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6화 (6/686)

第五章 ― 주방풍운(廚房風雲)

“아……!”

싱싱한 돼지고기 한 근이 바닥에 툭 떨어지고, 잘 영근 감자 대여섯 개가 바닥을 데구루루 굴러갔다.

시장을 봐서 돌아온 운찬이 객잔에 들어서자마자 한 행동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사람’을 보고 한 행동이었다.

“앗! 이 아까운 걸!”

“숙수님! 정신 차리세요!”

나무 바닥 구석구석을 닦아 내던 아칠과 아팔이 놀라서 식 재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먹는 것에 민감했다. 객촌에서 매번 끼니를 때우지 못해서 얼마나 굶주리고 고생을 했던가?

나무껍질은 물론이고, 냇가의 이끼에서부터 전나무 뿌리 사이에 숨어 있는 벌레까지, 안 먹어 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 아까운 걸 바닥에 떨어뜨리다니!

“숙수님. 그러시면 안 돼요!”

“음식 함부로 대하면 천벌받는다구요!”

두 사람은 운찬에게서 재빨리 식 재료들을 빼앗아 주방에 갖다 놓은 뒤, 전에 없이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운찬은 그에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그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한곳만 바라봤다.

“아! 안녕하세요?”

백옥 같은 피부, 방긋거리는 웃음에 현기증이 났다.

“누, 누구시, 세, 셔…… 아니, 세요?”

“재밌는 분이시네요.”

반달처럼 곱게 휘어지는 눈웃음에 또 한 번 현기증이 일었다.

운찬은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입술을 손으로 찰싹찰싹 때린 뒤, 헛기침을 했다.

“커험, 커험! 소, 소저는 누구신지요?”

“제 이름은 진휘연이에요. 여기 풍운객잔의 침모로 왔어요.”

“치, 침모요?”

“그쪽 분은 강 숙수님이시죠?”

운찬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놀라서 물었다.

“그, 그걸 어떻게……?”

“객주님이 말해 주셨어요. 밝고 재밌는 분이 있다구요.”

빙긋 웃는 그녀의 시선이 객잔의 구석으로 향한다.

그곳에 양팔로 머리를 받치고는 식탁 위에 누워 있는 장기린이 있었다.

“난 가볍고 단순한 녀석이 한 명 있다고 했어.”

“혀, 형님!”

운찬은 당황했다. 이런 아름다운 여인에게 그런 실례되는 감상을!

그는 휘연의 얼굴을 보며 허둥지둥하다가 결국 얼굴이 빨개져서는 장기린에게 달려가 물었다.

“형님,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되긴. 침모 구해 왔지.”

“침모라니……! 저렇게 예쁜 여자가 침모라는 게 말이 돼요?”

“좀…… 예쁘장하긴 하지.”

“좀이 아니에요! 엄―청 예쁘잖아요! 저런 사람은 어디서 구해 온 거예요? 대체?”

장기린은 누운 자세 그대로 슬쩍 눈을 떠서 운찬의 얼굴을 쳐다봤다.

대체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얼굴이 빨개져서 콧바람을 씩씩거리고 있으니 구분이 안 된다.

“들어 보세요. 침모라는 건 보통 나이 들어서 퇴기가 된 여인이나, 가사 일을 많이 해 본 여인들이 하는 일이에요. 저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자는 보통 침모 일을 안 한다구요.”

“하겠다잖아.”

“예?”

“본인이 하겠다잖아. 잘할 자신 있다던데. 젊은 여자는 고용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운찬이 입을 뻐끔거리며 당황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뭐야? 쟤랑 같이 일하기 싫어?”

“그건…… 아니죠.”

“그럼 뭐가 문제야?”

운찬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 처음에 당황해서 물었을 뿐, 예쁜 여자와 함께 일하는 게 싫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장기린은 운찬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주방으로 돌아가자, 휘연을 불렀다.

“휘연.”

“네, 객주님.”

휘연은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난 솔직히 객잔 일을 잘 몰라.”

“네. 그러신 것 같았어요.”

“침모는 객잔을 꾸미는 사람이라던데, 맞아?”

“맞긴 한데, 단순히 꾸미는 것보단 많은 일을 하죠. 총관처럼 객잔 일을 대부분 관리한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 그럼 침모의 입장에서 볼 땐, 어때? 여기를 얼마나 바꿔야겠어?”

휘연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아예 새로 지어 버리고 싶죠. 건물이 너무 낡아서 손님이 찾아오고 싶지 않을 것 같거든요.”

“다시 짓기는 힘들어. 고치는 걸로 쓸 만하게 만들 수 없을까?”

“음……. 외관을 최대한 장식하고, 안에 있는 가구를 싹 바꾸면 어느 정도 괜찮아 보이게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건물을 다시 짓지 않는 한, 다른 유명한 객잔들처럼 멋지게 만들지는 못하겠지만요.”

“꼭 멋질 필요는 없어. 평범한 게 제일이니까.”

“평범이요?”

“그래. 평범하게. 손님이 너무 없어서 망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휘연은 그 말이 재밌었는지 풋 웃음을 터뜨렸다.

“평범하게, 평범하게…… 알겠어요.”

“그래. 그렇게 해 줘. 그리고 돈이 필요하면 이 돈을 가지고 써.”

장기린은 제법 묵직한 주머니를 휘연에게 건네주었다.

휘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건네받은 것은 홍화객잔을 상징하는 붉은색 연꽃이 그려져 있는 주머니로, 총관에게서 받아 온 은자 이백칠십다섯 냥이었다.

그는 그것을 고스란히 그녀에게 준 것이다.

“이걸…… 다 주시는 거예요?”

“부족해?”

“아뇨, 그게 아니라…….”

휘연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 주머니를 바라보다가, 당돌하게 장기린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제가 이걸 가지고 도망치면 어떻게 하려고요?”

장기린은 눈을 감고 드러누운 채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도망칠 거야?”

“…….”

“난 한 가족이 된 사람을 의심하지 않아. 만약 그 사람이 배신한다면……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내 탓이지.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해.”

휘연은 누워 있는 장기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어린아이처럼 배시시 웃었다.

“헤헤.”

“……왜 또 웃어?”

“그냥, 역시 객주님을 만난 게 다행이다 싶어서요.”

“…….”

“또 부끄러워하신다.”

“……내가 언제?”

“객주님은 부끄러우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시잖아요.”

장기린은 몸을 움찔했다. 안 그래도 시선을 천장에서 옆으로 돌리려던 참이었다.

“저는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에요.”

“…….”

“그러니, 평범한 거 이상으로 잘 꾸며 놓을지도 몰라요. 미리 알고 계세요.”

휘연은 씩씩하게 웃은 뒤 몸을 돌렸다.

“아칠, 아팔. 객실을 좀 정리할 건데, 같이 도와줄래?”

아칠과 아팔은 잠시 주방 쪽을 쳐다봤다가, 힘차게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세 사람이 계단을 올라가고 나자, 가만히 누워 있던 장기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재밌는 애가 들어왔군.”

씩씩하고, 솔직하고, 당돌하다.

앞으로 함께하면서 심심하진 않겠구나 싶었다.

“아칠! 아팔! 재료 다듬는 거 도와주기로 해 놓고 어디 갔어?”

그때, 주방에서 슥 고개를 내민 운찬과 눈이 마주쳤다.

운찬은 일 층을 둘러보며 당황해했다.

“어? 형님. 애들 어디 갔어요?”

“……네가 애들을 무시하니까 복수당한 거다.”

“예? 제가 언제 애들을 무시했어요?”

운찬은 정말로 모르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휘연의 외모에 홀려서 애들이 하는 말을 무시했던 것은 기억도 안 나는 듯했다.

“흐음.”

잠시 고민하던 장기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도와주지.”

“……예에?!”

“재료 다듬는 거. 내가 도와주겠다고.”

장기린은 당황하는 운찬을 지나쳐 주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안 그래도 주방을 운찬에게만 떠맡겨서 마음이 불편하던 차였다. 당장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도와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저, 형님. 도와주지 않으셔도 괜찮…….”

“아냐, 아냐. 할 일도 없는데 도와줘야지.”

“…….”

“불편해?”

“예. 불편해요.”

운찬은 역시나 솔직했다.

“보조 일은 아랫사람한테 시켜야 하는 거라고요. 형님께 맡겨서야 말이 안 되죠.”

“그냥 참아.”

“…….”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이구먼.”

운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제가 어떻게 형님께 이래라저래라 합니까?”

“혹시 알아? 이게 처음으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기회일지?”

“…….”

“그렇다고 너무 그렇게 눈을 빛내진 말고. 적당히 도와주겠다는 거야.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얘기해 보라고.”

어깨를 툭 치면서 말하자, 운찬은 그제야 평소처럼 쾌활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럼…… 감자부터 시작하죠.”

“감자?”

“예. 감자요. 저기에 보이시죠?”

운찬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엔, 사람 몸통만 한 커다란 망태기에 감자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양이 만만치 않아서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운찬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포기하시렵니까?”

“……해 보지.”

“하하, 그럼 일단…….”

운찬은 도마 위에 놓여 있던 작은 칼을 건네주었다.

“소도(小刀)로 껍질을 좀 깎아 주세요.”

☆ ☆ ☆

슥. 서걱. 석.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화려한 손놀림에 거친 피부가 벗겨지고 노란 속살이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채 살포시 드러난다.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마냥 새카만 껍질들이 비산했다.

황옥으로 만든 조각상마냥 매끈한 단면은, 과연 장인의 솜씨이던가!

잡티 하나 남기지 않고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길은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남기지 않음이로다.

처음엔 조심조심. 느릿하던 손길은, 이제 광폭한 폭풍처럼 감자들을 휩쓸고 있었다.

지켜보던 운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꽉 차 있던 망태기는 일각도 채 지나기 전에 어느새 반이나 비워져 있었다.

“잠깐! 잠깐! 중지!”

장기린은 움직임을 멈추고 의아한 눈으로 운찬을 바라보았다.

한창 집중력이 올라가던 차인데, 어째서 방해한단 말인가.

“형님. 어떻게 감자 껍질을 그렇게 잘 깎을 수가 있어요?”

“……이게, 잘 깎는 건가?”

“그럼요! 처음엔 굼벵이처럼 느렸었는데, 갑자기 다섯 갠가, 여섯 개째부터 엄청 빨라졌잖아요? 왜 그런 거예요?”

운찬은 보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장기린은 대답하기가 애매해서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과거, 군대에 있을 때도 빨리 배운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대(隊)에 있는 녀석들이야 워낙 다들 잘하다 보니, 스스로를 특출 나다고 생각하진 못했지만, 분명 남들과 비교하면 빠르긴 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한 박자 빠르게 움직인다고 할까?”

“예? 한 박자 빠르게요?”

“그래.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박자를 가지고 있어.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여기에 껍질을 까놓은 감자가 있고, 여기에 아직 껍질을 까지 않은 감자가 있지. 만약 내가 너에게 여기 감자 두 개를 좀 집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치자. 그럼 어떻게 할 거냐?”

운찬은 잠시 망설이더니, 껍질을 안 깐 감자를 왼손에 쥐고, 껍질을 깐 감자를 오른손에 잡았다.

장기린은 그 양손을 가리켰다.

“그래, 그 속도다.”

“예?”

“너는 아마 다른 일을 할 때도 지금 감자를 집은 것과 같은 속도로 움직일 거다. 그렇지?”

운찬은 잠시 멍하니 생각하다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칼질을 할 때든 걸음을 옮길 때든, 별생각 없이 움직일 땐 지금 감자를 집어 든 속도와 똑같은 속도로 몸을 움직였던 것 같았다.

“그게 너의 ‘박자’다. 평소에 네 몸이 익숙해져 있는 속도라는 거지. 어떤 행동을 하든, 네가 빠르게 움직이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네 몸은 알아서 그 속도로만 움직일 거다.”

“아……!”

“그걸 한 박자 빠르게 하는 거다. 네 몸, 네 호흡, 네 생각. 모든 것을 한 박자 빠르게 해서, 그게 너의 ‘보통 박자’가 되도록 하는 거지. 생각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 속도를 몸에 인식시키는 거다.”

“……어려워요. 이해가 잘 안 가요.”

“봐라. 내 보통 박자는 이거다.”

장기린은 슥, 손을 옆으로 움직였다.

마치 바닥에 떨어진 쌀을 손으로 쓸어 담듯이.

그러자, 어느새 그의 손엔 바닥에 놓여 있던 감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어엇……!”

“이게 익숙해지고 나면, 세상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할 거다. 그때부턴 의식적으로 한 박자 느리게 살아가는 거지. 처음엔 좀 답답하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그것도 나름 괜찮아진다.”

운찬은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더니,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박수를 치며 탄성을 토해 냈다.

“어쩐지! 제가 청월루에 있을 때, 대숙수가 항상 숙수들한테 ‘이런 느려 터진 놈들!’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그냥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나 봐요.”

“대숙수라면…… 그때 그 시끄러운 인간 말인가?”

“성격은 안 좋지만, 실력 하나는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정통 중의 정통을 배웠거든요.”

“그래?”

“예. 음, 저도 연습해 봐야겠어요. 잘 안될 것 같긴 하지만.”

운찬은 비장한 얼굴로 감자에 소도를 대고 이리저리 휘젓다가 손가락을 찌르고 말았다.

운찬이 깨알 만한 핏방울을 보며 죽는다며 방방 뛰어다니는 것을 보며, 장기린은 피식 웃어 버렸다.

“조심해라. 칼로 하지 말고 다른 걸로 해.”

“윽, 예!”

운찬은 생각을 바꿨는지 밀가루에 물을 뿌리고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나무 판에 밀가루를 뿌려 놓고 반죽을 척척 치대기 시작하는데, 잔상이 남을 만큼 손놀림이 빨랐다.

운찬은 손을 멈추지 않은 채로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돼요! 돼요! 훨씬 빨라졌어요!”

“음, 잘은 모르겠지만, 반 박자 정도는 빠른 것 같다.”

“오! 이게 반 박자란 말이죠? 좋아! 그렇다면 한 박자 도전!”

“흐음.”

“으랴랴!!”

처음엔 춤을 추듯 괴상하게 밀가루를 뿌려 대던 운찬이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어느 정도 몸놀림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운찬의 눈빛이 영리하게 빛났다. 그는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는 것도 모른 채 반죽에 집중하고 있었다.

‘역시, 재능이 있어.’

원래는 무기를 들고 연습하는 거지만, 누구나 자기 분야가 있는 법이니 운찬은 저런 식으로 해도 괜찮을 것이다.

운찬은 확실히 배우는 게 빨랐다.

보통 반 박자가 빨라지는 건, 일주일 정도 연습한 뒤에야 가능한 일이다.

‘병사였다면 대(隊)에 들어왔겠군.’

이틀 안에 반 박자를 빠르게 할 수 있는 사람만 대에 들어올 수 있었다.

장기린은 잠시 그런 생각을 한 뒤, 다시 감자를 깎기 시작했다.

이것도 하다 보니 제법 재미가 있었다.

무념무상(無念無想).

몰아(沒我)의 느낌이랄까.

모든 생각을 잊고 하나에 몰두하니 잡생각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삭, 서걱, 석.

그렇게 일각 정도 집중했을까?

갑자기 운찬이 소리를 질렀다.

“우와아악―!”

“……뭐야, 왜 그래?”

“혀, 형님. 가, 가, 감자가! 감자가!”

“감자가?”

그는 그가 깎아 놓은 산더미 같은 감자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황옥처럼 노랗게 빛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갑자기 감자들이 거멓게 변해서 쭈그러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작은 아래쪽에서부터였다.

마치 버섯이 피듯 아래쪽부터 스멀스멀 검은색으로 뒤덮이더니 금세 깎아 놓은 감자의 절반을 뒤덮어 버렸다. 감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된 일이죠?”

“…….”

“형님이 껍질을 깎아 놓은 순서대로 쭈그러드는 것 같은데요?”

“아……!”

정말로, 그러고 보니 그가 감자를 깎은 순서대로 쭈그러들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칼에 독이라도 발려 있었나?’

물끄러미 손에 들린 소도를 내려다봤지만 왠지 그건 답이 아닌 것 같았다. 독이 발려 있었다면 처음에 깎은 두어 개만 시들었을 터였다.

“이건 혹시……!”

운찬이 의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항상 대숙수가 하던 말이 있어요. 칼질을 할 때는 경건해야 한다. 칼질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재료가 싱싱하게 되살아나기도 하고, 반대로 죽어 버리기도 한다고…….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이야말로 칼질의 궁극에 이른 거라고……. 그랬거든요?”

운찬은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 감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말하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대(隊)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무공이라는 걸 배운 둘째가 그에게 했던 말이 있었던 것이다.

“대형. 대형은 살기가 너무 짙습니다. 그래서 적군은 물론이고 같은 명(明)의 병사들도 대형을 감히 똑바로 못 보는 겁니다. 저희 사문에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검즉종심(劍卽從心)이니, 똑같은 검을 쥐어도 살검(殺劍)을 쥔 자는 사람을 죽이고, 활검(活劍)을 쥔 자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 대형을 이것에 비유하자면…… 살검의 극에 이른 분이지요. 아마 대형이 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미물들은 픽픽 죽어 나갈 겁니다.”

“운화, 과장이 심해.”

“……역시 대형은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아무튼, 대형은 살기를 줄이실 필요가 있습니다. 자고로 살검은 양날의 검. 밖으로 향하는 힘만큼 대형의 안도 갉아먹기 마련입니다. 하루빨리 대형의 몸속에 흐르는 살기를 비워 내고, 생기(生氣)와 활력(活力)으로 채우십시오.”

“……그런 뜻이었나?”

왠지 입맛이 썼다. 그때는 살기를 많이 뿜을수록 더욱 편해서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러면 안 되었던 모양이다.

“으으…… 그나저나 이 아까운 감자를 어떻게 하죠? 아무래도 못 쓰겠는데요?”

“…….”

“형님?”

장기린은 운찬을 힐끗 바라본 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옆에 있던 망태기를 들어 올렸다.

당근과 무가 가득 들어 있는 망태기였다.

“어엇! 형님, 그걸로 뭐하시려고요?”

“이거, 버렸다고 생각해라.”

“예에?!”

“필요한 야채는 다시 사 와. 이건 내가 좀 쓰마.”

“혀, 형님?”

당황한 운찬은 그대로 두고, 망태기를 든 채 주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객주를 위해 지어진 별채는 풍운객잔의 뒤뜰에 만들어져 있었다. 어차피 백 년이나 된 건물이기에 낡고 보잘것없었지만, 그 앞의 공터만큼은 잡초 하나 없이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공터의 중심에 망태기를 내려놓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곰곰이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운화가 그때 뭐라고 했더라? 살기를 지우기 위해선 뭔가를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둘째 부운화(芙雲樺)는 자신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사문에서 쓰는 이름이 운현(雲賢)이라고 했던가? 무당인지 무속인지 하는 유명한 곳의 제자였다고 했으니 틀린 방법을 말해 줬을 리는 없었다.

“노장사상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빼앗을 것이 있다면 반드시 우선 내주어라. 없앨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우선 부풀려라.’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살기를 없애기 위해선 우선 살기를 강하게 느끼고 부풀리셔야 합니다. 본인은 느끼지도 못할 만큼 한 몸이 되어 버린 살기를 우선 따로 분류해야 하죠. 그리고 차츰 그것을 지워 나가는 겁니다. 보통 강호인들은 폭포 수련을 많이 합니다만…… 폭포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니, 바람을 맞으며 하는 것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살기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바람에 서서히 씻어 내리는 겁니다. 흙먼지를 털어 내듯 말입니다.”

“후우우…….”

가만히 앉아 운화가 말했던 대로 자신의 몸을 자세히 관조하기 시작했다. 살기가 뭔지, 어떻게 하면 살기를 뿜을 수 있는지.

안다.

물론 안다. 평생을 해 온 일이니.

하지만 지금 그가 하려는 일은 일반적인 살기가 아니라 몸에 찌들 대로 찌들어서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못 느끼고 있는 살기를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기세를 뿜을 때는 이마 한가운데에 정신을 집중하는 법이지. 눈앞에 있는 것을 적이라 생각하고…… 죽여 버리겠다는 마음을 강하게 먹자. 확실하게. 실제로 느껴질 수 있도록…….’

잠시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눈앞에 있는 당근을 노려보았다.

큼직하게 자라 있는 당근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병사라고 생각했다.

이 당근이…… 아니, 이 병사가 나를 노리고 있다.

얼굴은 빨갛고, 녹색 머리털은 빳빳하게 곤두세운 채, 건방지게 눈을 부릅뜨고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

질 수 없다.

당장 죽이리라.

벌레처럼 미약한 반항을 대번에 짓누르고, 압도적으로 짓밟아 버리리라.

이 건방진…… 당근!

“큭, 쉽지 않잖아!”

긴장이 탁 풀려서 한숨이 나왔다. 텅 빈 공터에 앉아서 당근을 노려보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웃기지 않은가!

“내가 뭘 하는 건지…….”

잠시 머리를 긁적인 뒤,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운찬, 휘연, 그리고 아칠과 아팔.

같은 식구들이 똑바로 눈도 쳐다보지 못한 대서야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이 비정상적인 눈빛도 다 몸에 찌든 살기 탓이다.

아무 생각 없이 깎은 감자가 일각 만에 죽어 버리는 것 또한 살기의 탓이다.

어떻게든 이 과거의 업을 한시라도 빨리 벗겨 내야 했다.

‘평범하게 살려면…… 말이지.’

눈을 부릅뜨고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당근은 죽여야 한다.

당근은 내 목숨을 노리는 적이다.

절대로 살려 둬선 안 되는 죄인 중의 죄인이다!

“하앗!”

가슴이 울컥하고 아랫배의 무언가가 꿈틀 움직이는 순간, 재빨리 손에 들린 식칼로 당근을 썩둑 잘라 버렸다.

마치 적병의 목을 날리듯 호쾌하게.

당근은 반항하지 못했다.

절단면이 유리처럼 매끈해 보일 만큼 깔끔하게 반토막이 나서 바닥을 뒹굴었다.

반토막난 당근이 땅에 툭 떨어지는 순간, 싱싱했던 붉은색이 까맣게 변하며 목이버섯처럼 쭈그러들었다.

스스스…….

“음……!”

순식간에 쪼그라들어 버린 ‘당근’을 보자 절로 신음이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자른 것은 그래도 일각 동안 멀쩡했는데, ‘죽이고자’ 마음먹고 자른 것은 자르자마자 죽은 것이다.

‘운화의 말이 맞았어.’

이젠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다행이라면 이번에 칼질을 하면서 살기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게 되었다는 점이랄까?

‘아랫배에서 감촉이 느껴졌어.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살기의 근원이야. 몸에 배어 버린 살기는 모두 여기서 시작되었어.’

도대체 이렇게 큰 게 뱃속에 있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몰랐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랫배에 있는 구슬 같은 원정(原精)은 살기의 근원이었다. 써도 써도 도저히 마르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군집체였다.

‘이걸 살정(殺精)이라 부르자. 이걸 다루는 것을 연습해야 해. 필요할 때만 쓸 수 있도록……. 아니, 아예 되도록 비워 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돼.’

잠시 정신을 집중해서 살정을 강제로 풀어 보려고 했으나, 살정은 반항하듯 꿈틀거릴 뿐 풀어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단단히 꼬인 실타래를 풀어 보려고 노력하는 느낌이었다. 손을 대면 댈수록 점점 더 엉킬 뿐 풀릴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짜증이 나려고 했다.

‘성가시게……! 아니, 그럼 일단, 쓰지 않는 법을 연습하자. 어떻게 하면 쓰지 않을 수 있지?’

잠시 고민하다가 옆에 있는 망태기에서 무를 하나 꺼내 들었다.

큼지막하고 싱싱한 하얀색 무.

정신은 온통 뱃속에 있는 살정에 집중한 채로, 되도록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무를 썩둑 썰어 보았다.

무가 썰리는 순간 살정이 꿈틀거렸다.

미약한 기운이 뱃속에서부터 올라와, 가슴, 어깨, 팔을 지나, 들고 있던 식칼로 흘러들었다.

“아……!”

무는 새카맣게 죽어 버렸다.

마치 당근이 그랬듯이.

“이젠 살기를 뿜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구나……!”

당근을 죽이니 살리니 하면서 살기를 끌어낼 필요도 없었다.

마치 화약에 불을 당기듯, 살정에 신경을 쓰는 순간, 저절로 살기가 일어나 칼에 실리는 것이다.

살정은 스스로 움직였다. 마치 자신만의 의지가 있는 것처럼.

‘즉, 살기를 뿜지 않으려고 해도 살정을 의식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살기가 뿜어지는 건가? 곤란하군. 내 몸에 제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줄이야. 생각해 보자. 제멋대로 날뛰는 살기를 제압해야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활검? 활검이라는 건 어떻게 해야 하지?’

한참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장기린은 머리를 긁적인 뒤, 무작정 다리를 펴고 앉았다. 왼손으로 망태기에서 무를 하나 더 꺼내고는 툭툭 하늘로 던졌다 받는 것을 반복했다.

“그래. 해 보자. 몸으로 해 보는 거다. 언제는 머리 쓰면서 배웠나?”

처음 대(隊)에 들어갔을 때, 싸움법이든, 호흡법이든, 생각하는 법이든. 뭐 하나 머리로 배운 것이 있던가?

다 몸으로 뛰고, 몸으로 겪어 보면서 하나하나 머릿속에 강제로 새겨 넣은 것들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배울 게 있다면 스스로 몸에 새겨 넣어야 한다.

연습하고 또 연습하다 보면, 답은 나오게 되어 있지 않던가?

“좋아. 해 보자!”

거무튀튀한 식칼이 공기를 가르고, 졸지에 참혹한 변을 당한 당근과 무의 잔해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한적했던 별채에선 썩둑거리는 칼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 ☆ ☆

“이것도 안 돼. 색깔이 너무 칙칙해.”

“그럼 무슨 색깔이 좋을까요?”

“황색…… 아니, 객잔 건물과 어울려야 하니까. 대나무? 그래, 대나무가 좋겠다. 벽지 대신 잘 건조된 대나무를 쭉 덧대는 게 좋겠어.”

“헤에, 대나무요? 그것도 좋겠네요.”

“그래. 벽은 그렇게 하고…… 창틀은 바꿀 건 없겠다. 옻칠만 한 번 하면 될 것 같아. 음…… 그보다 가장 중요한 건 침상이랑 이불인데……. 이게 비싼 건 너무 비싸고, 싼 건 또 너무 싸거든. 아칠, 아팔. 혹시 근처에 좋은 금상(錦商) 아는 곳 있니?”

아칠과 아팔은 서로를 쳐다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금상이랄 것까진 없고, 포목점은 몇 군데 아는데…….”

“아무래도 장식이 들어간 이불은 많이 비싸서요.”

휘연은 담백하게 물었다.

“그럼 장식이 없는 이불은 얼마씩 해?”

“음, 천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충 오십 문에서 백 문…….”

휘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재질은 부드러운 세목천. 속은 오리털이 꽉 찬 푹신푹신한 걸로.”

“에…… 그 정도면…… 하나에 한 냥은 줘야 할 거예요.”

“거기다 자수를 놓으면 추가로 반 냥이지?”

“……네.”

“그럼 다 해서 한 냥 반이네. 좋아, 그럼 그걸로 하자.”

아칠과 아팔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그런 이불을 넣으시게요?”

“응.”

“너, 너무 비싸지 않나요?”

“안 비싸. 홍화객잔이나 창해루 같은 곳에선 그보다 열 배는 비싼 비단 금침을 가져다 둔다구. 생각해 봐. 우리 풍운객잔에서 하룻밤을 자는 데는 동전 이백 문 정도야. 더 받고 싶어도 객잔이 겉보기에 허름하니 더 받을 수가 없어. 객실이 총 여덟 개 있으니 하룻밤에 천육백 문. 한 달이면 사만 팔천 문. 은자로는 스물네 냥. 물론 이건 항상 방이 꽉 찼을 때의 수입이지만, 어쨌든 최대한 이 정도는 벌 수 있게 된단 소리지. 이불에 장식 좀 들어 있는 걸 사 오는 건 투자 축에도 끼지 못해.”

휘연은 상가의 자녀답게 확실히 계산이 빨랐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지금 이 일로 얼마나 이득을 보게 될지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우리 객잔은 겉보기에 허름해서 솔직히 손해 보는 면이 많잖아? 그러면 보기에 허름해도 사람들이 풍운객잔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장점을 보여 줘야지. 가격이 싸고, 거기다 잠자리까지 푹신푹신하고. 그러면 충분히 사람들이 몰리지 않을까?”

“아……!”

“우린 주변의 객잔들이랑은 ‘확실하게’ 다른 걸로 승부해야 해. 어차피 고급스럽고 화려한 걸로는 승부가 안 되거든. 그러니 남은 길은 오직 하나! 박리다매(薄利多賣)! 하나하나의 이득은 적어도 손님을 많이 끄는 걸로 승부를 보는 거야!”

휘연은 당당하게 외쳤고, 아칠과 아팔은 감동을 받은 선망의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칠, 아팔!”

“네!”

“내려가자! 객주님께 허락을 받고, 이 객실을 아늑하게 꾸며 보는 거야.”

“네!”

세 사람은 위풍당당하게 일 층으로 내려와 장기린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평상시 드러누워 있던 식탁 위에도, 재료들만 널브러진 채 텅 비어 있는 주방에도. 아무리 찾아봐도 장기린은 보이질 않았다.

“객주님은 어디 가셨지?”

아칠과 아팔도 의아한 듯 주변을 살폈다.

“글쎄요…….”

“숙수님도 없어요. 나가실 때는 항상 나간다고 말씀하고 나가셨는데…….”

두 사람은 똑같이 생긴 얼굴로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동시에 ‘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튕겼다.

“아! 별실!”

“별실에 계실지도 몰라요!”

짧은 다리로 도도도 뛰어가는 두 사람을 따라 휘연도 걸음을 옮겼다.

객주가 머문다는 별채는 생각보다 아늑해 보였다. 건물은 풍운객잔과 똑같이 낡았지만, 분명히 공을 들여세웠다는 게 느껴질 만큼 튼튼하고 안정적이었다. 낡아서 삭은 것은 겉을 덮은 나무판자뿐. 중요한 골자나 기둥 들은 모두 튼튼하기 이를 데 없는 철목으로 만들어졌는지, 여전히 굳건하게 건물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디서 지내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객실을 하나 빌려서 살지 않는 한, 이곳 풍운객잔에 따로 마련된 방은 오직 별채뿐이지 않았나?

그리고 별채엔 객주가 사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혹시…… 별채에서 객주와 함께 살아야 하는 걸까?’

얼굴이 화끈거렸다.

장기린이 ‘생각보다 음흉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부터,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어딘가에 방이 있을 거다’라는 생각까지,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여전히 그녀는 은자 삼백스물다섯 냥에 팔려 온 몸이었다. 객주가 원하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그게…… 어떤 일이더라도.

‘근데, 그럴 것 같진 않았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어쨌든 객주도 한창때의 젊은 남자인데…….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래도 홍화객잔에 팔려 갈 때처럼 기분 나쁘지는 않았…… 어머, 내가 무슨 생각을.’

그녀의 상념이 멈춘 것은 별채의 공터 앞이었다.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운찬이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할 때부터였다.

“쉿, 조용히 해 주세요.”

“네?”

“잠시만요.”

운찬은 어딘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휘연은 별채 앞, 공터의 중심에 앉아 있는 장기린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뭐야?’

새카맣게 변한 정체불명의 물체들이 왼쪽에 한가득 쌓여 있고, 그 옆에선 장기린이 수도승처럼 경건하게 앉아서 진지한 얼굴로 당근을 노려보고 있었다.

고작 당근 하나를 썰기 위해 저러는가 싶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는 손에 든 식칼을 마치 갓난아이 다루듯이 조심조심하면서 천천히 당근에 꽂아 넣었는데, 한 번 썩둑 썰어 버리는 게 무에 힘든 거라고 저렇게 안간힘을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린애가 썰어도 저거보단 잘하겠다.’

실소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운찬도 바보가 아닐 텐데, 명색이 숙수라는 사람이 겨우 이런 일에 숨도 못 쉬고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그리고 그러고 보니, 옆에 한가득 쌓여 있는 저 새카만 물체들도 매우 거슬렸다.

‘뭔가가 있는 건가?’

썩둑!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반토막 난 당근이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당연하게도, 당근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장기린도, 운찬도.

그 멀쩡해 보이는 당근에서 무려 일각 동안이나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역시……! 점점 발전하고 있어!”

감탄한 운찬의 목소리를 듣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저기요, 강 숙수님.”

“예? 아, 진 소저. 오셨었군요.”

“…….”

휘연은 황당한 얼굴로 운찬을 쳐다봤다.

엄청나게 집중했던 모양이다. 그녀에게 조용히 해 달라고 말했으면서도 그녀가 온 걸 몰랐었다니.

“죄송합니다. 저한테는 저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어서요.”

그 분위기를 느꼈는지 운찬은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해했다.

“아니에요. 죄송하실 건 없어요. 근데 무슨 일이에요?”

“아, 저거요? 저건……. 으음, 설명하기가 조금 곤란한데요.”

잠시 고민하던 운찬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저기 까만 것들 보이시죠?”

“네. 저거 말이죠?”

“저게 원래 당근과 무였어요. 형님이 칼을 대자마자 저렇게 변해 버렸죠.”

“예에?!”

휘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야채를 썰었을 뿐인데, 저렇게 썩어 버린 것처럼 까맣게 변해 버린단 말인가.

“지, 진짜요?”

“네. 진짜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형님이 말씀 안 해 주시지만…… 제가 배운 바로는 저건 살검이에요. 칼에 닿은 것은 무엇이든 단번에 죽어 버리는 무서운 살기가 깃든 검이요. 보통 사람은 얻을 수 없다고 들었는데…… 역시, 형님의 과거가 그리 평탄치는 않으셨던 것 같네요.”

휘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검인지 뭔지, 칼에 닿자마자 야채가 까맣게 죽어 버린다는 건 아직 믿기지가 않지만, 장기린의 과거가 평범치 않다는 것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다.

“알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왜 당근이 안 죽은 거죠?”

“아! 그게, 바로 형님이 발전하고 계시다는 점이에요. 처음에 별생각 없이 감자를 깎았을 때는 일각 안에 감자들이 싹 죽어 버렸거든요. 근데 이젠 당근을 썰고 일각이 지나도 멀쩡해요. 지금 보신 것처럼요.”

“살검을 안 쓰기 시작했다는 말인가요?”

“역시, 진 소저. 이해가 빠르십니다. 게다가 그뿐이 아니에요. 처음엔 일각을 버텨도 죽기 직전의 간당간당한 모습이었는데, 형님이 썰면 썰수록 야채들이 싱싱해져 가고 있어요. 제 생각엔…….”

운찬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살검을 버리고 활검을 쓰기 시작하신 것 같아요.”

“활검……?”

“예. 살검의 정반대죠. 칼로 썰어도 야채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모든 숙수들이 꿈에 그리는 궁극의 경지죠. 크……! 보면 볼 수록 감탄이 나오네요. 형님이 그걸 쓰기 시작하신 것 같아요.”

휘연은 새삼스런 눈으로 장기린을 바라봤다. 아직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운찬이 저렇게나 부러워하는 것을 보니 대단한 일이구나 싶었다.

“잠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저걸 그냥 두고 보실 건가요?”

한편, 옆에 따라왔던 아칠과 아팔은 안절부절하며 장기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 재료가 저렇게 되다니!”

“아까워! 아까워! 저렇게 까맣게 변해 버린 건 못 먹을 텐데……! 세상에 무가 다 몇 개야? 당근은 또 몇 개고?”

두 사람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휘연은 웃음이 나왔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먹을 것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두 소년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괜찮아. 다 의미가 있는 거야.”

휘연이 두 소년을 달랬다.

“의미가 있다구요?”

“응. 덕분에 우리 객잔에서 쓰는 요리 재료들은 더욱 싱싱해질 테니까.”

“네?”

휘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장기린은 그 뒤로 당근과 무를 두 개 더 썰어 본 뒤,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고 있었다. 뭔가의 여운을 느끼는 듯 식칼을 가만히 들여다본 채였다.

휘연은 모두를 데리고 장기린에게로 다가갔다.

“객주님.”

“어?”

“그게 활검이라는 건가요?”

장기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맞아.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요? 그걸 이용해서 썰면 야채가 더 싱싱해지구요?”

“그렇지.”

휘연은 배시시 웃었다.

“그럼, 그걸 강 숙수님께 가르쳐 주세요.”

“……예에?!”

놀란 외침은 옆에서 튀어나왔다. 반토막난 당근들을 들여다보고 있던 강운찬이 소리를 지른 것이다.

“저, 저한테요?”

“네. 저희 숙수님께서 한 단계 더 높은 경지가 되시면, 음식들도 더 맛있어지겠죠? 자고로 요리 맛의 칠 할은 재료가 좌우한다고 그러더라고요. 맞나요?”

“마, 맞습니다.”

운찬은 감격해서 휘연에게 고마운 눈빛을 보낸 뒤, 조마조마한 얼굴로 장기린을 흘깃거렸다.

그가 꿈에도 그리던 경지가 바로 활검이다. 야채를 썰면 야채가 싱싱해지고, 육류를 썰면 그 육질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펄떡댄다는 궁극의 경지.

요리가 접시에 담겨 나가는 순간까지 재료가 신선하길 바라는 숙수들에겐, 그게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운찬은 당장이라도 장기린에게 그것을 가르쳐 달라며 부탁하고 싶었지만, 이미 장기린에게 받은 게 너무나도 많았기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미리 알고 대신 말해 준 휘연이 얼마나 고맙겠는가. 그건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이었다.

그리고 이왕 나온 말이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찼다.

“형님!”

운찬은 넙죽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저에게 활검을 가르쳐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일어나.”

“형님……!”

무뚝뚝한 목소리가 거절이라고 생각했는지, 운찬은 더욱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염치없다는 건 알아요. 주방에서 요리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이렇게 기회도 주시고……. 이미 받은 게 넘치지만…… 그렇지만! 솔직히 욕심이 나요. 활검만 얻는다면…… 활검만 쓸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러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운찬은 이마를 땅에 ‘쿵’ 박은 뒤 일어날 줄을 몰랐다.

장기린은 잠시 그런 그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어 주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가르쳐 주려고 했어.”

“형……님?”

“사실 이건 나보단 너한테 더 쓸모가 많겠지. 요리를 하고 재료를 썰다 보면, 필요할 테니까.”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주자, 운찬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다만, 이건 아까 그 ‘박자’처럼 가르쳐 주기가 쉬운 게 아니야. 꽤 오래 걸릴 거다.”

“저, 정말입니까?”

“음? 뭐가?”

“정말…… 활검을 가르쳐 주실 거예요?”

“그래, 그렇다니까. 다만 배우기가 좀 어려울 거야.”

운찬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해졌다.

“괘,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아무리 어려워도 꼭 해낼게요!”

“정말 어려워. 귀찮지만 ‘숨쉬기’부터, ‘생각하기’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배워야 한다. 빨라야 일 년. 그나마도 다 배우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효과가 나게 쓰는 게 그 정도야.”

“하겠습니다! 할 거예요!”

운찬의 흔들리던 눈에서 결국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려 버렸다. 스물셋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마치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줄줄 흘렸다.

“사내자식이 함부로 우는 것 아니다.”

“으엉, 허어엉. 어엉……!”

“울지 말라니까.”

“어어엉―! 으어엉―!”

울지 말라고 할수록 운찬은 더욱 큰소리로 울었다. 반항을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감동을 참을 수 없어서 그랬다. 그동안 온갖 잡일을 다 해 가면서도 칼질 한 번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어깨 너머로만 봐 온 게 삼 년. 그 과정에서 꾹꾹 눌러 참았던 설움들이 한 번에 폭발한 것이다.

지금껏 누가 이렇게 잘해 주었던가? 가족들에게 등을 돌리고 나온 뒤로, 이렇게나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 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운찬은 정면에서 장기린을 꽉 부둥켜안았다.

“형님……! 형님……!”

“그래, 그래.”

“영원히…… 훌쩍. 영원히 형님을…… 훌쩍. 모실게요. 절대로…… 훌쩍.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장기린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라.”

“으어엉……!”

“그만 울라니까.”

“으어어엉―!”

무슨 말을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자, 장기린은 난감한 얼굴로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칠과 아팔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씩 웃고 있었고, 이 모든 일을 만든 장본인인 휘연은 뿌듯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싸운 형제를 화해시켜 놓은 엄마 같군.’

운찬, 아칠, 아팔, 휘연.

모두의 시선이 너무나 따뜻하다. 그가 원래 있던 곳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주고받는 시선, 서로에게 내뱉는 말, 상대를 부르는 손짓 하나하나까지. 모든 것에 사람들의 정(情)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 정이 쌓이고 쌓여서 인연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인연이 깊어져서, 서서히 진짜 가족이 되어 간다.

모든 것이 신선한 충격이고, 그리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계속 가 보자.’

장기린은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서히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불그스름한 하늘엔 벌써부터 삐죽 고개를 내민 보름달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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