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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63화 (164/194)

163화

“네? 황금 시간이라니요……?”

샤를리즈는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비쳐 버렸고, 아리아는 이런 샤를리즈를 놀란 눈빛으로 쳐다봤다.

샤를리즈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젊음이 영원하진 않잖아. 젊을 때 더 많이 놀아야지. 황금 같은 시간이라고?”

“언니는…… 가끔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딴 세상 사람 같은 말을 가끔하는 것 같아요.”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하는 말에 샤를리즈는 생각지도 못한 정곡을 찔렸다. 아, 깜짝이야. 샤를리즈는 예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어휴, 푹 잤더니 배고프네. 아리아, 밥은 먹었어요? 같이 아침 먹을까?”

“언니…… 그, 지금은 오후예요.”

“눈 떴으면 아침인 거지. 점심 같이 할까?”

샤를리즈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참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그녀는 식사하는 내내 아리아의 관심을 제 건강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느라 애를 먹었다.

식사를 마친 샤를리즈는 아리아에게 자신이 오늘 알츠베이트 공작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렸다.

예상대로 아리아는 몹시도 아쉬워했지만, 자주 놀러 온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다시끔 미소를 보여 주었다.

아리아와 식사 겸 오붓한 담소를 마친 샤를리즈는 아스킨의 집무실로 향했다.

“……샤를리즈, 몸은 괜찮은 건가?”

마침 회의가 막 끝난 것인지, 아스킨의 집무실 탁자에는 온통 서류로 가득했다.

아스킨 자신 또한 손에 양피지를 들고 있었지만, 그녀가 들어오자 얼른 내려놓고 성큼 다가왔다.

샤를리즈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스스로를 느꼈다.

긴장해? 왜?

……이 남자가 고백해서.

샤를리즈가 남몰래 입술을 꾹 물었다가 놓았다.

그래, 감정의 흐름을 어찌하겠나. 이성적으로는 옳은 길을 알고, 또 때론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지금은 몸이 좋지 않다 보니, 더욱더 감정의 흐름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이성이 느슨해진 틈을 타 흘러오는 이 다채로운 기분을 말이다.

“덕분에 보다시피 아주 건강해졌어.”

샤를리즈의 말에 아스킨은 미미하게 찡그렸다.

그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 환자였기에 어찌보면 전문가 수준으로 환자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

그런 그의 눈에 샤를리즈가 거짓을 말하고 있음이 잘 보였지만, 무어라 말을 할 순 없었다.

“열이 있는지 봐도 되겠나?”

“그거, 너무 눈에 보이는 수작 아니야?”

“…….”

샤를리즈는 빙긋 웃고는 툭 말했다.

“밤새 간호해 줬다고 들었어, 고마워.”

밤샘 간호. 이 단어는 아픈 몸을 파고들어 약해진 마음을 꾹꾹 찔러 오는 공격이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은 지구에서 가족을 한꺼번에 사고로 잃었다.

그후로 홀로 살면서 가장 있으면 안 될 일이, 바로 아픈 거라는 것을 깨닫고 극도로 건강 관리에 치중했었다.

그러나 회사 생활이란 게 뜻대로 되지 않는 법, 잦은 야근이나 상사의 폭언에 아프고 말 때면 새벽달을 보며 외로움에 주르륵 울던 날이 있었다.

‘아프긴 한가 보네. 이렇게나 감정적이 되는 걸 보면.’

한숨을 내쉬었더니, 숨이 뜨거운 기분이었다.

“아니다. 내가 좀 더 신경 쓰지 못해서 네가 아픈 것 같아…… 도리어 내가 미안하군.”

“내가 아픈 게 왜 네 탓이야.”

엄밀히 말하자면 그 밤에 나갔다 온 제 탓이었다.

게다가 록시디언을 만나는 바람에 서늘한 날씨 아래 외출이 더욱 길어지기까지 했다.

“엄밀히 말하면 자기 관리 하나 못한 내 탓이지 뭐.”

록시디언의 일을 떠올린 샤를리즈가 설핏 찌푸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스킨의 눈으로 염려와 함께 열망이 어렸다.

“괜히 사람 미안해지게 이러지 말고, 어제 말한 대로 나는 오늘 돌아갈게.”

마치 위험을 알아차리는 동물의 본능처럼 아무래도 제 상태가 꽤나 위험하다 여긴 샤를리즈가 웃음으로 무장한 채 한 발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한 발 물러나는 만큼 아스킨 쪽에서 성큼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커다란 손이 샤를리즈의 손끝을 아주 살짝 붙잡았다.

손 크기가 무색하게 소심한 몸짓이었다. 샤를리즈가 멈칫할 만큼.

“샤를리즈,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만 더 머물 순 없나?”

추욱 처진 어깨와 눈꼬리가 내려간 얼굴.

그를 아는 사람들이 이 얼굴을 보았다면 분명 다른 사람인가 싶어 눈을 비비며 다시 보았을 표정이었다.

‘미친. 뭐야.’

샤를리즈는 아래로 내려간 눈꼬리에 투명하게 매달린 눈물을 보고서 흠칫하고 말았다.

……이 인간이 미친 건가? 뭐야. 왜 이래?

문제는 이 개연성 없는 눈물이 이 청초한 얼굴에 어이없을 만큼 어울렸단 점이었다.

샤를리즈가 물러나던 것도 잊고 숨을 살짝 참았다.

책에서 본 구절 중에 얼굴이 개연성이란 말을 본 적 있건만.

그 비유에 걸맞은 모습을 지금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샤를리즈는 더는 아프지 않다고 잡아뗄 수도 없음을 느꼈다.

“……머무른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 데 뭐. 빨리 움직여야지.”

‘달라지는 것도 없다’는 샤를리즈의 말에 아스킨의 얼굴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초조함과 불안함이 깃들었다.

샤를리즈는 더욱 당황했다.

“저기, 아픈 건 난데 왜 네가 서럽게 울어?”

“……울지 않았다.”

그럼 네 눈꼬리에 매달린 건 이슬이니? 오냐, 생긴 게 딱 꽃 같아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만은. 샤를리즈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했다. 하지만…….

가슴에서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지 않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느새 가까워진 이 거리에선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샤를리즈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곧 손을 뻗었다.

“뭐야, 너. 왜 어울리지 않게 구는 건데?”

샤를리즈가 잡은 것은 아스킨의 멱살이었다.

잘 정돈된 옷이 가는 손 아래에서 구겨졌다.

꽤 우악스러운 손길이었건만 아스킨은 이마저 기껍다는 듯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저 걱정됐을 뿐인데. 안 되나?”

아스킨의 손이 조심스럽게 샤를리즈의 손을 덮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샤를리즈는 곧바로 후회했다.

“네겐 계획이 있다고 했지, 그 계획을 듣고 싶다.”

“……말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이건 듣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야.”

이 얼굴을 어떡하면 좋담. 샤를리즈는 얼굴 공격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꼈다.

아플 때, 그것도 마음마저 약해졌을 때 볼 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이건.

샤를리즈라고 얼굴에 약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스킨이 기어이 제 자존심과 모든 것을 뭉개 버렸을 때조차도 넋을 빼앗겼겠지.

오히려 샤를리즈는 제가 다가온 이 온기가, 눈에 서려 있는 진심 어린 걱정이 기꺼웠다.

……그건 그녀가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 본 사람의 온기였으니까.

아리아도 아스킨도 기본적으로 사람이 따뜻했다.

아스킨을 죽도록 미워했던 때의 자신이 들었다면 비웃었겠지만, 이 순간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샤를리즈는 가만히, 이안이 해 준 말을 떠올렸다.

차일드 백작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는 말을.

게다가 자신은 지금 알츠베이트의 근간을 흔들려 하고 있었다.

제국에 커다란 지각 변동이 있을 터였다.

“모든 걸 걸 수 있어?”

아스킨이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는 질문 때문이 아니라 샤를리즈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를 오해한 샤를리즈는 아스킨의 말을 잘랐다.

이 남자의 신중함을 알고 있던 터라, 지금 당장 답변을 요구하는 자신을 멈추고 싶었다.

‘아무래도 내가 제대로 된 내 편이 갖고 싶었던 모양이네.’

제대로 된 가족이 있는 아리아가 부러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샤를리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나는 일단 돌아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테니까, 너도 신중히 생각해 봐.”

“신중하게 생각했다. 지금 말하겠다.”

“아니, 한 번 더 생각해 봐. 넌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어. 자칫 실패하기라도 하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니까?”

아스킨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작게 숨을 내쉬더니, 이내 샤를리즈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모르는 듯하지만, 이미 손부터가 따끈따끈하다 못해 조금 뜨거웠다.

그럼에도 저 표독스러운 눈엔 고집으로 가득했다.

악연도 연이라면, 오랜 시간으로 아스킨은 이럴 때의 샤를리즈는 말을 듣지 않는단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기에 그는 하려던 말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그래, 알았다. 신중하게 생각해 보지.”

신중하게 결정해서 아마도 오늘 밤이나 내일 당장 말을 하게 될 테지만.

아스킨은 이런 마음을 쏙 숨긴 채 말했다.

“알겠으니, 다른 이야기를 하나만 들어주면 안되겠나?”

“무슨 이야기?”

“들어주면 좋겠는데……. 간청한다.”

샤를리즈는 아픈 몸 때문인지, 약해지려는 마음을 느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말이나 해 봐. 뭔데?”

샤를리즈가 시선을 들었을 때, 아스킨의 얼굴이 점차 다가왔다.

“……사람이 감기 혹은 몸살에 걸렸을 때, 가장 효과적인 해결 방식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약 먹는 거?”

샤를리즈는 코 앞에서 웃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물기가 눈에 어린 남자는 열에 흐려진 시야 속에서도 미려했다.

아스킨이 웃는 그대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옮기는 거다.”

“…….”

“다른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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