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 * *
“아흐, 온몸이 쑤시네 쑤셔.”
샤를리즈는 자신의 계획을 총망라한 양피지를 접으며 기지개를 켰다.
창밖을 둘러보자,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어 있었다.
앓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온몸은 한없이 무거웠고 입맛도 없었다.
“제트, 이거 태워 줘.”
“예, 공녀님.”
“그리고 이건 가지고 있다가…… 내가 말하는 사람에게 건네줘.”
알츠베이트 공작이라고 해서 적이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폭군 록시디언이 거의 천적에 가까웠고, 대부분의 귀족파 귀족을 장악했다고는 하나, 알츠베이트 공작을 대놓고 싫어하거나 그에게 증오를 품든 앙심을 품든 적의를 가진 이들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샤를리즈는 이들을 조사해 그들에게 각기 보낼 것을 준비했다.
일종의 익명의 투서랄까.
분명 의심부터 하겠지만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내용일 거다.
샤를리즈는 봉투들을 쭉 보다가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웨어우드 프레보스트.’
프레보스트 후작이었다.
아스킨의 스승이라 불리던 사람 말이다.
자연스럽게 아스킨을 떠올린 샤를리즈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뺨을 미미하게 물들인 채로.
* * *
‘벌써 밤인가.’
하루종일 샤를리즈의 생각에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던 아스킨은 정신을 차려보자 거대한 저택 앞에 있는 자신을 느끼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현재 알츠베이트 공작가 저택 앞에 서 있었다.
샤를리즈, 그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바로 샤를리즈가 자신의 성을 떠날 때 끝내 하지 못했던 대답.
샤를리즈가 말을 하지 못하게 했지만, 끝끝내 건네지 못해서 미련이 남았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음에도 듣고 싶으냐는 그 질문에, 망설여서 대답을 늦게 한 것이 아니라는 말 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아니, 사실 이 모든 건 핑계였다.
샤를리즈가 보고 싶었다.
‘아리아에게 뭐든 간에 늘 처음이 무서운 법이라고 가르쳤었는데…….’
정작 자신이 첫사랑에 빠져 마치 풋정에 어쩔 줄 몰라 잠 못드는 소년처럼 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첫 키스. 첫정은 아스킨의 모든 것을 앗아갈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커지고 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커지고 있었다.
문제는, 샤를리즈 같은 사람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처음이라고? 정말? 진짜?”
첫 입맞춤이라기엔 조금 격렬한 키스였다.
흐트러진 옷, 마찬가지로 흐트러진 머리, 흐려진 시야 속에서 놀란 샤를리즈의 표정이 선연했다.
그녀의 이상형은 좀 더 어른스럽고 능숙한 사람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능글맞은 얼굴 하나가 떠올라 아스킨은 제 얼굴을 붙잡고 말았다.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스킨은 평생 동안 제 외모를 두고 고민한 적이 없었다.
아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양친이 살아 있을 적에는 제국의 제일가는 미소년으로 이름이 유명했다.
양친을 잃고 홀로 어린 가주가 되어 가문을 이끌 즈음에도 그는 불운하지만 눈같이 차갑고도 서늘한 미청년으로 이름이 자자했다.
아리아의 약값으로 가문이 기울어 갈 때조차도, 철없는 귀족 영애들의 구애가 끊이지 않았고, 대가 없이 지원을 해 주는 조건의 혼인도 줄줄이 이어졌다.
게다가 그 ‘샤를리즈’마저도 아스킨의 외양을 보고서 첫눈에 반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스킨은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지금의 샤를리즈는 제 외모에 그리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정말 관심이 있었다면 그리 매몰차게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떡해야 하지?’
지금이라도 가꿔야 하는 것인가.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지만, 이는 아스킨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고의 흐름이었다.
“오빠 지금은 얼굴 막 쓰지? 두고 봐, 아무리 오빠라도 관리하지 않으면 후회하는 날이 올걸!”
아리아의 생일날, 황제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황성 연회에 참석하게 되면서 아리아가 서운함에 토로한 말이었다.
아리아가 권하는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왜인지 지금 떠오르고 말았다.
그렇게 무작정 찾아온 것은 좋았지만, 아스킨은 들어서지 못한 채 한참을 서성거렸다.
혹시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고 샤를리즈에게 미움을 살까 무서웠다.
고백을 했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입을 맞췄지만 상대는 처음이라는 것에 놀란 것 같았다.
또다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면 이제 샤를리즈의 가짜 연인 행세마저도 못하는 건 아닐까.
‘하아…….’
결국 아스킨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얼굴을 감싸 쥘 때였다.
아스킨은 마차 바퀴 소리를 들었다.
마차?
그것은 여기서 더 소리가 날까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새카만 마차를 발견한 아스킨은 고민을 싹 지워낸 채 눈을 가늘게 좁히곤 빠르게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마차가 지나치게 은밀했다.
게다가 평범하기 그지 없는 마차, 보통 특별한 이들이 그 어떤 정체도 드러내지 않을 때 쓰이는 마차이기도 했다.
‘설마 또 암살자인가?’
아니, 아이다. 아스킨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암살자가 마차를 타고 올 리는 없었다.
이토록 캄캄한 밤이었음에도 아스킨의 눈은 마차를 또렷한 시야로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은밀하게 등장한 마차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공작가로 들어갔다.
아스킨은 지울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망설이던 것이 무색하게 기척을 지운 채로 담을 넘어 공작가 내부로 들어갔다.
들켰을 때의 생각은 지금 당장 할 수 없었다.
이미 한 차례 암살자를 만났던 샤를리즈의 모습만 떠올릴 뿐이었다.
‘마차는…… 저쪽이군.’
아스킨은 조용히 마차를 쫓은 결과 꽤 가까운 곳까지 몸을 숨기고 살펴볼 수 있었다.
마차는 아무런 제지 없이 저택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마침내 멈춰선 마차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렸다.
아스킨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저 여자는…….’
놀랍게도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다름아닌 플로리아였다.
그녀는 걸릴 것 하나 없다는 듯 거침없는 걸음으로 알츠베이트 저택 문으로 들어섰다.
아스킨은 건물 안쪽으로 쫓아가는 대신 그대로 나무를 올랐다.
곧 창문 너머로 플로리아가 들어가는 방을 똑똑히 보았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집무실.’
자신 또한 아는 공간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대체 저 여인이 왜?’
저 여인은 차일드 가문과 긴밀한 관계로 보였다.
그리고 이번 토벌로 인해 차일드 가문과 알츠베이트 사이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재앙이 되었다.
우연히 토벌 지역 근처에 나타난 것으로 모자라 야심한 시각에 제국 최대 가문에 조용히 방문하는 여인의 모습.
많은 의구심이 들었지만 더 이상은 접근을 할 수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 들어온 것조차 아스킨이라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불청객인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날이 밝는 대로 샤를리즈를 만나야겠군.’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가려던 아스킨의 발은 자연스럽게 어디론가 향했다.
아스킨은 그렇게 샤를리즈가 머무는 건물 근처까지 다가갔다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레무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풀숲에서 조용히 나타나 예를 갖추는 사람만 아니었다면 그리했을 터였다.
아스킨은 이미 기척을 알아차린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예를 올리는 제트가 서 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다가오는 기척을 알아차렸다 한들, 기척을 알고 있던 것과 실제로 마주하게 된 당혹감은 다른 이야기였다.
아스킨의 미려한 얼굴로 당황이 스쳤다.
“공녀님께서는 막 잠이 드셨습니다.”
“……그런가.”
제트와 마주치는 것은 예상에 두지 않았던 아스킨으로서는 한숨과도 같이 답변했다.
혹시나 이런 상황을 대비해 더는 건물 근처로 다가가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이렇게 되고 말았다.
호위인 제트의 눈에 띄었다는 것은 곧 샤를리즈의 귀에도 이 일이 들어갈 거란 소리였으니.
아스킨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지난번엔 미안했군. 사과하지. 이만 돌아가려는 길이니, 비켜 주겠나?”
제트는 비켜서는 대신 아스킨을 응시하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아스킨의 제의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공작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스킨은 이를 무시한 채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대신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멈춰 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질문을 받지.”
“아마도 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어찌 이렇게 자신하는 걸까?
눈앞의 제트는 미묘하게도 체념한 듯 자신감이 어린 묘한 모습이었다.
“저는 공녀님을 근처에서 모시며 꽤 지켜봐 온 바, 공작님의 모습 또한 자연스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랬다. 존재감이 흐릿하긴 했으나 언제부터인가 샤를리즈 근처에 있던 저 기사의 모습을 기억하기란 어렵진 않았다.
샤를리즈를 미워하고 증오하던 시절, 증오했기에 그녀의 주변마저도 함께 미워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공녀님을 향한 태도가 이토록 급작스럽게 바뀌시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