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다시끔 울려 퍼지는 거친 노크에 눈을 찡그렸다.
참을성이 다한 건지 노크의 주인은 불쑥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내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누구야?”
일부러 날카롭게 말하는 동시에 인물을 살폈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부관이었다.
“휴식을 방해하여 죄송합니다, 공녀님. 다름아니라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지금은 못 간다고 전해.”
제트도 없는데 함부로 움직일 순 없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타의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실 줄 알고 공작님께선 제게 명을 하나 더 내리셨습니다.”
“…….”
“어떤 상황이든 공녀님을 모셔 오라고 말입니다.”
부관은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자신의 뒤쪽을 보여 주었다.
부관의 뒤로 기사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었다.
‘그 망할 영감이 나를 묶어서라도 데려오라는 지시를 내린 모양이네.’
쇠사슬이며 줄이며,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웃기네. 지금 나 같은 연약한 사람 하나 데려가겠다고 저 건장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 사슬씩이나 챙겨?”
“…….”
“기사의 긍지라곤 쓰레기와 바꿔치운 놈들이군.”
내 말에 기사들이 움찔하거나 시선을 살짝 돌렸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독스러운 눈으로 부관을 향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안내해.”
부관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긴장을 숨기며 뒤를 쫓아 5분쯤 걸었을까.
‘뭐야, 기사가 왜 이리 많아?’
알츠베이트 공작의 집무실 앞은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멤돌았다.
병기로 중무장한 기사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마치 전쟁을 코앞에 둔 살기를 띠고 있었다.
‘뭐야, 흡사 반역은 이쪽에서 준비하는 것 같은…….’
나는 눈을 설핏 찌푸렸다.
그들의 모습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알츠베이트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찾으셨다고요?”
알츠베이트 공작은 쇼파에 홀로 앉아 있었다.
“일단 앉거라.”
평소와 전혀 다르게 얼굴에 노기가 어린 모습이다.
원래 등락이 심했던 영감이라, 나는 개의치 않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네가 미쳤구나. 반역자를 찾아갔다고?”
오, 그게 이렇게 벌써 퍼지나?
“말은 바로 하셔야죠. 반역자가 아니고, 반역의 혐의를 받은 자. 더 정확하게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자라고 해야죠.”
“네 눈에 뭐가 씌인 건 분명하구나, 내 손녀야. 지금은 그놈의 반역 혐의가 사실이든 아니든 하등 중요한 게 아니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이미 갇힌 시점에서 게임은 끝났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죽을 놈이니 신경 꺼라, 뭐 이런 건가?
“전 이만 돌아갈게요.”
“네가 그따위로 행동하니 황실에서도 그 수모를 당하는 것이 아니더냐?”
흐음? 나는 눈을 돌렸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손짓하자 문쪽에 대기하고 있던 건장한 기사들이 다가왔다.
저건 필시 나를 붙잡으려는 몸짓이었다.
나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촛대를 들어 빠르게 빈 초를 쳐 떨어트린 뒤 내 목으로 가져다 댔다.
“아직 제가 필요하시죠, 할아버지?”
“뭐 하는 게냐, 진정 미친 것이냐!”
“미쳤으면 이러고 있겠어요. 할아버지 머리부터 후려쳤지.”
“당장 샤를리즈를 붙잡아!”
“멈춰. 움직이면 나 정말 찔러 버릴 거야. 내 목.”
촛대의 뾰족한 부분이 목을 더욱 찌르자, 기사들은 움찔하며 움직이지 못했다.
알츠베이트 공작 또한 경악한 얼굴, 그러나 분노한 얼굴이면서도 더는 명을 내리지 못했다.
‘역시, 붙잡아 억지로 뭔가 시키려던 모양이지.’
뭘 시키려 했는지는 익히 예상이 갔다.
“왜요, 혹시 뭔가 꾸미던 일이 끝날 때까지 저를 어디 가둬 두려 하셨나 보죠? 추후에 가장 비싼 값에 팔아치울 때가 올 때까지? 이거 어쩌나. 나는 내 맘대로 안 되면 콱 죽어 버릴 생각인데.”
“……샤를리즈. 이 철없는 것. 당장 그걸 내려놓거라.”
“어디, 순순이 말을 들었으면 제국 최고의 악녀 소리나 들었겠어요? 내 이런 점은 사실, 할아버지를 닮은 거죠.”
“…….”
“못되고, 남을 등쳐 먹고, 이기적이고, 사람 우습게 알고.”
“…….”
“얼마나 닮았어.”
나는 씩 웃었다.
“그래서, 반역 혐의는 아스킨 레무트에게 씌워 두고, 무슨 일을 벌이려고 했나요,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말하자, 집무실엔 조용한 침묵만이 머물렀다.
“아. 황제가 되고 싶으셨나?”
알츠베이트 공작의 얼굴에서 일시에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일갈했다.
“네게 황녀의 위를 되돌려 주는 것뿐이란다, 내 손녀야.”
“…….”
“그래, 네 말대로 이 할애비가 황제가 되어서 말이다.”
나는 히죽 웃었다.
아스킨에게 정보를 듣는 순간, 아니 듣기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차일드 백작은 반역을 꿈꾸고 있다. 그들의 자금력은 실로 대단하긴 했다.
이미 아스킨의 빚을 대신 탕감해 줄 정도의 재력이 있던 상황에, 새로운 로드의 주인이 되기까지 했으니.
그러나 그들이 속으로 숨긴 재력과 세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이것만으로는 황실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계획엔 ‘머리’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아스킨이 잡혀간 뒤로 제아무리 플로리아가 록시디언 옆에서 무언가를 해서 그놈을 현혹했다지만…… 의아할 정도로 귀족들이 반발을 하지 않아.’
귀족들의 여론을 뒤에서 통제하는 이가 있다면 어떨까?
그렇게 떠오른 사람이 바로 내 외할아버지 알츠베이트 공작.
“아아, 시선은 레무트 공작으로 이끌고서, 할아버지는 남몰래 다른 놈들과 손을 잡고 뒤를 덮칠 궁리만 하셨단 거군요. 아주 훌륭할 정도로 음침하고 간악한 계획이에요. 남이야 죽건 말건 내 실리만 취하는 멋진 계획이네요. 안 그래요?”
“그래, 남을 이용하는 것이 뭐가 나쁘더냐? 결국 당한 놈이 멍청한 것이지. 내 손녀야.”
공작 또한 나와 비슷한 얼굴로 웃었다.
“오, 지금 너처럼 말이다.”
무슨 말이야, 찡그린 순간 뒷목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윽, 젠장 뒤에서 온 건가…….
낭패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걱정 말거라. 죽이진 않으마, 내 손녀야. 너는 아직 이용 가치가 무궁무진하니 말이다.”
“……미친, 새끼.”
“하하하하!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방에 있거라. 이 할애비가 특별히 봐줘서 외롭지 않게 손써 두마.”
알츠베이트 공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고,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꽤나 어둑한 방 안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손발은 묶지 않았나.’
나는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몸이 멀쩡하다는 걸 확인했다.
좋아, 멀쩡하니까 이제 이곳이 어딘지 조사를…….
“공……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낮고 희미한 목소리에 모든 생각이 싹 사라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벽에 기댄 커다란 인영이 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다가갔다.
“제트, 세상에 너 괜찮아?”
제트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작게 기침했다.
이도 잠시, 기어이 몸을 반듯하게 일으켰다.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데다가 얼굴에 멍이 가득했다.
얼굴이 이 정도라면 보이지 않는 곳은 더 심할 것이다.
나는 작게 찌푸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공녀님…….”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 봐야, 믿기겠어? 상황을 한번 말해 봐.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감수할 테니까.”
최악의 상황이어도 잘만 하면 모든 상황엔 타개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우선 아리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레무트 공녀님께서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셨습니다.”
제트는 자신이 아리아를 무사히 데려다주고 돌아와 알츠베이트 저택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습격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힘이 빠져 제트 앞에 털썩 앉았다.
‘일단 정말 다행이네.’
아리아까지 잡히는 상황은 피했다.
“일단 최악은 피했네. 몸은 어때?”
“괜찮…….”
“정확하게 얘기해. 사실만.”
“……팔이 부러졌습니다. 다른 곳은 괜찮습니다. 멀쩡합니다.”
“멀쩡하긴 뭐가 멀쩡해. 검사가 팔이 부러졌다는데.”
나는 울상을 지었다.
얼굴을 거칠게 비비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못난 주인 만나서 고생하네 너도.”
“아닙니다. 쿨럭…….”
“무리하지 말고 있어. 방은 내가 살펴볼 테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문에 다가갔다.
당연하겠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공녀님께서 기절하셨을 때, 문 밖에서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 못질을 해 뒀을 겁니다.”
“미친 새끼네, 이거. 지 손녀 가두는 걸로 모자라 못질까지 해?”
“…….”
나는 성큼 창문으로 향했다.
창문도 열리지 않았을뿐더러, 대체 언제 어떻게 해 둔 것인지 단단한 나무로 봉해져 있었다.
창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바깥은 간신히 볼 수 있었다.
“만약 나간다면 문보다는 창문이겠지? 한 4층이나 5층쯤 되어 보이는데 어떡해야 하나.”
이곳엔 팔이 부러진 제트뿐이고.
나는 곰곰이 고민했다.
‘혹시 이건 어떠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