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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84화 (185/194)

184화

빗속으로 노아의 모습이 사라지자, 록시디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 휘청이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꽉 쥔 주먹과 조금씩 떨리는 몸은 그가 현재 어느 정도의 고통을 받고 있으며, 초인적인 한계로 참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나 참, 처음 전쟁에 나갔을 때도 이 정도로 방심하진 않았겠군.”

애송이도 아니고. 록시디언은 작게 혀를 차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를 온몸으로 받아 내는 그의 발밑에는 짙은 보라색 액체들이 웅덩이를 이루었다.

비를 맞는 동안에 보라색 웅덩이는 더욱 짙어졌다.

이는 놀랍게도 록시디언이 체내의 독을 빼내는 모습이었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지만 록시디언이 가진 저주 같은 고대 짐승의 힘은 감정의 결함과 폭주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그에게 안겨 주었지만.

세상사 모든 일이 그러하듯 약점만 안겨 주진 않았다.

바로 록시디언이 그 어떤 독에도 당하지 않는 몸을 가지게 된 것 또한 그러했다.

이는 플로리아가 만든 독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렇게까지 영향을 끼친 건 처음이라 그로서도 당황했지만.

“독, 많이 고통스러우실 거예요.”

록시디언은 머릿속에 잔잔하게 울리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렸다.

짙은 보라색 액체가 흘러들어간 곳엔 모든 풀과 꽃이 그대로 시들어가더니 죽어버렸다.

남은 액체는 비에 쓸려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록시디언의 얼굴로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모든 진상은 제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역시,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팔을 물릴 각오도 해야 하는 법이다.

“……어디, 더 밑바닥을 드러내 보거라.”

비가 그쳤을 때 웃는 자는 자신일 것이다.

록시디언은 마침내 멀쩡해진 몸을 하고서 천천히 이동했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알츠베이트 공작이 있는 자신의 집무실 방향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가?”

록시디언이 걸음을 멈춘 곳은 아스킨이 갇혀 있는 감옥이었다.

아스킨이 제압당한 상태라 생각해서인지, 생각보다 기사의 숫자가 적었다.

입구부터 가득 차 있던 병사들은 록시디언의 검에 명을 달리했다.

록시디언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손에 쥔 채 바닥에서 마지막으로 반항하다 죽은 이의 손에서 열쇠를 들어 올렸다.

철컥, 철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킨이 고개를 들었다.

‘간수와 병사들이 바뀌는 순간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건만.’

누가 들어오든 제압할 생각으로 경계하던 아스킨은 나타난 얼굴에 놀랐다.

“레무트 공작, 오랜만이지? 아, 오랜만이라기엔 너무 자주 보나?”

“……폐하.”

“오.”

록시디언이 놀랍다는 듯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직도 나를 황제로 여겨 주는가?”

“……처음부터 황제였고, 앞으로도 황제이실 것입니다.”

불편한 자세였지만 아스킨이 기꺼이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록시디언은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그대 아버지처럼 참 한결같군 그래. 가문의 특징이던가. 대대로 이러기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

“그래서 그대를 두고 도박할 수밖에 없었나…….”

“……예?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

“아아, 미안하게 됐단 소리야.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아군을 속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어쩔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사실 그대가 영영 내게서 충심을 거둬 가는 방향도 생각해 보긴 했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보이는군. 이젠 어쩔 수 없나.”

록시디언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황제가 하기에는 가볍고 장난스러운 모습이었다.

“내 여동생과 그대 사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니. 이것 참 복잡한 기분인데.”

“예?”

“아니, 걔는 늘 그랬거든. 하고 싶은 건 죽어라 손에 넣던 아이 같아 보여도, 마지막엔 늘 알츠베이트 공작의 손에 저지되어서. 포기하고 패악을 부리는 것에 익숙하던 아이였는데.”

“…….”

“그런 애가 머리를 쓰고 끝까지 발악하고, 나와 끝장을 볼 각오로 구하려 드는 게 그대였으니. 이게 사랑이 아니고서야 어찌 설명되겠나?”

“……무슨.”

“무슨은 무슨, 빨개진 얼굴이나 수습하고 말하게, 공작.”

“…….”

록시디언은 쯧쯔, 혀를 차며 아스킨의 쇠사슬과 족쇄를 풀어 주었다.

“짐은 이 제국이 어디까지 썩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대를 의심한 적은 없으나, 이 고초에 대해선 할 수 있는 말이 없군.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록시디언은 들고 있던 검을 아스킨에게 내밀었다.

아스킨은 망설임없이 그의 검을 양손으로 공손하게 받아들였다.

록시디언이 아스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 생각하게. 생각보다 고이고 썩은 물이 커,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괜찮겠나? 이 앞으로 펼쳐질 길을 또 한 번 짐을 따르며 걷는 것이.”

“본디, 황제 폐하께서 명하시면 언제든 내어 드릴 준비가 되어 있던 목숨입니다.”

아스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간청하건데, 이 목숨은 더는 함부로 쓰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살아서 만나고 싶은 이가 있습니다.”

“…….”

“그분께 꼭 돌려 드리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록시디언이 그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래, 그건 짐과 비슷하군. 나 또한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록시디언의 시야로 아주 잠시 여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보이는가 싶더니 사라졌다.

그는 아스킨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고는 물러났다.

“결론이 났군. 죽지 않으면서 모든 걸 해결하면 되는 것 아니겠나?”

조금 전 비장함이 거짓이었다는 듯 과장된 몸짓이었으나, 표정만은 결연했다.

아스킨도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썩어 버린 뿌리들을 자르러 가 볼까?”

* * *

곳곳에 죽어 있는 경비병들이 보였다.

이미 눈으로 익히 확인한 상황이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아리아의 눈을 가려 주어야 하나 고민했으나, 의외로 결연한 표정으로 잘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손을 내렸다.

현재 요란스럽게 돌아다닐 수는 없기에, 주요 일행만 내 안내에 따라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마침내 북쪽 외곽 허름한 장소에 도착했다.

“저, 공녀님 이곳도 이미 습격당한 것 같습니다. 한데 이곳은 대체 왜……?”

“왜긴 왜겠어. 여기가 아스킨이 있는 곳이니까.”

“예?! 중앙 감옥에 계신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나도 그런 줄 알았지.

보통 중죄인은 황성 중앙에서도 지하에 위치한 감옥에 가둔다.

특히나 반역 정도의 죄는 엄중하게 다뤄지기에 필시 이곳에 가두지만.

희한하게도 내가 노아의 안내를 받아서 간 감옥은 그곳이 아니었다.

황성 북부 외곽쪽에 위치한 감옥.

아스킨을 가두기 전까진 쓰지 않는 곳이었다.

‘나도 지금에서야 생각이 미친 거긴 한데…… 정말 중죄인으로 본다면 여기 가둬선 안 되지 않았나?’

이전에는 그저 아스킨이 붙잡혀 간 데다가, 폭군 오빠는 플로리아에 미쳐 눈이 돌아간 듯한 모습을 보이지. 돌아갔더니 감금되질 않나.

빠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적응하느라 놓쳐 버린 부분이었다.

‘여차하면 아스킨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만 하면 빠져나올 수 있던 환경이야.’

그렇다면 폭군 오빠는 사실 아스킨의 결백을 믿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걸까?

자기가 여자에 빠진 사이에 적이 어떻게 움직일지 궁금해서?

보통 이런 방법은 적을 한 번에 소탕할 때 쓰이는 방법 아니던가.

그러니 적을 속이기 위해서 아군도 함께 속였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 새끼가…….”

나는 기쁘기는커녕 부아가 치밀었다.

“고, 공녀님?”

옆에 있던 기사가 흠칫하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오빠 놈의 뺨은 나중에 후려갈기기로 하고.

‘그럼 플로리아와는 대체 무슨 사이였던 거야?’

이 질문도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우선순위는 아스킨을 먼저 구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우리가 한발 늦은 걸까?

아스킨이 갇힌 감옥에는 시체만 가득했다.

게다가 걸치고 있는 옷에 하나같이 알츠베이트의 사병임을 상징하는 문양을 단 채였다.

우리는 안쪽까지 가고서는 곧 얼마 있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스킨이 자력으로 탈출한 걸까?”

“조심스럽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벤이 아래에 쓰러진 자들을 가리켰다.

“공녀님, 이 자들은 모두 뒤에서 당했습니다. 공작님이 계시던 감옥 쪽 방향이 아니라, 이렇게 입구에서 들어온 자에게서 찔렸을 때 이런 모양이 됩니다.”

벤이 검으로 찌르는 시늉을 보였다.

“누군가 아스킨을 도왔다는 거야?”

“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안에 계시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쉽게 당할 인간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아스킨의 조력자는 그 의심 많고 신중한 사람이 믿고 함께 따를 인물이었으며, 이 병사들을 해치울 만큼 대단한 실력자거나 수하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벤의 말로는 같은 칼의 궤적이라고 하니, 홀로였을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은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눈을 좁히며 다음 행보를 생각했다.

‘만약 아스킨이 무사히 탈출했다면, 분명 주변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서 그 고지식한 인간은 황제부터 찾아서 보호하려 했겠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스킨의 성품을 생각하면 자신을 반역자로 인정하고 죽이려던 황제마저 품었을 것을 확신했다.

“모두 이동하자.”

“예? 공작님은…….”

“걱정 마.”

나는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황제랑 있을 테니까.”

나는 서둘러 한곳으로 일행들을 이끌었다.

걸음을 서두르는 동시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엇갈리니 오히려 더욱더 보고 싶어지네.”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당신을 예상보다 더.

아니, 아주 많이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는가 보다. 역시.

그러니 멀쩡히 살아 있길 바라.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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