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차일드 백작, 어리석은 짓은 그만하지.”
고요하지만 분노를 품은 록시디언을 비롯해, 분노조차 숨기지 않은 아스킨의 폭발적인 기세가 차일드 백작을 압박했다.
그러나 이미 쌓았던 모든 것을 잃고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린 백작은 자포자기한 채 히죽 웃었다.
“이미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내가 왜 여기에서 멈춰야 하지? 필요하다면 이년을 지옥길 동지로 삼을 거다!”
샤를리즈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버둥거리려 애썼다.
하지만 억센 사내의 손은 좀처럼 그녀의 힘으로 빠져나오기란 어려웠다.
‘정말, 나는 운이 없어도 더럽게 없지.’
이제야 사랑을 깨달아 좀 행복하게 살아 보려 했더니, 10분도 되지 않아 이런 일이 일어날 게 뭐란 말인가.
샤를리즈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이곳에서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한 순간, 단 한 순간만 노리면 된다.
“원하는 것을 말해. 내 여동생을 놓아준다면 내 황제로서 네 뜻을 들어주겠다.”
의외였던 점은, 저 폭군 오빠가 퍽 여유를 잃은 것처럼 보였단 점이었다.
샤를리즈는 묘한 기분을 느꼈지만, 분노와 더불어 길 잃은 아이처럼 흔들리는 아스킨을 보면서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하, 고결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번지르르한 말을 잘하시는군. 목숨이라도 내어놓을 텐가?”
“……인질이라면 황제인 내가 더 낫지 않겠나?”
차일드 백작의 제안에 록시디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검마저 바닥으로 던졌다.
폭군 오빠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나오는 것인지.
백작 또한 샤를리즈와 비슷한 의문을 가졌는지, 날카롭세 소리쳤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정녕 이 여자의 목에서 피가 솟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차일드 백작의 칼날이 샤를리즈의 목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샤를리즈는 날카로운 것이 기어이 살을 파고드는 감각을 느꼈다.
따끔하긴 했지만 참을 만했다.
‘이런, 더 자극한 셈이 됐나?’
하지만 흥분한 백작은 빈틈이 조금 더 많아졌다.
한편, 차일드 백작은 이 모든 일을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멍하니 저를 바라보고만 있는 플로리아를 향해 소리쳤다.
“플로리아! 연락은 없는 것이냐? 대체 왜…… ‘그분’은 아무런 조치가 없는 것이냐!! 젠장, 왜……!!”
차일드 백작의 말은 이 분위기를 대번에 뒤집기에 충분했다.
그분? 설마하니 차일드 백작 뒤에도 누군가 있었던 것인가?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비슷했다.
“이런.”
백작의 처절한 물음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이 공간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나타나 대답했다.
“차일드 백작님,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하시면 어떡합니까.”
차일드 백작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환한 빛이 집무실 벽 한 편에서 터져 나왔다.
차일드 백작은 익숙하기에 미리 눈을 감았고, 방심한 틈을 노리던 샤를리즈는 뜻밖의 섬광 벗어날 기회를 찾지 못했다.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제가, 제가! 이년을 생포해 두었습니다!!”
“저런, 입이 가볍기까지.”
눈부심이 잦아들었을 때 빛, 아니, 포탈에서 빠져나온 노아가 차일드 백작 앞에 서 있었다.
노아는 아무렇지 않게 등을 돌려 록시디언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 순간 이토록 정직한 인사는 도리어 조롱처럼 느껴졌다.
록시디언도 모르지 않았다.
그는 하, 비죽이 웃었다. 붉은 눈으로는 차가운 분노가 일렁거렸다.
“이렇게 정식으로 차린 예는 오랜만이군, 노아. 이게 다 무슨 상황이지?”
“하, 당신께선 지금 무얼 하시는 겁니까! 이제 와서, 젠장, 제길!! 당신만 빠져나가겠다는 거야?!”
록시디언의 물음은 바로 뒤이어 꽥꽥 터져 나온 차일드 백작의 외침에 묻혀 버렸다.
노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싱글싱글 웃는 동시에 눈만은 차갑게 식힌 채로 손을 들었다.
백작의 외침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원작을 벗어났다지만, 이건 전혀 생각을 못 했는데.’
샤를리즈는 남은 이들과는 또 다른 당혹감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찬찬히 생각해 보자면, 이 책에도 악역은 있었다. 악녀와 알츠베이트 공작 말고 정체를 모를 악역이 있었나?
그 악역이 조연인 남주였을 가능성은?
샤를리즈가 고민하는 사이, 록시디언은 평온한 표정으로 노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황제의 자리가 탐이 났더냐?”
“……제국을 너무 아낀 나머지,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노아는 자신의 죄를 감추지 않고 조용히 토로했다.
한편 아스킨은 노아가 어떤 충격 고백을 했건 간에 시선은 오로지 샤를리즈에게로만 향했다.
이때까지 충신이란 말에 누구보다 걸맞은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조국도 가문도 필요 없이 자신이 보잘 것 없게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 하나 구할 수 없다니.
이미 차일드 백작의 뒤로 벤이나 아스킨의 기사들이 접근하고자 했으나, 광기에 사로잡혀 능력이라도 상승한 것인지.
백작은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동시에 검이 샤를리즈의 목을 파고들곤 했다. 검을 어쭙잖게 배운 건 아닌 듯했다.
아주 은밀하게 접근이 가능한 자, 아스킨에 못미치더라도, 적어도 그 아래까진 준하는 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그렇게 샤를리즈를 구하기 위해 빈틈을 보던 중.
아스킨은 어느샌가 문 틈으로 나타난 이를 보고서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아스킨이 알기로 실력만은 확실한 자가 그림자처럼 다가가고 있었다.
남자 또한 아스킨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시선을 끌어야 한다.
아스킨은 노아가 스스로 죄를 낱낱이 고하는 사이, 차일드 백작을 향해 강렬한 살기를 내보냈다.
노아를 향해 분노와 증오 어린 시선, 욕설을 짓씹던 백작이 흠칫 놀라더니 아스킨을 발견했다.
곧 사나운 비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 제국 제일의 검사도 인질 앞에선 강짜 부리는 것 외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 당신은 역시 인형처럼 휘둘리는 게 운명인 모양이야!”
마치 네가 노려보아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백작은 아스킨이 보내는 짙은 살기에 적응한 나머지 제 뒤로 접근하는 자가 있음을, 그자가 아스킨만 못하더라도 검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퍽!!
“크악!”
마치 돌이 깨지듯 살벌한 소리와 함께 샤를리즈는 풀려났고, 그녀는 단단한 품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콜록, 콜록, 아, 스킨?”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들면 걱정으로 물든 제트의 얼굴이 보였다.
이어서 자신을 안은 채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아스킨 또한 보였다.
“지혈, 지혈부터 해야 한다.”
“하아, 괜찮, 아…….”
샤를리즈는 덜덜 떨며 제 목을 막는 커다란 손을 가만히 토닥거려 주었다.
고개를 돌리면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백작이 보였다.
샤를리즈는 차가운 시선으로 백작과 여전히 무릎을 꿇은 노아를 번갈아 보더니, 그대로 나아가 백작의 손을 콱 밟아 버렸다.
“크윽……!!”
이 자와 알츠베이트 공작 때문에 죽거나 다친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죽지 않아도 될 자들이 죽었다.
그리고 자신도 아스킨도 아리아와 이안까지도 고통받아야 했다.
“버러지, 같은 X이…….”
“버러지는 너겠지.”
샤를리즈가 고개를 들자, 가까운 곳에 노아가 있었다.
노아는 어째서인지 샤를리즈에게서 눈을 떼어내지 못했다.
“네가 원흉이었을 줄이야. 참신했어.”
샤를리즈의 비꼼에 노아가 잠시 쓰게 웃었다.
“……예, 어리석은 짓을 한 것 같군요.”
그는 고개를 돌려 록시디언을 향했다.
“폐하께서는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노아의 고백을 잠자코 듣던 록시디언이었다. 록시디언의 눈이 제 여동생의 목을 응시하다 말고 노아에게로 돌아왔다.
“……네 행동에 어색함이 깃든 순간부터 이상함이야 느꼈지만.”
“…….”
“끝까지 믿어 주고 싶었다.”
우직하지만 배신감이 뒤섞인 목소리에 노아는 씁쓸하게 미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차라리 미리 벌하시지 그러셨습니까? 현명하신 폐하께서 낌새를 그냥 두셨다니, 정말 이상하군요.”
“이유가 궁금했지. 그리고 어차피…… 쳐내야 할 싹이라면.”
록시디언의 눈이 차게 빛났다.
“한 번에 쳐내는 쪽이 효율적이니.”
“……폐하께선 이토록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황제 폐하시지만, 광증은 늘 당신을 폭군처럼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지요.”
“…….”
“알고 계시겠지만 광증이 일어났을 때, 사고 수습은 모두 제가 해 왔습니다.”
노아는 늘 진지하게 고민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저 광증, 미쳐 가는 황제를 이대로 두는 것이 맞는가?
주제넘는 고민이라 해도 좋았다.
노아는 이 나라를 지극히 사랑했기에.
“광증을 앓는 황제, 그리고 세상 모든 악행을 일삼은 알츠베이트 가문을 제국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습니다. 단 한 번에 없애 버릴 수 있다면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기도 했습니다.”
차일드 백작을 이용한 건 좀 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왜 망설였지?”
노아가 정말 이 계획을 성공하고 싶었다면 독을 해독하기 전의 록시디언의 목숨을 끊는 방안도 있었다.
그뿐일까?
조금 전 제트가 샤를리즈를 구하는 것 또한 그는 충분히 방해할 수 있었다.
“네겐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을 텐데.”
이를 지적하는 말에 노아는 침묵을 유지했다.
곧 오래지 않아 천천히 손을 들어 샤를리즈를 가리켰다.
“알츠베이트 공녀님, 아니. 샤를리즈 님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