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객잔
1-18권 完
-주비
1권
서장 ― 장기린(張麒麟)
거친 숨소리가 투구 안을 울린다. 작열하는 태양 빛 때문에 온몸이 땀에 젖어 끈적끈적하게 느껴졌다. 이제껏 보아 온 것은 오로지 죽음. 죽음. 죽음. 한바탕 피 보라가 불고 나면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허무할 만큼 가벼운 목숨이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사람이란 것 자체가 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
‘귀찮아.’
위아래로 흔들리는 시야 속에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각자의 창칼을 들고 살기등등한 모습. 그들은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자마자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 앞을 막지 마라.”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말의 옆구리를 박찬다.
애마 흑룡이 포효하며 앞으로 달려 나가자 흐릿했던 정신이 맑아진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직 장애물 아니면 적.
그는 철창을 한 손으로 감아쥐고 그 끝을 허리에 붙였다. 흘러가는 바람과 함께, 그 또한 한 줄기 바람이 되었다.
“아, 악귀다!!”
“피해! 아, 아니, 막아라! 여긴 뚫려선 안 된다!”
거친 몽골어였다. 십 년이 넘게 전장에 있다 보니 적군의 말이라도 웬만큼 알아듣게 되었다.
그는 말의 흔들림에 맞춰 고개를 숙이고 말 등에 바짝 몸을 붙여 맞바람을 뒤로 흘려보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달려가는 이 힘을 살릴 수가 없었다.
가로로 길게 뚫어진 구멍으로 보이는 적들은 황급히 말을 타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죽여!”
“봐라! 갑옷이 부서져 있다! 상처를 입었다!”
“우리가 악귀를 죽일 수 있다!”
그 말에 힘을 입었는지 도망치려던 보병들도 이쪽을 향해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큭, 하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날 죽이겠다고?’
분명 옆구리에 꽤 큰 상처를 입긴 입었다. 방금 전에 치르고 왔던 전투에서 한 몽골 장수의 호위에게 입은 상처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힘은 건재하고, 두께가 세 치나 되는 철 갑옷 또한 멀쩡하게 몸을 감싸고 있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십삼 년이나 북로전쟁에서 살아남은 ‘적룡기마대주’가 고작 백부장도 안 되는 졸개 스무 명에게 당한다면 그건 농담거리도 안 되리라.
“캬앗!”
“하앗! 핫! 핫!”
“끼요오옷―!”
그의 철창이 앞을 향하고, 기묘한 기합성과 함께 달려오는 몽골 기마병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상대는 가죽 갑옷을 입고 머리는 몽골 방식으로 꿩 꼬리를 장식한 투구를 쓴 채다. 무기는 두꺼운 마상도. 무장은 별거 없지만 달려오는 속도가 놀랄 만큼 빨랐다.
‘경기병(輕騎兵)인가.’
몽골군의 대부분이 그렇다. 가벼운 무장만을 갖춘 채 미친 듯이 말을 질주하는 병사들. 화살조차 앞지르는 엄청난 말의 속도와 말 위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몽골군의 뛰어난 승마 실력은 원제국을 이룩한 힘이었으니까.
다만 그 힘은, 적룡기마대에겐 통하지 않을 뿐이다.
푸확!
철창의 끝으로 가볍게 기마병의 가슴을 찌르자 미처 칼도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한 사내는 허공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가죽 갑옷 따윈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일격에 가슴이 박살 났고 몸은 거의 반으로 접혔다.
‘너도 가볍군.’
창을 휘두르자 부서진 호박처럼 그 잔해가 바닥에 후드득 떨어진다. 주인을 잃은 말은 구슬피 울며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간다.
다음은 기마병 두 명. 말 머리의 간격을 유지하며 각각 반대쪽 손으로 무기를 쥐고 있는 것을 보니,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사이로 보였다.
그는 그대로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기마병들 사이로 내달렸다.
창을 휘둘러 두 명의 허리를 동시에 베어 버렸다.
‘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창을 들고 있는 손을 통해 기분 나쁜 감각이 전해져 왔다.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달리던 말까지 쓰러져 둔탁한 소리를 냈다.
사람을 벤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베면 벨수록,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더욱 선명해지는 듯하다.
“아, 악귀!”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시끄럽다. 귀찮다.
그는 철창을 휘둘러 그를 향하는 어설픈 죽창들을 쳐 냈다. 죽창 십여 개가 우수수 부서지며 함께 휩쓸린 수급 몇 개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불쌍한 얼굴이군.’
잔뜩 찡그린 채 눈을 부릅뜨고 있는 얼굴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 보인다.
흑룡이 다시 한 번 질주하자 ‘우두둑!’하고 사람이 통째로 밟히는 느낌이 들었다. 보병들 따윈 길을 막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한 번 휘젓고 나자 그를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쓰러졌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는 곧장 초원의 한가운데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장수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삼백 리 벌판을 넘어 이곳까지 온 이유가 바로 이 사람 때문이었다.
그의 주인.
적룡기마대의 주인.
가까이 다가가자, 피로 범벅이 되어 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노장(老將)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결국…… 왔……더냐……?”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회생 불가능한 상처다. 다른 건 몰라도 왼쪽 어깨와 허리를 찢어 놓은 상처는 이미 너무 오래되어서 피도 잘 흘러나오지 않았다.
황급히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고 그를 부축했다.
“혼자…… 왔느냐?”
“다른 대원들은 평원 쪽 전투를 마무리 중입니다. 한데…….”
잠시 말을 멈췄다가 원망스럽게 말했다.
“그러게 왜 저희 대(隊)를 다른 곳으로 보내셨습니까?”
“허허, 전……략적인 선택…… 쿨럭! 쿨럭! 이었지…….”
“카라코룸을 친다는 것이 전략적인 선택입니까? 그것도 고작 삼천으로?”
아무리 패망해 가는 제국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원의 수도. 고작 삼천을 끌고 쳐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였다.
노장은 재밌는 듯 웃었다.
“허허! 허허……허! 그래도……의미……가 있었다.”
“병사들은 전멸입니까?”
“그래…… 청룡대도……모두 잃고……빠져 나왔지. 우습게도…… 탈영병……에게…… 잡혔지만…….”
조금 전에 베어 버린 스무 명이 몽골의 탈영병이었던 모양이다.
노장도 웃고 그도 웃었다. 카라코룸을 향해 진격한 대장군(大將軍) 공손웅이 패잔병들 따위에게 잡히다니, 이 이상 웃기는 농담도 없다.
“저희를 두고 가셔서 그렇습니다.”
“하긴, 너희를…… 데려 갔으면…… 카라코룸……도 함락했을까……?”
“물론입니다.”
“허허! 그러게 말이…… 쿨럭, 쿨럭! 쿠빌라이는…… 쿠빌라이는 어찌 되었나?”
피범벅이 된 얼굴 사이로 노장의 눈이 빛났다.
쿠빌라이.
다음 대의 칸이 될 몽골 부흥의 핵심 인물이자, 공손웅이 위험할 걸 알면서도 굳이 미끼 역할을 도맡아 카라코룸으로 쳐들어간 이유이기도 한 사람이다.
“죽었습니다.”
“그의…… 삼십만…… 기병은……?”
“전멸이나 다름없습니다.”
“허허, 잘했…… 쿨럭, 쿨럭!, 그런데 너…… 다쳤구나.”
“텐챠이가 꽤 강하더군요.”
텐챠이. 몽골 최강의 전사이자 쿠빌라이의 호위병을 말했다.
공손웅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허허허허!”
한참 동안 이어진 웃음이 그쳤을 때, 그는 더 이상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그걸 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회광반조(廻光返照). 죽기 직전에 나타나는 마지막 불꽃이 나타나고 있었다.
“적룡기마대. 내 필생의 업적이자, 내 마지막 실수.”
“…….”
“내가 죽기 전에 너희를 다 죽였어야 했는데.”
웃으면서 할 말이 아니지만, 웃는다. 아마 적룡기마대가 들었어도 똑같이 웃을 것이다.
“그래, 이제 어쩔 것이냐?”
공손웅이 죽으면 족쇄는 풀린다. 그는 지금 그것을 묻고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놓은 것은 없고?”
“잘하는 게 싸움뿐이라,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공손웅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평범하게 살거라.”
“평범……하게 말입니까?”
“그래. 되도록 피를 보지 말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거라. 좋은 여자 찾아서 가정도 꾸리고. 일을 해서 돈도 벌어 보고. 너는 원래 싸우는 것을 싫어했잖느냐?”
“…….”
“너는 왜 싸우는 것을 싫어했었지?”
“……지겨웠습니다.”
“왜 지겨웠느냐?”
“사람이 너무 가벼워 지겨웠습니다.”
공손웅은 그 대답에 호탕하게 웃었다. 어째서 웃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마음을 잊지 말거라.”
“……예.”
“평범하게 살 테냐?”
“예. 그러겠습니다.”
공손웅은 쿨럭쿨럭 기침을 토해 냈다.
“큭! 허허…… 그럼 적룡기마대는?”
“남을 놈은 남을 겁니다.”
“해산시킨다는 소리구나?”
“…….”
“그래, 그것도 좋겠지. 네가 대주가 된 지 얼마나 되었지?”
“팔 년입니다.”
“그래. 처음 들어와서 오 년간 싸움터를 구르고…… 그다음 대주로서 팔 년……. 십삼 년이라. 허허, 참 오래도 안 죽었구나.”
“칭찬입니까?”
“그래. 칭찬이다.”
공손웅의 웃음이 점점 흐려졌다. 호탕했던 웃음이 쌔근거리는 숨소리로 바뀌었다.
“원래…… 약속했던 기한은…… 삼 년이었지…….”
“예. 그랬습니다.”
“오래…… 남아 줘서……고맙…… 행복하게…… 살…….”
“예. 그러겠습니다.”
그가 마지막 대답을 들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에 웃는 얼굴로 눈을 감았으니 편하게 갔을 거라 생각할 뿐이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공손웅의 눈을 감겨 주었다.
“편히 가십시오.”
히히힝!
흑룡이 울었다. 바람도 울었다.
축 늘어진 공손웅의 몸을 등에 업고 흑룡에 올라타자, 드넓은 초원의 끝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스쳐 가는 바람과 함께, 수많은 피와 원한으로 물든 북방의 대지가 노래를 부른다.
공손웅도, 그도.
이젠 떠날 때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