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72화 (173/194)

172화

맹세컨대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아스킨이 부정했지만 록시디언은 듣지 않았다.

“폐하, 돌아가신 부모님과 대대로 지극히 충성을 맹세했던 제 가문의 명예를 걸고 저는 단 한번도 반역을 꿈꾼 적이 없습니다.”

대체 어디서 이 이야기가 나왔을까.

그리고 어떻게 진행되었기에 황제가 움직이게 되었을까.

아스킨이 아는 록시디언은 비록 여동생과 엮인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더라도 이성과 합리를 잃고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스킨은 그런 황제를 존경했다.

그렇지만 지금 그저 살벌히 쳐다보며 같은 말로 추궁하는 사람은 일견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

록시디언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노아를 향해 손짓했다.

손에 밧줄을 든 노아가 다가오자, 아스킨은 이번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포박당해 주었다.

“공작 같은 충직한 기사라도 일주일 정도 굶으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어차피 록시디언이라 한들 하루 아침에 자신을 없애 버릴 순 없을 터였다.

아스킨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뭐가 됐든. 저 여자가 뭔갈 한 것임에 분명하다.’

지금 본 것을 정리하고 생각해 볼 시간이.

‘……샤를리즈가 보고 싶군.’

아스킨은 자신의 발로 들어왔을 때처럼 자신의 발로 직접 노아를 따라 황제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숨죽여 록시디언의 추궁을 바라보던 신하들도 눈치를 보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커다란 집무실에는 플로리아와 황제만이 남았다.

록시디언은 한 손엔 반쯤 남은 와인 잔을 든 채로 무표정하게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플로리아는 록시디언이 좋아하는 향긋한 와인 병을 들고 잔에 천천히 따라 주었다.

와인잔이 다시 차오르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병을 내려두고 록시디언에게 다가갔다.

“황제 폐하.”

나긋한 부름에도 록시디언은 응답이 없었다.

플로리아는 그럼에도 이해한다는 듯이 나긋한 손으로 록시디언의 어깨를 쓸었다.

록시디언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

플로리아는 비록 의도적으로 접근했음에도 자신을 볼 때면 풀어지고야 마는 이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아니, 좋았다.

그녀가 늘 꿈속에서 기묘한 미래를 체험했을 때, 제 옆에는 항상 이 남자가 있었다.

이 사나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표정을 한 채로 말이다.

플로리아가 속으로 고개를 내저어 불필요한 생각을 떨어트렸다.

이미 허리로 자연스럽게 파고든 탄탄한 팔이 필요하지 않은 생각을 떨어트리는데 충분한 도움을 주었다.

“폐하, 마음이 좋지 않아 보이세요. 괜찮으신가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단단한 팔이 감기는 걸로 모자라 딱딱한 남자의 몸에 파고들게끔 잡아당겼다.

플로리아는 록시디언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로 눈을 내렸다.

“짐은 지금 누구보다 기분이 좋은데.”

록시디언은 플로리아를 제 다리에 앉히는 걸로 모자라,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제 잔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플로리아가 잔을 잡아 장난스럽게 잔을 빙글빙글 돌리는 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고개를 숙인 플로리아는 보지 못했지만 단 한 순간 록시디언의 얼굴로 지독히도 차가운 표정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갖고 싶다는 생각을, 지독히도 끌리는 감정을 느낀 적이 있던가.

기이하리만치 갑작스럽고 사고 같은 감정이었다.

그에겐 익숙한 집착이란 감정.

그는 이것을 정복과 귀족들 간의 정쟁에서 승리하는 것, 제 하나뿐인 여동생을 가족으로서 지키는 것 외에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플로리아가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레무트 공작님은 제국에 다시 없을 충신이라고 들었어요. 한 번쯤 넓은 아량을 베푸시는 것은 어떨까요……?”

“아량이라. 반역을 꾀한 죄인에게 아량을?”

“쉽게 용서할 순 없겠죠. 하지만…….”

플로리아가 살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록시디언은 눈빛으로 해 보라는 듯 그녀를 채근했다.

플로리아가 용기를 얻었다는 듯 새하얀 뺨을 분홍빛으로 살짝 물들였다.

“폐하, 이 미천한 사람의 말에 귀기울여 주신다면, 진실을 말하게 한 뒤 공작님에게 빚을 지게 하는 건 어떠실까요?”

“저놈이 제 입으로 죄를 토로할 것 같은가?”

“방법이야 있다고 생각해요.”

“방법이라……. 어떤 방법이지?”

플로리아가 록시디언의 손을 살포시 잡자 기다렸다는 듯 팔이 더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방법이길래 저 딱딱한 놈의 입을 열게 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한데.”

“바로, 공작님의 여동생을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록시디언이 아주 잠시 멈칫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플로리아를 응시했다.

붉은색과 금빛이 이지러지게 섞인 눈동자였다.

플로리아는 이를 보면서 맹수가 먹잇감을 무는 상상을 떠올렸다.

그녀가 록시디언의 굵은 손목을 잡자, 눈은 점차 금빛으로 물들었다.

제국의 황실에는 대대로 고대 짐승의 저주로 인한 감정이 불안전하며, ‘폭주’의 위험을 가진 짐승과도 같은 아이가 태어난다.

자, 그럼 그 짐승의 시초는 어디에서 왔는가.

고대의 그 짐승은 어찌 되었는가.

플로리아는 고대 짐승을 잡고 진정시키며 때로는 제압하던 이들의 후손이었다.

게다가 고대의 저주가 그녀의 몸에도 이어지는 탓에, 짐승의 피를 이은 자와 고삐를 쥔 자는 어찌할 수 없이 서로에게 이끌렸다.

이끌림.

플로리아가 자신을 시궁창에서 구해 준 차일드 백작에게조차 밝히지 않은 사실이었다.

또한 록시디언에게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진실은 알아야 하니까요.”

짐승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건……, 동시에 폭주시킬 방도도 안다는 소리였다.

플로리아가 어깨를 쓸자, 록시디언이 조용히 끓는 신음을 흘렸다.

“플로리아.”

“예, 폐하.”

플로리아는 억센 손에 턱을 붙잡혔음에도 생글생글 웃었다.

“그대는 제국에 온 지 오래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건만, 신기할 정도로 레무트 공작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군.”

아스킨이 여동생인 아리아를 끔찍이 아끼고 꽁꽁 숨긴 탓에, 생각보다 아리아에 대한 것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아스킨의 스무 살 적 로드를 제패한 날을 기억하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귀족이라면 모를까.

어린 귀족들은 레무트 공작가에 공녀님이 계셨나요?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도 있었다.

플로리아는 코앞에 앉은 폭군의 눈빛 속에 춤을 추는 금빛 그림자를 보며, 눈을 깔았다.

속으로 무엇 때문인지 모를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은 황제 폐하를 위한 일입니다.”

“하…… 하하. ”

록시디언의 웃음은 곧 커다랗게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그는 플로리아마저 내려놓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자신을 보았을 때, 플로리아는 분명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건만.

의심이 지워진 얼굴을 보면서 록시디언이 아니라 자신이 올가미에 들어간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착각일 것이다.

“아주 흥미롭군. 하지만 황제인 내가 그렇게 치졸한 방법을 쓸 순 없지. 약자와 환자는 건드려 봐야 재밌지가 않아. 내게도 방법이 있으니 걱정 말아.”

록시디언이 고개를 숙여 플로리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대는 아주 재밌어. 오래도록, 짐의 곁에 머물러 봐.”

“…….”

폭군은 그대로 허리를 들어 잔을 단숨에 비워 버리고는 자신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플로리아는 록시디언이 남긴 잔에 쪼르륵 와인을 따랐다.

“폭군의 눈을 흐릿하게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살려 준 은혜는 갚아야지.”

플로리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가만히 고민했다.

처음엔 그냥, 그 사람을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인데.

정작 드디어 만나게 된 사람은 자신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샤를리즈 공녀님.”

작게 중얼거리던 플로리아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래, 내가 할 일은 이 계획을 망치지 않는 것뿐이지.’

* * *

샤를리즈가 황성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제 앞에 굳게 닫힌 성문을 마주했다.

“허어? 뭐?”

“드, 들어가실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인간도 아니고 그 폭군이 자신의 출입을 금지시켰다고.

마치 이렇게 찾아올 것을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샤를리즈는 성질을 내려다 말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 멀미.’

몸을 생각하지 않고 사정없이 몰라고 시켰더니, 겁에 질린 마부가 정말 광란의 질주를 했다. 제트 코스터를 타도 울렁거리지 않던 속이 지금은 난리가 났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읍…….”

“약을 가져오게 시킬까요? 아니면 등이라도.”

샤를리즈는 손사래를 치며 억지로 속을 가다듬었다.

황성 앞에서 험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찬바람에 속을 조금 진정시킨 샤를리즈가 제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제트, 너 황성 담도 넘을 줄 아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