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 * *
다음 날 아침, 알츠베이트 공작가 앞에 마차가 도착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문앞엔, 호위 기사인 제트가 샤를리즈의 에스코트를 위해 대기 중인 것이 보였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제트가 자신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임에도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아…….’
자신의 이마를 벅벅 문지르는 샤를리즈의 모습은 도통 평소 때와 같은 평온함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제 손에 얼굴을 묻고 하아, 한숨을 푹 쉬는 샤를리즈의 이마가 살짝 붉었다.
“아니. 옮기는 거다.”
“다른 사람에게.”
“으으…… 내가 미쳤지…….”
샤를리즈가 머리를 꾸욱 쥐었다.
분명 거기서 무슨 소리냐고, 뭔 미친 소리냐고.
지금 우리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연인 행세를 할 때냐고 핀잔을 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리즈는 빤히 아스킨을 보다가 눈을 감는 쪽을 택했다…….
‘이건 새벽의 실수야. 새벽 감성의 실수!’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샤를리즈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이건 실수가 아니었다.
샤를리즈는 분명 자신을 오롯이 걱정하고 애달픈 그 얼굴에 동했다.
충동이라 한들 정말 아니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그렇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나브로…….’
도대체 어느 순간에, 언제부터인지는 명확히 짚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아스킨에게 이끌리고 있었다.
다만 그 꼴을 당하고서도 저 인간에게 흔들렸다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동하면 무엇하는가?
자신은 신과의 계약을 종료하면 어마어마한 보상과 함께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샤를리즈는 내 이름이 아니다.
이 몸은 자신의 몸이 아니다.
그런데…….
“……첫키스인데.”
“아아아악!”
샤를리즈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어젯밤. 한창 즐기고(?) 나서 남자의 머뭇거림을 동반한 수줍은 한마디에 샤를리즈의 이성이 깨끗하게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샤를리즈는 처음이 아니었다.
게다가 샤를리즈가 지구에 있을 때 남자 취향은, 잘 빨개지고 잘 울고 조신하면서도 처음인 남자였다. 물론 현실 말고 소설 속 취향이긴 해도 그것 또한 취향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샤를리즈가 이 소설에서 남주와 서브 남주가 아닌 조연에 가까운 아스킨에게 정을 주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소설 속 이 인간이 잘 울었던 건 아니었지만, 아리아가 죽었을 때의 우는 모습이 인상 깊어서…….
그런 인간이 이제는 자신 때문에 울었다. 솔직히 말해 묘한 통쾌감과 후련함, 우쭐함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아니. 이 모든 건 결국 변명이다.
결국 해 버린 건 자신이고, 결정한 것도 자신이다.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 술기운이란 핑계도 대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래. 인정해야지.
‘내가 그놈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단 걸.’
그렇게 샤를리즈가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한결 멀끔한 얼굴이었다.
‘그래. 인정하니 속은 편하네.’
그녀는 이 세계에 와서 늘 정면 돌파를 택했다.
‘이야기, 나눠 보면 될 거 아니야.’
이번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아스킨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일단은 지금 이 저택에 있을 영감을 해치운 뒤에 말이다.
샤를리즈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휴, 어젯밤 일로 잔뜩 머리가 복잡했더니, 여기 들어가는 게 떨리지도 않네.’
처음 알츠베이트 저택으로 돌아가야겠다 마음먹었을 땐 나름 긴장도 했던 것 같은데, 아스킨 덕분이라고 할지 긴장감은 온데간데없는 상황이었다.
“오랜만이네, 제트.”
“……네, 공녀님.”
샤를리즈는 제트의 손을 잡고 내려와 저택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걷는 동안 제트의 눈길이 내내 샤를리즈를 향했다.
“무슨 할 얘기 있어? 아, 할 얘기는 많겠구나. 나중에 들어가서 할까?”
그 망할 영감과 대화를 끝내고 말이야.
샤를리즈가 제트에게 들릴 정도로 말을 건넸다.
어째서인지 잠시 침묵하던 제트는 곧 ‘네’ 하고 대답했다.
“공녀님…… 저 또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알겠어.”
샤를리즈가 이렇게 대답하던 때였다. 제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샤를리즈가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알츠베이트 공작이 있었다.
‘허어? 어쩐 일로 마중을 다 오셨대.’
여긴 정문 초입이었고, 샤를리즈가 돌아온다는 기별은 갔을 테니.
누가 봐도 마중을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오, 샤를리즈!”
그런데 노기로 가득할 줄 알았던 알츠베이트 공작의 표정은 뜻밖에도 온화함이 가득했다.
게다가 직접 샤를리즈 앞까지 다가와 손을 펼치기까지 했다.
“우리 예쁜 손녀 왔느냐? 이 할애비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
샤를리즈는 당황하지 않은 채 멀뚱히 응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갑자기라니. 허어, 이 할애비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 그러느냐?”
피식, 웃음만이 나오는 말이었다.
“아 예, 그렇게 아끼신다면서 아끼는 손녀가 며칠이나 집을 비워도 찾지 않으신거고 말이죠?”
“이런, 슬프구나…….”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네가 이 할애빌 골려 주려고 한 일인 걸 모두 다 알고 있단다. 일단 어서 들어가자꾸나.”
샤를리즈는 알츠베이트 공작이 내민 손을 외면한 채 걸어갔고.
알츠베이트 공작은 사람 좋은 웃음소리를 억지로 내며 샤를리즈 뒤를 따랐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기어이 샤를리즈의 방까지 쫓아왔다.
“저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나가 주시겠어요? 공작님.”
그러나 공작은 나가기는커녕 쇼파에 앉았다.
“아가, 여기 잠시 앉아 보거라.”
샤를리즈는 못 이긴 척 마지못해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차피 공작이랑 대면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지만 티를 내지 않는다. 본래 이런 자리란, 애타는 사람 쪽이 약자인 법이었다.
“호위는 물리거라.”
“안 돼요. 내 그림자 같은 사람이라.”
제트까지 물리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공작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지만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피곤하니까 용건만 간단히 해 주세요.”
“그래, 그래. 이 할애비한테 화가 단단히 났다 이거구나. 어릴 때마다 넌……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항상 보란 듯이 반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지.”
샤를리즈는 알츠베이트 공작이 자신의 모든 행동을 그저 치기와 어리광으로 치부하는 말에도 잠자코 있었다.
“그날 네 행동으로 네 마음은 모두 알았단다.”
“알았다고요? 그럼 이제부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인가요?”
“그래. 차일드 가문과의 결혼을 추진하지 않으마.”
샤를리즈는 침묵했다.
“갑자기 왜요?”
“내 손녀가 이토록 싫어하니까 그렇지.”
알츠베이트 공작이 턱을 느긋하게 문질렀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제국 최고의 가문 공녀인 네가 겨우 차일드 따위에 간다니 이 할애비가 아무래도 잠깐 실성을 했나 보구나.”
샤를리즈는 실소를 참았다.
결국 더 비싼 값에, 더욱 비싸게 치를 곳에 보낸다는 소리를 잘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아스킨과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태도였다.
자신도 아스킨도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히려 이 할애비는 네 결단력에 감탄하는 바란다.”
이를 모르는 알츠베이트 공작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흡족한 미소마저 떠올렸다.
“나중에 드레스 룸을 보려무나. 네가 자주 가던 의상실에서 최신 유행의 것들로 모두 바꿔 놓았단다. 그러니 이제 그만 좀 화를 좀 풀련?”
“제가 어린애인 줄 아시나 봐요.”
“그럼, 이 할애비 눈에는 영원한 꼬마 숙녀로 보이지 않겠니.”
샤를리즈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자꾸 이상한 말씀하지 마시구요. 기억 못 하는 척 하시는 것 같아 알려 드리자면 저는 레무트 공작과…….”
“난 이만 돌아가 보겠다. 피곤하다면 빨리 쉬거라.”
알츠베이트 공작은 샤를리즈의 말을 자르며 방을 나가 버렸다.
샤를리즈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간 문을 쳐다볼 때, 공작이 다시 들어와 퍽 위엄 있는 척 샤를리즈에게 물었다.
“네가 제국 밖으로 여행을 갔을 때, 이웃의 제인츠 왕국 왕세자가 너를 그렇게 예뻐했다고 하던데, 맞느냐?”
“무슨 소리예요? 누가 그런 헛소문을 이야기하던가요?”
‘샤를리즈’가 밖으로 여행을 다녀왔을 때라면, 이 몸의 머릿속에도 있었다.
제인츠 왕국 왕세자는 ‘샤를리즈’에게 끈덕지게 굴다가 그녀의 매운맛을 본 인간이었다.
“됐다. 이 할애비가 모두 알아서 하마. 편히 쉬고 있거라.”
문이 닫혔다.
샤를리즈는 픽 웃으며 자신의 전투력을 또 한 번 다지는 계기가 되어 준 알츠베이트 공작에게 감사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기분이 영 더러웠으니 말이다.
“제트, 가져와.”
“네. 공녀님.”
제트는 샤를리즈의 방임에도 아무렇지 않게 책상 서랍을 빼내고 뭔가를 뒤지더니 두꺼운 서류를 가져왔다.
샤를리즈는 서류를 우르르 펼친 채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처음부터 대화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내가 하던 일을 하면 될 뿐이야. 샤를리즈가 생각에 골몰히 잠겼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트…… 아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자 지금까지 꼿꼿하게 서 있던 제트의 얼굴로 처음으로 긴장 어린 표정이 스쳤다.
샤를리즈의 앞에서 거의 내비치지 않던 그의 잔뜩 긴장된 표정에, 샤를리즈는 서류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신전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