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폐하!”
록시디언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그곳에서 노아가 솟아올랐다.
노아는 록시디언의 옆으로 가려 했으나 몇 번이고 악착같이 덤벼드는 기사들의 방해를 받아야만 했다.
이어서 활짝 열린 문 너머 집무실 앞에서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오는 소리는 싸움이 일어났다기보다 황제의 집무실을 지키던 병사들이 일방적인 도륙을 당하는 소리였다.
록시디언은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도 알츠베이트가 마지막 선물이랍시고 지껄인 말들이 결국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처음부터 알아차렸지만 자신했던 것이 낭패였을 터.
이대로 황제가 바닥에 쓰러지는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일어나며 노아를 향했다.
노아는 록시디언을 향해 은밀한 눈짓을 보냈다.
록시디언은 이를 보며 천천히 눈을 감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노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록시디언에게 고정된 틈을 이용해, 양손을 겹쳐 잡았다.
‘이건 몸에 부담이 가서 절대 안 쓰는 것이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군은 여기서 죽어선 안 됐다.
곧 천장에서 거대한 불의 구가 생성되었다. 구가 넓게 퍼지더니 불이 비처럼 쏟아졌다.
“으악, 뭐야, 뭐야!”
“엎드려라! 가구를 이용해 피해!”
“물, 물은 없느냐? 얼른 가져와! 공작님을 보호하라!”
사람들이 혼비백산하거나 엎드린 틈을 타 재빠르게 이동한 노아가 록시디언 옆에 포탈을 열었다.
“폐하, 지금입니다!”
록시디언은 직접 발을 뻗고 싶었지만 이미 온몸에 퍼진 독으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이 틈을 타 알츠베이트 공작이 우렁차게 달려가라고 명령했고 몇몇 기사들이 불을 맞으며 달려왔다.
노아는 빠르게 록시디언을 부축해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알츠베이트 기사들이 뒤를 따랐지만, 아직 채 쓰러지지 않은 황제의 호위병이 달려와 막았다.
간발의 차이였다.
노아와 록시디언이 피신함과 동시에 포탈이 그대로 사라졌다.
플로리아는 록시디언이 사라지는 모습을 당황하지 않은 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록시디언이 완전히 사라지자 고개를 돌렸다.
황망해진 알츠베이트 공작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알츠베이트 공작님, 차일드 백작님을 통해 요청하신 위치들은 전부 파악해 놓았답니다.”
플로리아가 품 속에서 지도를 꺼냈다.
그곳에는 그간 그녀가 모아 온 정보들이 표기되어 있었다.
불의 비는 노아가 사라지고서도 잠시 이어지다가 사라졌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지도를 받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곧 기사들에게 명했다.
“너와 너, 아니. 한 부대 전부 다 움직여라. 여기, 표시된 곳들로 가서 호위병들부터 제압하도록. 투항하는 자는 살려 둬도 좋다.”
“에,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미 이 황성은 알츠베이트의 군사들이 장악한 상태이기 때문에 쉬이 처리할 수 있는 명령이었다.
이런 상황이 되기까지 플로리아의 공이 가장 컸지만, 정작 당사자는 고요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록시디언을 향한 유혹하는 듯한 미소도, 샤를리즈를 향할 때 짓곤 하던 볼이 붉어질 정도로 화사한 미소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는 그녀를 유리 인형처럼 보이게 했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사라진 황제를 추적하기 위해 이런저런 지시를 추가로 내리고 있을 때, 차일드 백작이 이끄는 군대가 도착했다.
백작은 성에서 알츠베이트 공작을 다시 마주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황제의 시체를 찾았다.
분명 그들이 모의한 계획에 따르면 분명 자신이 도착했을 즈음엔 황제가 죽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공작님, 황제의 시체는 어디 있습니까?”
차일드 백작이 록시디언이 사라진 황제의 집무실을 샅샅이 훑으며 말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대답 대신 저벅저벅 걸어 의자에 앉았다.
황제가 앉던 자리에.
그는 앉은 채로 입술을 야비하게 끌어올렸다.
“걱정 말게. 비록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유로 놓쳤지만…… 신이 온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을걸세.”
지극히 평온하다 못해 잔악한 만족감이 어린 얼굴엔 자신의 어린 혈육을 제거했다는 죄책감 따윈 없었다.
“안 그런가, 플로리아?”
“네.”
플로리아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조금 전에 거세게 끌어올린 짐승의 힘만큼 내상을 입었을 것이니, 천천히 죽음을 맞이할 일만 남았을 겁니다.”
차일드 백작은 알츠베이트 공작처럼 평온하지 못했다.
‘시체를 눈으로 보지 못한다니!’
오랫동안 박쥐 같은 삶을 살아왔고 그렇게 연명해 온 그로서는 확실한 것이 아니면 절대 믿지 않았다.
확실한 것만 있다면 세상에 ‘만약’ 따위의 단어가 왜 있겠는가!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느냐?”
플로리아는 온순한 표정으로 더욱 순종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어찌 백작님 앞에서 제가 감히 거짓을 고할 수 있겠습니까? 확실합니다.”
플로리아가 예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이미 걸음조차 걷지 못할 만큼 독이 퍼진 모습을 모두가 보았습니다.”
“……그 말이 진실이어야 할 것이다. 너와 내 계약이 마지막까지 이어져 원하는 걸 얻고 싶다면.”
“…….”
플로리아는 그림처럼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백작에게 살며시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네, 백작님. 약속하신 보답, 잊으시면 안돼요.”
그 말에 차일드 백작의 표정이 그제야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비록 황제의 시체는 보지 못했지만 이 계획은 실패할 리가 없다.
자신은 침몰하지 않는 배에 탄 것이다.
여태까지 그래 왔듯이 말이다.
마침내 백작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 * *
샤를리즈가 탄 마차가 황성 근처에 도착했을 땐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먼저 내려서 주변을 돌아보고 온 이안이 마차 창문를 노크했다.
“황녀님, 멀리 아버지의 군대가 보입니다. 알츠베이트의 사병들도 보이더군요.”
“황실의 병사들은?”
“그게…….”
이안이 우산을 쓴 채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안 보입니다, 이상할 정도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래?”
샤를리즈는 턱을 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알츠베이트 공작과 차일드 백작이 힘을 합한 이 반란이 성공한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성공하는 걸까?
그녀가 아는 제 폭군 오빠는 결코 녹록한 황제가 아니었다.
플로리아의 치마폭에 빠졌다고? 그건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휘하엔 노아라는 유능한 보좌관이 있는데다, 그 외에도 강한 군주로서 자리매김하게 보조한 가신들이 많았다.
폭군으로서 탄탄하게 쌓아 온 강한 황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리 없다.
‘물론 삼국지 같은 걸 보면 하루아침에 망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방심은 너무나 큰 적이다.
역사 속 모든 전쟁의 어처구니없는 패배 안에는 대체로 이 안일함과 방심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도착은 잘 했습니다만, 계획이 있으십니까?”
“일단 마차로 이동을 하면 눈에 띄기 쉽겠지. 마차부터 숨기고 걷자.”
“……비가 너무 많이 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비가 좀 그치면 그때 움직이시는 건 어떠십니까.”
“아니, 쉽게 그칠 비는 아닌 것 같아. 그리고 시간이 없어.”
샤를리즈의 머릿속엔 황실 내부 지도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지난번 폭군을 찾아가 실랑이를 벌인 뒤로, 샤를리즈는 이 몸의 모든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진짜 ‘샤를리즈’가 이젠 허락하겠다고 하기라도 한 듯이.
저 먹구름이 개이고 비가 그치면 하늘 아래서 웃는 사람이 누구일까.
마지막이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걷자. 갈 장소는 내가 알고 있어.”
현재 많은 인원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 게다가 호위였던 제트도 떨어트려 놓은 상황이었다.
이안과 단둘이 움직이는 위험한 수를 두면서까지 샤를리즈는 빠르게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발은 괜찮으십니까.”
“염려 마. 이 정도로 쉽게 나가떨어지진 않으니까.”
편하기만 한 일정이 아님을 직감했기에 애당초 알츠베이트 저택에서 출발했을 때 이미 하녀의 편한 신발을 빌려 신은 지 오래였다.
한참을 걸었을까.
앞장서던 이안이 멈춰섰다.
“……공녀님, 앞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이 냄새가 피비린내라고?”
그렇지 않아도 샤를리즈 또한 이 자욱한 빗속에서도 퍼지는 비릿한 향을 맡은 참이었다.
“예, 비가 와서 희미해지긴 하지만 분명 피비린내입니다. 아니, 이 빗속에서도 맡아질 정도면.”
“누가 엄청나게 죽기라도 하거나, 다쳤다는 소리네.”
샤를리즈의 머릿속으로 딱히 유쾌하지 않은 상상이 스쳐 지나갔고, 샤를리즈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들은 얼마가지 않아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져 있는 장면을 발견했다.
“이런, 숙녀께서 보실 광경은 아니군요. 공녀님 실례하겠습니다……!”
“아니, 됐어.”
샤를리즈는 이안의 손을 밀어내며 빤히 보았다.
‘샤를리즈’의 새롭게 떠오른 기억이 피와 악독함이 가득했던 터라 적응이 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며 관찰했다.
‘이상한데. 저 문양은…….’
시체를 둘러보던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츠베이트 공작가의 기사들이야.”
“네, 그렇군요……. 게다가 갑옷이 깨져 있습니다. 보통 이건 중장비 무기를 가진 이들에게 당했다는 건데, 제가 알기로 이 정도 무기를 수준급으로 다루는 이들, 아니, 단체는…….”
“황실 군대가 아니야?”
“네, 아, 공녀님은 잘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평범한 검으로는 이렇게 부서지고 깨지지 않습니다. 둔기 같은 걸로 후려칠 때 나오는데, 그…….”
이안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샤르리즈의 앞을 가로 막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뽑은 검을 수풀을 향해 겨눴다.
“누구냐!”
샤를리즈 귓가엔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이안의 눈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분명 누군가 있다.’
게다가 여럿, 셀 수 없는 기척이 느껴진다.
하지만 다가오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다가올수록 기척을 숨기지도 않았다.
곧이어 수풀 사이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였다.
“너는……!”
샤를리즈가 깜짝놀랐다.
“벤?”
아스킨의 부관 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