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샤를리즈로서는 의아하게만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신전이라니?
‘신전이라…….’
분명 이 원작에서 나름의 비중을 가지고 나오는 세력이었지만 샤를리즈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세력이었다.
아니, 원작 ‘샤를리즈’라면 모를까.
생각해 보니 자신도 막 빙의했을 때 ‘샤를리즈’인 척 행세하면서 몇몇 접근하는 남자를 쳐냈을 때, 그들 중에 성기사도 있었다.
‘죄다 원작이랑은 별 상관없는 엑스트라들이었지만 말이지.’
게다가 성기사들의 단장, 카하스의 경우 샤를리즈에게 푹 빠졌다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샤를리즈’가 카하스를 갖고 싶어 만들어 낸 소문이기도 했다.
‘샤를리즈’는 좋아하던 아스킨이 좀처럼 손에 들어오지 않자, 그 대체제로 제국의 다른 미남들을 찾아 유혹했는데, 그중 한 명이 성기사 단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것 외에는 다른 소문은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샤를리즈’가 여행을 떠나기 전 성기사 단장에게는 관심이 식어 더는 발길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만 들려올 뿐.
실제로도 샤를리즈의 기억 속엔 성기사 단장의 기억이 어렴풋했다.
마치 그리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듯이.
‘애초에 이 몸에서 눈을 떴을 때 대체로 차지했던 기억은, 할아버지, 오빠, 나머지는 죄다 아스킨에 대한 기억…….’
그렇기에 제트에게서 흘러나온 신전에 관한 이야기는 샤를리즈를 조금 긴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미지의 영역이었으니까.
“그건 왜 묻는데?”
“……어떤 생각이신지 궁금합니다.”
샤를리즈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볍게 대답했다.
“별생각 없는데?”
진실이기도 했고, 제트의 반응을 보고자 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고로 대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선 적당한 무관심이 최고였다.
“…….”
샤를리즈의 대답에 제트의 표정이 묘해졌다.
신기하게도 그건, 기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으며 화가 나 보이기도 했고…….
끝내는 조금 서운해 보이기도 했다.
“어떤 감정도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굳이 따지자면 그런데.”
“예, 알겠습니다. 대답에 감사드립니다.”
“할 이야기는 그게 다야?”
“네, 그렇습니다.”
조금 전 비장하게 할 얘기가 있다더니, 이것뿐이라고?
샤를리즈는 내려다본 서류를 한번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제트를 곁눈질했다.
이대로 다시 서류를 보는 길도 있었다. 하지만.
샤를리즈는 적어도 제트에겐 매몰차게 행동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저 남자는 유일하게 자신을 진심으로 대했던 남자였다.
샤를리즈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영문 모를 진심과 충정이었지만.
그건 때로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이 고독한 영혼이라는 사실을 아주 가끔 잊게 해 주는 선선한 바람같이 느껴졌다.
모든 고독을 날려 주진 못했더라도 위안은 됐단 소리다.
그런 사람이 현재 ‘나 할말이 많소’ 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나몰라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샤를리즈는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뒤로 향했다.
제트는 자신에게 소리없이 다가오는 샤를리즈의 모습을 보며 평소답지 않게 당황했다.
무뚝뚝한 얼굴 가득 경직이 스쳤다.
“공녀님?”
“말하렴.”
“무엇을…….”
“무엇이든.”
그렇게 비오는 날 쫄딱 젖은 커다란 강아지같이 보지 말고 말이야.
샤를리즈의 솔직한 감상에 제트가 잠시 움찔하더니 고개를 살짝 돌렸다.
우직한 눈으로 망설임과 혼란이 스쳤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모두 드렸습니다.”
“아니잖아. 내가 너를 하루이틀 보니?”
하도 가까이에 있어서일까, 속속들이는 아니어도 적어도 지금 할 말이 남았다는 사실은 아주 잘 보였다. 굳이 그 말을 삼켜 버렸다는 것도.
“살다 보니 느낀 건데, 말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순간이 와. 그때 후회하지 말고 그냥 기회가 있을 때 이야기해.”
“…….”
“네가 놓친 기회가 사실 마지막 기회였을 수도 있잖아?”
물론 샤를리즈는 제트가 끝내 말하지 않더라도 언제든 들어줄 용의가 있었지만.
제트에게는 달리 들린 듯했다.
다시 샤를리즈를 향한 제트의 눈이 사뭇 달라졌다.
지나치게 진지한 시선에 도리어 샤를리즈가 잠시 멈칫했다.
공손의 극을 달리던 시선이 아주 잠시나마 자신이 아는 제트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런 얼굴을 어디서 보았더라…….
그래, 황성.
제 오라비인 록시디언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던 기사들이 저런 얼굴이었다.
자신의 신념과 충정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하면서도 오만마저 깃든 모습.
강자들만이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샤를리즈를 겁먹게 할 만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살짝이나마 낯선 긴장감을 불러오는데는 성공했다.
분명 샤를리즈에게 깃든 긴장감을 읽었을 텐데도 제트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다만 조금 전 보였던 색다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제가 만약……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일단은, 믿지는 않을 것 같지만…… 네가 믿으라면 믿을게.”
샤를리즈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이미 보통 기사답지 않은 모습이야 꽤 보았지 않았던가.
샤를리즈는 검을 몰랐지만 제트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이전에 쫓아낸 다른 호위들과 있을 때도, 이 저택의 기사들은 미묘하게 제트를 어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정작 본인들은 잘 모르는 듯했지만 그건 본능적으로 제트를 피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마치 양 떼들 사이에 육식 동물에게 양털을 씌워 놓고 숨겨 놓아도 양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말이다.
“저는…….”
마침내 제트의 수묵화 같은 시선 속에 결심이 스치고 그의 입이 떨어졌다.
“신전 관계자였습니다.”
샤를리즈는 이 말이 많은 것을 함축하는 동시에 마지막까지 구체적인 사실은 당장 밝히고 싶지 않는 제트의 소망을 읽었다.
이해했다. 샤를리즈 또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밝히지 않을, 아니. 밝힐 수 없는 비밀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신전의 적을 모두 버리고 당신을 따르기로 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다음에 이어진 말이 샤를리즈를 놀라게 만들었다.
멀쩡하던 신관직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온 거라고?
제트의 실력을 보자면 신전에서도 고위 기사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걸 버리고 평기사로 그것도 호위 중에서도 공녀의 패악을 견뎌야 하는 자리라니.
“……자의로? 강제로?”
이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그리고 샤를리즈는 제트의 희미한 미소를 목격했다.
“굳이 나누자면 자의 반, 타의 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샤를리즈는 확신했다.
이 사람, 억지로 끌려온 거네.
‘샤를리즈’의 미모에 반해 껄떡대는 남자들과는 궤를 달리 했으니, 추종자가 되어 기사로 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샤를리즈는 제트의 눈에서 단 한 번도 끈적이는 것을 본 적 없었다.
막 빙의했을 때는 오히려 의무적인 친절과 충정에 오히려 ‘얘가 날 동정하나?’ 싶었다.
동정한다면 왜 굳이 자신에게 못되게 굴었을 주인을 동정하는 걸까 싶어 이상한 인간인가 싶은 마음에 거북함을 가졌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섬기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샤를리즈가 유일하게 믿고 일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제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알츠베이트를 무너트리는 일일지라도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리고 역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굳이 말하자면 샤를리즈에게 있어서 제트는 다정하거나 친절하지는 않아도 믿을 수 있는, 그래 그녀의 세상에서 조력자이자 ‘조연’이었다. 무대의 메인은 될 수 없는.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한마디는 제트 자신을 메인 인물로 만들었다.
아니, 그렇게 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공녀님께선 기억이 없으신 거군요.”
샤를리즈는 살짝 입을 벌렸다.
가까스로 표정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이 그녀의 최선의 노력이었다.
그 누구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매일 같이 보던 알츠베이트 공작도, 심지어 가족이라던 폭군 오빠조차도.
“저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하시기에, 그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샤를리즈의 얼굴에 예리하게 서는 경계를 보며 제트는 대항하지도 변명하지도 않은 채 얌전히 고개를 숙이는 쪽을 택했다.
자신의 가장 약한 부위를 보여 주며, 자신의 안전을 증명하는 거대한 동물처럼.
“어디에도 노출할 생각은 없습니다.”
“…….”
“믿어 주십시오.”
‘샤를리즈’가 한낱 호위 기사를 어떻게 만났느냐, 첫만남이 어찌 되었느냐 하는 것쯤은 충분히 잊을 수 있다. 그녀에겐 중요한 것들이 더욱 많았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얘기하는 지금, 샤를리즈는 제트와의 첫 만남이 결코 쉬이 잊을 수 없는 종류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자의로? 강제로?”
자신이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것도.
확신을 심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기억이면 어째서 이 몸에 남아 있지 않은 거냐 원망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 몸에게 모든 기억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니.
군데군데 구멍 난 기억을 어떻게든 짜맞춰 ‘샤를리즈’ 행세를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 노력이 훌륭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건만…….
샤를리즈는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왜, 죽지 않지?’
순간 심장이 덜컹했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 신은 분명…….
‘이 몸에 든 것이 가짜 영혼이라는 것을 들키면’ 또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