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이 정도로는 가짜임을 들킨 게 아니라고 보는 건가?’
샤를리즈는 목에 이어서 가슴도 쓸어내렸다.
심장에 고통도 없는 걸로 봐서는 자신의 생각이 맞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샤를리즈의 눈이 제트를 향했다.
이 남자가 의심조차 안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진짜 샤를리즈이되, 기억만 잃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
하기야, 그 누구가 몸의 영혼이 바뀌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샤를리즈 자신조차도 주변에 이런 일이 있다고 한들, 쟤가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고 생각하지.
쟤 몸에 다른 영혼이 빙의했어! 하는 엉뚱한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샤를리즈는 그제야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긴장한 탓이었다.
다리마저 풀려 허물어지는 모습에 제트가 깜짝 놀라 샤를리즈를 붙잡았다.
“공녀님!”
“아아, 괜찮아. 괜찮아……. 좀 놀라서 그래.”
그러자 제트의 얼굴 위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혹시…… 제가 신전과 관계된 자라서 놀라신 겁니까?”
아니? 그럴 리가. 내가 놀란 건 다른 쪽인데.
샤를리즈의 표정이 워낙 노골적이었던 터라, 제트는 자신이 잘못 판단했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혹시 기억…….”
“그래, 그 기억.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야? 하고 묻기엔 내가 너무 힌트를 줬구나.”
“…….”
샤를리즈는 제트의 가슴을 밀어내며 균형을 잡았다.
그래, 이미 들켜 버린 것 어떡하겠나. 그렇다고 한들 제트가 어디 가서 말할 것 같지도 않고.
자신이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샤를리즈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오히려 굳이 따지자면 과거의 ‘샤를리즈’와 자신을 구분해서 보고 있다는 얘기 아니던가?
“난 네가 신전에서 온 사람이든 황성에서 온 사람이든. 하다 못해 다른 왕국에서 온 스파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놀라지도 않았을걸.”
“…….”
“내게 중요한 건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야.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샤를리즈와 제트의 눈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샤를리즈는 이 묵직한 암녹색 눈이 찰나 흔들렸다고 느꼈다.
“저와의 첫만남을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제 본명 또한 기억하지 못하시겠군요.”
제트가 머뭇거렸다. 그의 얼굴 위로 여러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샤를리즈는 이번엔 후련함이 큰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저와 공녀님 사이에 오간 거래 또한 기억하지 못하실 테고.”
“내가 알아야 하니?”
“아뇨, 아닙니다. 이제는 제게 의미 없는 거래이기에…… 공녀님께서도 더는 기억하지 못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트의 얼굴로 순간 미소가 스쳤다.
은은하되 놀라울 정도로 다정한 미소였다.
“그 거래, 아니. 내기에서 제가 졌기 때문입니다.”
제트는 조금 멀게 느껴지는 과거를 떠올렸다.
그가 신전에 적을 뒀을 때에 어느 날 그를 찾아온 여자가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되 때로 그 고귀함을 제 스스로 땅바닥에 처박아 버리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 여자.
“안녕, 신전 이쁜아?”
그 악명 높은 알츠베이트 샤를리즈 공녀가 자신을 찾아왔던 것이다.
“네가 신전에서 그리도 잘났다고 하던데. 과연 나쁘지 않은 낯짝이네? 너 나랑 재밌는 놀이 하자. 심심하던 터에 네가 마음에 들어.”
제국의 독이 든 사과, 흑장미라는 이명이 무색하지 않게 그녀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무례한 말을 퍼부었다.
당시 고결하고 우직한 성기사였던 그가 화를 낼 정도로 무례한 조롱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제트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쫓아내려 했을 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제의했다.
“나 같은 여자를 평생 좋아할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럼 너, 내기할래?”
제트가 그 제의를 받아들인 까닭은 @마침 그가 신전에서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던 참이었고.
뒤이어 자금이 떨어졌던 신전이 어쩔 수 없이 그를 팔아치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와 샤를리즈의 내기는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로.
제트는 본래 이름과 적을 잃고 알츠베이트 공녀의 이름 모를 기사로 전락했다.
“네가 나한테 진정으로 반하면 지는 거야. 어때 쉽지.”
“네가 지면 넌 내 말이면 뭐든지 따르는 인형이 되는 거야.”
제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트는 그 내기에서, 거래에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평생을 가도 이런 악독한 여자를 좋아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넌, 내기에 지면 뭐든 들어줘야 해. 나를 죽이란 말조차도 말이야.”
그 생각이 달라진 것은, 여행을 다녀온 샤를리즈를 마주했을 때였다.
제트는 자신을 향해 다정하게 휘는 눈동자를,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보면서 느꼈다.
어쩌면 절대 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 내기의 결과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고.
그의 예감은 결국엔 현실이 되고 말았다.
“……무슨 내기인진 몰라도 네 얼굴을 보니 과거의 내가 제대로 헛소리를 했단 것만은 알겠네.”
“아닙니다.”
제트가 작게 웃었다.
“돌이켜보니 제게는…… 의미 있는 내기였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트는 신전에 있을 때보다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음을 느꼈기에 신전에서 알츠베이트로 팔려 온 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지금의 공녀님을 만나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그 말에 샤를리즈의 표정이 묘해졌다.
“지금의 나 말이지…….”
샤를리즈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그 내기 내용이 뭔지 물어봐도 되니?”
말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지만, 제트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 자신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게 내기 내용을 말하게 되면…… 자신이 왜 이 내기에서 지게 되었는지도 자연히 밝혀지게 된다.
그렇다는 건…….
제트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말씀드리게 되면, 공녀님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듣고 싶으십니까?”
“어. 말해.”
“대신, 제가 어떤 말을 드리더라도 공녀님께서 잊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히 약조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샤를리즈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제트의 시선에 못이겨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제트는 자신의 마음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다.
“저는 공녀님을 은애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할 기회가 온 것에 그저 감사하기로 했다.
“……뭐?”
“거래의 조건은 이것이었습니다. 공녀님께서 제가 진정으로 공녀님을 사랑하게 되는 날, 제가 패배하는 것으로 공녀님께 뭐든지 들어주는 조건을 내거셨습니다.”
“…….”
“저는 공녀님께 진정으로 반하는 이는 없을 거라고 속으로 호언장담했지만, 패배한 것은 제 쪽이었습니다.”
제트가 눈을 살짝 내렸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공녀님을 본 순간.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요.”
샤를리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 스쳤다.
이내 샤를리즈는 얼굴을 부여잡고 하하,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커지는 동안 제트는 말없이 잠자코 기다렸다.
“그 이야기, 조금만 더 빨리 들었다면…… 외롭지 않았을 뻔했어. 아니, 아니야.”
샤를리즈가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 제트. 하지만 네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없어.”
샤를리즈 답지 않은 조용하고도 미안함이 스친 얼굴, 그리고 목소리.
그녀는 알까? 제트는 정말 진심으로, 이 정도면 충분했다.
“잊으셨습니까, 어떤 말씀을 드리더라도 잊어 주셨으면 한다는 이야기.”
“…….”
“공녀님께서는 제 간청을 들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샤를리즈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작게 웃었다.
제트는 이 미소가 자신으로서는 처음 보는 미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참 인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봐.”
샤를리즈는 실연당한 그를 위로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인간적인 호감이 섞인 눈동자가 살짝 그림자 진 이 방에서 홀로 반짝거렸다.
제트는 이 눈동자가 참으로 생기 넘친다고 생각했다.
“넌 좋은 사람이야. 아마도 내가 여기 있는 한 믿을 수 있는 사람이겠지? 내 편, 말이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샤를리즈가 손을 뻗었고, 제트는 머뭇거리며 그 손을 잡았다.
악수였다. 주종 관계에서는 할 수 없는 행위.
어째서일까, 제트는 오늘 그녀에게 진정으로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진짜 이름은 뭐야?”
샤를리즈의 목소리 뒤로 과거의 ‘샤를리즈’가 내기를 제안했을 때의 목소리가 겹치는 듯했다.
“네가 지면 넌 꼭 들어주는 거야. 설사 나를 죽이라는 명령이라도 말이야.”
그건, 흡사 자신을 죽여 달라는 명을 내릴 것처럼 들렸다.
어째서 과거의 ‘샤를리즈’는 그런 말을 했을까.
눈앞의 샤를리즈는 기억을 잃은 것처럼 보이니, 그 이유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진짜 이름은 잊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공녀님께서 내려 주신 이 이름만을 제 이름으로 여기고 살고 싶습니다.”
제트의 말에 샤를리즈는 조금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감이지만 ‘샤를리즈’가 이름을 이렇게 지은 거라면…….
‘결코 좋은 의미로 이렇게 지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제트라니, 알파벳 끄트머리의 자의 이름.
그 ‘샤를리즈’라면 분명 막 지었거나, 자신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할 신분이란 의미에서 줬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음, 그래. 네가 원한다면 더 묻지 않고, 말리지도 않겠지만. 그래, 의미는 오늘 새로 만들어 보자.”
샤를리즈는 악수한 손을 작게 흔들며 말했다.
“내가 일을 저지르면 네가 마무리해 준다는 의미에서. 마무리, 해결을 의미하는 제트인 걸로 하자.”
“…….”
제트가 웃음지었다.
“예, 공녀님.”
그는 오늘 실연을 당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절망도 실망도 아닌 새로운 행복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