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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73화 (174/194)

173화

제트는 아주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끄덕였다.

“공녀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샤를리즈는 잠시 감격에 젖었다.

이거 자칫하면 너도 나도 같이 반역에 끌려갈지도 모르는데, 정말 흔쾌히 수락하는구나.

샤를리즈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훌쩍였다.

“내가 정말 기사 하나만은 잘 둔 것 같아.”

“…….”

“경은 내가 만난 인연 가운데 유일하게 정상적이고 행복한 인연이야. 아리아를 빼면 말이야.”

제트는 샤를리즈의 평에 행복함을 느끼다가도 아주 잠깐 ‘정상적’이라는 표현에서 흠칫했다.

그러나 곧 수긍했다.

하기야 제 주인의 남자복은 객관적으로 봐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닌 듯했으니까.

그렇기에 이제는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공녀님께서 선택한 남자가 그분이시라면.’

제트가 마음을 다지는 사이 샤를리즈는 이미 성문을 꼼꼼히 훑고 있었다.

“제트,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무엇이든 하명해 주십시오.”

“너, 문도 딸 줄 아니?”

전직 성기사는 아주 잠시 움찔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신을 외면한 지 오래였고, 이제는 새로운 신을 모시는 자였다.

“좋아. 그렇단 말이지. 정말 유능하네, 넌.”

“제일 좋은 건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시는 게 좋은 방법 같지만.”

“그랬다간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하나 알아서 말이야.”

바람이 불었다. 샤를리즈의 긴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이해가 안 되지?”

“네?”

“나도 그래.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그놈을 생각했다고 이렇게 달려가나 싶은데.”

“…….”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더라.”

앞을 보며 중얼거리는 샤를리즈의 목소리는 제트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같이 느껴졌다.

“정신 차려 보면 스며들어 있더라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

“참 억울한 일이지.”

제트는 억울한 일이라면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하고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적어도 이렇게 말하는 샤를리즈의 목소리가 후련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곧 저 어둠 속 황성으로 가야 하는데도 그녀의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거렸다.

적어도 제트가 알던 때처럼 스트레스를 받거나 억지로 웃는 기색은 없었다.

행복해 보였다.

곧이어 제트는 정말로 샤를리즈라는 짐까지 감당하고서 기어이 황궁의 담을 넘었다.

그러나 샤를리즈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정말 벽을 타는 식은 아니었다.

그건 도리어 쉽게 걸릴 거라고 제트가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택한 길은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자그마한 문으로, 상대적으로 순찰이 거의 없어 있던 순찰도 제트가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황성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샤를리즈는 자꾸만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곧 이건 아주 어린 시절에 자신이 황성에 머물렀던 기억임을 알았다.

몸에 담겨 있던 기억이었다.

“제트, 이쪽. 이쪽으로 가면 사람 없어.”

그렇게 안쪽으로 갈수록 제트를 직접 이끌었고 기어이 자신이 아는 중앙 성까지 도착했다.

샤를리즈는 숨을 살짝 몰아쉬면서 복도로 들어섰다.

복도에 들어선 샤를리즈를 발견한 기사가 있었으나, 감히 그녀를 막아서진 못했다.

‘여기까진 록시디언 그놈의 명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건가?’

샤를리즈는 피식 웃고는 복도 한복판에 멈춰섰다.

웬만하면 자신도 상식적으로 가고 싶었다.

‘그런데 폭군 오빠 그놈이 이토록 몰상식하게 나오니 어떡해?’

그녀는 눈을 뜬 이래로 줄곧 하나의 원칙을 지켜 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패악에는 패악으로. 몰상식에는 몰상식으로!

샤를리즈는 후읍 숨을 들이 마셨다.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야, 록시디언……!!”

샤를리즈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려퍼졌다.

그렇지 않아도 천장이 높은 황성이라 성안 가득 메아리 치는 듯했다.

제트는 당황했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표정을 지었고, 도리어 샤를리즈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모드던 기사들만 쩔쩔매며 귀를 막았다.

‘오냐,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샤를리즈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몇 번이고 더 큰 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얼마가지 않아, 고요한 복도 너머에서 누군가 황급히 뛰어왔다.

익숙한 실루엣.

폭군의 부관인 노아였다.

“공녀님……! 대체 이 야심한 시각에 무얼하시는, 아니.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샤를리즈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대답했다.

“알면서 뭘 묻니? 그래, 우리 대단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주무시는 걸까?”

“저…….”

샤를리즈는 폭군 못지 않게 노아를 자주 만난 탓인지.

노아의 시선으로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챘다.

안 자는구나.

잘된 일이었다.

“자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오빠 좀 만나 봐도 되지?”

“안 됩니다. 황, 황제 폐하를 알현하시려면 낮에 미리 말씀을…….”

샤를리즈가 하, 혀를 찼다.

미리 알림? 예고? 웃기지도 않았다.

샤를리즈가 웃는 그대로 분노를 드러냈다.

“이것들이, 맨날 저들 멋대로 내 방에는 불쑥불쑥 찾아와 놓고는 미리는 무슨 미리야. 록시디언 그놈이야 경우가 없다고 쳐도 노아 경. 당신이 내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샤를리즈가 한 걸음 다가가자, 노아가 본능적으로 걸음을 뒤로 물렀다.

지금의 샤를리즈는 기세가 대단했다.

본래 타고난 미모도 미모였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노아는 스스로 자신이 샤르리즈에게 약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빨리 안내해.”

노아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곧 다시 눈을 뜻 노아가 고갯짓하자, 근처를 서성이던 기사들이 우물쭈물하며 물러났다.

“황제 폐하께서 좋아하시진 않으실 겁니다.”

“언제는 오빤 내가 좋아하는 일만 했니?”

“…….”

노아가 망설이더니 말했다.

이것이 자신이 샤를리즈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라는 듯.

“만나신다고 한들, 현재 폐하께서는 공녀님께서 아시는 모습도 아시는 반응도 해 주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만나시길 희망하시는 겁니까?”

“노아, 나는 지금 이 대화를 하는 시간마저 아까워.”

존칭이 떨어진 호칭에 노아는 한숨을 쉬었다.

잠시 뒤 느릿하게 안내하는 걸음을 참지 못한 샤를리즈는 눈앞에 집무실의 문이 보이자 마자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집무실 앞에서 대기해 달라고 하던 노아의 말은 이미 귀 너머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안녕.”

집무실 안쪽은 어두웠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계신지요? 그 잘생긴 용안 좀 한번 보여 주시죠?”

샤를리즈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어두운 방 안에는 그녀의 구두 소리만 울려퍼졌다.

샤를리즈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폭군을 찾는 사이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또 술 마셨냐?”

샤를리즈가 방향을 잡았다.

친근한 말투처럼 보이나, 목소리만은 서늘했다. 장난이 아니라는 듯.

“아 맞다. 술이라도 마시고 왔어야 하는데. 아쉽다, 그치? 그래야 망나니 여동생으로서 망신을 좀 톡톡히 줄 수 있는데 말이야.”

“…….”

“어차피 잘생긴 황제 폐하의 집에는 좋은 와인이 많겠네. 한 병 가져와 보지 그래? 나는 지금 아주 술 마실 기분이 제대로거든.”

록시디언은 고개를 돌려 집무실에 대기 중이던 시종들을 물렸다.

제 아무리 안팍으로 폭군 소리를 듣는 자신이지만 오늘만큼은 저 여동생이 하는 꼴을 보아하니 정녕 좋지 못한 꼴을 보일 것 같아서였다.

모두가 나가고 거대한 집무실엔 남매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안절부절못하는 노아와 석상처럼 대기 중인 제트 또한 함께였다.

“……나 바쁘니까 적당히 까불고 가라.”

“까불긴 누가 까부나요? 감히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 까부는 여인도 있답니까?”

“장난할 기분 아니야. 진짜 내가 왜 황제인지 알고 싶은 거냐?”

“오, 정말 멋진 협박이야.”

샤를리즈의 입가가 삐죽 올라갔다.

록시디언은 기시감이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저 입매를 한번 보고 나면 그 다음엔 꼭 재수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 어디 한번 해봐. 나도 좀 보자. 그 잘난 권력으로 내게도 군사를 보내 잡아가기라도 하려고?”

록시디언의 눈이 사납게 가라앉았다.

샤를리즈는 저와 똑같은 색의 눈이 난폭하게 일렁거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 역시나 그놈 때문에 온 거군. 그럴 줄 알았다. 어떻게 넌 늘 내 예상을 한 치도 빗나가질 않는 거냐?”

“허?”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했던가.

가만히 잘 살고 있던 사람을 대뜸 잡아간 게 누군데.

록시디언의 행동에서 제 오빠이던 윤지훈의 뻔뻔한 얼굴이 겹치는 듯했다.

윤지훈은 그래도 상식 선에서 사고를 치기라도 했지, 저쪽은 한 나라의 황제라는 것이 아주 아스트랄하게 지랄이었다.

‘역시 이전과는 달라. 대체 뭐가 문젠지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네.’

플로리아. 그녀와 관계된 것이다.

샤를리즈는 당장 멱살부터 움켜잡고 정신 차리라 외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할 일이 따로 있었다.

‘그 남자의 무사함부터 확인해야 한다.’

아리아와 약조했다. 그녀의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기로.

“설마, 벌써 아스킨의 목을 친 건 아니지?”

과격한 말이 먼저 나간 것은 제발 그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함의 발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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