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플로리아는 샤를리즈가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잠시 놀란 얼굴이었지만, 곧 생긋 예쁘게 웃었다.
“샤를리즈 공녀님을 뵙습니다.”
이름을 허락한 적 없는데도 퍽 친근하게 부르는 인사였다.
샤를리즈는 화를 내는 대신 차분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플로리아는 샤를리즈의 시선이 기쁘다는 듯 볼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기쁜 마음이에요.”
“너 정말 정체가 뭐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뭘 몰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길래, 자신이 알던 선량하고 순수한 여자 주인공은 어디 가고, 폭군을 꼬여내는데 성공한 계산적인 절세미인이 눈앞에 있었다.
샤를리즈는 자신을 친근하게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 흉계를 꾸민 게 분명한 플로리아를 향해 당장 뛰어들고 싶었지만.
‘그건 저쪽에서 바라는 일이겠지.’
샤를리즈는 뒤로 숨긴 주먹을 꾹 눌러잡아 참았다.
“그래,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이거지?”
샤를리즈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그녀의 눈에서 웃음기가 싸악 사라졌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야.”
샤를리즈의 표독스러운 표정에 플로리아는 아주 잠시 멈칫했다.
그녀의 가는 어깨가 마치 둥지에 떨어진 새의 것처럼 가냘프게 파르르 떨렸다.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던 플로리아는 샤를리즈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작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본래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잖아.”
샤를리즈가 잠시 멈춰 섰다.
“당신이랑은 꼭, 대화해 보고 싶었는데…….”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샤를리즈가 찌푸리자, 플로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스킨 레무트가 이렇게 되었다면 당신은 오히려 쾌재를 부르며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당신 손에 들어오든 죽든 어쨌든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거잖아.”
본래 ‘샤를리즈’였다면 자신을 거부해 왔던 아스킨의 불행을 즐겼을 것이다.
좋아하고 즐기며, 죽는 것보다 내 노예가 되는 것이 낫지 않겠냐며 제안하고 조롱할 인물이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있는 자리는 본디 제 것이었던 것 아니었나요?”
플로리아가 한 말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샤를리즈는 심장이 떨려 왔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응시했지만.
“뭐가 원래 네 것이라는 거지?”
“전 매일 밤 꿈을 꿨어요. 미래의 순간들, 지금 이 시간들을요.”
플로리아의 얼굴에선 웃음이 걷힌 지 오래였다.
샤를리즈는 아주 잠깐, 역할이 뒤바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사람이 그 꿈과 같은데, 왜 공녀님께서만 다른 거죠? 저는 그저 꿈에서 나온 대로 했을 뿐이에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리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샤를리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얘가 지금 무슨 개소릴 하는 거야?
모든 것이 왜 이치대로 흘러가지 않았는가.
여기서 이치 대로가 ‘원작대로’라는 말과 같은 뜻이라면.
‘난 뒈져야 한다는 소리잖아.’
악녀 샤를리즈는 죽어 마땅한 인물이 된다.
아니, 죽을 것이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플로리아는 지금 샤를리즈에게 왜 죽지 않는 거냐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모습이 소설 속 모습은 아닌 것 같단 느낌이 들긴 했는데.’
샤를리즈는 화를 내는 대신 차분히 생각했다.
사실 한편으로는 지금 많이 놀란 상태였다.
‘미래를 안다고? 꿈으로 꿨다고?’
지금 한 말을 정리하자면 플로리아는 자신의 미래를 꿈으로 꿨다는 듯했다.
그 미래란 샤를리즈 자신도 아는 원작의 내용이었다는 것 같고 말이다.
그렇다면 플로리아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자기가 본 미래에선 분명 폭군 옆에 있는 게 본인이었을 테니 말이지. 그럼 지금 옆에 있는 것도 당연한 얘기긴 하지.’
물론 어디까지나 플로리아의 입장에서의 이야기다.
이 논리라면 앞서 말했듯 자신은 죽어야 할 인물이 되어 버리니까.
여기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자신이 왜 죽는단 말인가.
‘하지만 이젠 알겠어.’
플로리아가 원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자신에게 좋은 방향은 아니란 걸 말이다.
애초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샤를리즈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런 개꿈 같은 거 말고, 나중에 나한테 유언 내용이나 보내.”
“…….”
“읽고 버려 줄 테니까.”
샤를리즈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샤를리즈는 인상을 설핏 찌푸렸다.
‘아니, 쟤는 왜 자기가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거야? 맞은 건 난데.’
뒤에서 자그만 말이 들려왔다.
“……기백이 대단하시네요. 이곳까지 공녀님을 모시고 온 게 누군지 모르겠으나, 빨리 돌아가서야 할 거예요.”
고개를 돌리면 플로리아의 눈이 보였다.
샤를리즈는 이곳에 와서 수많은 눈을 보았고, 덕분에 사람의 감정을 잘 읽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곧 황제 폐하께서 이곳으로 오실 테니까요.”
저토록 복잡한 눈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저 플로리아의 태도는 너무나 뒤죽박죽이었다.
자신을 향해 연예인을 본 팬인 양 굴던 태도가 가식처럼 보이진 않았으나, 하는 행보는 전부 자신을 훼방 놓고 방해하는 짓뿐이라니.
더는 저 여인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샤를리즈는 그대로 감옥을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플로리아는 천천히 깊은 지하 감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무얼 잘못 말했나. 아니면 성급하게 말해 버린 걸까.’
* * *
철창 안쪽에 있던 아스킨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발소리. 게다가 가볍다.
혹시 샤를리즈일까?
그녀가 돌아온 걸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스킨은 애타는 눈으로 철창 너머를 응시했다.
곧 그의 얼굴로 실망이 스쳤다.
가까워질수록 전혀 다른 사람의 발소리였다.
게다가 소리만으로 느껴지는 불길한 감은 틀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곧 마법등 앞에 얼굴이 드러나자 아스킨은 붉어지려 하던 얼굴을 풀어내며 그대로 벽에 기대 눈을 감아 버렸다.
“제국 최고의 검사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이라니, 참 어울리지 않네요. 공작님의 위명은 제가 있던 왕국까지 자자했는데 말이에요…….”
“…….”
“지금은 죽음을 앞두신 소감이라도 물어야 할까요?”
“…….”
플로리아는 아스킨의 무시에도 별다른 불쾌한 티를 내지 않았다.
“저와 대화하기 싫으신 거구나. 그럼 질문을 할까요? 황제 폐하 앞에서 왜 저를 밀고하지 않으셨나요? 제가 몹시도 수상하셨을 텐데 말이에요.”
“…….”
“저를 밀고하지 않았다는 건 혹시 제 제안을 한 번쯤 고려하신다는 뜻이려나요?”
플로리아의 가는 손에는 청동 열쇠가 들려 있었다.
바로 아스킨이 갇혀 있는 철창의 열쇠였다.
곧이어 ‘딸깍’ 소리가 들렸다.
플로리아가 감옥 문을 여는 소리였다.
아스킨은 이 소리에 아주 찰나 반응하긴 했지만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사실 지금부터는 당신이 무엇을 하든 결과는 정해져 있을 거예요. 사형대로 가게 될 테니까요.”
플로리아는 아스킨 앞에 쪼그려 앉은 채 턱을 괴었다.
희고 청초한 얼굴은 이 눅눅한 감옥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건 변하지 않을 거예요.”
플로리아는 그럼에도 어쩐지 이 장소가 퍽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건 자신이 살아온 인생 대부분의 환경이 이런 곳이었기 때문일 터였다.
“당신에 충정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똑똑히 보셨죠? 지금 제 손을 잡고 저기 열려 있는 문으로 나가세요.”
플로리아가 그의 옷자락에 뻗었던 손은 아스킨의 한마디에 우뚝 멈췄다.
“거기서 더 뻗는 순간 넌 죽는다.”
차가운 목소리에 플로리아는 피식 웃었다.
“사람은 다 죽는 거 아니겠어요?”
“…….”
“참 이상해요. 공녀님도 그렇고 당신도 참 내가 꿈에서 보았던 것과 다르니 말이에요.”
자신의 꿈속에서 아스킨은 여동생을 잃고 처절한 얼굴로 복수를 바랐다.
다름 아닌 ‘샤를리즈’의 죽음을 원하며 자신에게 제의했고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한데 이 나라에 도착하여 보니, 샤를리즈와 아스킨은 철천지원수라 보기 어려운 관계였다.
오히려 서로가 티를 내지 않을지언정 애틋해 보이기까지 했다.
“정말 절 죽이실 거라면 죽기 전에 용기를 내야죠.”
플로리아는 다시 한번 아스킨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손을 내밀고 난 뒤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더 이상 달콤한 유혹이 아닌 협박에 가까웠다.
“전 의뢰받은 것이 있다 보니,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원망하진 말란 말은 하지 않을게요.”
“…….”
“당신의 동생이 무사하길 바란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것이에요.”
아스킨은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여인을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부들거리는 손을 꽉 쥐는 것으로 화를 억눌렀다.
“그딴 소리 집어치우고, 의심 가는 놈을 말하라니까. 그 아리아가 날 여기 보냈어. 알아?”
“…….”
“그 애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
그가 이 순간 믿을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