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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71화 (172/194)

171화

“네가 제국 밖으로 여행을 갔을 때, 이웃의 제인츠 왕국 왕세자가 너를 그렇게 예뻐했다고 하던데, 맞느냐?”

뜬금없는 화제에 알츠베이트 공작이 다소 놀란 듯하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왕세자 이야기는 어떻게 아신 거예요?”

“녀석, 이 할애비를 눈 뜬 송장으로 알고 있는 게냐?”

“눈까지 감았다면 더 좋았을 뻔했는데 아쉽네요. 그럼 내가 알츠베이트 공작이 되었으려나?”

샤를리즈의 대답에 공작의 얼굴에 노기가 어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알츠베이트 공작은 싸울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인지 곧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몰랐으면 좋았을 거란 얘기죠. 그 왕세자는 매우 불쾌하게 굴었으니까.”

샤를리즈도 농이었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거나 모르는 일이 없으시단 거네요. 제국 바깥의 일을 훤히 아실 만큼 정보력도 좋으시고. 그럼 국내에서 일어난 일은 더더욱 잘 아시겠어요.”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너는 가만히 있거라.”

첨예하게 달라진 분위기. 공작도 샤를리즈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도 가만히 있는데요, 뭐. 그럼 저는 또 가만히 있으러 가요.”

……당연하겠지만 알츠베이트 공작은 이미 아스킨의 일을 알고 있다.

그리고 통쾌해하며 방관할 작정이다.

짧은 대화였지만 이를 느끼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관여할 것 같지는 않아. 그랬다면 내게 보란 듯이 떠들었을 인간이니까.’

저 인간은 샤를리즈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기르던 애완동물 혹은 예쁘장한 인형.

혹은 좋은 것만 안겨 주면 헤헤 웃으며 좋아할 제멋대로에 백치 같은 어린애로나 볼까.

그렇기에 제 선에서 저지른 일이었다면 보란 듯이 이 할애비가 이토록 대단하며 절대적 인물이라고 자랑하며 압박을 줄 인간이었다.

샤를리즈의 판단은 옳았고 그렇다면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알츠베이트 공작에게서 흘러나온 말이 샤를리즈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레무트 그놈하고는 이제 완전히 끝이구나. 못돼먹은 놈. 뒤로 얍삽하게 그럴 줄 알았지.”

“…….”

“세상에 속이 더럽지 않은 인간은 없어. 그런데 그놈은 역모를 저질렀다지? 너한테 들러붙으려고 할 때부터 무슨 꿍꿍이가 있을 줄 알았다.”

아니, 틀렸다.

일단 당신의 속이 더럽다 못해 시궁창이기 때문에 남들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며.

아스킨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들러붙은 적이 없었다.

‘‘샤를리즈’가 들러붙은 거겠지.’

샤를리즈는 고개를 돌려 싸늘한 얼굴르 알츠베이트 공작을 향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 인간도 여기에 가담했어.’

중심에서 힘쓴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최소한 미리 소식을 접하고 방관하는 것 이상으로는 행동했다.

샤를리즈는 문을 나서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제트에게 빨리 마차를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넌 마차와 함께 기다려.”

“네, 공녀님.”

샤를리즈는 그 길로 제 방에 있는 아리아에게로 돌아갔다.

“아리아, 내가 직접 황실에 다녀올게요.”

진정이 된 듯 차가운 손수건으로 눈을 꾹꾹 누르고 있던 아리아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황의 심각성도 잊고 잠시 귀엽다고 느낄 정도의 모습이었지만 샤를리즈는 진지한 표정으로 제 친우를 응시했다.

“언니, 오빠는 정말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언니도 잘 아시잖아요.”

“응. 너무 잘 알아서 문제죠.”

책 속에서도 그리고 지금 이 현실에서도.

그 남자는 지독한 외골수였다.

자신이 정한 것은 바꾸지 않는다.

지금까지 샤를리즈가 보아 왔던 그의 결정 중에 유일하게 번복하고, 바뀐 것은.

“좋아해.”

곧 터질 것만 같은 것을 언어로 전달하던 그때처럼.

“널 좋아한다.”

자신에 관한 것뿐이었다.

샤를리즈는 주책맞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꾹 눌러 참았다.

갑자기 끌려 나간 내 파트너를 걱정하는 것뿐이다.

라고는 하지만, 이끌림을 거부하거나 모른 척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온 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걱정됐다. 아주 많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아리아, 난 당신 오빠를 믿어요.”

“…….”

“적어도 당신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허튼짓 안 할 남자죠.”

차라리 록시디언에게 목줄을 완전히 내어 줄지언정 제 손으로 충정을 차 버리는 남자가 아니다.

“……저뿐만이 아니에요. 오빠는, 언니를 위해서도 절대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네?”

“오빠는 언니를 아주 많이 좋아하니까.”

아리아가 눈치 못 챘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직설에 샤를리즈는 놀랐다.

“언니도, 같은 마음인가요? 아니, 이 대답은 안 해 주셔도 괜찮아요. 우리 오빠가 잘못한 게 있단 것 정돈 저도 너무 잘 알아요.”

머뭇거리던 샤를리즈는 그냥 웃고 말았다.

“내가 반드시 데려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알겠죠? 걱정되면 영지로 돌아가서 기다려도 좋아.”

“아뇨, 황성에서 더 가까운 곳에서 기다릴래요. 언니, 부탁드려요……!”

다시 울먹울먹해진 아리아를 꼬옥 안아 주고, 아리아와 함께 온 벤에게 아리아를 부탁했다.

그렇게 그녀를 뒤로하고 샤를리즈는 뛰다 시피한 발걸음으로 마차를 향해 갔다.

“가자, 제트.”

* * *

한편 아스킨은 곧바로 황제를 볼 수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한참이나 대기해야 했다.

아스킨의 요청이 받아들여진 덕에 그는 감옥에서 대기하는 신세는 면했으나, 적어도 여긴 한나라의 공작이자 대단한 업적을 세운 영웅을 대기시키기엔 지나치게 허름한 방이었다.

낡은 듯한 창문을 보며 아스킨은 묵묵히 생각했다.

‘늦군.’

그러나 하염없이 대기시킬 생각은 아니었는지, 곧 아스킨은 이동할 수 있었다.

“이쪽입니다. 폐하께서 알현을 허락하셨습니다.”

죄인 취급은 아니었으나, 배로 많아진 기사들은 하나같이 긴장 어린 기색이었다.

어쨌거나 죄가 있다는 명목하에 끌려와서인지 평소와는 다른 절차가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외람되오나, 몸수색을 거치겠습니다.”

적어도 죄인처럼 묶진 않았으나, 이런 취급 정도는 견디라는 식의 태도였다.

아스킨은 진땀을 뻘뻘 흘리는 젊은 기사를 보며 무심히 생각할 뿐이었다.

‘패기가 없군.’

아스킨은 자신을 묶지 않은 것에 대한 보답이라도 되는 양 순순히 눈을 감고 팔을 벌린 자세를 취해 주었다.

기사단장까지 동원되어 아스킨의 몸을 샅샅이 훑고 나서야, 황제의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아스킨은 당당하게 록시디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집무실 자신의 의자에 앉아 있는 황제의 옆으로 플로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이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은 것으로 알고 있건만 상당히 친밀한, 아니 친밀하다 못해 은밀한 자세였다.

아스킨은 아주 찰나간 눈을 찌푸렸지만 잠시뿐이었다.

곧 플로리아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록시디언의 앞까지 걸어가서 예를 올렸다.

“제국의 위대하신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록시디언은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남자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눈은 웃지 않는 서늘한 웃음이었다.

“역모꾼이 오셨군.”

“…….”

아스킨이 대답을 하지 않자, 록시디언이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내 동생을 꼬여내려다 잘 안 되니, 이젠 나를 직접 치기로 마음 먹은 건가?”

이 무슨 허상과 망상에 사로잡힌 듯한 말인가.

하지만 아스킨의 표정엔 흔들림 하나 없었다.

황제가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이야 아스킨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그럼에도 황제는 제가 섬겨야 할 하늘이었으며, 충성을 바칠 주군이었다. 그는 기사였으니까.

“왜 말이 없지? 아아. 이제 황제의 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록시디언이 흥미롭다는 듯 제 턱을 쓸었다.

“저는 반역을 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내가 잘못된 정보만 믿고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워 그대를 해하려 한다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아스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폐하께서 행하신 일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으나, 오해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잘못은 하지 않았으나 실수는 했다? 이 무슨 모순인지.”

록시디언과 아스킨은 평온한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아스킨은 록시디언을 쳐다보다 기묘한 것을 발견했다.

‘폐하의 눈이…….’

샤를리즈와 똑같이 새빨간 눈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저 붉은 눈에서 기이한 황금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단순히 일렁거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찰나간 황금빛이 잠시 홍채를 모두 차지해 금안으로 보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아스킨은 말없이 록시디언 옆에 선 저 여자, 플로리아가 찰나 록시디언의 어깨를 쓸어내리는 순간 록시디언의 눈이 완전히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록시디언이 소리 없이 신음하며 찡그리는 것조차도.

……누가 보아도, 너무나 이상한 광경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는 순식간이었으니 아스킨 정도의 동체 시력을 가진 이만이 잡아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스킨과 록시디언의 말없는 대치는 계속되었고, 이들 기에 짓눌린 주변 신하들은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럼 네 집에서 나온 병장기들과 야산에 숨겨 놓은 군대는 무엇이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증거가 나왔음에도?”

“세상 모든 것은 만들어질 수 있음을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그래, 그것이 진짜일지 가짜일지 판단하는 건 오직 짐의 눈이지.”

“…….”

“짐이 그 증거를 진짜로 판단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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