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5화 (5/686)

第四章 ― 휘연(輝蓮)

몸을 덮치는 피로와 중압감 속에서 진휘연(秦輝蓮)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오랫동안 함께한 방의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창틀 사이로 화살처럼 내리꽂히는 밝은 햇살이 방안 구석구석을 밝히고 있었다.

밖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레 전 하인들을 모두 내보낸 뒤, 이젠 그녀의 일상이 되어 버린 분위기다.

그녀는 그대로 상체만 일으켜 딱딱한 나무 벽에 등을 기댔다.

결국 반 시진밖에 자지 못했다. 죽을 것처럼 피곤했지만 더 잘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붉은빛이 감도는 촉촉한 입술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꿈을 꿨어.”

반 시진밖에 자지 못했지만, 그 사이에 꾼 꿈이 어찌나 생생한지, 잠에서 깬 지금까지도 그 광경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도도하게 흐르는 커다란 장강 위에서 환하게 빛나던 새하얀 연꽃 한 쌍.

빛날 휘(輝), 연꽃 연(蓮).

그녀의 어머니가 꾸셨다는 태몽.

그래서 그녀의 이름이 되어 버린 꿈.

“어째서……? 오늘부터 새로 태어나라는 걸까? 두 번째 삶을 살라고?”

멍하니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포기하지 말자. 진휘연! 씩씩하게 살아야지.”

그녀는 시큰해진 눈가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린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속이 비치는 얇은 침의가 몸에 달라붙어 늘씬한 몸매가 드러났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가슴 아래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잘록한 허리가 이어지고, 여자치곤 키가 큰 편인 그녀의 쭉 뻗은 다리가 백옥처럼 빛났다.

그녀가 성큼 움직이자 방 안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텅 빈 방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경(銅鏡)에 그녀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홍화객잔의 총관 사무혁(司拇奕)이 오늘을 준비하라면서 주고 간 것이다.

값비싼 고급 물건답게 매끈하게 표면이 처리된 동경은, 반 시진밖에 못 잤음에도 잡티 하나 없이 뽀얀 얼굴과 눈, 코, 입이 완벽한 균형을 이룬 아름다운 얼굴을 그대로 그려 내고 있었다.

“한때는…… 이런 얼굴이 좋았었는데.”

휘연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과거 항주 최고의 청과상인 진가장(秦家莊)의 외동딸이었다.

한때, 차세대 항주제일화(杭州第一華)가 될 거라고 옆에서 부추기는 것에 맛이 들렸을 땐, 어떻게 하면 좀 더 예쁘게 보일까 고민하며 화장법을 공부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녀는 외모보단 내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옆에서 예쁘다고 띄워 주는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실제론 아무 의미도 없는 허망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은 외모 하나만 믿고 살아갈 만큼 만만치 않으니까.

항주제일화가 될 거라며 띄워 주던 시비(侍婢)와 아버지의 친구들은, 가문이 위기에 처하자 하나둘씩 인연을 끊고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 어머니…….”

부모님을 생각하자 애써 웃었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흐려졌다.

모든 것의 시작은 아버지가 커다란 거래를 하나 따냈다고 기뻐하면서 시작되었다. 진가장을 두 배로 키울 수 있는 커다란 일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상해 쪽의 과수원을 살펴본다며 어머니까지 모시고 유람을 가듯 떠나셨고,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산적을 만나 포로로 잡혀 버리셨다.

눈앞이 깜깜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다른 부유한 집안의 딸들처럼 곱게 화초처럼 자라났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일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어려서부터 비단 옷감을 쫓아다니기보다는 주판을 퉁기고 장사 구경하는 것을 더 좋아하던 여인이었다.

곧장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도움이 될 만한 인맥을 찾아다녔다.

아버지의 친구들, 관아의 관리들, 무림인이 많은 서호표국까지.

온갖 곳을 찾아다녔고,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은…… 세상은 더럽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친구들은 모두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심지어 은근슬쩍 그녀에게 첩으로 들어오라며 추파를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관아의 관리들은 산적들이 있다고 하면 무조건 모른다며 잡아뗐고, 유일하게 앞으로 나서 주었던 서호표국은 진상 조사를 위해 보냈던 표사들 몇 명이 시체로 돌아오자, 곧장 태도를 바꿔서 그녀의 간청을 묵살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이 넓은 항주에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

그렇게 절망하고 있던 그때, 한 사람이 찾아왔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난폭한 인상을 한 사내는 부모님을 살리고 싶으면 가산을 처분해서 은자 이천 냥을 내놓으라고 했다.

진가장이 제법 부자 소리를 듣긴 하지만, 그래도 은자 이천 냥이면 전 재산의 반 이상이라고 할 만큼 큰돈이었다. 함부로 줘선 안될 돈이지만, 돈을 순순히 건네주라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친필 서찰을 보자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집안에 있는 돈과 패물을 탈탈 털어 이천 냥을 마련했다.

그는 유유히 돈을 챙겨서 돌아갔고, 부모님은 열흘 후에 보내 주겠다고 말했다. 너무나 불합리한 약속이었지만 힘이 없는 그녀의 입장에선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걸로 부모님이 돌아올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천 냥을 지불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항주 제일 전장인 서풍전장(西風錢莊)에서 차용증을 들고 찾아왔던 것이다.

쓰여진 금액은 은자 사천 냥. 아버지의 직인과 수결까지 찍힌 진품 차용증이었다.

관군과 무인 들을 잔뜩 데리고 와서 으름장을 놓는데…… 그녀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 일 안 하고 놀고먹기만 해도 삼대는 먹고살 수 있을 돈이 불과 한 달 만에 사라져 버렸다.

과수원, 돈, 전답, 진가장이 가지고 있던 상점들까지.

모든 것을 처분하고 나서 마련된 돈은 정확하게 삼천육백칠십오 냥.

사천 냥에서 삼백스물다섯 냥이 모자랐다.

진가장이 건재하던 시절이라면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는 금액.

하지만 지금 그녀에겐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돈이었다.

서풍전장은 피도 눈물도 없었다. 더 이상 돈이 나올 곳이 없으니, 그들은 그녀를 ‘재산’으로 취급했다.

차세대 항주제일화라 불리던 잘난 미모 덕분이었다.

그들은 홍화객잔에 그녀를 재산으로써 팔아 버렸고, 홍화객잔의 총관 사무혁은 정확히 삼백스물다섯 냥에 그녀의 인생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곳 진가장을 떠나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울면 안 돼. 울지 말자, 진휘연.”

직접 떠온 물로 세안을 마친 휘연은 총관이 준비해 준 화려한 비단옷 대신 부모님이 좋아하시던 노란색 경장을 입었다. 여러 겹으로 땋아 내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발랄한 노란색 경장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부모님은 이 옷을 입으면 병아리 같았던 어릴 적 그녀가 생각난다며 좋아하셨었다.

물론, 그녀도 노란색을 좋아했다. 열흘 중 일곱, 여덟 번은 노란색 옷을 입을 정도로.

똑똑.

“준비 다 했느냐?”

총관 사무혁의 목소리였다.

휘연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씩씩한 표정으로 문을 활짝 열었다.

“……준비해 준 옷이 아니군.”

사무혁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은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웠다.

하지만 그에게 지고 싶지 않았던 휘연은 오히려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가서 갈아입으면 되잖아요.”

“……등천입장(登天入場)이라는 걸 아느냐?”

“그게 뭔데요?”

“고급 기녀들의 신고식 같은 거다. 기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지. 기루에 들어가는 첫날,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줘서 네 이름을 알리는 날이다. 그것도 모르면서 내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구는 건가?”

사무혁은 뱀처럼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의 위아래를 훑었다.

“화장도 안 하고, 장신구도 없고……. 엉망이군. 충고하지. 네가 진가장의 아가씨였다는 사실은 잊는 게 좋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적응하지 못할 테니까.”

“…….”

“그리고 내 말은 무조건 따라라.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만, 앞으로 반항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시키는 대로 몸을 꾸미지 않은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휘연은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뭐야?”

“내 기억까지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아요. 당신들에게 필요한 건 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기녀잖아요? 돈벌이는 확실히 시켜 줄 테니까. 나를 노예 취급하지 말아요.”

사무혁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차가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그의 눈을 보자 휘연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 안 돼, 지지 말자. 지면 안 돼.’

사무혁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죽고 싶나?”

“죽이게요? 삼백스물다섯 냥이나 주고 산 나를? 한 번 써 보지도 않고?”

“…….”

“죽일 거 아니면 그런 협박도 하지 말아요. 날 노예 취급하거나 죽일 거라고 협박하면,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일하지 않을 거예요.”

휘연은 덜덜 떨리는 몸을 감추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반쯤은 죽을 각오로, 반쯤은 계산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비싼 돈을 주고 구해 온 그녀를 함부로 죽여 버리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뱀처럼 냉정한 이 사무혁이란 사람은 충동적으로 앞뒤 안 가리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으음, 무, 무서워. 왜 저렇게 눈빛이 무섭지?’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그녀는 가슴이 떨릴수록 져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사무혁은 그런 그녀의 속을 꿰뚫어 보듯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려 피식 웃었다.

“당돌하군.”

“칭찬이죠?”

“먼저 홍화객잔으로 간다. 거기서 외모를 좀 꾸민 다음에 홍화루로 등천하기로 하지.”

사무혁이 손짓하자,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비 두 명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사무혁은 그녀를 지나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시도는 좋았다만, 사실 예의를 가르치기 위해 꼭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

“……!”

“이 세상엔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있다. 잊지 않는 게 좋아.”

백 마디 말보다 더 강렬한 경고였다.

휘연은 떨리는 가슴을 꾹 누르고는 모른 척 시비를 따라 미리 준비된 마차를 향했다.

마차는 고급스러운 쌍두마차였다. 양옆에는 홍화객잔을 상징하는 붉은색 연꽃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는데, 붉은색 연꽃잎 사이사이로 금가루를 묻혀 놓아서 햇빛이 비출 때마다 반짝반짝 빛을 내뿜었다.

휘연은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연꽃이 빛나던 꿈은, 이걸 말하는 거였을까?’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평생을 살아온 진가장이 보였다.

이미 서풍전장의 소유로 넘어간 곳이고, 머지않아 이름도 다른 것으로 바뀔 테지만, 그래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곳은 영원히 진가장이었다.

지난날의 추억이 깃든.

마음속의 고향.

‘언젠가, 꼭! 되찾고 말 거야.’

그녀는 강하게 다짐한 뒤,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이삼십 년이 걸리더라도, 기루에서 구를 데로 구른 몸이 되어 퇴기가 되더라도.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서,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진가장을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가요.”

그녀의 얼굴에서 슬픔이 사라졌다.

씩씩한 얼굴로 빙긋 미소 짓는 그녀는 마차가 출발한 뒤로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게 진휘연이다.

☆ ☆ ☆

한 식경가량 부지런히 나아가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분명히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았는데, 바깥에선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옆에 함께 타고 있던 시비들은 긴장한 얼굴로 바깥의 눈치만 살필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니 그녀들도 영문을 모르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나?’

호기심에 마차의 창문을 열고 빠끔히 내다봤다. 바깥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마차의 앞에 나동그라졌던 사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서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내고 있었다.

“아…….”

휘연은 고운 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왠지 가슴속이 찌릿찌릿했다.

사내가 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다부지고 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런 젠장! 꺼지라니까!”

“거 더럽게 귀찮게 하네. 확, 파묻어 버릴라!”

아무래도 사내를 마차 앞으로 집어던진 것은, 척 보기에도 ‘나 파락호요’라고 이마에 써 놓은 듯한 외모로 건들거리고 있는 문지기 두 사람인 것 같았다.

‘아, 도착했구나.’

휘연은 그 문지기 두 사람의 뒤에 있는 커다란 객잔을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연꽃 모양의 연등 수십 개가 장신구처럼 사 층짜리 전각을 장식하고 있는 곳. 그 정면의 간판엔 정갈하면서도 화려한 글씨체로 ‘홍화객잔(紅花客棧)’이라 쓰여 있었다.

“캬악― 퉤!”

그들은 더럽게 바닥에 침을 찍찍 뱉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꺼지라면 꺼져!”

“침모를 왜 여기서 구하냐고? 나 참, 기가 차서. 이거 미친놈 아냐?”

두 사람의 기세는 살벌했는데, 놀랍게도 그 사내는 기가 죽지도 않는지 흙먼지만 툭툭 털어 낸 뒤 다시 그들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휘연은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불러만 주시오. 이야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 글쎄, 뭘 부르냐고!”

“침모 말이오. 여기 침모가 솜씨가 좋다고 들었는데.”

“솜씨야 좋지.”

“그러니 만나고 싶단 말이오.”

“나 참…… 뭐, 좋아. 그렇다 쳐. 그럼 만나면? 침모를 만나서 뭐할 건데?”

“고용할 거요.”

망설임 없는 대답에 파락호 두 사람의 얼굴이 팍 찡그려졌다.

“뭐라고?”

“침모를 내가 고용할 거라고 했소.”

“……고용해서 뭐할 건데?”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만.”

“필요하니까 묻는 거잖아! 침모를 데려다가 어디 다 쓰게? 마누라로 삼기라도 하려는 거야?”

파락호는 자신의 말이 재밌는지 동료를 보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 앞에 서 있던 사내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를 참고 있어.’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사람 보는 안목을 키웠던 그녀는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내는 화를 참고 있었다. 파락호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무시하고 있었고.

“말해 봐. 마누라로 삼으려는 거야?”

“왜? 밤이 외로워? 기녀는 부담스럽고, 그래서 조금 만만한 침모나 찾아보자 이런 거야?”

“그런데 이걸 어쩌나? 우리 대(大)홍화객잔은 침모도 비싼데.”

“홍화루의 기녀가 아무리 싸도 반 시진에 은자 세 냥이거든. 침모는 최소한 은자 한 냥은 받아야겠어.”

“그래그래.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돈 내고 만나 봐.”

파락호들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빙글빙글 웃으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쁜 사람들!’

휘연은 알 수 있었다. 저 사람들은 사내의 허름한 복색을 보고 상대를 우습게 보고 있다.

그리고 만약 저 사람이 파락호들의 말대로 은자를 줄 수 있더라도, 절대로 침모를 만나게 해 줄 리가 없었다.

“그런 문제였나?”

“뭐?”

사내는 망설임 없이 품속에서 동그란 것 하나를 집어 파락호에게 던져 주었다.

매끈하고 동그란 은색의 물체.

은자였다.

“어, 어……?”

휘연은 깜짝 놀랐다.

파락호들도 진짜 은자를 내줄지는 몰랐는지 서로를 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이제 됐소? 반 시진은 만나 볼 수 있겠군. 침모를 불러 주시오.”

“…….”

침묵이 흘렀다.

휘연은 한숨을 푹 쉬었다.

‘보나 마나네. 자, 하나…… 둘…… 셋!’

“……이걸론 안 되지!”

“그, 그래! 이걸론 모자라지!”

손안에서 반짝거리는 은자를 보며 파락호들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빛났다.

십 중 십. 예상했던 그대로의 결과였다.

일말의 기대를 품고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고 있던 휘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럴 줄 알았어.’

저 사람은 물러도 너무 무르다.

목소리로 봐선 나이가 어린것 같진 않은데, 어떻게 사람 속을 저렇게 모를까? 인생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사내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조용조용하게 말했다.

“약속을 어기는 거요?”

그 지적은 정당했으나, 파락호들은 험상궂은 인상만큼이나 얼굴이 두꺼웠다.

“약속? 무슨 약속?”

“우린 약속한 적 없어. 대충 그 정도는 들 거라고 말해 줬던 것뿐이지. 일단 품속의 주머니나 꺼내 봐. 내가 한번 보고, 그 돈으로 침모를 만날 수 있나 없나 말해 주지.”

“…….”

“어허, 어서 내놓으라니까. 장님 주제에. 정말 큰일당하는 수가 있어!”

휘연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장님? 장님이었다고?’

물론 뒤에서 봐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저 사내가 장님이라는 느낌은 조금도 받지 못했었다.

장님이라면 으레 갖고 있는 지팡이도 없을 뿐더러, 아까 나동그라졌을 때도 곧바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지 않았던가? 장님들은 보통 어딘가에 부딪칠까 봐 항상 조심하는 버릇이 있는데, 사내에게선 그런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사내는 손바닥을 내밀고 두 사람을 멈춰 세웠다.

“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소. 백 냥이든 천 냥이든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내지. 침모나 불러 주시오.”

“뭐? 천 냥?”

“그렇소.”

휘연은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놀랐다.

‘저, 사람……. 진심이잖아?’

백 냥, 천 냥.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허허 웃을 이야기였으나, 사내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안목이 말해 준다. 저 사람은 그만한 ‘가치’만 있다면 정말로 천 냥을 쓸 거라고.

휘연의 눈에 호기심이 짙어졌다.

‘대체 정체가 뭐지?’

정체가 뭐기에 천 냥을 쓸 수도 있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고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이미 대화는 다른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모두가 그녀와 같은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 천 냥? 좋아. 천 냥 내봐. 내가 침모가 아니라, 우리 홍화루의 최고 기녀이신 천화(天花) 낭자라도 불러 드리지.”

“장난치지 마시오.”

“장난? 아니, 진짜 천 냥 한 번 내 보라니까? 귀빈 대접하고 깍듯하게 모셔 줄게!”

“…….”

“거봐! 못 내면서! 크흠, 일단 주머니나 한번 보자고! 그럼 내가 침모를 만나게 해 줄지 말지, 알려 준다니까?”

휘연은 이제 숨도 못 쉬고 그들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저 사내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까?

“잠깐. 그만둬라.”

‘아…….’

안타깝게도 상황을 정리한 것은 마차의 앞에 타고 있던 홍화객잔의 총관 사무혁이었다.

휘연은 싸움이 중단되었다는 안도감과 사내의 반응을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초, 총관님?”

“여긴 어쩐 일로……?”

파락호 두 사람은 좀 전의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총관에게 쩔쩔맸다.

총관은 성큼성큼 걸어가 그들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예……?”

“…….”

대답은 없었다. 손바닥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그들이 조심스레 은자를 올려놓자, 총관은 반대쪽 손으로 번개같이 그들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짝! 짝!

“윽……!”

“억……!”

두 사람이 각각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초, 총관님.”

“침모를 팔아 장사를 해? 네놈들에게 그럴 권리가 있던가?”

“그게, 저기…….”

“닥쳐라! 내 이 일의 책임은 나중에 묻겠다!”

총관은 마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대협객처럼 준엄하게 그들을 꾸짖고 있었다.

휘연은 이상함을 느꼈다.

‘대체 왜 저러…… 아……!’

그리고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주변엔 어느새 구경꾼들이 제법 몰려 있었던 것이다.

벌써 수십 명 가까이 모여 있는 그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객잔의 하인들도 있고, 지나가던 행인들도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들은 절대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기에 총관도 함부로 못하는 것이다. 지금 이 사건에 대한 소문이 곧장 항주 바닥에 쫙 퍼질 것을 알기에, 몸조심을 하면서 행동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기회야!’

휘연의 눈이 반짝 빛났다.

백 냥이든 천 냥이든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쓰겠다는 사내.

홍화객잔의 총관.

그리고 발뺌할 수 없도록 잔뜩 모여 있는 구경꾼들.

휘연은 잔뜩 긴장한 채, 이어지고 있는 총관과 사내의 대화에 집중했다.

“미안하게 됐군.”

총관은 손에 든 은자를 사내에게 돌려주었다.

“내 사과하지. 밑의 사람들이 장난기가 심해서 말이야. 장난을 친 거라네. 이해해 주게.”

“알겠소.”

“허허, 이해해 주니 다행이군.”

총관은 고맙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사내가 계속 말을 이었다.

“침모를 만나고 싶소.”

“……또 그 소린가?”

“돈을 내야 하는 거요?”

총관은 비릿하게 웃었다가, 이내 표정을 관리했다.

“그럴 리가. 그런데 말투가 좀 거슬리는군. 만약 돈을 내야 한다면 낼 수는 있나?”

“가격이 합당하다면.”

“호오, 그래?”

총관은 온화하게 웃었다.

하지만 휘연이 보기에 그건 비웃음이었다.

“합당하다면, 가격이 얼마든 낼 거다?”

“그렇소.”

“그 전에 하나만 묻지. 우리 침모를 데려다가 어떻게 쓸 건가? 모두가 내 가족 같은 사람들이라 묻지 않을 수가 없군.”

휘연은 헛웃음을 흘렸다.

‘가족? 퍽이나.’

가족은커녕 노예 취급을 하고 있을 것이 안 봐도 뻔했다. 그건 그동안 자신에게 한 태도만 봐도 명백하다. 밑의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성격이었으니까.

그런데 저렇게 가증스럽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다니.

“객잔을 열려 하고 있소.”

“……객잔?”

“그렇소. 그래서 침모가 필요하오.”

총관은 의외의 일격을 받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객잔에 필요한 침모를, 우리 홍화객잔에서 데려가겠다? 설마, 그 객잔이 이곳 금선로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

“맞소. 이곳에 있소.”

“……어느 객잔에서 왔나?”

총관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금선로의 다른 객잔이 연관되어 있다면 이건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이다.

“풍운객잔이오.”

“……풍운?”

“그렇소.”

“설마 그…… 금선남로에 있는 그, 매우 오래된 풍운객잔을 말하는 건가?”

“맞소. 거기요.”

금선로는 금선북로와 금선남로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총관은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자네는 풍운객잔과 어떤 관계지?”

“내가 객잔의 주인이오.”

사내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태연히 말했다.

“주인? 객잔을 샀다는 건가?”

“그렇소.”

“언제?”

“오늘 샀소.”

얼굴을 굳히고 있던 총관이 그 이야기를 듣자 돌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하하하!”

“왜 웃는 거요?”

“풍운객잔에서 침모를 구하러 오다니! 좋아, 내줘야지. 내줘야 하고말고. 합당한 가격만 내게. 그럼 내가 보내 주지. 혹시 기녀는 필요 없나? 기녀도 필요하다면 보내 주지.”

총관은 지금의 상황이 재밌다는 듯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는 그 웃음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그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내가 필요한 건…….”

찰칵.

그 순간, 마차의 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차에서 노란색 경장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펄쩍 뛰어내리더니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뛰어난 미색에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휘연은 밝은 목소리로 힘차게 소리쳤다.

“저요! 제가 할게요! 그 침모, 제가 할래요!”

대부분의 시선이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감탄이라면, 딱 한 사람의 시선은 그와 달랐다.

총관 사무혁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냐!”

“무슨 짓이긴요. 제 일자리를 찾아가는 거죠. 저기요. 그 침모 자리, 제가 하면 안 될까요? 저 잘할 자신 있어요.”

처음으로 사내의 얼굴이 휘연을 향했다.

얼굴이 갸름하면서도 남자답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큼직했는데, 한쪽 귀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곤 제법 괜찮은 외모였다.

‘아직 이립(而立:30세)도 안 된 것 같네?’

휘연은 그가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겉은 물론이고 속까지 샅샅이 파헤쳐지는 것 같았다.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나?”

“침모의 경험은 없지만, 집안을 꾸려 나간 경험은 있어요. 계산도 잘하고, 방을 꾸미는 것도 잘해요. 하인도 부릴 줄 알고요.”

“……그래?”

“저를 데려가면,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마지막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떨려 버렸다.

옆에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사무혁 때문이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이 싸늘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절대로 데려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거지?’

그의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아마, 그 생각은 틀릴 거야.’

휘연은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운명이 당기는 듯하던 그 찌릿한 느낌을.

그리고 돈과 관련된 일에서 전혀 긴장하지 않던 저 사내의 대범함을.

‘……아, 근데 조금 불안하긴 하다.’

만약 저 사내가 예상과 달리 그녀를 안 데려가면?

……고생길이 훤할 거다.

첫날부터 총관에게 제대로 찍힌 것일 테니.

“크흠, 저 아이가 철이 없군. 미안하지만 저 아이는 침모가 아니네.”

“침모가 아니면 누구요?”

“기녀가 될 아이네. 오늘 등천할 예정이었지.”

주변 구경꾼들 사이에서 ‘오오―!’하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미모가 범상치 않더란 말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꼭 홍화객잔에 가 봐야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휘연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를 기녀로서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어……? 웃었어?’

언제부턴지 장님 사내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착각인지 몰라도 웃는 것 같은 느낌도 잠시 들었다.

“될 예정이라는 것은, 아직 기녀가 아니라는 뜻이군.”

“음? 지금 뭐라고 했나?”

“저 여인을 데려가려면 얼마를 줘야 하오?”

“얼마라니. 그 무슨…….”

휘연이 재빨리 대답했다.

“삼백스물다섯 냥이요!”

총관의 시선이 칼로 찌르듯 아팠지만, 휘연은 모른 척 사내만 쳐다봤다.

“그렇죠? 총관님?”

“…….”

“저를 데려오실 때, 서풍전장에 삼백스물다섯 냥을 내셨잖아요?”

잠시 갈등하던 총관은 이내 표정을 담담하게 회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네. 삼백스물다섯 냥을 냈지. 좋아. 만약 자네가 ‘지금’ 그 돈을 낼 수 있다면 이 아이를 넘겨주지. 아까 보니 꽤 돈에 자신이 있어 보이던데, 지금 그 돈을 낼 수 있나?”

“…….”

“참고로 꼭, 지금이어야 하네. 오늘 저녁에 등천을 하고 나면 가격이 뛸 거거든.”

총관은 그가 돈을 지불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삼백 냥이 넘는 은자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풍운객잔에서 온 이 얼뜨기는 망신만 당하고 물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명령을 어기고 돌발 행동을 한 휘연에겐 깊은 가르침을 내려 줘야 할 것이다.

“삼백스물다섯 냥이라고 했소?”

“그렇네.”

“내겠소.”

“그럼 그렇…… 뭐라고?!”

무심코 대답하던 총관이 입을 쩍 벌렸다.

사내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척하니 내밀고 있었다.

눈이 부실만큼 빛나는, 일 족(足)만 한 길이의 묵직한 육면체.

갑작스레 금괴가 등장하자 웅성거리던 주변의 소음이 딱 그쳤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갑자기 나타난 귀한 물건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게…… 무슨…….”

금괴가 큰돈이라고는 하나, 홍화객잔의 총관이 그 정도 금액에 놀랄 리는 없다. 홍화루에서 하루에 만지는 돈만 해도 그 정도는 되니까.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아주 난감했다.

그는 자신감 있게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삼백 냥이 있으면 그 돈을 내고 데려가라고.

보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말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금괴를 의심스럽게 살펴봤지만, 아무리 봐도 이 금괴는 진짜였다.

“와아! 금괴네요! 금자로 삼십 냥! 은자로는 육백 냥! 분명히 삼백스물다섯 냥보다는 훨씬 크니까, 저는 이분을 따라가야 하는 거죠?”

“…….”

“그렇죠? 홍화객잔 총관님?”

휘연은 활짝 핀 모련처럼 방실방실 웃으면서 물었다.

반대로 총관의 얼굴은 벌레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역시, 선택이 옳았어!’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아니, 좋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밉살스럽던 총관의 찡그려진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기뻤고, 무엇보다 기녀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너무나 기뻤다. 불행한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 이 결정이 실수일 수도 있다. 지금 이 사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니까.

솔직히 말해서, 의외로 나쁜 사람일 수도 있고, 그녀에게 홍화루에서의 일보다 더 더러운 일을 시킬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녀의 안목과 운명을 믿었다.

‘그런 사람이 아냐. 이 결정은…… 분명 잘한 거야.’

휘연은 사내의 등 뒤로 다가가 조심스레 소매를 잡았다.

그는 잠시 움찔했지만, 소매를 뿌리치진 않았다.

“총관님. 설마 한 입으로 두말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홍화객잔의 명예가 걸려 있는데?”

그녀가 목소리를 높여 말하자, 주변에서 “에이, 홍화객잔의 총관이 그럴 리가 없지.”, “저놈 누군지 몰라도 복 받았다!”라는 말이 웅성웅성 흘러나왔다.

“너……!”

“그럼 저는 이분을 따라가면 되는 건가요?”

“……그래.”

총관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면서 결국 승낙했다.

‘됐……어.’

풍성한 소매 밑에서 그녀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당당한 척했지만 솔직히 그녀로선 총관의 눈빛을 받아 내는 것이 너무나 버거웠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스윽.

“어……?”

휘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옆에 있던 사내가 그녀의 앞으로 한 발짝 나와 있었다.

마치, 그녀의 앞을 지켜 주는 것처럼.

그 덕분일까? 사내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총관의 눈빛이 더 이상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법 듬직한 면도 있네.’

휘연은 씩 웃으면서 총관을 향해 손을 척 내밀었다.

“주세요.”

“……무엇을?”

“잔돈이요. 다시 말해 드려요? 금괴 하나면 금자 서른 냥. 은자로는 육백 냥. 그러니, 원래 제 몸값인 삼백스물다섯 냥을 제외하면 이백칠십다섯 냥이 남지요?”

“…….”

“설마 홍화객잔의 총관님이 잔돈을 떼먹진 않으시겠죠?”

빠득!

이빨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총관은 옆에 어벙하게 서 있던 파락호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가서 돈 가져와라!”

“예, 예!”

그들은 잠시 후, 홍화객잔 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나왔다.

총관은 그 돈을 그녀에게 던지듯이 건네주었다.

“이 일, 후회하게 될 거다.”

총관의 눈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사내를 향하고 있었다.

사내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소.”

“그럼 조용히 살았어야지.”

“지금 조용히 살고 있잖소? 안 그랬으면 이렇게 평화롭게 끝났을 리가 없지.”

이게 평화롭게 끝난 건가?

총관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는 사이, 사내는 휘연의 어깨를 툭 치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지.”

“에…… 네.”

휘연은 걱정 반, 기쁨 반의 심정으로 그를 따라갔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자 총관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괜히 걸음을 더 빨리해서 사내의 곁으로 쫓아갔다.

사내의 걸음은 꽤나 빨랐다.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멀어졌고, 금선북로와 금선남로를 잇는 다리도 단번에 건넜다.

두 사람의 앞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어? 잠깐…….’

휘연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저기, 객주님. 장님 아니죠?”

사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아니지.”

“그런데 왜 눈을 감고 있었어요?”

“……겁주기 싫어서.”

“네?”

“누가 그러다라고. 내가 쳐다보기만 해도 겁주는 거라고.”

휘연은 사내의 눈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좀 떠보세요.”

“후회할 텐데?”

“괜찮아요. 마음 단단히 먹고 있을게요.”

잠시 고민하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차피 한 가족이 될 테니까.”

“……!”

휘연은 어쩐지 그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떨림 반, 기대 반으로 사내를 지켜봤다.

그리고 그가 눈을 뜨는 순간,

“꺅……!”

깜짝 놀라서 주저앉아 버리려는 것을 사내가 허리를 붙잡고 지탱해 주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아!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총관의 눈빛 따윈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이게 진짜로 무서운 눈빛이다. 너무 무서워서 똑바로 쳐다도 보기 힘든 눈빛. 오금이 저려서 머릿속이 하얘지는 듯한 공포.

“괜찮나?”

하지만 어색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듣자 그 공포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단단한 감촉이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조심스레 올려다보자 사내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결국 멀리 뒤쪽을 바라봤다.

“뭐, 꼭 눈을 똑바로 보지 않아도 돼.”

“괜찮아요. 적응됐어요.”

“정말?”

“아, 아뇨. 아직은요. 하지만 차차 적응될 거예요.”

“그래.”

사내가 허리를 놓아주었다.

휘연은 양 볼이 화끈화끈한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아,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거지?’

휘연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고생했다.

기껏 마음을 진정시키고 보니, 사내는 휘연의 뒤쪽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 뒤를 돌아봤지만, 그녀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도 그러더니, 계속 따라붙는군.”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사내는 몸을 돌리더니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휘연은 그 뒤를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갔다.

“저기요, 객주님.”

“어.”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그건 왜?”

“서로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아! 제 이름은 진휘연이에요.”

사내는 처음 눈을 떴을 때처럼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딸랑― 딸랑―.

그때, 방울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우차(牛車)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앳된 외모에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소년이 우차에 타고 있었는데, 승복을 입은 것을 보니 사미승인 듯싶었다.

사미승은 두 사람에게 다가와 제법 절도 있게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부처님의 인연이 두 분에게로 저를 이끄셨군요. 연등제를 맞아 서인사(西印寺)에서 만든 연등입니다. 공양을 위해 사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연등?”

“예. 연인이 되실 분, 새로운 인연을 맞으신 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했을 때 축복을 기원하며 연등을 다는 것이지요. 연등 안에 원하시는 소원을 써넣으셔도 좋습니다.”

사미승은 우마차의 짐칸에서 연등 두 개를 꺼내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두 분께는 이게 좋을 것 같군요.”

휘연은 그 연등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새하얀 연등이었다. 어찌나 잘 만들었는지 진짜 연꽃 같은 것은 둘째 치고,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이 너무나 예뻤다.

휘연이 그 연등 두 개에서 눈을 못 떼고 있자, 사내는 사미승에게 물었다.

“얼마지?”

“원하시는 만큼 주시면 됩니다.”

사내는 정중하게 합장하는 사미승에게 은자 한 냥을 내밀다가, 이내 마음이 바뀌었는지 한 냥을 더 내밀었다.

은자 두 냥.

큰 액수였지만 사미승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불호를 한 번 외운 뒤, 별말 하지 않고 은자를 받았다.

크게 겸양을 떨지 않으니, 오히려 진짜 승려 같았다.

휘연은 우차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사내에게 물었다.

“왜 두 냥을 주셨어요?”

“그냥.”

“그냥요?”

“두 사람이니까. 두 냥을 줬어. 그것뿐이야.”

휘연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왠지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는 두 사람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일에 한 냥을 주기가 싫었던 거다. 왠지 한 냥짜리 행운을 두 사람이 나누는 것 같으니까.

“헤헤.”

“왜 웃어?”

“저도 그냥요.”

휘연은 사내의 옆을 나란히 걸어가며 그의 손에 들린 연등과 자신의 손에 들린 연등을 번갈아 쳐다봤다.

나란히 서 있는 새하얀 연꽃 두 개.

장강처럼 도도히 흘러가는 두 사람의 운명.

“헤헤헤.”

“……왜 자꾸 웃는 거야?”

“그냥, 다행이다 싶어서요.”

“뭐가?”

“객주님을 만난 게요. 홍화객잔은 제 운명이 아니었나 봐요.”

사내는 쑥스러운 건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객주님 이름이 뭐라고요?”

“장기린.”

“…….”

“또 웃고 있는데?”

“그냥, 특이한 이름이네요.”

휘연은 장기린의 소맷자락을 꼭 붙잡았다.

아늑한 노을빛이 두 사람의 뒤로 길게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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