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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오빠는 덤입니다-188화 (189/194)

188화

샤를리즈는 자신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하나하나 토로하는 대신에 아스킨의 몸을 꽉 껴안았다.

아스킨은 이 힘이 자신이 한번 뿌리치면 너무나 쉽게 바스러질 힘인 줄 알면서도 그 어떤 구속보다 행복하고도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이라 생각했다.

“앞으로 평판 관리 좀 잘해. 너무 정직하게 사니까…… 이걸로 이용해 먹는 놈들도 나오잖아.”

“…….”

“좀 약게 살란 말이야.”

“……그러지.”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에 샤를리즈가 얼굴을 묻은 그대로 피식 웃었다.

이 남자와 약아빠진 삶이라니, 상어와 초식처럼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지극히 어려운 걸 알기에 샤를리즈도 정말로 가능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됐어.”

“……뭐?”

“안 되는 거 안다고. 그냥 그대로 살아.”

샤를리즈가 천천히 머리를 떼어 냈다. 그대로 조금 떨어져서 말을 이으려 하는데, 덥석 붙잡혔다.

샤를리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날 포기하겠다는 말인가?”

“어?”

“나는, 네가 내 삶에 영향을, 아니 멋대로 개입해 주길 바란다.”

“……내가 널 예전처럼 괴롭히면 어쩌려고?”

“상관없어.”

“뭐?”

“이젠 내가 널 사랑하니까.”

아스킨의 붉어진 얼굴과 다급한 목소리를 번갈아 느낀 샤를리즈는 곧 작게 웃고 말았다.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잘됐네. 나도, 앞으로는 그냥 내가 네 평판을 관리해 주겠다는, 그런 말을 하려 했거든. 맡겨 주겠다면야 사양하지 않지.”

샤를리즈가 손을 뻗어 아스킨의 뺨에 가져다 댔다.

온순하게 뺨을 기대는 아스킨 레무트라니.

게다가 자신을 향해 이리도 집착적인 시선을 보내는 남자라니.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땐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내가 만들었다는 실감이 났다.

그래, 이곳은 내가 만들어 낸 결과가 가득 담긴 세계다.

이 흔적을 두고 어딜 갈까.

“이번엔 진짜 약혼이라도 할까? 결혼을 염두에 두고.”

놀람과 동시에 더욱 붉어지는 아스킨의 얼굴을 보다 말고 샤를리즈는 결국 작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한편, 록시디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서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황제 폐하.”

이전까지 플로리아를 오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록시디언의 시선에 이안의 모습이 담겼다.

이안은 천천히 록시디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차일드 가문의 장자, 이안 차일드가 폐하를 뵙습니다.”

서로 피차 아는 처지에 가문과 가문의 장자임을 고하는 것은 지금 이 사태를 자신이 책임지겠다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아하니, 샤를리즈를 도운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안이 샤를리즈의 편에 서서 싸우는 것을 본 뒤였다.

“가문과 네 아비를 버리겠다면 목숨은 보전해 주겠다. 네가 새로 세울 가문의 영향력도 보장해 주지.”

“…….”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무런 표정 없이 제 아비를 응시했다.

목에 칼을 앞두고서도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습.

추하고 비루한 저 중년이 제 부친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한때는 그리도 존경하는 아비였다.

눈을 감았던 이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이미 늦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 부디 단 한 번만 자비로운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이안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샤를리즈를 택한 순간부터 자신에게 이미 아비는 없다.

그러니 이미 버린 자에게 자신이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자비이자 베풀 수 있는 정이었다.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용서라? 짐의 목을 노리려던 자의 목숨을 말이더냐?”

“예. 폐하, 어떤 자에게 죽음은 잠시의 고통만 안겨 줄 뿐 차라리 영원한 안식이 되기도 합니다. 폐하께서는 존귀한 생명을 노린 자를 편안하게 보내 주시겠습니까?”

차일드 백작은 늘 말하곤 했다.

더럽고 치사하고, 똥밭에 구르듯 추접하더라도 살아 있는 쪽이 좋다고.

그러니, 아버지.

이게 내 마지막 선물입니다.

“이대로 편안하게 보내지 마십시오. 용서라고 말씀드렸으나, 차라리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 될 겁니다.”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라.”

“예, 제국 최북단엔 여전히 사계절 내내 눈보라가 치고 사람하나 오가지 않는 오지가 있습니다. 봄이 가득한 영지에서 자란 저희 가문이들이 살기엔 지나치게 혹독한 곳이지요. 그곳에서 남은 평생 추위와 배고픔을 마주하며, 얼어붙은 땅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곱씹게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반성은 저자의 몫이겠으나, 반성해도 삶이 돌아오진 않겠지요.”

“…….”

“이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을 바쳐도 좋습니다.”

록시디언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돌려 샤를리즈를 향했다.

샤를리즈는 부모를 배신하며 자신을 도와준 이안이 없었다면, 여전히 그곳에 갇혀 있거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던 상황이었음을 인지했다.

샤를리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 모양으로는 ‘목숨은 안 돼.’ 하고 속삭였다.

이를 지켜 주지 않으면 오빠고 나발이고 머리라도 잡아당길 심산이었다.

혹은 목걸이를 쓰거나 말이다.

이윽고 록시디언이 무어라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그보다 먼저 차일드 백작이 핏발이 선 눈으로 소리쳤다.

마치 소리라도 지른다면 자신의 처지가 조금이라도 달라질 거라 믿는 것처럼.

“이, 이 어리석은 놈……!! 아비를 배신하더니 이제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한단 말이냐? 다 필요없다! 이, 아비가 이리 쉽게 죽을 듯싶으냐?”

차일드 백작에겐 아직 수많은 정보가 남아 있었다.

이걸 어떻게든 저 이안이 이용만 해 준다면, 그런다면…….

모든 것이 자신의 뇌 내에서만 가능한 일인 줄 모른 채, 차일드 백작은 개처럼 헛소리를 짖어 댔다.

“차일드 백작, 그대는 어울리지 않게 훌륭한 아들을 뒀어?”

록시디언이 재밌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러나 눈은 혹한의 겨울처럼 차갑기만 하였다.

“여기 있는 차일드 백작, 평민 플로리아. 그리고 저기 뒤에 버려진 알츠베이트 공작까지 정식 재판을 열어서 처형하도록 하겠다.”

처형이라는 말에 차일드 백작, 플로리아, 알츠베이트 공작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플로리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하게, 마치 제 처지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처럼 체념마저 어린 태도였다.

그러나 플로리아와 다르게 남은 두 사람은 각자 자리에서 무릎 꿇은 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꽥꽥 소리를 질렀다.

모두가 샤를리즈와 록시디언 시점에서는 개소리에 불과한 소리였다.

록시디언은 검을 검집에 넣고는 뒤돌아섰다.

“레무트 공작, 잠시 따라오게.”

“예.”

록시디언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마당에 지금 이 자리에서 개인의 복수를 할 생각은 없었다.

이자들은 모든 귀족의 앞에서 본보기로 처단될 것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당장 살생을 저지르기 보다는 썩은 뿌리를 모조리 걷어 낼 생각이었다.

이를 생각하면 죽을 뻔한 위기 한 번 정도야 싸게 먹힌 셈이었다.

아스킨과 록시디언이 문 근처로 간 사이 샤를리즈는 이안에게로 향했다.

옆에서 차일드 공작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정보… 정보…….’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이제 저건 이빨 빠진 개에 불과했다.

샤를리즈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안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젠 일어나. 남은 건 네가 뭘 원하든 내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

“……아닙니다, 공녀님.”

고개를 들어 올린 이안이 힘없이 웃었다.

“앞으로 한동안 제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서 수없이 오를 것입니다. 괜히 저와 엮여 괜한 고초를 겪게 만들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네……?”

“내 악명이 여기서 더해진다 한들 더 나빠질 곳이 있니?”

“…….”

얼빠진 얼굴을 하던 이안이 이내 웃고 말았다.

그래서일 것이다.

마침내 자신에게 환히 웃어 주는 샤를리즈를 보며 자신이 마음 깊이 안심해 버렸기 때문에.

이안은 한순간 방심해 버렸다.

제 옆에 누가 있는 줄 잠시 생각지 못한 채로.

샤를리즈가 이안의 어깨로 손을 뻗기 위해 허리를 숙인 순간.

멍한 듯 중얼거리던 차일드 백작이 빠르게 손을 뻗어 샤를리즈를 잡아 당겼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목을 겨눈 기사에게 던진 뒤였다.

“크아아악!”

플로리아에게 미리 받아 두었던 독이었다. 여차하면 알츠베이트 공작에게 먹여 죽이려고 가져온 독이었다.

설마하니 이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방사형으로 뿌리기만 하면 되는 이 독은, 제 아무리 기사라도 한순간 버틸 수 없는 고통을 주는 독이었다.

그리고 차일드 백작은 이안에게 가장 처음 검을 가르친 사람이기도 했다.

적어도 못 쓰진 않았단 소리.

샤를리즈를 우악스럽게 잡고 목에 칼을 겨눴다.

“다들 비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년의 목숨은 끝이다.”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모습에선 그 어디에도 평소의 저울을 재던 이성적인 모습은 없었다.

“아버지!!”

“이안, 너도 뒤로 물러서거라. 당장.”

“…….”

“기어이 피를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이안이 다가가려 하자 터져나온 소리에 이안은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

황급히 돌아온 록시디언 또한 이안에게 눈짓으로 뒤로 물러날 것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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