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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69화 (170/194)

169화

플로리아는 목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챙강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그녀의 호위 하나가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 모든 일을 해치운 사람은 정작 고요하기만 했다.

“…….”

플로리아는 비로소 얼굴에 잠시 긴장을 내보였다가 지워냈다.

“아직 사랑에 깊이 빠지신 건 아닌가 봐요. 정녕 사랑에 빠지셨다면 여기 쓰러진 것은 제 호위가 아니라 저였을 텐데. 아니면, 제가 한 말에 혹하셨나요? 샤를리즈 공녀님을 완전히 갖고 싶어져서? 욕망으로 빛나는 사람은 언제나 매력적인 법이라, 저는 그런 분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플로리아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목의 피를 닦아냈다.

“제 꿈에서 당신과 제가 손을 잡았던 이유는 아, 맞아요. 사랑스러운 레무트 공녀님이 샤를리즈 공녀님으로 인해 죽었기 때문이었죠……. 인간의 감정이란 참으로 오묘하지 않나요? 이 순간 샤를리즈 공녀님이 당신의 여동생을 해친다면, 그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까맣게 변해 버리겠죠.”

“…….”

“재밌지 않나요? 저는 그 이야기의 끝이 참으로 궁금했는데.”

이어지는 말들은 아스킨으로 하여금 이 여자가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믿게 만들었다.

“허황된 꿈인 줄로만 알았던 꿈속 사람들이 그대로 움직이고 있더라구요. 바로 옆 제국에서.”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뱉어내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이 순간 바로 이 여인을 없애지 않은 이유는, 샤를리즈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 그녀의 계획에 자신이 훼방 놓는 일은 없게끔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아스킨은 검을 움직였다.

이번엔 더는 플로리아 본인을 노리지 않았다.

남은 호위의 목을 겨눈 아스킨이 이보다 더 차가울 수는 없게 서린 말투로 짓씹듯 뱉었다.

“널 구해 준 걸 후회하게 만들지 마라. 그 입에서 한마디만 더 흘러나온다면 그땐 검을 대신 받아 줄 기사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스킨은 플로리아를 남겨 둔 채 그대로 지나쳐 제 말이 있는 곳으로 가 버렸다.

잠시 뒤 아주 먼 곳에서 말 울음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꼼짝없이 자리에 서 있던 플로리아가 마침내 울음소리가 들렸던 곳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시선에서는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자욱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청초한 얼굴과는 대비되는 시선 속에서 검은 불꽃 같은 증오가 일렁거렸다.

“그 사람 옆에는…….”

플로리아가 입술을 꽉 깨물며 채 잇지 못했던 말을 완성했다.

내가 있고 싶었는데.

마지막 순간 자신을 벌레처럼 보던 아스킨의 눈빛은 플로리아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플로리아의 머릿속으로는 그를 저주하는 말들만 떠올랐다.

“저어, 플로리아 님…….”

남아 있던 호위 하나가 우물쭈물하며 플로리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플로리아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그 어디에도 독기 어린 시선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돌아갑니다.”

플로리아의 시선이 아주 잠시 알츠베이트 공작저를 눈에 담았다.

아주 오랜 시간 꼭 한 번 옆에서 보고 싶었던 이가 지척에 있건만,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우스워 플로리아는 작게 웃고 말았다.

곧 그 시선엔 증오가 어렸지만.

* * *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제트는 이 모든 광경을 제 머릿속에 담아 둔 뒤,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거처로 향하는 그의 마음속엔 바위 같은 결심이 들어섰다.

* * *

이른 아침.

레무트 공작가엔 수많은 병력이 집결하였다.

특이점이 있다면 이 모든 병력이 레무트 공작가의 기사와 병사가 아니란 점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벤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레무트의 기사가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심기를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의 앞마당에 집결한 세력이 무려 황실의 깃발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례 없는 병력의 집결에 하녀 몇과 시종들이 집무실 앞으로 달려갔다.

이미 소식을 전달받은 아스킨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나와 사람들을 안정시키고는 병력이 집결된 곳으로 걸어갔다.

‘황실 깃발.’

가짜일 가능성은 없다. 저걸 사칭했다가는 자칫 반역죄마저 뒤집어쓸 테니.

게다가 현 황제인 록시디언의 영향력이 큰 상황에서 감히 간 크게 저 깃발을 사칭할 세력은 알츠베이트 말고는 없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서 있는 자가 황실 기사단장인 이상 알츠베이트일 가능성은 영(0)에 수렴했다.

아스킨은 관찰을 멈추고 기사단장에게 말을 건넸다.

“황실 기사단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지?”

“레무트 공작께서는 황제 폐하의 명에 따르십시오.”

아스킨은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기사단장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무슨 명인지 먼저 고하는 것이 그대의 역할일 텐데.”

“…….”

“나, 아스킨 레무트와 내가 이끄는 공작가가 이 정도 무례한 취급을 받기엔 이 제국에 헌신한 바가 결코 녹록지 않을 터.”

“…….”

“말할 기회를 다시 주지.”

아스킨의 압박에 잠시 긴장했던 황실 기사단장은 이내 입술을 꽉 깨물더니, 진땀 어린 표정이되 적의 어리고 사나운 얼굴로 아스킨을 향했다.

“이 시간부로, 레무트 공작을 역모죄로 구속하겠습니다!”

아스킨은 잠시 멈칫했다.

기사 단장의 입에서 나오는 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스킨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황당함을 느끼는 사이 황실 기사단장은 제 뒤에 있던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뭣들 하느냐! 얼른 죄인을 포박하지 않고!”

그러나 아스킨의 부관 벤은 자신의 주인을 포박하려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그 또한 아스킨의 뒤를 따라 수많은 전쟁과 토벌을 다녀온 용맹한 기사기도 했다.

아울러 레무트 공작을 따르는 모든 기사라면 가슴 깊이 아스킨을 존경하는 바.

벤이 나서자 나머지 레무트 가문 기사들도 그냥 있지 않았다.

“젠장, 어찌 다른 분도 아니고 우리 공작님께 역모란 무시무시한 소릴 한단 말이오! 신이 이 자리에 계신다 한들 헛웃음을 치겠군!”

벤이 아스킨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건 모함입니다, 공작님. 이대로 순순히 가셔서는 안 됩니다.”

아스킨 또한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 중이었다.

본디 역모죄란 그 죄가 제국 법도에서 가장 무거운 죄다.

그렇기에 이렇게 몰려와 데려간다는 건 정말 빼도 박도 못할 실증적, 물질적 증거가 있을 때에야 가능한 법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역풍은 모두 명령한 황제가 받게 될 테니까 말이다.

지금처럼 황권이 강력한 때에도 부담이 존재하는 선택이었다.

“상황이 너무 이상합니다. 증거 하나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우루루 몰려와 데려가려 한다니요? 오히려 목적이 공작님을 포박해 데려가는 것 하나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벤이 다급하게 말했다.

“공작님, 일단 자리를 피하신 후에…….”

벤이 칼을 빼어들자, 뒤로 따르던 레무트 가문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사분열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황실 군대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잠시 당황했지만 대응하는 속도가 황실 직속군답게 훈련이 아주 잘된 모습이었다.

아스킨은 잠시 고민 끝에, 이 충돌이 결코 생산적인 결과를 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벤의 칼날을 맨손으로 살짝 잡았다.

“공작님?”

“…….”

아스킨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당황이 가득했던 황실 기사단장이 얼른 표정을 정비하며 외쳤다.

이 제국에서 가장 전투에 이골이 난 기사단과 병력을 꼽으라면 단연 저들, 레무트 공작의 기사단과 사병들이었다.

황실 직속군이 빠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반평생을 전쟁과 토벌에서 살아온 전문가들과는 다름을 잠깐의 기세에서도 뼈저리게 느낀 그였다.

“공작님, 공작님께서 훌륭한 공적을 세우신 대륙 제일의 검사시라고는 하나 홀로 이 모든 기사를 상대할 순 없듯이 레무트의 현재 병력으로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병력을 상대하실 수 없을 겁니다.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두십시오.”

이는 허세에 가까웠다.

레무트 공작가의 병력은 아주 불리한 형태의 전투에도 익숙했고 그 경험에서 승리한 적은 무수히 많았다.

두려움이 엿보이지 않는 저 눈들이 증거였다.

“……순순히 황제 폐하의 명을 따르십시오.”

벤이 발끈하려 하자 아스킨은 그의 손을 잡고 그대로 검을 내렸다.

“난 떳떳하다. 그러니 항쟁할 생각도 없다.”

사실이야 어떠한들 아스킨은 이 제국의 충성스러운 기사였다.

무릇 기사란 위에서 어떠한 불합리한 명이 내려와도 때때로 생각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해야 했다.

아스킨은 자초지종을 알아보는 건 황실에 도착하여서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치 어미를 잃은 짐승처럼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는 수하들을 외면하는 것 또한 도리가 아니었기에.

“……알아보도록.”

“예, 공작님…….”

수하들이 반발하지 않도록 벤에게 명을 남겼다.

벤은 누가 봐도 수긍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주군의 명은 절대적이었다.

“순순히 따르실 거란 말씀이시겠지요?”

“황제 폐하께서 나를 뵙고자 하셨으니, 거기에 따르는 것이다.”

황실 기사들이 다가오다 말고 주춤했다.

아스킨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죄인으로서 가는 것이 아니다.”

“…….”

“이 정도의 이해력은 있겠지, 기사단장.”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이 눈짓하자, 각기 사슬과 밧줄을 손에 쥔 기사들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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