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저쪽에서 송환을 수락한 이상 이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게다가 아스킨은 물론 결사 항전을 불사할 레무트 기사들과 병사들의 기세를 느낀 지금은 더욱더.
그렇게 아스킨이 순순히 그들의 뒤를 따르려는 그때, 누군가 헐떡이는 숨소리를 내며 다급히 다가왔다.
“오빠!!”
가냘픈 비명에 아스킨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려 했건만, 역시나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최근 계속해서 몸이 좋지 않은 제 여동생에겐 심려 끼치고 싶지 않았으나 아리아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충격에 약한 아이인데…….’
아니나 다를까 돌아본 곳에 아리아는 이미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은 채 엉망이 된 표정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오빠, 오빠가 역모라니! 반역이라니!”
아리아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몹시도 처연하고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에 황실 기사단장마저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저 연약한 레무트 공녀가 충격에 쓰러지거나 병환이 깊어지기라도 한다면…….
단장이 숨을 꿀꺽 삼켰다.
“아리아,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황제 폐하를 직접 뵙고 오해를 풀 테니 걱정 말고 방에 돌아가.”
“아니, 무슨 오해? 대체 오빠의 어떤 행동이……, 어떤 행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건데? 어떻게 우리 오빠를 오해할 수 있어!”
오빠가 뭘 잘못해서!
예전의 아리아라면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연약하고 가냘프며 착한 아리아로 남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샤를리즈를 만나 더욱 넓은 세상을 알게 된 아리아에겐 욕심이 생겼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해지고 싶은 욕심.
제 오빠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제국에 결코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었다.
아프다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나이보다 눈치가 빠르고 지혜로웠다.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에서, 이 순간까지도 올곧음을 유지하는 쪽은 자신의 오빠였다.
“걱정 마. 금방 돌아올게.”
자신에게 헌신적인 오빠였지만 다정하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다정하게 웃으며 쓰다듬을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단 거다.
늘 어쩔 줄 모르며 조금 난감한 듯, 아빠와 엄마를 닮은 무뚝뚝한 얼굴로 조심스럽던 오빠가 지나치게 다정해진 것은…… 누군가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아스킨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그대로 황실 직속군을 따라 떠나 버렸다.
아리아는 망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아스킨이 사라지기 무섭게 풀썩 주저앉았다.
‘……정신,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야 되는데.’
오빠가 없으면 자신이 이 가문의 결정권자였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이렇게 선명하고 무겁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사실 부모나 다름없는 오빠가 눈앞에서 수많은 황실 군대에 포위되어 잡혀 가는데.
그 사람이 제국의 영웅이자 여태까지 이 제국에 어떤 공헌을 했던 사람임을 떠올리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오빠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아리아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니…….”
이 사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인물.
동아줄과 같은 사람. 그리고 자신에겐 늘 태양 같던 사람.
이내 파리한 낯 위로 굳은 표정이 떠올랐다.
가냘프되 단단하게 선 아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벤. 정신 차려.”
눈이 마주친 벤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늘 연약하기만 하여 자신들이 지켜야만 했던 자신들의 아가씨를 보았다.
“나, 나가야겠어. 어딜 가는지 벤이라면 알겠지?”
아리아의 뜻을 알아차린 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 또한 똑같은 인물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곧 아리아의 뜻을 알아차린 벤이 서둘러 마차를 준비했다.
“멀미를 해도 좋으니, 전속력으로 부탁해.”
“예, 알겠습니다. 꽉 잡아 주십시오.”
* * *
샤를리즈는 아침부터 계획을 실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제트가 새로 내민 자료를 검토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마침 외출한 알츠베이트 공작이 자신을 찾거나 성가시게 굴지 않으니 몸이야 바쁘지만 마음이야 매우 편안했다.
다만, 한편으로는 머릿속 한쪽이 원작 속 사건들과 모아 온 자료들. 즉 현실의 일과 비교하고 맞춰 보느라 바빴고, 책상 위는 널브러진 양피지로 가득했다.
“공녀님.”
“응.”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 벌써 점심때야? 간단하게 준비해 줘.”
미리 명을 해 둔 탓에 노크를 한 채 바깥에서 들어오지 않고 묻는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샤를리즈가 고개를 들었다.
샤를리즈는 기지개를 켜며 나른하게 하품했다.
‘곧 제트가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겠네.’
뻐근한 목을 풀겸 주무르거나 자연스럽게 목을 돌릴 때였다.
커다란 노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제트가 들어왔다.
그답지 않게 다급한 표정과 발걸음이었다.
“제트? 무슨 일이니. 왜 그리 급하게 문을 열어? 뭐…… 잘못되기라도 했어?”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레무트 공녀님께서 급히 공녀님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리아가?”
아리아가 찾아오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왜일까.
싸한 예감이 목 뒤에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리아의 방문에 ‘급함’이란 단어가 함께 나왔다는 건.
“빨리 들어오라고 해. 얼른.”
“예.”
이윽고 샤를리즈가 마주하게 된 것은 맑은 눈동자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퉁퉁 부어 버린 눈으로 자신의 품에 왈칵 안기는 아리아였다.
“언니……!”
도무지 평소와 같다고 할 수는 없는 아리아의 엉망인 몰골에 샤를리즈는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아리아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물었다.
아리아가 조금 더 익숙하게 느낄 다정하고 정중한 어투가 흘러나왔다.
“아리아, 대체 무슨 일이에요?”
“어, 언니. 언니. 큰일 났어요.”
“응, 괜찮아요. 무슨 일인지 천천히 말해 봐요. 모두 들어 줄게, 응?”
아리아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은 정작 샤를리즈 조차도 딱딱하게 굳게 만들 소식이었다.
“어, 언니…… 황실 군대가 역모죄로 오빠를 잡아가 버렸어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뭐? 아스킨이 역모죄요? 대체 왜?”
아리아는 서둘러 이야기를 시작했다.
울먹이고 패닉에 빠져 횡설수설한 부분은 있었으나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을 하려 한 탓에 샤를리즈는 아리아를 달래면서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며칠간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이 빠르게 지나쳐 갔다.
‘가정해 보자.’
차일드 가문과 플로리아는 긴밀한 관계이다.
만약 플로리아가 책 속에서처럼 록시디언에게 달콤한 감정을 품은 것이 아니라, 그저 ‘유혹’ 그 자체에만 목적을 둔 것이라면?
차일드 가문의 목적은 반역이다. 무려 황제를 치는 것.
자신들의 거사를 이루기 위해 가장 껄끄러운 존재가 될 게 뻔한 사람이 바로 전쟁엔 이골이 난 제국의 영웅이라면.
이를 위해 아스킨부터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평소라면 이런 상상이 지나친 비약이라고 자제했을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영 플로리아가 꺼림칙했다.
이유 모를 불길한 예감.
샤를리즈는 자신의 이 알 수 없는 촉을 믿어 보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믿지 않을 이유도 없다.
샤를리즈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미 내가 등장하면서 꼬여 버린 이야기가 한 번 더 꼬이지 말라는 법은 없지.’
상황을 정리해 본 뒤 샤를리즈는 아리아부터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아리아, 일단 내가 더 자세히 알아볼 테니 여기 물부터 좀 마셔. 응?”
“어, 언니. 도와주실 거죠?”
“당연하죠. 그러니 아무 걱정 말아. 정 급하거나 어려우면 내가 내 오라버니 앞에서 배 째라고 시위하든 뭘 하든 확 드러누울 테니까.”
농담 같은 샤를리즈의 말에 아리아의 얼굴이 약간이나마 펴졌다.
물론 샤를리즈는 농담이 아니었다.
“일단 뭣 좀 알아보고 올 테니 여기서 조금만 쉬고 있어요.”
“저도……! 저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샤를리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아리아의 양 뺨을 살며시 잡았다.
“지금 아리아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요. 여기서 아리아까지 쓰러지면 그렇지 않아도 제일 힘들 아스킨이 더욱 힘들어진다는 거 알죠?”
“…….”
아리아의 끄덕임을 목도한 샤를리즈가 작게 미소했다.
“여기에서 쉬고 있어요. 알게 되는 게 있으면 제일 먼저 말해 줄게요.”
샤를리즈는 제트에게 눈짓을 하고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왔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바로 자신이 쓰러트러야 할 적인 알츠베이트 공작이었다.
공작은 1층 응접실에 있었고, 샤를리즈의 방문에 며칠 전과 같은 어울리지도 않는 다정한 미소 따위로 반겼다.
“오오, 내 사랑스러운 손녀야. 어쩐 일이더냐? 요즘 늘 방에만 있어 걱정했단다.”
“…….”
“여기로 앉거라.”
아직 아스킨의 일을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샤를리즈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상황을 알아보고자 급하게 찾아왔지만 제 급함을 드러내는 건 오히려 약점을 노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할아버지.”
“허허, 이제야 그렇게 불러 주는 걸 보면 화가 풀린 것이냐?”
샤를리즈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용건과 알아볼 것을 적립한 후에 머뭇거리는 척 입을 열었다.
“이전에 제인츠 왕세자가 저를 예뻐라 한 것 같은데 왜 잘해 보지 않았냐고 말씀해 주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