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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83화 (184/194)

183화

“왜 네가 여기에…….”

“알츠베이트 공녀님을 뵙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샤를리즈는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들어가는 ‘알츠베이트’란 이름마저 거슬렸다.

그러나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벤이 상대를 확인하자 수신호를 보냈고, 기다렸다는 듯 뒤쪽 풀숲에서 더 많은 기사들이 등장했다.

이안은 기사들을 보고서도 표정을 풀지 않은 채 평소와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알츠베이트 소속 병사들을 죽인 게 너희들인가?”

벤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죽어 있는 상태였고, 시신을 확인하던 중 인기척이 들려 잠시 숲 속으로 피신해 있었습니다.”

여전히 비가 세차게 오는 탓에 대화를 주고받기 위해선 목소리 크기를 높여야 했다.

벤은 말투는 정중했으나 보이는 얼굴과 시선에 이안을 향한 경계를 숨기지 못했다.

‘차일드 백작이 황성으로 무혈입성했다.’

그는 제 주군이 이안을 경계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으며, 이곳으로 오며 차일드 백작의 모습 또한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이곳에 차일드 백작의 아들이 있다니.

게다가 샤를리즈와 함께였다.

‘공녀님은 최근 레무트 공작님과 긴민한 관계를 가지신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최악의 경우엔 샤를리즈 또한 주군의 편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너희가 저들을 죽이고 우리 목까지 노리는 거라면?”

“저흰 그저 주군을 위해 움직이는 몸입니다. 어찌 두 분의 생명을 노리리라 생각하십니까?”

이안은 겨눈 칼을 치우지 않았다.

샤를리즈가 나서서 이안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어라 할 때였다.

“잠깐 다들 멈춰, 기다려!”

기사들 뒤에서 가냘프지만 강단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를리즈는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 목소리는 분명……!

“아리아?!”

“언니!”

샤를리즈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분명 안전 가옥에 잘 데려다 준 사람이 여기 있었으니까!

‘어째서 여기 아리아가 있는 거지?’

샤를리즈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상황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곧바로 결론을 도출한 샤를리즈가 물었다.

“설마 별장에 침입자가 있었던 거예요?”

“네……. 맞아요.”

아리아가 어렵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눈물 가득한 얼굴로 샤를리즈를 끌어안았다.

아리아의 얘기인즉 이러했다.

제트가 별장에 잘 데려다주고서 한 시간 뒤, 낯선 이들이 자신이 별장의 주인이라며 찾아왔고, 아리아는 불길함을 느끼고 숨었지만.

발각당해서 끌려오게 되었다고.

그렇게 감옥으로 끌려가던 중 황실에 은밀하게 도착한 레무트 기사단과 맞닥뜨리게 되어 구출되었다고.

‘……다행이다.’

여기 이 벤과 기사들이 아니었으면 정말이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발생했을 것이다.

“이안, 경계는 그쯤 해 둬. 이 사람들은 보다시피 주인만큼이나 진실한 사람들이야.”

“충성스러운 자들일수록 주인만을 따를 겁니다.”

“그것도 괜찮아. 여기, 현재 주인이 나를 보호하고 있잖아?”

이안이 고개를 내리니, 아리아가 샤를리즈에게 안긴 채로 야무진 낯을 하고 있었다.

이안은 맥이 풀리는 듯 얼굴을 조금 허물었다.

“못 믿겠다면 나를 믿어, 그럼 됐지?”

이안의 손은 아직 샤를리즈의 손에 잡혀 있었다.

이안은 하는 수 없이 몸에 긴장을 풀었다. 어찌하겠는가. 가족도 가문도 버리고 선택한 사람이었다.

‘공녀님 옆자리에 서는 일은 어쩌면 가능성이 없을지도 모르나.’

이안은 이미 자신이 샤를리즈에게 있어 이성도 연인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곁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그는 지금은 샤를리즈를 자신의 주군으로서, 주인으로서 따르기로 결정한 것뿐이다.

그리고 오로지 이 사람을 믿고 이곳까지 온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더 다시 돌아보는 한편 굳게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제트에게 혹시 모를 상황을 지시한 게…… 전화위복이 되겠는데.’

샤를리즈는 이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벤을 응시했다.

“아리아를 구해 줘서 고마워. 비록 내게 감사 인사를 받으려 한 일은 절대 아니겠지만 말이야.”

“예, 저희는 저희의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리아님께서도 저희의 소중한 주인 중 한 분이시니 말입니다.”

“그래.”

샤를리즈는 벤 뒤의 기사들을 보았다.

벤에게 물으니 남은 인원 및 더 많은 이들이 뒤에 대기하고 있다고 하였다.

“난 이 황성의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알아.”

“……저희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난 아리아와 아스킨 편이지. 그렇다면 너희와 나도 한편 아닌가?”

샤를리즈가 어깨를 으쓱했다.

“믿기진 않겠지만 너희 주군을 구하러 가는 길이었어. 안 그래도 군사가 필요했는데, 이렇게 훈련이 잘된 제국 최고의 정예라면 더더욱 환영이지.”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아리아 님을, 미리 도와주셨다는 것도 잘 들었습니다.”

“됐어. 지금부터 죽음을 각오해야 할 텐데 감사 인사까지야 뭐.”

벤은 자신의 동료들을 한번 보더니 굳은 표정을 보였다.

이뿐 아니라 샤를리즈의 말을 들은 기사들 또한 비슷한 표정이었다.

“저희는 레무트 공작님을 위해서면 언제든지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 아스킨이 부러운데?”

샤를리즈가 농담처럼 말했다.

어쩐지 제트가 잠시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아리아가 미묘한 기류를 알아차리고서 샤를리즈를 꼬옥 껴안았다.

그녀가 아리아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각오는 잘 들었으니, 지금부터는 내 명령에 따르는 게 어때?”

벤은 대답 대신 아리아를 향했다.

아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윽고 샤를리즈는 장소를 이동해 레무트 공작가의 정예를 마주하게 되었다.

용케도 은밀한 공터를 찾아낸 것인지 가득 서 있는 인원에 샤를리즈는 조금 놀랐다.

이윽고 설명 끝에 아스킨의 병사와 기사들이 샤를리즈에게 예를 올렸다.

“자, 그럼 지금부터 성탑에 갇힌…… 왕자님. 아니 공작님을 구하고 악당들을 모두 날려 보내러 가 볼까.”

이안은 앞장 서서 걷는 샤를리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쩐지 자신이 조금 초라한 사람이 된듯한 기분에 살짝 웃었다.

‘이런, 제 이상형이 존경하게 만드는 여성인 것은 또 어떻게 아시고.’

* * *

같은 시간, 노아는 아무도 없는 북쪽 정원에 도착했다.

황실에서 제일 외곽에 있는 정원이었다.

그리고 아스킨이 있는 감옥의 근처이기도 했다.

노아는 어째서 록시디언이 이곳에 오자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명에 따랐다.

‘이런 폐하께서 의식이…….’

마지막으로 목적지를 겨우 뱉은 록시디언이었다.

포탈을 통과할 때만 해도 거의 혼절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세차게 내리는 빗방울에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듯했다.

록시디언이 부축에서 벗어나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노아가 황급히 재차 부축했다.

“……여긴 어디지?”

“황실 북쪽 정원입니다. 말씀하신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하아, 넌 내가 괜찮아 보이냐?”

록시디언이 피식 웃었다.

“……웃을 여력이 있으시다니 괜찮으신가 보군요.”

“하아……. 넌 참 간헐적으로 건방져.”

록시디언은 심장을 꾹 부여잡고는 쿨럭 기침을 토했다.

목구멍을 타고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잘 들으세요, 폐하. 말할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을 테니까요.”

록시디언은 이걸 아무렇지 않게 닦아 냈다.

“당신은 중독될 겁니다.”

록시디언은 흐린 시야를 이겨내려는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노아, 당장 샤를리즈부터 찾아.”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서 공녀님이라니요.”

“넌 아직도 걔를 모르냐? 이 판국에 분명 여기까지 뛰쳐나왔겠지. 망할 망아지 같은 계집애……. 속도 모르고, 쿨럭!”

“폐하! 지금은 폐하의 안위부터……!”

“당장 가. 그 너구리 같은 영감 새끼가 분명, 쿨럭, 무슨 짓을 꾸몄을 거다.”

록시디언은 흐린 얼굴이었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붉은색과 금색을 오가는 홍채 색에 노아가 잠시 멈칫했다.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거냐?”

“……아닙니다.”

“그럼 빨리 가. 명령이자 꼭 지키라는 부탁도 하자. 게다가, 그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난 제국의 황제거든. 쉽게 죽을 듯, 하아, 싶으냐?”

노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록시디언은 한마디를 더 붙였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어서 보내는 거니까 얼른 가. 명령이다. 노아.”

노아는 록시디언의 시선에서 섬뜩함을 느끼고서야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록시디언이 결코 이대로 쉽게 알츠베이트에게 자신이 이룩한 걸 넘겨줄 사내는 아니라고 느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는 명을 받들기로 결심하고서 빗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포탈을 열 수 있지만, 연속적인 사용은 지나친 기력을 요구하는 탓에 노아는 방향을 틀어 근처 마굿간으로 향했다.

곧 말에 올라탄 채 달리는 동안, 노아의 머릿속엔 조금 전 색이 바뀔 듯 말 듯 일렁거리던 록시디언의 눈동자가 떠나가질 않았다.

불안한 기분이었다.

마치 등 뒤로 절대 풀어놓아선 안 되는 엄청난 짐승을 풀어놓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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