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이 순간에도 차일드 백작의 호위들은 툭툭 쓰러지고 있었다.
남은 이들이 백작을 호위하고자 백작 옆으로 바짝 붙었다.
이미 샤를리즈 옆에 있던 이들을 베어 버린 지 오래였던 록시디언이 피식 웃었다.
저벅저벅.
그가 걸어감에 따라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같이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기사들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지만 이들 중에서도 록시디언의 칼을 오래 견디는 자는 없었다.
‘더럽게 강하네.’
샤를리즈가 간략하게 평을 내렸다.
흘끗 아스킨 쪽을 바라보니, 과연.
이 공간에서 가장 잘 싸우는 건 이 두 사람인 듯했다.
샤를리즈는 싱글싱글 웃고 있는 록시디언의 몸을 빠르게 훑어보고 크게 다친 곳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 다시 아스킨을 보았다.
폭군 오빠 저놈이야 어디 중상이나 불구가 된 게 아니라면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아스킨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으면 좋겠는데.’
샤를리즈는 손을 꾸욱 쥐었다.
언제부터인가 미묘하게 사람을 향한 집착이 솟았다.
이를 처음 느낀 건 이제는 친구가 된 아리아를 향한 집착을 불쑥 느꼈을 때였다.
다치지 않으면 좋겠다, 에서 만약 다친다면 아리아를 다치게 한 놈을 어떻게 쓸어버릴까.
이런 생각과 함께 ‘샤를리즈’ 몸 안에 남아 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던 것이다.
이전에 남을 어떻게 괴롭혔는지에 관한 기억 말이다.
그리고 아스킨을 좋아하게 되면 될수록 아리아 때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샤를리즈는 항시 이런 기분을 느낀 건가?’
샤를리즈는, 아니, 윤지후는 어쩌면 자신의 영혼이 이 몸에 지나치게 적응한 나머지 이 몸에 남아 있던 본능들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게 아닐까 싶었다.
이 몸에 남아 있는 ‘샤를리즈’ 영혼의 파편들. 이 몸과 뒤섞인 게 지금 자신의 상태라면.
‘샤를리즈’도 윤지후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폭군 오빠가 자신을 냉대했을 때 그리도 서러웠으며.
저놈이 무사히 돌아온 꼴을 보니, 그렇게 화냈던 것도 잊고 반갑고 안심했다.
그렇다면 나는 아스킨에게 점점 집착하게 되는 걸까?
‘샤를리즈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순간에도 잘 싸우는 아스킨을 보았다.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처럼 그가 검을 한번 움직일 때면 최소 두 명 이상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는 최전선에서 수많은 숫자 차이를 극복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샤를리즈는 저 남자를 바라보며 찰나의 고민 끝에 자신은 ‘샤를리즈’와 다르다고 판단했다.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알아.’
책 속 악녀 또한 선악을 몰랐던 것은 아니나, 그녀는 애석하게도 알츠베이트 공작의 학대 속에서 컸고, 제대로 기준이 형성되진 않은 듯했다.
‘정확하게는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된다, 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그렇다면 샤를리즈는 앞으로 더더욱 제대로 살고 싶었다.
다름 아니라 저 남자 때문에.
이미 악녀가 남긴 상흔이 저 남자에게 가득 남아 있었으니.
앞으로는 서로가 과거를 잊고 지금의 모습만 바라볼 수 있게 집중하고 싶었다.
아니, 오히려 아스킨이 과거의 ‘샤를리즈’ 모습을 떠올린다면, 결코 좋은 일로 떠올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생각하는 것만으로 질투를 느낄 것 같았다.
‘역시, 섞이긴 섞였네.’
윤지후라면 생각하지 않았을 것들이다.
샤를리즈는 피식 웃었다.
이런 것들이 싫냐고 한다면 싫진 않았다.
오히려 이것들을 버리고 가라고 한다면…….
그러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거부하려 해 봤지만.’
이대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곳. 윤지후로 돌아갈 세계에는 그녀가 신에게 약속받은 어마어마한 코인이 있다.
그것을 돈으로 바꾼다면, 한평생 먹고사는 데는 걱정 없으리라.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세계에는 가족도 친척도 없었다.
록시디언을 볼 때면 늘 떠오르던 친오빠 윤지훈을 포함하여 다정하던 부모님은 모두 죽은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돌아가야겠다 생각했었다.
그건 어찌 보면 자신이 이 세계에서 잘못 들어온 부유물 같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결국 이 세계에 미련이 남고야 말았다.
‘언니!’ 하고 방긋 웃는 아리아가 좋았고.
비록 제게 상처를 주긴 했지만 틱틱대면서도 결국은 져 주는.
투닥이는 게 싫진 않고 재미마저 느껴지는 록시디언은 윤지훈이 생각나 좋았다.
게다가 이 자리엔 없지만 늘 뒤에서 든든히 지켜 주던 제트라거나.
저기, 록시디언이 온 뒤로 싸움에 합류한 이안에게 마저 정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는 서로에게 솔직해진 아스킨 저 남자가 좋았고.
사랑하게 된 저 사람과의 미래가 기대되었다.
“신이시여.”
내가 당신과의 약속을 지킨다면. 당신은 지금의 제 소원을 들어주실 건가요?
신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누군가가 털썩 쓰러졌다.
백작의 가장 가까이에서 호위하던 인물이었다.
백작이 손을 덜덜 떨며 위를 향했다. 그러다 문득 악에 바친 눈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망할 X!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말하지 않았잖아!!”
백작이 향한 곳은 플로리아가 있는 곳이었다.
백작과 마찬가지로 코앞까지 들이닥친 기사들에게 목을 내어 준 플로리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칼 끝에 살짝 베인 목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백작님, 저도 어떻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분명, 황제가 사라지기 전까지의 모습은 독에 푹 절여져 죽기 직전의 모습이었습니다.”
샤를리즈는 록시디언이 헤쳐 온 길을 얌전이 뒤따라 걸으며 가장 가까이에서 구경했다.
자신의 뒤에는 알츠베이트 공작이 있었지만, 남는 기사 하나가 감시하고 있으니 크게 상관없었다.
게다가 이미 겁먹고 꺾여 버린 노인네 하나가 무얼 할 수 있을까.
‘흐응, 저쪽을 쳐다보고 있네.’
록시디언의 옆으로 온 샤를리즈는 제 오빠가 향한 곳을 보고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록시디언이 플로리아를 바라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탓이다.
마치 기쁨과 절망, 혹은 분노와 설렘이 한곳에 고여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샤를리즈는 끝내 배신당했더라도 록시디언이 플로리아를 어느 정도로 좋아한 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보았다.
‘이런 걸 보면 원작의 억지력이 아예 없진 않은 건가?’
정작 원작을 있는 대로 부수고 다녔던 샤를리즈 자신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억지력이건만.
록시디언에게만은 여주인공을 향해 애틋함을 느끼게 하는 힘인가 싶기도 했다.
어쨌거나 백작과 플로리아 두 사람 다 대화하면서 목소리를 그리 낮추지 않았던 터라 모든 대화를 다 들을 수 있었다.
“내가 고작해야 그런 독 하나 때문에 죽을 것 같았으면 황제 자리는 진즉 잃었겠지.”
“……하, 아니, 폐하. 지금 억지로 참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백작이 용기를 내서 대꾸했지만 애석하게도 덜덜 떠는 몸으로는 무엇을 하든 우스워 보일 뿐이었다.
“참는 만큼 더 고통스럽게 죽게 될 겁니다.”
록시디언은 피식 웃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곧 그의 입에서 큰 웃음이 터지는가 싶더니, 그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내 그의 커다란 손바닥 살갗에서 보랏빛 액체가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치이익.
바닥이 타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들 모두가, 저것이 독한 독이라는 걸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으리라.
샤를리즈가 눈을 깜빡였다.
‘저 폭군 오빠에게 저런 능력도 있었나?’
록시디언은 여유로운 얼굴로 물었다.
“그래, 날 죽게 만든단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
“어, 어떻게……. 자, 장기를 태우고 녹이는 독이라고, 아,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해독할 수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내 안에 있던 고대 짐승이란 놈이 더 강했던 모양이군. 그래서, 백작.”
록시디언이 웃는 그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중독되어 가던 짐의 연기는 괜찮던가? 죽기 전에 감상평을 들려줘야지.”
록시디언의 칼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백작의 호위 중 절반을 땅바닥에 쓰러트렸다.
이제 나머지 절반밖에 남지 않았을 때, 문 쪽에서의 전투도 끝난 것인지, 그들은 새롭게 당도한 기사의 손에 죽었다.
쓰러진 이들 사이로 홀로 발을 디딘 사내는 다름 아닌 아스킨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죄송하다니, 짐은 진심으로 감탄했는걸.”
“…….”
“역시 대륙 최고의 기사란 말은 과언이 아니군.”
이제 백작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복도와 문 쪽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이들도 이미 죽거나 항복한 지 오래였다.
샤를리즈는 아스킨이 나타난 순간부터 피가 튄 얼굴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투가 끝나 손등으로 땀을 훔치는 이안도, 사시나무 떨 듯 덜덜덜 떠는 차일드 백작도, 여유롭게 응수하는 록시디언도.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아스킨의 모습이 점차 커진다고 생각했을 때, 샤를리즈의 위로 커다란 체온이 덮였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잠시 멍하게 정신을 놓은 사이 아스킨의 커다란 품이 자신을 덮쳤다.
샤를리즈는 깜빡이는 것도 잠시 피 내음이 나는, 하지만 따뜻한 품 안에서 피식 웃었다.
그대로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댄 채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오래 걸렸잖아.”
“……미안하다.”
아스킨은 무엇이 미안한 것인지 모르면서도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