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기묘한 일에 기사들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로 경계했다.
“폐하,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뭐?”
“저자는 곧 자폭할 겁니다. 제가…… 그래서 피를 흘리지 않고 죽여야 한다고 말씀드렸건만, 늦었군요.”
“대체 무슨 소리야, 그건!”
“죄송하지만 제가 조치한 일이었습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노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후의 비술을 저자에게 걸었다.
차일드 백작에게는 죽음에 이를 것 같으면 몸에 피를 내라고 미리 말해 두었다.
극도의 흥분한 상태로 피를 내면 공격한 대상을 죽여 줄 거라고 속삭였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폭발시키는 주문이었다.
문제는, 노아 자신이 그곳에 있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건 주문이라 주변 이들까지 폭발에 휘말린다는 단점이 있었을 뿐.
“당신처럼 날 때부터 타고난 이들은 모르겠지. 어설픈 재력만 있는 비천한 가문으로 살아가는 것이 때로 평민으로 무지한 채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비참하다는 사실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저 소리를 들은 평민들이 우스워 콧방귀를 뀔 소리.
거대한 재력을 가진 주제에, 심지어 로드를 개척한 가문이 된 주제에 만족하지 못한 것은 백작 자신이었다.
“그리고 제가 어디, 혼자 갈 것 같습니까? 얼마 전 황실 정원 공사를 하셨지요? 그때, 사람을 시켜 황실 외곽에서 촘촘히 폭발 물질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진행하라 해 두었으니, 거대한 불꽃 축제가 열리겠군요. 연료는 사람이겠지요!”
백작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샤를리즈, 만약 폭발이 일어나면, 책상 밑으로 뛰어들어라.”
“뭐? 너, 어딜 가려고…….”
아스킨은 옆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동시에 은밀하게 노아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노아, 조금 전에 피를 흘리더라도 대번에 죽이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건 아직도 유효합니까?”
노아가 아스킨을 보더니 오묘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단, 기회는 한 번뿐일 겁니다. 아니면 다 같이 죽는 거죠.”
“당신은 그 기묘한 이동 능력으로 살 수 있을 테니 부탁 하나 하지요.”
“…….”
“샤를리즈를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아스킨은 대답은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검을 만지작거리며 가슴을 고요하게 가라앉혔다.
실패하면 여기 모두가 죽는다.
‘창을 던진 지는 꽤 되었지만.’
아스킨은 할 수밖에 없음을 느꼈다. 곧 그의 검이 창처럼 날아가 광소를 터트리고 있던 차일드 백작의 가슴에 푹 꽂혔다.
아스킨의 공격은 성공했다. 그러나 그도 노아도 생각지 못한 것은, 차일드 백작의 집념이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는 점이었다.
한편 샤를리즈는 아스킨의 검이 백작의 가슴에 꽂히는 순간, 눈앞으로 무언가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양피지였다.
[신입니다.
오랜만이죠? 저기 인물 차일드 백작을 향해 뛸 것.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인물 사망.
특: 너 하나의 희생으로 모두가 살 예정.]
빠르게 읽어 내린 샤를리즈가 입을 벌렸다. 정신차렸을 때, 이미 자신은 뛰어가고 있었다.
마치 이것 말고는 생각한 적도 없다는 듯이.
‘내가 바란 엔딩은 이따위 것이 아니야!’
마침내 차일드 백작에게로 손을 뻗는 순간. 샤를리즈의 눈앞으로 거대한 빛이 터졌다. 이내 모든 것이 하얗게 변했다.
* * *
“윤지후 양.”
지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으윽, 내 머리…….’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들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폭발은?! 조금 전 있었던 폭발을 떠올린 순간 그냥 누워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분명 마지막 순간 새하얀 빛을 보았고, 자신의 눈에서는 커다란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야가 흐릿해진 동시에 모든 것이 하얗게 되었음을 기억했다.
‘폭발은 어떻게 된 거지?’
지후는 자신의 몸보다는 주변을 살펴보기 바빴다.
그러다 흠칫 놀랐다.
의아할 정도로 새하얀 공간이었다. 아스킨도 록시디언도. 광소를 터트리던 차일드 백작도…… 모두 어디에도 없었다.
“정신이 들어요?”
지후는 제 손을 내려다보다 다시 한번 놀랐다.
한 떨기 장미 같고 표독스럽던 ‘샤를리즈’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건 자신의 손. 그래, 윤지후의 몸이었다.
알아보기는 편했다.
자신이 죽을 때의 옷을 걸치고 있었으니까.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신이 나서 비행기를 탈 때 입고 간 옷이었다.
그대로 사고가 나 죽었었지.
지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 앞에는 인자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어딜 보아도 제국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인상이다.
그러나 지후는 왜인지 여성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여……기가 어딘가요?”
지후의 질문에 나이가 지긋한 중년 여성은 살풋 웃더니, 손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여인이 손을 뻗는 순간 순백의 날개를 단 아기들이 뿅 나타나더니 앙증맞은 나팔을 뿜뿌! 불었다.
흡사 동상에서 보던 아기 천사상의 모습을 그대로 본딴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저쪽이 천사인가?
“지후 양이 이곳을 천국이라 믿는다면, 천국이겠고, 그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 생각하면, 텅 빈 공간이 되겠죠?”
나긋한 말씨에 지후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허리를 바로 세웠다.
다시금 앞에 기다리고 있는 여성에게 시선을 돌리면, 왜인지 이번엔 뒤에서 흘러나오는 빛 때문에 얼굴이 다시 보이지 않았다.
‘꿈인가?’
죽어서 개꿈을 꾸는 걸까.
만약, 꿈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런 것이 가능한 존재는 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후 양이 익숙하게 여기는 그 존재가 맞다고 해 둘까요?”
지후는 눈을 깜빡였다.
“신께서 왜 제게 존댓말을 쓰세요?”
“신도 피조물에게 경의를 가진답니다. 게다가 지후 양은 내 세계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니, 예우하는 거죠.”
여인이 싱긋 웃는 소리가 들여왔다.
이 기분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왈칵 무언가 치솟는 기분이었다.
“제가 드디어 죽은 건가요?”
“일단은 그렇다고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머리는 아직도 아파요?”
“조, 조금 아프지만 참을 만해요. 그럼, 제가 죽었다면…….”
지후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대체 그 폭발이 일어난 뒤에 상황이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다른 사람이라, 누굴 말하는 건가요? 지후 양이 본 책의 주인공? 아니면 그 책에 나오지 않았던 사람들?”
“모두 다요……!!”
신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는 대신, 지후 앞에서 보란 듯이 손을 튕겼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허공에 숫자가 떠올랐다.
지후는 어딘가 익숙한 숫자라 생각했다.
“이, 이게 뭔가요?”
“지후 양이 그토록 기다리던 ‘코인’이죠? 아, 시간의 왜곡이 조금 있었다 보니, 돌려드릴 땐 더 많아지겠네요.”
그래, 익숙한 숫자다 싶었더니, 자신이 돈으로 환산한 코인이었다. 게다가 기억하는 것보다 많았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제 것이 아닌 게 아닌가요?”
“음,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요? 지킨 거나 다름없을 텐데. 파혼 도장은 찍은 게 아닐 테니 조금 봐주기로 했답니다.”
지후가 입을 살짝 벌렸다.
분명 신에게 이런 미션을 받고 대가로는 자신의 피와 삶 같은 돈을 돌려받기로 했다.
그런데 분명 자신은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 같은데 준다고 하니 좋아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이런 돈따위 어떻게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정말로 모르고 있었군요? 오늘이 바로 1년째가 되는 날이랍니다. 축하해요.”
숫자가 지후 앞으로 다가왔다.
건드리기만 하면 돈이 다발로 와르르 쏟아질 것같이.
그러나 지후는 눈앞에 있는 엄청난 돈이 될 코인보다, 조금 전까지 함께했던 이들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보다, 다른 사람들은요? 그들은 죽은 건가요?”
왜, 신은 대답해 주지 않는 건가?
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기쁘지 않은 건가요?”
“기, 기뻐요. 하지만, 하지만…….”
망설임과는 달랐다. 말을 이을수록 지후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마치 신이 자신을 압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요, 기뻐야 하잖아요?”
“하지만…….”
지후는 이를 악물었다. 미션을 이룩했다.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후는 신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들었다.
내 사람들은, 내가 뛰어들면 죽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런데 죽었어?
눈물을 매단 채 날카롭게 노려보는 지후를 보며, 신은 입술에 미소를 띠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을 할 줄이야.”
흥미롭다는 목소리와 함께, 인자한 얼굴을 한 신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내 제안을 한 번 더 들어 볼래요?”
신은 윤지후를 불쌍히 여겨, 분명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세계에서 빌려온 영혼이었다.
그 몸에 적합한 영혼이 지구라는 세계에만 있었기에.
하지만 이제는 제발로 자신의 피조물들과 살겠다고 빌지 않는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 이 코인과 함께 원래 당신의 세계로 돌려보내 줄 것이고, 아니라면 다시 내 피조물들이 있는 세계로 돌아가는 거예요.”
지금도 관할자가 윤지후를 당장 돌려놓으라 신호를 보냈지만, 신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책 속으로 돌려보내 줄 거예요.”
“……제가, 책 속으로 돌아가길 희망한다면.”
지후는 신이 대답해 주지 않는 것에서 긍정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역할이 끝났기 때문에 불러들인 것이고.
실제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모두 죽었다거나.
끔찍한 상상이 안개처럼 자리를 넓혔다. 지후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설명, 설명해 주세요. 모두가 죽었고, 그치만, 그렇다 해도 제가 돌아가면 살릴 수 있는 건가요?”
신은 대답하는 대신 미소 지었지만, 본능적으로 정답임을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