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분명 아리아는 샤를리즈를 찾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그녀가 아리아를 보호하고 있다는 말이겠지.
“가라.”
“충신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충심에 하나뿐인 가족마저 저버리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아스킨은 어렵지 않게 이 기회가 함정이란 걸 알아보았다.
아니, 그리 생각했다. 자신이 제 발로 이곳에 나가는 순간부터 죄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짓지도 않은 반역죄 말이다.
“너 또한 의뢰를 받아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나? 무엇이 됐든 넌 내가 반드시 내 손으로 처리하겠다.”
“그럴 기회를 방금 잃으셨는데, 후회가 취미이신가 보네요”
플로리아는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나가며 철창이 다시 잠겼다.
플로리아는 열쇠를 손에 쥔 채, 여전히 눈을 감고 쳐다보지도 않는 아스킨에게 말을 남겼다.
“아, 그리고 당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공녀님께도 위기가 찾아올 거예요. 당신 때문에.”
그때였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아스킨이 벌떡 일어나 눈깜짝 할 사이에 창살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강한 힘인지 철창이 일순 흔들렸다.
아스킨이 맹수처럼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온몸에 힘을 주었다.
“너 같은 인간이 건드릴 사람이 아니다. 그녀가 누군지 알기나 하는 거야?”
“그러게, 기회를 걷어찬 건 당신이라고 했잖아요? 나도 이렇게 되지 않길 바랐지만. 어쩌겠어요? 계약에 묶여 있는 몸인 것을.”
아스킨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플로리아에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저 여인을 구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 * *
나는 방문 앞에 선 채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최상의 결과는 아스킨을 직접 데리고 오는 거였지만.’
생각보다 더 오빠 놈이 미쳐 있었지.
플로리아는 더는 주인공이라 생각되기는커녕 다른 사람이라 생각해 보면 좋겠고.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데다 원작, 즉 미래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차피 원작은 의미 없어진 지 오래야.’
이 소설에서 악의 원흉은 알츠베이트 공작과 샤를리즈.
하지만 그 샤를리즈가 노선을 바꿔 아리아를 죽음으로 이끌지 않았고, 아스킨과도 끝내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되지 않았다.
‘원수는커녕 진하게 입이나 맞추고 왔지.’
다시끔 생각나는 장면에 나는 얼굴을 비비다 말고 손끝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이미 행한 일엔 후회하지 않는다.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내 최선이었으니까.
그러니 선택했으면 이제 밀고 가자.
‘이 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으니까.’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리아에게 빈손으로 돌아온 내 모습을 보여 줄 자신이 없었지만.
들어가야만 했기에 자신에 마음부터 다잡았다.
곧 결연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아리아.”
“언니!”
방에 있던 아리아는 쪼르르 내게 달려왔다.
운 건지 눈 밑이 빨갰다.
“언니, 오셨어요? 오빠는요? 저희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
“진정해요. 일단 아스킨은 무사해.”
나는 망설이다가 끄응 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나오는 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
당장이라도 눈물을 보이면 어쩌나 생각하며 나는 손수건부터 찾았으나, 아리아는 끝내 울음을 참아냈다.
“응. 언니가 그렇게 말하면 믿을래요.”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언니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나는 쓰게 웃었다.
“내가 당장 꺼내 주지 못해서 미안한걸.”
“아니에요. 언니마저 없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고마워요 언니.”
그 말은 애석하게도 내게 책임감을 불러일으켰지만 애써 티내지 않았다.
아스킨을 잡아들인 것이 폭군 오빠 그놈이라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놀랍게도 나는 그놈을 진짜 오빠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운 정도 정이라더니 참 무섭지.’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사람의 인연이란, 정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이던가.
내 몸이 아닌 몸을 빌려 활동하는 동안에 나는 이곳의 사람들과 깊은 연을 맺고야 말았다.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내가 과연 돌아간다고 한들 원래대로 살 수 있을까.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아.
‘돌아가면 나는 혼자니까.’
가족이 모두 죽었다. 친척조차 없다.
처음 신에게 미션을 받았을 때는 돈만 많다면 외로움 정도야 즐길 수 있을 거라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이는 ‘샤를리즈’의 몸에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거란 걸 확신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단 아스킨을 꺼내고서 생각하자.’
상념을 뒤로 한 채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일단 직면한 과제부터 해결할 때였다.
“아리아, 잘 들어요.”
플로리아가 마지막에 나를 협박한 것.
“모든 사람이 그 꿈과 같은데, 왜 공녀님께서만 다른 거죠? 저는 그저 꿈에서 나온 대로 했을 뿐이에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리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말의 내용과 다르게 아스킨은 구금되었다.
원작의 내용과 전혀 다른 상황이다.
‘만약 플로리아의 계획 안에 아스킨을 제거하는 일이 있을까? 아스킨은 마지막까지 자기 결백을 주장하고, 혐의를 제대로 밝히지 않은 채 죽인다면 제국민들의 반발이 심상치 않을 거야.’
아스킨은 귀족들 사이에서 알츠베이트의 꼭두각시니 빚쟁이니 남몰래 조롱당하지만.
어쨌거나 국민들에겐 영웅이었다.
‘만약 죽이더라도 어떻게든 혐의를 인정하게 하거나 포장하려 들 거야.’
가장 쉬운 방법은 아스킨의 의지를 꺾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혐의를 인정하게 하는 것.
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아리아를 이용하는 거다.
‘죽게 둘 생각도, 아리아를 이용하게 둘 생각도 없어.’
“내게 아무도 모르는 별장이 하나 있어요.”
한때 내가 아스킨과 완전히 어긋나고 막살기로 결심했을 즈음.
가장 먼저 한 일은 이 샤를리즈가 뭘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거였다.
돈을 쓰려면 내가 얼마나 있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러면서 알게 된 건데.
‘샤를리즈는 생각보다 숨겨 둔 재산이 많았어.’
드레스 숍에 가는 척 은행도 가 보고, 방을 뒤져 보기도 했다.
‘샤를리즈’는 제멋대로에 표독스럽고 사치스럽기까지 한 악인이었지만.
멍청하거나 우둔하진 않다는 걸 알았다.
그 알츠베이트 공작 몰래 숨겨 둔 재산도 있더라?
심지어 차명 명의로 말이다.
“아주 멀진 않거든요. 지금 당장 출발하면 오후나 저녁쯤에 도착할 거예요. 돈을 좀 써 놔서 지금도 관리가 잘 되고 있단 걸 최근에 확인했고요.”
알츠베이트 공작이 끝내 나를 억지로 결혼을 시키든 뭔갈 시키려 들면 확 거기로 튀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그 인간의 약점을 수도에 배포할 생각이었는데.
“아리아, 잘 들어요. 당신의 오빠는 잘 버티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버티기 위해선 당신이 안전해야 해요.”
나는 아리아의 양 어깨를 잡고 이야기했다.
조금 놀라는 듯하던 아리아는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어요……!”
“좋아요, 지금 제트를 붙여 줄 테니까 함께 떠나요.”
나는 서랍으로 가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여차하면 튈 때 가져가려고 미리 준비했던 주머니로, 안쪽에는 당장 쓸 수 있는 돈은 물론 팔 수 있는 보석과 패물, 혹시 몰라 시세를 정리해 둔 표도 있었다.
“제트, 너도 들었으니 내가 뭘 말하려는지 말 안 해도 알겠지?”
“예.”
제트는 대답하는 동시에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향했다.
“공녀님의 명은 언제나 충실하게 이행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자리를 비우면 그간 공녀님의 호위에 공백이 생깁니다.”
“충분히 감안한 사실이야. 지금 우리는 아리아가 다치거나 납치당하는 게 더 큰일이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견딜 수 없을 거야.”
아스킨에게만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리아는 놀란 듯 나를 쳐다보다가 내 팔을 꼬옥 껴안았다.
“아리아, 나는 널 동생처럼 여겨.”
“언니…….”
“그러니까 약속해. 네 안전을 제일 우선으로 여기는 거야. 그게 나와 아스킨이 바라는 일이야.”
“약속할게요.”
그렇게 제트와 아리아가 저택을 나섰다.
나는 두 사람이 마차를 타고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안심하며 스르륵 주저앉았다.
‘좋아, 급한 일은 하나 해결했고.’
이제 제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알츠베이트 공작 그 영감과 대담을 나눌 차례였다.
일단은 한숨 자 둬도 괜찮겠지? 아주 조금만.
노곤함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쾅쾅쾅!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음? 깊이 잠들었나 보네. 많이 피곤했나.’
하긴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정이었다.
고개를 돌리다 말고 나는 깜짝 놀랐다.
‘밤?’
창문 밖은 깜깜한 밤이었다. 저녁도 아니고 밤.
아리아가 비밀 별장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왜 제트는 돌아오지 않은 거지?
지금 문을 쾅 두드린 사람이 제트일 리가 없었다.
혹시 제트가 문밖에 기다리고 있을 상황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랬다면 누가 감히 내 방문을 사납게 두드리게 둘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제트에겐 언제든 내 방에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을 내려 둔 지 오래였다.
‘무언가 잘못됐다.’
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