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이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입술이 절로 떨렸다.
속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몰랐어?
……아니, 그건 아니야.
아스킨 레무트란 남자는 차갑고 철두철미하면서도 요령이 없는 남자였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이성적이고 내 적으로 갈무리될 것 같던 남자가 변할 줄은 나도 저 남자도 몰랐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이 남자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이 나를 쳐다보았을 때.
나는 너무나 쉽게 저 눈 속에 어린 감정을 알아차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날 처음 보았을 때 눈이 너무나 차가웠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는 나는 그가 숨겨도 열기를 알아볼 수 있었다.
“……기어이 고백하는구나.”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아스킨은 잠시 멈칫했지만 동요한 표정은 아니었다.
마치 들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숨기지 못할 것 같단 생각은 했지만.”
“숨길 생각이나 있었어? 놀라운데.”
나는 손을 뻗었다. 툭. 그의 옷자락에 내 손끝이 닿았다.
아스킨의 시선이 마치 손길이라도 되듯 나를 쓰다듬다가 느릿하게 올라왔다.
“내가 보통 눈치야?”
왜일까, 늘 서늘하던 눈동자가 일그러진 열기를 담아 나를 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일그러졌으면 하는 건, 내가 이상한 걸까.
“넌 알아보기 쉬웠어. 내가 봤던 그 어떤 남자보다도 말이야.”
“…….”
푸른 눈에 마치 칼로 도려낸 듯한 상처가 울렁거렸다.
희고 푸르다. 그렇기에 이토록 선명하게 보이는 걸까?
마치 가슴이 저 눈을 비추는 거울이라도 된 양, 흔들림에 맞춰 함께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날 용서하지 않을 건가?”
“내가 뭘 용서해야 하는데?”
“그건…….”
“네가 아니라 내가 물어야지. 넌 나를 용서했니? 나는, 너를 힘들게 하고 네가 그렇게도 아끼던 아리아에게도 손을 댔던 사람이야.”
“아리아의 일에 대한 용서는 내 역할이 아니야. 그리고 그 애는 잊었기 때문에 너를 그토록 아끼고 좋아하는 거겠지.”
“…….”
“그리고 나는 이젠 모든 걸 잊을 만큼 너를 좋아하는 것뿐이다.”
푸른 눈동자가 또 한 번 일렁거린다.
이에 따라 가슴도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아니, 모두 잊었어. 널 좋아하니까. 오히려 이젠 상관없을 지경이야.”
아스킨은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말했다.
이렇게 말이 많은 남자가 아니었건만 마치 제 가슴의 주머니가 터진 것처럼 쉴 틈 없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넌 지금 네 표정을 알고 있나? 대체 왜냐고 묻는 듯한 얼굴을 해. 이유는 나야말로 알고 싶어.”
“…….”
“그렇지만 이제 이유를 찾는 것보다도 내 마음이 더 중요해졌을 뿐이다.”
“…….”
“강요할 생각은 없어. 그저…… 깨닫고 보니 네 모습이 정말 외로워 보이더군. 내 탓인 것 같아 괴로웠다고 하면 넌 믿을 텐가?”
“……왜 네가 갑자기 이렇게 말이 많아진 건지 모르겠지만.”
“좋아해.”
굵직하고도 듣기 좋은 음성이 듣기 싫었느냐 하면 그게 아니었기에 더욱 묘한 긴장감이 나를 휘감았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바람에 몸을 맡길 것만 같았다.
“넌 동료라고 말했지. 지금 그대로 나와 협력하면 돼. 아니, 이용해도 좋다.”
참으로 이 남자답지 않은 말에서 그저 다시 한번 진심의 깊이를 깨달았을 뿐이었다.
“……나 참. 이 늦은 시간까지 감시를 하는 거냐고 한마디 하려 했더니. 아주 말 한 번을 못하게 하는구나.”
“……고백을 그저 입막음으로 생각하는 너도 참 대단한데.”
아스킨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작게 웃었다.
나직한 웃음이 목 안쪽을 울리는 웃음이었다.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이제 네가 그저 내 마음이 진심이길 알아주길 바라는 수밖에.”
아스킨이 조심스럽게 자신에게 뻗은 내 손을 잡더니, 허리를 숙여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차 안쪽에 있던 탓에 남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은 상당히 묘했다.
그것도 달빛에 잠겨 푸른 빛에 유려한 선이 더욱 반듯해진 얼굴을 보는 것은 더욱더.
“알아주지 않으면 그래……. 다음엔 눈물이라도 흘리면 한번 봐주려나?”
“난 그렇게 동정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야.”
“그랬다면 아리아와 가까워지진 않았을 것 같은데.”
“허?”
“가까이서 본 너는 내 생각보다 정이 더 많아 보여서.”
가까워진 얼굴이 마차 그림자에 잠겼다.
그러나 살짝 어두워진 그림자 아래서도 기나긴 속눈썹만은 너무나 잘 보였다.
“더욱더 네게 관심을 갈구하고 용서받고 싶어질 지경이야.”
“……혹시 술이라도 마셨어?”
“네가 주정뱅이의 고백을 가만히 들어 줄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내려 줘도 되겠나?”
떨떠름하게 허락하기 무섭게 아스킨이 내 허리를 살짝 잡고 마차에서 휙 내려 주었다.
다시 높아진 그의 키가 새삼스러웠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나는 누구도 사귈 생각 없어. 바빠.”
“누구도, 라는 지점이 참 마음에 드는군.”
“뭐?”
“아니, 경청하고 있다.”
“하지만 네가 앞으로 나와 약혼을 유지해 줬으면 해. 최소 반년, 아니 7개월 이상은.”
“그럼…….”
아스킨이 머뭇거렸다. 조금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덕분에 기본적으로 매달던 차가운 표정이 사라지니, 어째 청순해 보여 잠깐 눈을 비볐다.
“수락할 테니 그동안에…… 너도 좀 더 나를 봐 줄 수 있겠나?”
“조건이야?”
“아니, 조건도 강요도 아니야. 그저 부탁이다.”
나는 바라보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 푸른 달빛에 물든 남자를 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마저 조용히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마음이 어느 순간에 기울고야 말았다는 걸.
저 눈처럼 새하얀 얼굴에서, 푸른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 순간들이 늘어났단 것을.
숨기고만 싶었다.
……난 돌아갈 거야.
* * *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알려 주지 않을 건가?”
“무슨 일은. 용건이 있어서 밖에 다녀온 것뿐이야.”
아스킨은 샤를리즈를 방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런데, 공작님 한가해? 기사들이 너 매우 바쁘다고 하던데.”
“바쁘지 않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시간을 비울 수 있다.”
“그래? 아쉽지만 나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알츠베이트로 돌아갈 생각이야.”
“뭐?”
아스킨이 걸음을 멈췄다.
새벽이라 어둑한 복도에는 은은한 촛불만이 길을 밝히고 있었다.
“갑자기 왜? 지금 돌아가도 괜찮은 건가? 아니, 혹시 내 성에서 불편한 것이 있었더라면.”
“불편한 거라, 이 늦은 시간까지 이렇게 감시하는 거?”
“그런 거라면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
……앞으로는, 이라면 감시하긴 했단 소리 아니야?
샤를리즈가 이런 얼굴로 쳐다보자, 아스킨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감시한 적은 없어. 염려라면 모를까…….”
“그래, 벤이 쫓아와서 감시하긴 하더라.”
“감시는……!”
“농담이야. 농담.”
샤를리즈가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자를 잡으려면 사자굴로 들어가야지.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도 없고.”
“……계획이 있는 건가?”
샤를리즈가 잠시 고민하더니 살짝 끄덕였다.
“있긴 해.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도 있고. 일단 오늘은 피곤하니까 들어가서 좀 쉴게.”
아스킨은 샤를리즈가 생각한 것처럼 요령 없고 무디기만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집중한 사람에 대해서는 무섭도록 집요하고 예리한 면이 있었다.
이따금 흔들리는 샤를리즈를 볼 때면 꼭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이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위태로움도 함께.
“샤를리즈.”
그래서 그는 실례를 무릅쓰고 가는 손목을 아프지 않게 잡았다.
“난 네 동료다. 그리고 네 편이야.”
아스킨은 아끼는 이에게, 그것도 생애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섭도록 집중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 자신 또한 모르는 것을 알아차리곤 했다.
“뭐야. 누가 너 네 편 아니래? 파트너는 하기로 했잖아.”
지금처럼 잠시 울 듯한 표정을 지을 때라거나.
단단하던 눈이 흔들릴 때와 같이.
그는 금방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은 것을 꾹 눌러참았다.
* * *
다음 날 아침. 샤를리즈가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사람이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다.
“언니! 깼어요?!”
“아리아……?”
샤를리즈는 일어나려다 말고 눈을 찡그렸다.
머리가 욱씬거리고 몸이 무겁고 말을 듣지 않았다.
억지로 움직이자 머리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눈길을 돌리자 물수건이었다.
“왔으면 깨우지 그랬어. 그런데 이게 뭐야?”
“언니, 진짜 괜찮아요?”
샤를리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머리는 여전히 무겁고 몸은 뜨거웠으며 욱씬거렸지만, 모른 척 태연하게 미소했다.
“그럼. 설마 나 세수시켜 준 거야? 지난밤에 안 씻고 바로 잠들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아뇨, 그게 아니라……. 언니, 어젯밤에 끙끙 앓고 있다는 걸 하녀가 알려 줘서 오빠랑 제가 새벽 내내 간호했어요. 오빠는 회의가 있어서 잠시 나갔고요.”
“내가?”
샤를리즈가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자 머리가 핑 도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밤에 나갔다 왔기 때문인가? 아니면 너무 많은 일을 처리해서?’
확실히 어젯밤에 일이 많기야 했다.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샤를리즈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불을 걷어내자, 아리아가 얼른 이불을 잡으며 만류했다.
“언니, 아직 아픈 거죠? 안 되겠어요. 빨리 다시 누워요. 네?”
“아니야. 괜찮아. 한가하게 누워서 황금 시간을 허비할 순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