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 *
“큰일인데. 비 때문에 뛰어내리긴 어렵게 됐어.”
제트가 멀쩡해진 덕분에 우리는 창문을 부수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흐리고 비가 조금 오던날씨였다.
쏴아아아!
날씨가 금세 바뀌어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뛰어내리는 건 아무래도 위험 요소가 많다고 주장하던 제트는 더욱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이렇게 되면 더더욱 공녀님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 또한 날씨를 보니, 제아무리 제트를 믿는다지만 나를 안고 뛰어내리란 말은 못하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저 비가 쏟아지는데, 내가 창문 밖으로 나가 무슨 스파이처럼 옆 창문으로 넘어갈 자신도 없었다.
‘제트만 내보내기에도 불안 요소가 많아.’
문제는 높은 확률로 근처의 창문이 우리 방 창문과 비슷한 상태일 거란 점과 아래쪽에 알츠베이트 공작이 감시를 꽤 많이 붙여 두고 갔을 거란 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트가 회복하지 못할 거라 생각해 아주 많은 숫자는 아니란 점이었다.
‘이를 어떡한다…….’
지금 상황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시간 싸움이었다.
또 다시 방 안에 침묵만이 맴돌던 때에, 방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보다도 제트가 기민하게 반응했다.
“공녀님, 이건 분명 싸우는 소리입니다.”
한발 늦게 알아차렸지만 내게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래, 나도 듣고 있어.”
싸움이라니, 갑자기 알츠베이트 저택 내부에서?
밖이 심상치 않았다.
방 안엔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없었지만 제트는 솜씨 좋게 침대 기둥을 부러트려 몽둥이 비슷한 것을 들었다.
“괜찮겠어? 검이 아닌데.”
“성기사는 폭도나 이단자를 제압하기 위해 이런 몽둥이와 비슷한 무기를 다루는 훈련을 받습니다. 괜찮습니다.”
성기사 세계도 꽤 살벌하네. 나는 끄덕이며 문을 응시했다.
나 또한 혹시 몰라 몰래 손에 부서진 나무 조각을 하나 든 채였다.
‘전력은 되지 않겠지만 여차저차 인질이라도 되면 콱 찔러 버려야지.’
제트가 내 앞을 지키듯 가로막았다.
콰앙!
이내 커다란 굉음과 함께 잠겨 있던 방문이 열렸다.
문 틈으로 들어오는 누군가의 모습에 제트가 망설임 없이 나서는 순간이었다.
“제트, 잠깐만! 멈춰!”
제트를 멈춰 세우는 동시에 들어온 누군가가 내게 허리를 깊숙하게 숙였다.
나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샤를리즈 공녀님을 뵙습니다.”
다정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와 인사, 모를 수가 없었다.
눈앞의 인사를 올린 남자는 이안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다소 짧아지고 살이 조금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이안, 네가 어떻게 여길…….”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필요할 때 곁에 있고 싶다고.”
이안의 뒤로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제복과 갑주를 걸친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의 뺨과 몸에는 피가 튀어 있었다.
게다가 다시 보니 이안의 몸에도 여기저기 붉은 흔적이 있었다.
‘이 사람은 적인가, 아군인가.’
나는 짧은 순간 고민했지만 이내 판단을 내렸다.
“제트, 무기 내려.”
“하지만 공녀님.”
“괜찮아. 내가 그리 판단했어.”
제트가 곧 무기를 내리는 동시에 옆으로 살짝 비켜났다.
“약속을 지킬 줄 알는 남자라,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정말 달라졌네 당신도.”
이안은 답지 않게 조금 어색하게 웃다가, 이내 본연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곧 진지한 얼굴이 스쳤다.
“샤를리즈 공녀님, 제가 소식을 듣고 달려오긴 했습니다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다 알고 온 건지,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진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길어. 그냥 요약해서 보는 바와 같아.”
나는 이안에게로 다가가, 바닥에 버려진 못을 툭 발로 찼다.
“말을 듣지 않으면 가둬서라도 이용한다. 알츠베이트의 민낯이라고나 할까?”
“…….”
“아무튼 구해 줘서 고마워. 네가 오지 않았다면 저기서 정말 뛰어내릴까 했거든.”
비가 세차게 내리는 창문을 보며, 이안이 잠시 숨을 삼키는 것 같았다.
“……이것 참, 달려오길 정말 잘한 것 같네요. 일단 여기서 나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사실 내가 봐도 미친 짓 같긴 했기에 이안의 표정이 저런 것도 충분히 이해했다.
저기서 뛰어내리면 높은 확률로 중상일 것 같긴 하더라.
이안이 나를 호위하기 위해 옆에 서자 반대편으로 제트가 자리했다.
나는 제트를 가만히 불렀다.
“제트, 너도 끝까지 함께할 거지?”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래, 그럼…….”
나는 이안을 한번 보았다가 다시 제트를 응시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갈등이 스쳤지만 이번에도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리아에게 가 봐. 가서 무사한지 확인하고 돌아와 줘.”
“공녀님, 하지만.”
“나도 고민했지만 여기 있는 이안을 신뢰하기로 했어.”
알츠베이트 저택에 기사들을 이끌고, 그것도 제 얼굴을 숨기지 않고 들어왔다.
이건 이안 또한 각오를 굳혔다는 소리다.
‘차일드 백작과 알츠베이트 공작은 손을 잡았어.’
알츠베이트 공작이 이 사실을 알면 가만두지 않을 것임에도 이렇게 행동했단 소리니까.
“내가 이 저택을 빠져나오게 된 이상 우리에겐 이제 아리아가 인질로 잡히지 않는 게 아주 중요해졌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나는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이안과 바로 황성으로 달려갈 거야.”
감이지만 그곳에 가면 어떻게든 결론이 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강한 예감은 내가 막 이 몸에서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는 이어서 고심 끝에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만에 하나, 정말 만약이라도 아리아가 별장에 없다면…… 이렇게 해.”
나는 제트에게 몇 가지 명령을 내렸고, 내 기사님은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끝끝내 항명은 하지 않았다.
제트를 보내고 이안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돌연 헛웃음을 지었다.
곧 웃음소리가 작게 마차에 울려 퍼졌다.
“하아, 정말 재밌네.”
이 상황이 새삼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안, 네 부친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진 알고 있지?”
“예,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반역에 대한 건 제가 공녀님께 알려 드린 것을요.”
평온한 목소리였지만, 이안의 표정으로는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이안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이 반역이 어떻게 되든 간에 이안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반역이 성공하더라도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 반역이 실패하면 집안을 배신한 후계자가 된다.
어느 쪽이든 배신자 소리를 들을 줄 알면서도.
“고마워.”
나를 구한 거야.
“아닙니다, 그저 제가 한 말을 지키고자 했을 뿐입니다.”
“처음엔 그저 뺀질뺀질한 인간인 줄 알았더니, 정말 다시 봤어.”
“뺀질뺀질……. 하하하.”
이안이 입을 가로막고 살짝 웃었다.
“너나 나나 각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배신했으니, 우리에게 남은 통로는 하나밖에 없다는 걸 너도 알겠네.”
“예, 이 반역을 실패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 맞아.”
나는 고개를 들어 창문을 향했다.
저 멀리 보이는 황성을 보면서 눈을 가라앉혔다.
“어느 인간이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말이지.”
그러고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수호신인 양 만지작거렸다.
* * *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인데도 초저녁 같은 어둠이 내려 어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는 록시디언의 집무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둑하고 까만 색상, 무거운 가구의 배치에 더해 창밖에 치는 번개로 인해 대낮임에도 저녁같이 번개가 선명하게 보였다.
번쩍이는 빛이 이 제국의 황제, 록시디언의 얼굴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어딘가 조금 야위었지만 아프거나 헬쓱해 보이기는커녕 굶주린 짐승처럼 벼려진 모습이었다.
“이 비를 뚫고 여기까진 웬일인가, 알츠베이트 공작?”
자신의 외조부를 부르는 명칭엔 그 어떤 친애의 감정도 없었다.
무감정한 목소리에 알츠베이트 공작은 인사조차도 없이 그저 웃었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옷끝에서 툭 떨어진 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 황실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서 황제 폐하께 직접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라?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옅은 미소까지 띠며 알츠베이트 공작의 말을 넘겨 버리는 록시디언의 모습에 공작은 평소처럼 찌푸리는 대신 비슷한 미소로 받아 주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여유가 넘쳤다.
“그러시다면, 할애비로써 제가 직접 가르쳐 드려야지요.”
“내 기억 속에 날 가르칠 만한 할아버지 따위는 없었던 듯하지만 이왕 온 것이니 내 들어는 보지.”
록시디언이 느긋하게 뒤로 기대며 알츠베이트 공작을 응시했다.
‘그 여유도 곧 끝일 거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저 오만한 시선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권력이 제국 전체에 미친다고는 하나, 그 권력은 황권을 떠받드는 귀족들의 동의 하에 의해 나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