었다.

“이야, 우리 황제께서 별자리까지 능통하신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요즘 별자리는 의상숍에서 찾는 거였어?”

“적당히 해라?”

“나야말로 한마디 하고 싶은데. 내가 이런 말 할 자격도 없나? 그런 거면 나랑 아스킨 사이는 왜 그렇게 반대했었어? 골탕 먹이지 말고 속 시원하게 허락이나 좀 해 주지.”

스스로 유치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술 먹었었으면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

“……뭐?”

나를 지나치는 록시디언을 느끼며 생경함을 느꼈다.

이건 뭐랄까, 그래 윤지훈이 내 생일도 까먹고 지 여친 챙기러 나가는 걸 볼 때 기분이 이랬던가.

플로리아를 에스코트 한 채로 뒤돌아서 가 버리는 모습을 한참이나 보았다.

‘……사랑이 사람을 이렇게 변하게 만드나?’

그런데,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아? 이렇게까지 내게 관심을 꺼 버린다고?

새삼스럽게 브라더 콤플렉스, 뭐 이런 생각만 해도 낯간지러운 증상에 걸린 건 아니다.

다만 평소라면 내 옷차림, 내가 여기 나온 의도, 뭐 하다 온 것인지, 동행자는 왜 이안인지 등등…….

나는 물론 이안의 꼬리까지 탈탈 털어 댈 인간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무 자르듯이 변할 수 있던가?

그것도 네가 어떻게 되든,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다는 듯이.

조금 전의 록시디언은 오직 하나만 보이는 사람처럼 굴었다.

“……무슨, 여우에 홀린 사람 본 기분이네.”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막 마차에 올라가던 플로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플로리아는 나를 보며 연예인을 만난 팬인 양 어쩔 줄 몰라하다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나는 멀어지는 마차를 보다 입을 열었다.

“이안, 오늘은 그만 돌아가.”

“저, 공녀님…….”

“당신은 똑똑하니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은 알 거야, 그렇지?”

“…….”

“모르더라도 괜찮아. 대충 내 오라버니가 왜 갑자기 저러나, 저 플로리아란 여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심도 깊게 알고 싶어진 거니까.”

“…….”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냥 돌아가. 그리고 아까 도와주려 한 거 같은데 고마웠어.”

“……아닙니다.”

이안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나를 향했다.

“알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를 찾아 주십시오.”

“…….”

“이전에 공녀님께서 제게 공녀님 편이 되겠냐고 물으셨지요, 네. 저는 공녀님의 편입니다. 아니, 지금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이안의 입술이 손등을 살짝 스치고 떨어졌다.

곧 마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 나는 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창문 너머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이안의 모습이 보였지만, 지그시 눈을 감았다.

돌아가는 마차 안은 무거운 침묵이 지배했다.

맞은편에 앉은 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뜨며 벤을 불렀다.

“벤.”

“……예, 공녀님.”

“주인이랑 똑같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연기 못하는 거 말이야.”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자는 척 연기가 영 글렀다고.”

그제야 벤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깜빡 잠이 들어 버렸군요. 공작님께는 부디 비밀로 해 주십시오. 공녀님의 호위로 갔다가 졸았다는 것을 알면 불같이 화를 내실 겁니다.”

“그럼 오늘 본 것들 비밀로 해 줄래? 서로 주고받기 어때.”

“……저는 아무것도 본 것이 없습니다.”

“그래, 주인보다는 눈치가 있어서 다행이네.”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벤이 아스킨에게 모든 것을 고할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상관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레무트 성에 도착했다.

에스코트를 하기 위해 먼저 내린 벤은 한눈에 보아도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마차 문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샤를리즈.”

아스킨이었다.

나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싱긋 웃었다.

“……이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답답해서 잠시 바람 좀 쐬고 왔지. 왜? 아, 벤. 오늘 고마웠어. 피곤할 텐테 빨리 들어가서 쉬어.”

“……예, 공녀님.”

벤이 나와 아스킨을 번갈아 보다가 서둘러 빠른 발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일단 당장은 벤의 입을 통해서 아스킨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어진 셈이었다.

“샤를리즈.”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왜? 이제 어디 다녀왔냐고 물어보게?”

“……아니.”

아스킨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다녀오고 싶었던 곳이든, 꼭 가야만 하는 일이든 뭐든 있었겠지. 그걸 억지로 알아낼 생각은 없어.”

“…….”

“필요하다면 네가 알려 주겠지.”

아스킨이 내 손을 가져와 정중하게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제 네 편에 설 수 있는 자로는 인정을 받은 것 같으니까.”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푸른 눈에 이지러질 듯 꽉 찬 것을, 본능적으로 먼저 느꼈기 때문이었다.

“네겐 거북하게 느껴질 것 같아, 몇 번이고 숨겨 보려 했지만 나는 그런 것에 능숙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의 입술이 잠시간의 침묵을 유지하더니 꾹 깨물었다.

“좋아해.”

곧 터질 것만 같은 것이 마침내 언어로서 내게 닿았다.

“널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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