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록시디언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쳤는데?”
잔인한 웃음이 스쳤다.
“그래? 죄없는 사람을 죽였으니, 오빠도 죽어야겠네.”
담담한 샤를리즈의 말에 록시디언이 멈칫했다.
“……죄가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해. 네게 시비를 가릴 자격은 없어.”
“없겠지. 하지만 눈이 달렸는데 판단 하나 못하겠어?”
“도대체 뭔데 이렇게 난리야?”
피로함이 드러나는 얼굴에도 샤를리즈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나는 아스킨 레무트의 약혼자야.”
“…….”
“그 사람의 생사를 확인할 자격과 의무가 있어.”
“……그래? 너도 같이 역모에 가담했다고 자백하는 거냐?”
록시디언의 눈으로 잠깐이지만 살기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눈이 돌아 버린 건 록시디언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샤를리즈는 목에 매달린 목걸이를 꾹 쥐며 록시디언을 응시했다.
“오빠, 오빤 돌아 버린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이미 본 적 있어. 그렇지?”
샤를리즈의 눈에서도 범상치 않은 광기가 흘러나오자, 록시디언이 천천히 눈을 피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아스킨을 빨리 돌려보내.”
“…….”
샤를리즈의 얼굴 위로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오빠, 오빠는 멍청한 황제가 아니야. 그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러니까, 이 반역에 대한 누명이 터무니없이 어설프고 허점이 많다는 걸 잘 알 텐데?”
록시디언이 이 젊은 나이에 강력한 황제가 된 것에는 여러 정치적 이유도 있지만 본인의 현명함과 능력, 카리스마가 제일 컸다.
이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귀족들을 찍어 누르고 이 자리에 오른 황제였다.
그런 록시디언이 이따위로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진짜 반역 혐의가 있었다면 이런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쟤 성격에 만천하에 증거부터 알리고 봤겠지.’
그러니 더욱 이상하다는 거다.
지금 일처리는 그저 아스킨을 묻어 버리고 싶다는 악의밖에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반역을 꾀한 죄인을 돌려보내라?”
“오빠, 아니, 록시디언. 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어? 레무트 공작가야. 몇 대가 황실에 미친 듯이 충정을 바쳤던 가문. 이번 대의 공작은 로드를 개척한 공로마저도 홀랑 황실에 바쳤어. 고작해야 그 대가 같지도 않은 대가만 받고서.”
샤를리즈가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충직한 신하가 어떻게 역모를 꾸며? 딱 봐도 누군가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거 모르겠어?”
“그만해. 내가 말했을 텐데. 그건 황제인 내가 판단한다고.”
“판단이고 뭐고.”
샤를리즈가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가 보증할 테니까 얼른 데려와. 진짜 반역자라면 같이 목이라도 잘릴 테니까.”
“…….”
사람은 시간에 따라, 또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그럼에도 사람에게는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었다.
아스킨 레무트에겐 그게 바로 ‘충정’이었다.
타고나기를 우둔할 정도로 우직하게 태어난 남자는 제 여동생과 나라, 황실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다.
록시디언은 제 여동생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테이블 옆에 있던 줄을 잡아당겼다.
곧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록시디언은 지금까지 고요하게 대기하던 노아를 향했다.
“노아, 저거 빨리 돌려보내.”
“허, 정말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네가 진짜 돌았구나?”
황실 기사들은 샤를리즈의 발언에 경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번 뚫린 샤를리즈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뭐에 미친 거니? 아, 여자에 미친 건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판단을 할 수 없을 테니.”
“샤를리즈. 네 말을 들어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아, 그러셔? 그렇지.”
샤를리즈는 록시디언의 경고에도 그를 비웃었다.
“넌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난 안 된다? 그래, 지엄하신 황제 폐하니까.”
이 빌어먹을 신분제.
“네가 몇 번이고 내 방을 멋대로 들락날락해도 나는 참아야만 하고, 네가 무슨 개소릴 하든, 내 인생에 어떤 훼방을 놓든 난 참아야 하고.”
이상했다. 샤를리즈는 분명 여기서 말을 멈추려 했지만, 왜인지 단 한 순간 자신의 입이 멋대로 움직이는 느낌과 함께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이 밀려들었다.
“나는 알츠베이트에 팔려 가고. 아, 여기부터 시작이었지.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만 알츠베이트에 팔아 버린 것.”
“뭐?”
머릿속으로 아주 아름답지만 처연한 인상의 여인이 슬프게 미소하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샤를. 내 아가. 이게 다…… 네 오빠를 위한 일이야.”
“그래도 네 오빠가 너를 지켜 줄 거야. 싸우지 말렴.”
자신에게 목걸이를 걸어 주는 사람은 분명 샤를리지의 모친이자 선대 황후였다.
샤를리즈는 밀려드는 기억으로 알 수 있었다.
황실과 알츠베이트 가문 사이에서는 약조가 있었다.
아이 중 하나는 반드시 알츠베이트 가문에게 줄 것.
둘째 아이가 자랐을 때, 부부는 어느 아이를 보낼지 선택해야 했고.
그들은 알츠베이트 공작의 성정을 알면서도, 샤를리즈를 보내길 택했다.
록시디언을 보낼 수는 없었기에.
‘하, 악녀님.’
‘샤를리즈’의 의사는 없었다. 황제 부부는 학대받을 것을 알면서도 딸을 그곳에 보내버렸다.
‘당신의 삶도 기구하네요.’
샤를리즈는 이 몸의 진짜 주인이 저지른 죄를 이해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 여자를 처음 진정으로 동정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록시디언도 알고 있었던 것 같으니까.
자신을 위해 여동생이 알츠베이트로 가야만 했던 것.
‘그래, 어쩐지 나를 계속 황실로 돌아오라고 하더라니. 제 죄책감 때문이었나?’
샤를리즈의 얼굴로 차가운 비소가 떠올랐다.
“아, 결국 너랑 나도 남매 따위가 아니라, 그저 내가 네 죄책감을 해소하는 도구 정도였겠구나.”
“야, 샤를리즈……!”
“그렇지 않다면 네가 이따위로 내 말을 무시할 리가 없지.”
록시디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샤를리즈가 자신의 목걸이를 잡았다.
“엄마의 유언도 결국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네 책임감을 덜어주기 위한 거였다니 말이야.”
목걸이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록시디언의 눈이 한순간 황금빛이 되었다.
그러나 왜일까, 기다렸던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샤를리즈는 똑똑히 목격했다.
목걸이에서 튀어나온 빛이 튕겨나가는 것을.
‘아아.’
이로서 증명된 셈이다. 새로 나타난 이 책의 주인공.
플로리아는 저 록시디언의 ‘저주’에도 관여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
샤를리즈는 목걸이를 넣고 깔끔히 포기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림자 같은 것이 샤를리즈의 양손을 봉해 버렸다.
“공녀님, 움직이지만 않으시면 아프시진 않을 겁니다.”
그림자가 노아로부터 이어진 것임을 확인한 샤를리즈가 픽 웃었다.
나서도 되냐 묻는 제트에겐 살래살래 고개를 내저어 주고는 노아를 향했다.
이미 록시디언에게 무언갈 더 해 볼 생각도 의지도 없었지만.
샤를리즈는 차갑게 일갈했다.
“나를 결박하다니, 너도 죽고 싶은 거로구나. 노아.”
“……저는 황제 폐하의 부관입니다. 결계를 용서해 주십시오.”
샤를리즈는 제 두 손을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억지로 노아에게 화를 내 보려 했지만 딱히 그럴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은 저도 모르게 록시디언을 의지했던 듯했다.
‘윤지훈이 떠올라서.’
죽은 친오빠가 떠올라서. 다시는 보지 못할 그 얼굴이 자꾸만 생각나서.
얼굴은 달라도 하는 얄미운 행동이, 그래도 그 안에 있는 건 애정이라는 사실이 느껴졌기에 그러했지만.
모두 자신의 착각이었던 듯했다.
샤를리즈는 의연하게 등허리를 폈다.
그녀의 목소리에선 더는 분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실례했습니다, 황제 폐하. 감히 미천한 공녀가 보인 무례로 목을 치셔도 좋습니다.”
“…….”
샤를리즈는 록시디언을 한번 보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다신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황제 폐하.”
그렇게 샤를리즈가 집무실을 나섰을 때, 문이 쿵 닫혔다.
노아는 기사들에게 눈짓했고, 기사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묵례를 올리고서 사라졌다.
샤를리즈와 노아, 그리고 제트가 복도를 걷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공녀님, 폐하께서도 공녀님을 섭섭하게 해 드리려 한 것은 아닐 겁니다.”
“노아.”
샤를리즈는 노아가 어렵게 꺼낸 말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렸다.
샤를리즈의 얼굴에는 조금 전 차가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의문이 어려 있었다.
“예?”
“너도 뭔가 이상한 거, 알고 있지? 똑똑한 네가 모를 리가 없어.”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누가 뭘 아냐고 물었어?”
“…….”
샤를리즈가 싱긋 웃었다.
“내가 오늘은 조용히 물러갈 테니까 아스킨 얼굴 한 번만 보게 해 줘.”
“그건 안 됩니다. 폐하께서 아시면 저는 정말 죽은 목숨입니다.”
이미 록시디언에게도 노아에게도 정이 떨어진 참이었지만, 샤를리즈의 생각은 달랐다.
조금 전 자신의 말들은 계산 속에 뱉은 것이기도 했으니까.
‘갑자기 샤를리즈의 기억이 떠오를 때는 진심으로 당황했지만.’
생각해 보니, 죄책감이면 어떤가.
이걸 지금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던가.
“그럼 여기서 내 손에 죽는 건 괜찮고?”
“…….”
“난 알아. 여기서 내가 널 죽이더라도 내 오빠는 날 용서할 거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