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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75화 (176/194)

175화

샤를리즈가 괜히 죄책감을 부추기는 말을 하고서 나온 것이 아니다.

분명 록시디언은 이상해졌다.

그러나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다.

“실례했습니다, 황제 폐하. 감히 미천한 공녀가 보인 무례로 목을 치셔도 좋습니다.”

그건 이 말을 하는 순간의 록시디언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레무트 공작은 둘도 없는 충신이잖아. 정말, 이 나라를 위해 그런 충신이 사라지는 걸 원해? 네가 그러고도 황제를 위하는 부관인가?”

“…….”

“얼굴만 보고 갈게. 진짜 잠깐이면 돼.”

노아는 잠시 놀랐다.

이 순간 샤를리즈의 얼굴로 잠깐 스친 간절한 표정 때문에.

적어도 자신은 이 표독스러운 공녀에게서 절대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얼굴이었다.

노아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 신경이 쓰여서 함께 나왔던 내 잘못이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지만 어떡하겠나.

곧이어 제 옷자락을 붙잡고 그 샤를리즈가 간곡하게 요청하자, 노아는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주제넘게도 현재의 샤를리즈를 동정하고, 또 아주 조금은 특별한 마음을 품었기에.

“……이쪽입니다.”

잠시 뒤, 노아의 안내에 따라 샤를리즈가 도착한 곳은 경비가 삼엄하게 배치된 낡은 건물이었다.

노아가 누군가를 부르더니, 웬 남자와 무언가를 한참이나 얘기했고.

다시 샤를리즈에게 다가왔다.

“공녀님,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누구도 공녀님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

“아? 한 발 빼시겠다?”

샤를리즈의 대꾸에도 노아는 정중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할 순 없으니까요.”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란 소리였다.

샤를리즈는 살짝 웃었다.

“그래. 고마워. 진심이야.”

“…….”

“문제가 일어나도 네 이름은 나오지 않을 거야. 맹세하지.”

뒤돌아서는 샤를리즈를 향해 노아는 깍듯한 예를 올렸다.

샤를리즈는 이곳에 오면서 문득 새로운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닌지라 재빨리 안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간수의 안내에 따라 들어간 감옥 내부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샤를리즈가 코에 손을 가져다 대자,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제트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제야 샤를리즈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제국 최고의 영웅이 이런 곳에 있다고?’

아스킨은 최고급 성은 아니지만 그래도 번듯한 성과 저택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물론 전쟁터의 허름한 잠자리를 수없이 경험했겠지만.

적어도 공작이란 작위에 걸맞은 집이 있던 사람이란 거다.

‘그런 사람을 이딴 시궁창 같은 곳에 둬?’

죄가 있으면 또 몰라.

죄가 없는 것이 자명한데, 이런 곳에 처박아 둔 거라면 더더욱 용서가 안 되는 일이었다.

마침내 샤를리즈는 아스킨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

아스킨은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어련히 이 시간이면 오는 간수이려니 했다.

시간별로 오는 간수들은 아스킨을 은근하게 협박하고 압박했다.

“폐하께서는 공작님께서 스스로 진실을 고하시길 바라고 계십니다.”

식사는 오지 않은 지 꽤 되었다.

가뭄에 콩 나듯 물만 줄 뿐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살 만했다.

아스킨은 고개를 든 순간, 횃불 아래 보이는 얼굴을 보며 놀랐다.

이곳에서 볼 줄은 몰랐던 샤를리즈였으니까.

갖혀 있던 아스킨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거, 자존심 상한 얼굴인데.’

원수로 오래 지냈기 때문인지, 샤를리즈는 아스킨의 부정적인 표정쯤은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없어.’

평소 같았으면 이 남자의 자존심을 위해서 좀 더 배려라는 걸 해 봤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여유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아스킨, 괜찮아?”

약속된 것인지 간수는 멀찍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뭐 하러 이런 누추한 곳까지…….”

“지금 당신은 그게 문제야? 내가 금방 꺼내 줄게. 지금 의심 가는 거 있으면 빨리 말해 봐. 시간이 없어.”

“…….”

“사람이든 물건이든 뭐든 좋으니까.”

아스킨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샤를리즈는 아스킨의 몸과 얼굴에 남은 상처를 보며 찡그렸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았다.

“의심 가는 사람…….”

“그래, 뭔가 짚이는 게 있으면.”

그때였다. 멀어졌던 간수가 왜인지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샤를리즈는 간수를 보고는 제트에게 눈짓했다.

‘약간이라도 좋으니 시간을 끌어 봐.’

샤를리즈의 눈짓을 이해한 제트가 빠르게 나섰다.

간수의 발소리는 아스킨 또한 들었기에, 그는 이 귀중한 시간을 쉽게 날려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큼 다가와 철창을 잡고 있던 샤를리즈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귀한 공녀께서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군. 난 괜찮으니, 아리아를…….”

“그딴 소리 집어치우고, 의심 가는 놈을 말하라니까. 그 아리아가 날 여기 보냈어. 알아?”

“…….”

“그애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

아스킨은 잠시 표정을 흐리더니, 이내 철장에 이마를 툭 가져다 댔다.

무슨 생각인지 잠시 눈을 감은 그는 이어서 눈을 뜨고 얼굴을 내렸다.

샤를리즈는 제 손에 닿는 입술의 감촉에 흠칫했다.

“샤를리즈.”

아스킨이 샤를리즈의 손에 입을 가져다 댄 채 작게 속삭였다.

“좀 더 가까이.”

샤를리즈는 살짝 숨을 삼키며 빠르게 고개를 내렸다.

아스킨은 귀를 빌려준 샤를리즈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샤를리즈에게 겨우 들릴 듯한 목소리였으니 간수는 듣지 못했을 터였다.

‘……역시.’

아스킨으로부터 들은 정보는 샤를리즈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제트가 시간을 잘 끌어 주고 있었기에, 샤를리즈는 아스킨과 인사를 나눌 정도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아스킨, 나.”

“샤를리즈, 내가 먼저 해도 되겠나?”

“뭔데? 얼른 얘기해.”

“조금만 더 가까이.”

샤를리즈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얼굴을 더욱 가까이 가져왔다.

“나중에 뺨을 때려도 좋고, 칼로 찔러도 좋아. 어쩌면 마지막이 될까 봐, 조금은 두려웠으니.”

“무슨 소릴 하고 싶은…….”

샤를리즈는 입술로 스친 감각에 눈을 크게 떴다.

잘게 떨린 동공이 앞을 향하면, 쓰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미안하다. 일이 잘 해결되면 좋겠지만, 최악의 경우엔…… 아리아를 부탁해.”

상처와 어두운 감옥의 풍경조차 지우지 못한 외모의 남자였다.

그는 샤를리즈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가, 떨어트렸다.

“……네가 부탁해야 할 건 아리아가 아니라 멋대로 이딴 행동을 한 대가일 거야.”

“……그것도 사과하지. 우린 아무것도 아닌 사이인데 무례했군.”

“그래. 맞아. 연기나 하기로 한 사이지.”

샤를리즈가 제 가는 손을 철창 사이로 집어넣어 아스킨의 멱살을 콱 잡았다.

이 미친놈이, 내 입술을 이따위로 뺏어 가?

‘너 때문에 쓸데없는 것만 새로 깨달았잖아.’

샤를리즈는 부아가 치밀었다.

분노도 함께였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을 방금 전에 인정하고야 말았으니까.

자신은 이 남자가 좋았다.

머리로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바엔 내가 뭐든 해서라도 도와주고 싶을 만큼 좋았다.

사실 이 감정을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미를 눈치챘을 때 묻어 버리려 했다.

그 감정이 자신에게 패배감을 주고 만 것은.

“넌, 나한테 큰 잘못한 거야.”

“미안하…….”

자신이 이 감정을 깨닫는 순간부터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목표가 흔들릴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패배감과 자신이 인정한 사랑은 함께 찾아왔다.

아스킨은 제 입술로 올라온 샤를리즈의 입술에 눈을 크게 떴다.

믿기지 않았지만 코로 들어오는 부드럽고 아찔한 향기에 이대로 죽어도 좋을 듯한, 지독한 황홀감마저 들었다.

철창으로 손이 나가지 못해, 고작해야 샤를리즈의 손을 잡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쉬웠다.

갈증이 일었다.

“살아 나와. 이건 명령이야, 알았어?”

“……샤를리즈.”

“네게 명령을 하기 위해선 빌어먹을 황녀인지 뭔지 하는 신분도 되찾을 생각이니까. 똑똑히 들어.”

아스킨은 상기된 표정으로 천천히 끄덕였다.

“그럼 그때는 내 황녀님인가?”

“웃기지 마, 누가 네 황녀님이야.”

샤를리즈는 아스킨을 꼬집고는 그대로 떨어졌다.

제 얼굴이 붉어졌으리란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이건 부끄러울 일 없겠네.’

저쪽에서 더욱 빨개진 상태니까 말이다.

자신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만큼.

아스킨이 빨개진 얼굴을 아예 보지 못한 건 아니었건만, 얼굴부터 목에 귀까지.

심지어 손끝까지 빨개진 모습은 감옥에서 보기엔 아까울 정도로 절경이었다.

아스킨은 그 상태로도 애써 더듬더듬 아리아의 안부를 듣더니, 답변마저 전달했다.

그사이에도 제트는 놀랍도록 완벽하게 간수를 데리고 시간을 끌어 주어서, 그들의 첫 키스는 누구도 보지 못한 완벽 범죄가 되었다.

샤를리즈는 그대로 감옥을 빠져나왔다.

“제트, 간수에게 뭐라고 했길래 그렇게 시간을 끌 수 있었던 거야?”

“음…… 특별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트는 특별한 건 아니라 말하면서도 조금 말하기 꺼려 했다.

그러더니 슬쩍 속삭였다.

본래 성기사들은 토벌 기사들처럼 돌아다니는 일이 잦다보니 약초에도 해박한 편인데, 그중에서도 제트는 더 해박한 편이라고.

“남자에게 좋은 약초에 대해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

그것참 솔깃한 말이었겠네. 샤를리즈는 끄덕였다.

밤일에 신경 쓰는 건 지구나 이 세계나 마찬가지인가보다 생각하면서.

‘이제 할 일은 명확해졌어.’

아스킨의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머릿속이 간단해졌다.

감옥을 막 나섰을 즈음, 샤를리즈의 눈앞으로 누군가 나타났다.

이 순간 가장 꼴보기 싫은 인영이었다.

바로 플로리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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