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샤를리즈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은 제 페이스를 되찾은 사람처럼 싱글벙글 웃었다.
이안 차일드란 인간은 생각하기까지 긴 과정을 거치더라도 결론을 내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키운 건 다름 아닌 제 부친이었다.
“사랑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늘 강조하셨던 정의를 실천하려는 것뿐이지요.”
암. 내 정의는 저기 계신 아리따운, 하지만 고고하신 공녀님께 있지 않겠는가.
물론 내 사랑을 받아 주실진 영원히 모르겠지만 말이지.
이안이 부드러이 웃었다.
“아, 물론 사랑이 제일 크다고 해도 좋겠네요. 역시 미친놈 중에 사랑에 미친놈이 제일이죠, 아버지.”
“……어리석은 놈! 정의란 힘이 있는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 이걸 어찌, 바로 눈앞에서…… 내 힘과 권력을 네게 주려 했거늘!!”
싱글 웃고 있던 이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렇죠. 아버지와 저는 평생 평행선을 걸을 운명이었을 것을, 제가 너무 늦게 인정했으니.”
“…….”
“이 또한 사랑이겠군요, 아버지. 그리고 이후로는 아버지라 부를 일은 없을 겁니다.”
샤를리즈는 부친 앞에서 직접 배신을 고백하는 이안의 모습이 가엾게 느껴졌다.
저야 알츠베이트 공작과 그 어떤 가족적인 유대감이 없었지만, 이안은 달랐다.
가족 같지도 않은 학대한 자에게 복수하는 것과 자신을 키워 주고 가족으로서 함께했던 가족을 버리는 것. 어느 쪽이 더 힘든 일일지는 더없이 분명했다.
더 이상 눈앞의 이안이 스스로에게 잔인해지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로 했다.
샤를리즈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차일드 백작,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이지.”
참으로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황실의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이 황제의 집무실에서 벌써 짧은 시간 내에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것이란 말인가.
이 상황이 드넓은 제국에 퍼진다면 위엄이 가히 구겨질 이야기였다.
“권력만을 탐하면 어찌되는지, 눈앞 표본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샤를리즈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 못하는 알츠베이트 공작을 눈짓했다.
차일드 백작은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겨눠진 검에 가로 막혔다. 벤과 이안이 새파란 시선으로 막아서고 있었다.
“요망한 계집. 악독한 년! 네가 내 아들을 망쳤구나! 제국의 찬란한 미래를 네가 망쳐 버린 것이다, 네년이!”
“어후, 마지막에 가니까 바닥을 드러내네? 뭐가 찬란한 미래라는 거야?”
목청도 좋네. 샤를리즈는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건들거리는 시늉을 하고 싶어도 몸에 베인 예법은 우아하기 그지 없었다.
샤를리즈는 픽 웃고는 바로 앞에서 백작을 마주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까진 네 말대로 내가 네 아들을 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
“백작에 말투를 보아하니 오히려 내가 이안을 바로잡아 준 것 같은데?”
샤를리즈의 여유롭고 느긋한 목소리에 백작은 잠시 숨을 뚝 끊듯이 참더니, 이내 광소를 터트렸다.
조금 전 자신이 주도권을 빼앗긴 알츠베이트 공작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광기로 물들어가는 눈동자가 지나치게 침착했단 점이었다.
“하하, 하하하하……. 대단하십니다. 공녀님.”
“정신이 180도쯤 돌면 너처럼 되니?”
샤를리즈의 주변에 있던 이안과 벤이 경계 태세를 갖추는 것이 느껴졌다.
두두두. 거대한 발소리가 들렸다. 샤를리즈가 뒤를 둘러보자 문쪽에는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병사들이다!”
다수의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 감정에 휩쓸려 적에게 시간을 벌어 주다니. 당신도 당신 할아버지만큼이나 어리석으시군요.”
여전히 목이 겨눠진 채로 히죽 웃는 백작의 모습에 샤를리즈는 당황하는 대신 태연하게 대꾸했다.
“쫄아서 존댓말 다시 쓰는 놈이 말은 많아. 당장이라도 널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
“…….”
“그리고 시간을 준 게 누구라고 생각해?”
“뭐……?”
“넌, 아직도 내가 데려온 이들이 누군지 모르겠니? 멍청하긴.”
샤를리즈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이러니까 너와 내 할아버지의 조급한 계획이 실패하는 거야.”
아니, 어차피 실패할 계획이었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말이야.
샤를리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돌린 차일드 백작은 곧 흠칫했다.
‘숫자가…….’
자신이 생각했던 숫자가 아니었다!
분명 저것보다, 배로, 아니 수십 배로 많아야 했다! 게다가 병사들이 군데군데 상처입은 채였다.
스쳐 지나가는 불길한 상상에 차일드 백작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래, 지켜보자고. 누가 이기는지. 모두 쳐라!”
샤를리즈의 명령에 차일드 백작을 겨눈 기사만 제외하고서 병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샤를리즈는 넋이 빠진 백작을 그대로 둔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알츠베이트 공작에게로 향했다.
“오, 샤, 샤를리즈……!”
“…….”
공작이 손을 덜덜 떨며 샤를리즈에게 손을 뻗었다.
병사들을 상대하는 대신 샤를리즈 옆을 호위하는 쪽을 택한 이안이 검을 겨누자 그대로 멈췄다.
“고, 고맙구나. 이 할애비를 구하러 와 줘서!”
“구하긴 누가 구해?”
샤를리즈가 귀찮다는듯 발로 걷어차자, 공작이 벌러덩 넘어진 개구리처럼 뒤로 나자빠졌다.
그럼에도 공작은 절박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너, 넌, 어릴 때부터 유난히 속정이 깊었지. 내, 딸처럼 말이다!”
“글쎄다, 그 따님은 자기가 낳은 아들만 신경 쓰는 것 같던데.”
“그래서…… 내가 널 더, 애, 애지중지했던 거고!”
“요즘은 애지중지의 다른 뜻이 학대와 폭력이었나?”
샤를리즈는 바닥에 엎어진 알츠베이트 공작의 손을 지그시 밟았다.
하이힐을 신었어야 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챙겨 신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당신을 지금 살려 두는 건, 벌이 내 몫이기 때문이야. 당신이 한 만큼 벌을 받기 전엔 쉽게 죽지도 못할 거야.”
“샤를, 샤를리즈!”
“알죠, 할아버지? 내가 얼마나 고문으로 유명한 X였는지.”
“……!!”
그사이, 기사 하나가 샤를리즈에게 다가왔다.
“공녀님 생각보다 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속삭이는 말에 샤를리즈는 흘끗 돌아보았다.
아스킨이 키운 기사들은 확실히 제국 최정예라는 말이 아깝지 않게 실력이 뛰어났다.
아마 성 밖에 나눠 둔 병력 또한 치열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잘 버티고 있지만 인해전술로 밀고오는 병력을 마냥 상대하기엔 체력의 한계가 있다.
샤를리즈는 주변을 돌아보다가, 기사 하나에게 목이 겨눠진 채 얌전히 서 있는 플로리아를 발견했다.
이 상황은 명백히 차일드 백작이 불리했다.
그럼에도 플로리아는 차일드 백작 뒤편에 선 채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샤를리즈가 찌푸리며 플로리아를 향해 고요히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저 여자 또한 원흉이었다. 처벌을 반드시 받을 것이다.
“공녀님, 다음 명령을 하달해 주십시오. 벤 부대장은 공녀님의 뜻을 따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가 다수를 상대하는데 가장 유리한 장소일 거야.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끝까지 가야지. 조금만 시간이 더 있으면 돼.”
나는 비어 있던 아스킨의 감옥을 떠올렸다.
아스킨이 홀로 탈출했다면 가장 소란스러운 곳으로 올 것이고.
아스킨이 홀로 탈출하지 못했다면 아스킨을 구출한 건…….
샤를리즈가 주먹을 꾹 쥐었다가 펴며 결연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뒤에서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함성 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레무트 공작님이시다!”
“공작님이 원군과 함께 오셨다!!”
샤를리즈가 황급히 등을 돌렸다.
아직 싸움이 진행 중이라 혼잡한 시야였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저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한 사내를 보았다.
찢어진 셔츠에 바지, 엉망인 차림인데다 군데군데 피가 가득했지만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찬란한 은발만큼은 핏빛에 지지 않은 채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밀고 들어갈 테니 후방으로 밀려나는 적들을 모두 제압해라!”
“예!!”
“대장님이 돌아오셨다!”
전장에서 장수에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를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지쳐 가던 기사들에게서 솟아 나는 기운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샤를리즈는 아스킨을 마주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등장에 온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손을 바닥으로 내리다 문득 바닥에 펼쳐져 있는 양피지를 발견했다.
익숙한 글자에 놀라 서둘러 들어올렸다.
‘음? 이건 내가 은밀히 조사한 내용인데, 이게 왜 여기에……?’
불길한 예감이 샤를리즈를 사로잡았다.
샤를리즈가 당황한 사이, 집무실 뒤편에 있는 유리창이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유리 조각과 함께 건장한 사내가 집무실 내부로 파고 들었다.
들어서자마자 사내는 몸을 둘러싸고 있던 모포를 땅에 버렸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보며, 샤를리즈가 깜짝 놀랐다.
“……오빠?”
주인이 사라졌던 방에, 주인이 돌아왔다.
록시디언은 샤를리즈를 본 순간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샤를리즈는 이걸 걱정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폭군 오빠에게선 평생 보지 못하리라 생각한 표정이기도 했다.
“야! 뭐야, 너 괜찮은 거야? 다친 곳은 괜찮은 거지?”
“……멀쩡한 거 안 보여?”
둘 사이에 있던 갈등은 싹 잊은 듯한 태도다.
샤를리즈는 당혹한 기분으로도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그러는 넌 대체 어디 있었고,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거야?”
“아, 사정이 있어서. 허리 숙여!”
록시디언은 샤를리즈를 향하는 검을 가볍게 막아 냄과 동시에 주위를 둘러싸던 병사들을 베어 나갔다.
한편 록시디언을 발견한 차일드 백작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록시디언이 죽었다는 알츠베이트의 말을 믿었다.
미심쩍은 구석이야 있었지만 완전히 믿을 수 있었던 건.
플로리아를 데려온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폐…… 아니, 당신이 어떻게 다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록시디언은 조금 헬쓱하긴 했지만 중독된 기색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검을 탁탁 털었다.
“그냥 폐하라고 부르면 될 것이지, 뭘 그렇게 굳이 고쳐 가면서까지.”
록시디언의 얼굴에서 차차 미소가 사라졌다.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줄 알았나? 아쉬워서 어쩌나.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