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그런가? 난 제국에 자신들 배를 불리기에 혈안이 된 돼지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
“아아, 실례했군. 훌륭한 귀족들에게 돼지란 오욕을 씌울 뻔했어. 돼지들의 다른 이름이 ‘귀족파’라지?”
알츠베이트 공작의 수염이 잘게 떨렸다.
“……제 질문이 너무 어려웠나 보군요. 조금 더 쉽게 설명해 드리지요. 저희 알츠베이트 가문은, 항상 황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한 행동에 황실을 갖다 붙일 줄은 몰랐군. 그렇게 날 위했다니 뜻밖인데? 이제 감동해 박수라도 치면 되나?”
“……어디 감히 감사 인사를 받기 위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래? 이제 와서라도 인사라도 받겠다는 줄 알았지. 아니면 뭐 훈장이라도 내려 줘?”
건들거리는 록시디언의 행동은 황제가 아니라 뒷골목 건달이라 해도 어울릴 법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예기를 잃지 않는 모습에 알츠베이트 공작은 결국 본론을 꺼냈다.
“자꾸 딴 말씀을 하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단도직입, 나도 그말을 참 좋아하지.”
록시디언이 팔짱을 풀었다.
“그래, 그렇게 빙빙 돌리지 말고 그 더럽고 검은 속내나 빨리 말해 봐.”
“황제 폐하의 정식 사과를 요청드립니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소리는 우렁차고 당당했다.
록시디언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갸웃했다.
“오, 이런 호통도 오랜만이군. 그대는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이렇게 나를 휘어잡으려 들곤 했지.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한 적은 없지만 말이야.”
“…….”
“하하하, 그래, 사과라? 어떤 사과를 줄까.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은 배은망덕한 황제였다고 성명문이라도 주면 되나?”
끝까지 이죽거리는 록시디언의 모습에 알츠베이트 공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조금만 더.
“어제 제 손녀이자 폐하의 여동생인 샤를리즈를 이 성에서 내쳤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무례하게 말이지요.”
“아아. 그 일? 그거랑 사과는 무슨 관계지?”
“샤를리즈, 그 아이는 제국 최고의 귀족 가문 영애입니다! 그런 여인을 수많은 기사가 보는 앞에서 모욕을 주셨으니, 당연히 사죄를 하셔야 합니다.”
웃기지도 않았다. 황제에게 사죄 요구라. 그것도 되도 않는 명목으로?
게다가 설사 사과를 한들 대상은 알츠베이트 공작이 아니라 당사자를 향해야 했다.
“공작, 아주 재미있는 발상이야.”
록시디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인가? 제국 최고의 가문의 주인이 슬슬 노환이 난 모양이야.”
“폐하, 그 말씀도 사죄해 주셔야겠군요.”
“싫다면? 뭐. 이젠 외조부로서 훈계라도 하겠다? 어디, 황실의 검 앞에서도 그리 말해 보게.”
“폐하, 귀족들의 눈이 무섭지도 않으십니까?”
“아아, 무섭군. 이거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는 건가?”
록시디언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알츠베이트 공작 앞에 도착했을 때, 섬광과 같은 속도로 검을 꺼내 공작의 목에 겨누었다.
목 끝에 서늘한 날붙이가 다가왔음에도 알츠베이트 공작은 예견이라도 한 듯 동요없이 자신의 외손자를 보았다.
노회한 공작의 눈으로 증오가 일렁거렸다.
“그간 폐하께서 저희 귀족들과 상의 없이 무수히 독단과 악행을 저지르심에도 저는 폐하를 대변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래서?”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사사건건 훼방을 놓으면 놓았지, 단 한 번도 황제를 대변한 적도 도운 적도 없었다.
록시디언이 이 나라에 세운 공은 오롯이 그의 능력 하나로 일궈낸 결과였다.
“지금부턴 신하로서가 아니라 할애비로서 못난 손주를 훈육해야겠지요. 여기에 더해 이 나라의 충신으로서 기강을 세울 것입니다. 그래야 이 나라가 제대로 설 테니 말입니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눈이 번들거렸다.
록시디언이 싸늘한 시선으로 검을 겨눈 손에 힘을 주려는 순간 알츠베이트 공작이 목 앞에 겨누어진 칼날을 피했다.
이와 동시에 황제의 집무실로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록시디언은 들어온 기사들의 면면을 보며 픽 웃었다.
이들은 황제의 집무실에 당당하게 알츠베이트 가문의 인장이 박힌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감히 황제의 집무실에 병력을 이끌고 온 자를 무어라 하던가.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는군. 이게 다야?”
반역이다.
“록시디언, 네 힘을 자만하지 마라.”
그 말을 무시하듯 록시디언은 앞으로 나선 기사 여럿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이들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졌지만.
어째서인지 남은 이들의 기세와 시선은 더욱 흉흉해졌다.
“고작 숫자는 이것뿐인가? 반역을 꿈꾸는 자들의 결말을 직접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제국의 수많은 귀족 모두를 혼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더냐?”
“썩어 빠진 귀족은 있으니만 못한 돼지들이지. 아직도 내가 왜 황제로 있는지 모르겠나?”
“…….”
“너 같은 놈들을 극복하고 홀로 설 수 있기에 황제인 거다.”
알츠베이트는 기사들과 함께 들어온 부관에게 손짓했다.
부관은 복도로 나가 창밖으로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이와 동시에 록시디언 뒤로는 노아가 공간을 찢고 나타났다.
노아가 록시디언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순간이지만 방 안의 광경을 본 노아의 시선이 오묘했지만, 록시디언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노아, 넌 나서지 마라. 저들에게 이 제국의 법도를 보여 줄 생각이니.”
“예, 폐하. 이럴 줄 알았다면 병력을…… 옮기지 말 것을 그랬습니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닥치기 이전, 록시디언은 돌연 주요 정예 기사들과 병력을 다른 거처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그 거처에는 플로리아가 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록시디언의 근처에는 현재 호위라고 할 만한 병력이 없었다.
복도가 거의 텅 비어 있던 수준이었으니.
“오합지졸 따위야, 혼자서도 충분하지.”
록시디언의 검 끝으로 새파란 기운이 어렸다.
이를 지켜보던 알츠베이트 공작의 얼굴로 야비하고도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가 떠오르고 얼마되지 않아.
타앙!
록시디언의 검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가 검을 놓친 것이다.
록시디언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심장을 부여잡았다.
놓친 검을 가까스로 붙잡았지만, 지팡이처럼 지탱할 뿐, 그대로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갔다.
“하하하하! 위대하신 황제 폐하, 검조차 쥐지 못하면서 무슨 법도를 보여 주신다는 것입니까?”
“……알, 츠베이트. 네가…….”
록시디언은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문에서 걸어 들어오는 누군가를 보았다.
자신을 향해 가엾다는 듯이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는 여자, 플로리아였다.
자신의 거처에 있어야 할 여자가 가는 손을 들어올렸다.
손 끝에는 황금빛이 어려 있었다.
익숙한 금빛이었다.
샤를리즈가 제게 목걸이를 쓸 때 익히 보았던 빛.
“황제 폐하, 무리하지 마세요.”
“……크흡.”
“가만히 계시는 쪽이 오히려 덜 추한 모습으로 남게 되실 거예요.”
“……네가, 독을 탄 것이냐?”
“독이라뇨. 스스로 선택하신 일 아니셨나요?”
플로리아는 화사하게 웃었다.
“내 광증을,”
“그렇죠. 제가 치료해 드리기로 했었죠. 그것이 황제 폐하와 제가 얼마 전에 맺은 계약이었고. 제겐 그런 능력이 있었어요. 그렇죠? 실제로 광증을 제어하실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하아.”
“모든 일에는 부작용이란 게 있는 법이에요, 폐하.”
알츠베이트 공작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한 록시디언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리석은 손자야, 내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고 일러 주마. 내 네가 광증을 치료하기 위해 은밀히 이웃 제국까지 샅샅이 뒤진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정확히는 알츠베이트 공작 또한 차일드 백작과 손을 잡으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록시디언이 어린 시절 광증으로 고생한 사실은 알았으나, 성인이 되어서도 낫지 않아 고생스레 이웃 제국까지 뒤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정보였다.
“……탐욕스러운 돼지 너구리 새끼를 미리 죽이지 못한게, 한이 될 줄이야.”
“플로리아라고 했나? 네가 만든 약은 경우에 따라 광증을 치료하지만 다른 모든 장기 기능을 죽인다고 했는데, 맞느냐?”
“예, 공작님. 그것을 직접 드신 분이 지금 눈앞에 있는 황제 폐하입니다.”
플로리아는 웃으며 록시디언을 보았다.
플로리아와 록시디언은 처음부터 남들이 보듯 불같이 사랑에 빠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연인 따위가 아니었다.
“광증을 앓고 계시지요? 제가 치료해 드릴 수 있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한번 체험시켜 드릴 수 있어요. 경험하시고 결정하셔도 괜찮습니다.”
광증이 없어지는 것은 록시디언의 오랜 숙원이었다.
잠시 평소의 현명함과 이성을 잃은 결정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 결정에 손을 뻗을 수 없을 만큼.
“어머니, 저는 샤를리즈를 해치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해치고 싶지 않아요……!”
록시디언은 ‘정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리석은 녀석. 광증을 치료하기 위해 수상한 자임에도 더욱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치료부터 하려 들다니. 그래서 너는 이 나라에 황제가 되면 안 되는 것이었어.”
피식 웃는 얼굴엔 비웃음이 잔뜩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