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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68화 (169/194)

168화

“급작스럽다.”

아스킨은 작게 중얼거렸다.

남들의 눈에는 이렇게 보이는가.

적어도 아스킨 자신만은 수없이 많은 고뇌를 거쳤던 일인데 말이다.

아스킨이 피식 차게 웃었다.

냉소였다.

“대답을 듣고자 하는 이유는?”

“제가 모시는 주인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스킨이 팔짱을 끼고는 작게 날숨을 내쉬었다.

“넌 내 질문에 진실로 응답한 적이 없는데, 내게는 진실을 요구하는 건가?”

“…….”

“하지만 네 도움을 받은 바 있으니, 아주 모른 척할 생각은 없다.”

아스킨의 예상치 못한 답변에 제트는 당혹 어린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빠져드는데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면 나는 좀 더 쉽게 방법을 찾았을 지도 모르지.”

오랫동안 이 감정을 모른 척했고, 거부했고, 의문도 가졌다.

그러나 결국에 답은 하나였다. 자신은 샤를리즈에게 반하고 말았다.

과거와는 달라진 그녀에게.

아니, 지금의 그녀라서 반하고 사랑하고야 만 것이다.

“……권력 때문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그대 눈엔 그렇게 비쳤나? 만약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난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니,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겠군. 이만 돌아가겠다.”

아스킨은 미련없이 등을 보였다.

제트는 검사와 검사로 만난 이 시점에서 먼저 등을 보인다는 건 도리어 상대를 향한 신뢰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저는 공녀님을 은애하지만, 평생 이룰 수도, 이루어질 거라 꿈조차 꿀 수 없는 마음이란 걸 잘 압니다.”

“…….”

아스킨이 돌아섰다.

“……그래서?”

“감히 저를 좋아해 달라 말조차 건넬 수 없는 분이지만, 옆에서 진심을 다해 보아 왔기에 보이는 것도 있더군요.”

아스킨이라고 제트에 대해 알아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샤를리즈 옆에 있는 전직 고위 성기사로 보이는 자. 어느 것 하나 수상하지 않은 것이 없는 수식어.

그렇게 알아봤을 때 아스킨은 어렵사리 저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전직 성기사 단장.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남자가 모든 것을 버린 채 저 자리에 있었다.

성기사 단장들은 으레 항시 투구를 쓰고 있으니, 저 얼굴을 아는 자가 드문 것도 당연했다.

그저 미남이라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아스킨 또한 과거 ‘샤를리즈’와 성기사 단장 사이에 있던 소문 정도는 들어 본 적 있었다.

그 악녀가 이제는 성기사 단장까지 노린다는 소문을.

“공녀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조차도 말입니다.”

“…….”

아스킨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사이 제트가 짤막하고도 나직하게 말을 맺었다.

“저는 공작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부디 공녀님께 진심으로 대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제트는 아스킨에게 깍듯한 예를 올렸다.

“카…….”

“저는 그 이름을 잊었습니다, 공작님.”

“…….”

“앞으로도 잊고 살 생각입니다.”

마치 저의 소중한 마음을 알아 달라는 듯한 모습에 아스킨은 돌아서는 제트를 향해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제트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때, 아스킨은 자신이 너무나 주책맞다고 생각해 버렸다.

“공녀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조차도 말입니다.”

이 말이 향하는 방향이 기쁘고, 애틋하고 행복하여서.

아스킨은 몇 번이나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의 새하얀 귀는 어느새 주체할 수 없이 붉어진 채였다.

그는 얼굴을 꾹 눌렀다.

이렇게라도 진정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샤를리즈에게 달려갈 것 같아서였다.

안 돼, 안 될 말이다. 어떻게 얻은 마음인데, 그녀가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다.

‘진정해…….’

그러나 바람과는 다르게 심장은 풍랑이라도 맞이한 듯 거세게 뛰었다.

하기야 거대한 소식이 자신을 치고 간 뒤 아닌가. 이건 사고라고 봐도 좋았다.

그에겐 행복한 사고.

더는 여기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아스킨은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이나 샤를리즈가 있는 건물을 바라보다가 저택 바깥으로 발길을 돌렸다.

말을 저택에서 떨어진 곳에 매어 두었기에 꽤 걸어야 했다.

그가 왔던 길을 돌아가 마침내 저택 벽을 막 넘어섰을 때였다.

그는 자신이 내려선 길 앞에 눈에 익은 마차가 가로막고 서 있었다.

마차를 확인하기 전부터 빠르게 알아차렸지만, 그는 피하거나 몸을 숨기는 대신 그대로 대치하는 쪽을 택했다.

마차에 나 있는 창문에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아스킨은 이 기척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가 다가가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여인이 내렸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낭랑한 목소리. 플로리아의 것이었다.

플로리아는 아스킨을 마주했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좋은 밤이죠.”

오히려 막 포로로서 발견했을 때 연약하고 겁에 질려 있던 모습이 어디 갔냐는 듯 매우 태연하고도 유연한 대처였다.

“이상하네요. 저를 미행하신 건가요?”

“내가 왜 널 미행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에도 플로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이 야심한 밤, 우연히 만난 장소 치고는 평범하지 않은 장소니까요.”

자신 또한 알츠베이트에서 나온 스스로의 모습이 수상쩍다는 걸 인정하는 말이었다.

보통 자신의 잘못을 순순이 인정하는 범죄자들은 다음 순간 증인을 제거하는 쪽을 택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스킨은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존재란 것이 다를 뿐.

“길을 가다 마주친 것뿐이다.”

아스킨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고는 저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사라지려는 모습에 플로리아가 걸음을 움직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듣기로 황제 폐하를 향한 충정이 대단하신 분이시라고요. 어찌나 유명하신지 제가 있던 왕국에까지 소문이 자자하셨지요.”

“마치 나를 오래 알았던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어찌 모르겠어요?”

플로리아가 살풋 웃었다.

이슬을 머금은 백합처럼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공작님도, 황제 폐하께서도 그리고 알츠베이트 공녀님도……. 모두 왕국에서 너무나 유명하신 인물이신 것을요.”

그러나 플로리아의 목소리를 듣노라면 단순히 소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이면에 더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아스킨의 눈이 차가워질수록 플로리아는 이를 안다는 듯 더욱 깊게 휘어졌다.

“그래서 아주 충성스러운 공작님, 폐하께는 오늘 일을 일러바치실 건가요?”

“폐하의 귀에 들렸을 때 두려울 만한 행동을 했다고 자백하는 건가?”

“가장 강력한 원군과 손을 잡으려면 솔직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아스킨은 나지막하게 대꾸하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말없이 플로리아를 지키던 의문의 기사들이 한 발 앞으로 디뎠다. 아스킨의 손이 향하는 곳에 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공작님께서는 샤를리즈 공녀님을 사랑하시죠?”

조용히 흘러나온 플로리아의 말은 적어도 이 순간에 나올 거라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아스킨은 예상치 못한 그 말에 살짝 찡그렸다.

긍정도 부정도 돌아오지 않았건만 플로리아는 여전히 눈을 휜 채였다.

“애석하게도 제가 이런 것을 정말 잘 보거든요. 그렇다면 공작님은 샤를리즈 공녀님을 손에 넣고 싶으신 건가요?”

플로리아의 목소리가 ‘샤를리즈’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 어쩐지 더욱 부드럽게 풀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황제 때문에 샤를리즈 공녀님과 멀어지지 않았나요? 아니, 적어도 앞으로 그럴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걱정되진 않으신가요?”

“…….”

“저와 함께한다면 샤를리즈 공녀님을 얻으실 수 있을 걸요.”

아스킨은 대답 대신 검을 뽑았다.

플로리아가 눈을 깜빡였을 때, 어느새 은빛 사선같이 다가온 검이 목 앞에 멈춰 있었다.

“그녀를 물건 취급하지 마라.”

플로리아의 가늘고 새하얀 목으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플로리아는 당황해 허둥지둥 움직이는 호위 기사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들을 진정시키는 플로리아의 모습에서 당황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참지 않고 검을 뻗은 아스킨의 반응이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 아름다운 낯에 여유로운 미소까지 띠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드릴까요?”

“…….”

“저는 당신들을 꿈에서 본 적 있답니다. 어디 한 번뿐일까요, 매번, 아주 매번 보아 왔지요, 무려 십 년이나 넘는 꿈에 같은 인물이 등장했다고 하면 믿으시려나?”

“그 입에서 허튼 수작이 흘러나온 순간 망설임 없이 베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공작님과 제가 한편이었단 사실이, 새삼 믿기지가 않네요.”

“뭐?”

“아, 꿈 이야기예요. 꿈.”

플로리아가 싱긋 웃는 그대로 말했다.

“꿈속에서는 저와 당신이 같은 목적으로 한편이 된 채, 하나의 적을 물리쳤답니다. 그 적은 외롭고도 고고하게, 한편으로는 처절하게 죽었지요. 당신도 아는 사람이랍니다.”

플로리아의 뺨이 아주 잠시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그녀의 두 눈으로는 잠시 샤를리즈를 마주했을 때처럼 동경이 차올랐다가 사라졌다.

“샤를리즈 공녀님,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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