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章 ― 금선풍운(金仙風雲)
금선북로와 남로를 잇는 경계선 부근.
푸른색과 녹색이 섞인 연등 수십 개를 화려하게 매달아 놓은 오 층 높이의 전각에선, 바람이 불때마다 연등 밑의 풍경(風磬)들이 영롱한 소리를 연주했다.
푸른 바람을 닮았다는 청풍객잔(靑風客棧).
하지만 전각의 최상층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대화는 이름처럼 푸르지도 영롱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돌아왔다고?”
한쪽 무릎을 세우고 방만하게 앉아 있던 청풍객잔의 객주 방태풍(榜颱風)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새하얀 문사건을 머리에 쓰고 하늘하늘한 백색 비단으로 몸을 두르고 있었는데, 정결한 옷차림과는 달리 터질 듯이 튀어나온 뱃살과 다섯 겹이나 되는 두툼한 턱 때문에 그 모습이 매우 웃겼다. 마치 돼지가 사람의 옷을 입고 있는 듯한 모습이랄까.
하지만 적어도 청풍객잔 내에선 그의 외모를 갖고 웃는 사람은 없다. 더러운 외모만큼이나 험악한 성질머리 때문에 작은 실수로 반병신이 돼서 쫓겨난 점소이나 하인 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던 것이다.
“부하들 말대로, 저도 지금은 무작정 일을 벌이기보단 일단 대책부터 마련해 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크흠! 그래도 그렇지!”
“솔직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이러다 다른 객잔과 전쟁이라도 나면 곤란한 건 우리 쪽일 텐데요?”
청풍객잔을 지키는 장흠파의 두목 장흠은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덩치로 먹고사는 파락호답지 않게 상당히 마른 체구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얇은 입술과 섬뜩한 눈빛, 그리고 잔인한 일 처리 덕분에 이곳 항주에서 그를 우습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그는 기회주의자였다.
장흠은 항주, 그것도 이곳 금선로에 진출한 지 불과 오 년 남짓밖에 안 된 신출내기였으나, 그는 이곳에 온 첫 해에 처음으로 들어갔던 백염파의 ‘큰형님’과 단둘이 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함께 마시고 있던 술병으로 내리쳤다.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내려쳤다. 그리고 그 기세로 차례차례 다른 ‘형님’들을 찾아가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잔인하게. 남은 자들이 아무도 대들지 못할 만큼.
형님들을 죽이고, 그 심복들을 죽이고…….
백염파의 간부들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으나, 같은 편인 척 다가가 뒤를 내리치자 너무나도 쉽게 쓰러졌다.
그날로 백염파는 장흠파가 되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당시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청풍객잔을 찾아가 그들의 보호를 자청했다.
그 선택은 탁월했다. 불과 얼마 지나기도 전에, 청풍객잔은 이곳 금선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객잔이 되어 버렸으니까.
탁월한 기회를 놓치지 않는 그의 행동력은 언제나 성공을 쟁취해 왔다.
그리고 지금, 그는 ‘함부로 일을 벌이지 않도록’ 행동했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거기에 투자한 게 얼만데! 풍운객잔을 다른 곳에 빼앗기다니! 이게 말이나 되나? 솔직히 말해 봐. 장흠파도 예전 같지 않은 것 아닌가?”
장흠의 눈빛이 드러나지 않게 싸늘해졌다.
“말씀이 심하시군요.”
“심하다니! 난 지금 너희 놈들을 싹 갈아엎어 버리고 싶은 것을 참는 거야! 여기 청풍객잔의 일을 맡고 싶어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런데도 내가 처음의 인연을 중시해서 계속 일을 맡겨 줬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
“자꾸 이런 식으로밖에 못하면, 앞으론 독두파(禿頭派)를 쓸 거야!”
독두파는 현재 장흠파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할 수 있는 파락호 단체였다. 머리를 빡빡 깎은 대머리들만 모여 있는 곳인데, 덩치가 크고 사나운데다 자기들끼리만 쓰는 이상한 무술을 갖고 있어서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장흠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독두파가 작년부터 끊임없이 방태풍에게 자신들을 써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젠 상당히 성장한 장흠파가 독두파에게 일방적으로 질 리도 없고, 말하자면 개국공신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방태풍이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믿음도 있었다.
그런데 웬걸?
얼마 전부터 방태풍은 그들에게 맡기는 일을 이중 의뢰를 해서 독두파에도 의뢰를 했다. 그리고 묘하게 경쟁을 붙여서 먼저 일을 처리하는 쪽이 승자라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결과, 청풍객잔 산하에 두 개의 파가 함께 있는 듯한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피가 거꾸로 솟는 일이다. 서로 동등했던 객주와 두목의 관계가 수하 비슷하게 변해 버린 것도 그때부터다.
장흠은 자신이 너무 방심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교활한 돼지 같으니. 돈밖에 없는 주제에, 감히 나를 이렇게 엿 먹여?’
방태풍도 그 우스운 외모와는 다르게 이 복잡한 항주에서 이만큼이나 객잔을 키워 낼 수 있는 걸물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젠, 다를 것이다.
장흠은 방태풍이 동지이자 적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얗게 질린 그의 손등에서 힘줄이 꿈틀거렸다.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처리할 겁니다.”
“흥. 왜? 또 가서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돌아오려고?”
“…….”
“도대체 수하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상대가 아무리 만만치 않아 보여도 그렇지, 셋이나 갔으면 그놈을 족쳐서라도 정보를 좀 캐 왔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그냥 순순히 놔주고 와?”
“잘못 건드렸다간, 객잔끼리의 전쟁이 날 수도 있습니다.”
“전쟁? 흥! 그깟 것 나라면 나라지. 너희가 잘 싸우기만 하면 사실 그런 건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 아냐?”
“…….”
“쯧쯧. 이래서 삼류랑은 놀면 안 된다니까.”
비웃음이 가득한 방태풍의 목소리.
하지만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든 장흠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는 그를 향한 모욕을 모두 인내한 뒤 그저 묵묵히 할 말을 다했다.
“그놈들이 누구기에 선수를 쳤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배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창해루나 홍화객잔 같은 다른 오대객잔(五大客棧)이 작정하고 벌인 일이라면……. 이번 일이 우리 청풍객잔을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흥, 그건 그렇지.”
“그러니 일단 배후를 캐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객주도…… 이곳에 자주 오는 지부 대인께 부탁해서 배후를 캐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부 대인께……?”
방태풍은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예.”
“그분은…… 아니, 그분께 어떻게 부탁하라는 거야? 말 꺼내기가 어려울 텐데? 그냥 막무가내로 풍운객잔을 알아봐 주십시오, 하기도 그렇고 말이야.”
“사업적인 거라고 하십시오. 풍운객잔을 잘 인수하면 사업이 두 배로 커진다. 그런데 이상한 놈들이 자꾸 꼬여서 일하기가 어렵다. 사업에 동참해 보실 생각 없으시냐? 이런 식으로 물어보십시오.”
“흐음……. 그래서, 그 대가로 풍운객잔에서 나오는 이득을 나눠 준다?”
“예. 돈을 좋아하는 지부 대인이니까 틀림없이 승낙할 겁니다.”
“흐음……. 하긴, 지부 대인이 사업에 끼면 훨씬 일이 쉽겠군. 관군이라든가, 보호적인 면에서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렇습니다.”
방태풍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해 보지. 대신 이건 두 번째 순위야. 되도록 너희가 제대로 해. 지부 대인이라는 패는 가능한 한 아껴 두고 안 쓰는 게 좋은 필살패니까.”
“알겠습니다.”
“나가 봐.”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젓는 방태풍에게 장흠은 짧게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빠져나왔다.
탁.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순간, 장흠의 얼굴은 악귀처럼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꺅……!”
“흡……!”
지나가던 하인과 하녀 들이 황급히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각자의 입을 가리며 양옆으로 비켜섰다.
장흠은 그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건방진 돼지 새끼가……! 감히 누굴 종 부리듯이……!”
예전에 방태풍은 그에게 뭔가를 시킬 땐 ‘부탁’의 형식을 취했었다.
그런데 이젠 누가 봐도 ‘명령’이지 않은가.
“만석 형제!”
“예! 형님.”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흠파 중, 처음 풍운객잔에 갔었던 세 형제가 재빨리 대답했다.
“마총(馬總)한테 풍운객잔 상태 좀 알아보라고 그래.”
“예? 마, 마총이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만석 형제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오늘 장흠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함부로 말대꾸했다간 크게 경을 칠 분위기였다.
“그놈이 알아서 할 테지만, 가서 정보를 알아본 다음엔…… 그 객주 놈, 죽일 수 있으면 죽이라고 해.”
“……예.”
“불만 있나?”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봤을 땐, 풍운객잔의 그자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아서…….”
“그래 봤자 파락호야. 마총이 죽이려고만 하면 무림 고수도 죽일 수 있어.”
“…….”
“할 말 있으면 해라.”
“그게…….”
“뭐야?”
“저기, 그자를 죽이면, 전쟁이 일어나진 않을까요?”
장흠은 서늘한 눈으로 만석을 내려다봤다.
“내가 그걸 모를 것 같나?”
“예?”
“내가 그걸 모를 것 같냐고!”
쾅!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장흠은 뾰족한 단도를 나무 탁자 위에 내리찍어 버렸다.
만석이 몸을 움찔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장흠은 파르르 떨리는 칼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살벌하게 말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 한 번만 더 말대꾸하면 이 칼날 밑에 탁자가 아니라 네 손목이 있을 거다.”
“……예, 알겠습니다.”
“빨리 가라. 오늘 안에 일 끝내.”
“예.”
만석 형제가 후다닥 도망치듯 밖으로 나간 뒤, 장흠은 분노가 일렁이는 눈으로 등 뒤의 청풍객잔을 올려다봤다.
그가 쌓아 올린 왕국.
그가 지켜 낸 오 층 높이의 성채.
그리고 그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배은망덕한 돼지 새끼.
“훗. 전쟁이 났을 때, 독두파가 어떻게 하는지 한번 지켜보지. 네놈…… 실수한 거다.”
감히 이 금선로에서 장흠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줄 것이다.
장흠은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주 어두운, 객잔이 만들어 낸 짙은 어둠 속으로.
☆ ☆ ☆
금선북로 청월루.
백 총관과 철우는 그의 수하가 가져온 보고를 듣고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직접 객잔을 운영하려 하는 것 같다고?”
“예.”
“다른 객잔의 지원을 받는 게 아니고?”
“예. 지원 같은 건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그게, 저처럼 그곳을 감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다섯 명 정도였는데…… 한 곳에서 온 게 아니라 두 곳에서 따로따로 온 것 같았습니다.”
철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뭔 소리냐?”
“감시자가 각각 두 개의 무리인 것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한 곳은 청풍객잔에서 온 것 같았는데, 다른 한 곳은 모르겠습니다.”
“즉, 우리 말고도 감시하는 자들이 있다? 그게 각각 다른 두 곳이고?”
“예.”
“허어, 참.”
철우는 방만하게 풀어헤친 가슴팍을 손으로 긁적거렸다.
그들의 앞에 앉아 있는 사내는 은신과 잠입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이니 틀릴 리가 없었다.
“홍화객잔이겠군.”
“예? 홍화객잔?”
“그렇네. 철우, 내 생각엔 그들은 홍화객잔에서 온 것 같군.”
백 총관은 깊은 눈빛으로 확신을 담아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조금 전에 보고가 하나 들어왔었네.”
“어떤 보고 말씀이십니까?”
“음, 그 전에…… 자네는 이따가 다시 이야기하지. 잠시 나가 있게.”
백 총관은 앞에서 보고를 하고 있던 사내를 밖으로 내보냈다. 방 안에 철우와 둘만이 남게 되자, 그제야 말을 꺼냈다.
“홍화객잔에서 누군가가 소란을 피웠다더군. 침모를 한 명 데려가겠다고 말이야. 그러다 어찌어찌해서 거기 홍화객잔의 사 총관과 만난 모양이야. 그리고 그날 기녀로 등천하려던 아이를 사 가겠다고 이야기가 되었다네.”
“침모를 데리러 왔는데, 기녀를 사 갔단 말입니까?”
“뭐, 그 아이가 당돌하게 함께 가고 싶다고 한 모양인데…….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쨌든 그는 대금을 치르고 그 아이를 데려갔네.”
“대금이라…… 기녀라면 비쌌겠군요.”
“장차 항주제일화가 될 아이였다는군. 삼백 냥 가까이 줬다고 들었네.”
“삼백 냥……! 그렇게 큰돈을 냈단 말입니까?”
“그렇네. 그것도 그 자리에서 금괴로 냈다더군.”
“금괴……!”
철우는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점점 더 크게 놀라고 있었다.
“정체가 뭔데 금괴를 갖고 있답니까? 아니, 그 전에, 그 아이를 그만한 돈을 주고 데려올 이유가 있습니까?”
“나도 궁금하네. 그러니 계속 미행을 붙여 놨지.”
“으음…….”
“한 가지 분명한 건, 정체가 범상치 않을 거란 거야. 누가 평소에 금괴를 가지고 다니겠나? 분명히 뭔가 배후가 있을 게야. 자세히 조사해 봐야 할 것 같네.”
철우는 심각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방구석에서 생각하는 걸론 해결이 안 되는군요. 직접 조사해 봐야겠습니다. 우리한테선 숙수를 데려가고, 저쪽에선 침모를 데려갔다……. 허, 참. 이걸로 봐선 제대로 객잔이라도 운영할 기세군요.”
철우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으나, 백 총관의 얼굴은 심각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예?”
“위장을 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영업을 하는 게 나을 테니까. 잊지 말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하고 부유한 자들을 상대하고 있는 걸세. 지금 객잔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진짜 정체를 잊어선 안 되네.”
“그렇……지요.”
“흐음, 옛말에 친우는 멀리, 적은 가까이 두라고 했었지.”
백 총관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뒤,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 그 친구랑 친분을 좀 쌓아 보는 게 어떻겠나?”
“예?”
철우의 콧잔등이 불편하게 씰룩거렸다.
“그 친구라면, 지금 풍운객잔에 있는 그 사내 말입니까?”
“그렇네.”
“……농담이시겠죠?”
“진담이네.”
철우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제가 그런 거에 약한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해 보게.”
“그건 명령입니까?”
“부탁일세.”
“그럼 거절하겠습니다.”
“그럼 나도 바꾸지. 명령일세.”
“……끄응.”
“자네 풍운객잔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나?”
철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백 총관을 쳐다봤다.
백 총관은 담담하게 말했다.
“청풍객잔이 노리고 있던 곳이지.”
“뭐, 그런 소문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청풍객잔은 이곳 금선로를 다수(多數)로 장악하는 것이 목표지. 얼마 전에 백로객잔을 인수해서 두 개로 늘어났고, 이번에 풍운객잔을 차지한다면 세 개째. 즉,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늘려서 결국 이곳 금선로가 모조리 청풍객잔으로 채워지는 걸 노린다는 뜻이야.”
“말도 안 되는 망상이군요.”
“그렇지. 하지만 지금까지는 상당히 잘하고 있네.”
“……그래서, 이것도 청풍객잔의 음모일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겠나?”
철우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꿈틀거렸다.
“솔직히 방태풍이랑 장흠이 이런 은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이진 않습니다만.”
“그렇긴 하지.”
철우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이랬다저랬다. 줏대 없는 것처럼 대답하지만 사실 백 총관이 이런 식으로 대답할 땐 오히려 깊은 생각이 있을 때다.
“제가 어떻게 하시길 바라십니까?”
“말했잖나? 가서 친해지라고.”
“…….”
“조사도 안 해 보고 무작정 족칠 수는 없지 않나? 친해져 보고, 아, 이거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결정을 내리게. 때려눕히든, 아니면 그대로 두든.”
철우는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무조건 때려눕히고 끌고 오면 안 됩니까?”
“어허, 이 사람. 파락호로 좀 살더니 진짜 뼛속까지 파락호가 된 겐가?”
“청월루의 망나니, 철우한테 뭘 바라십니까? 이놈은 주먹질 말고는 모르는 놈입니다.”
철우는 능청스럽게 씩 웃으며 큼지막한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백 총관은 그 모습을 보며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혼자 보기 아깝군, 그래!”
“아깝다니요. 철우에겐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 그래. 알았네. 하하하!”
백 총관의 웃음소리는 한참 뒤에야 그쳤다.
“흠흠. 그럼, 부탁하겠네.”
“알겠습니다.”
“언제 갈 텐가?”
“낮잠이나 한숨 더 자고 가 보지요.”
철우는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게 철우의 성격이기 때문에?”
“알면서 뭘 물으십니까.”
“알겠네. 알아서 하게나. 다만, 너무 늦으면 다른 쪽이 먼저 움직일지도 모르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 던지는 말에 뼈가 들어 있다.
철우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가 다시 느긋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든 말든, 저는 한숨 자고 가렵니다.”
“알겠네.”
대답을 하는 백 총관의 얼굴에도 웃음이 감돌았다.
철우가 문을 열고 나간 뒤 쿵쿵거리는 무거운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말은 저렇게 해도 확실하게 처리하겠지.’
철우는 그런 사람이다. 겉으로 보이는 껍데기완 달리 속은 누구보다 진중한……. 이곳 청월루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인물이다.
백 총관은 방에 홀로 남은 뒤 다탁 밑에서 서찰을 몇 장 꺼내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오늘 아침으로부터 반나절 만에 마련된 내용이었다.
“강운찬, 왕칠, 왕팔, 진휘연.”
각각 한 장씩, 나름 깊은 사연들이 흰색의 종이 위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슬픈 일도 있고, 평범한 일도 있고, 신기한 일도 있다. 사람의 인생이 모두 담겨 있는 종이들.
다만, 그중에 딱 한 장만은 이름도 나이도 없이, 달랑 두 줄만이 적혀 있었다.
“이름 불명. 정체불명. 청월루와 홍화객잔에서 소란을 일으킴. 조사가 필요. 이걸로 끝인가?”
툭.
총관의 손에서 서찰이 떨어졌다.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문제가 되어선 안 될 텐데…….”
☆ ☆ ☆
“긴말은 하지 않겠다.”
홍화객잔 총관 사무혁은 그의 앞에서 태연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사내를 보며 말했다.
사내는 화화공자 같은 차림으로 상당히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분칠을 한 것처럼 하얀 피부 위로 까만 눈썹이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사내는 계속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웃는다기보단, 웃는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
게다가 계속 웃는 바람에 눈동자가 보이질 않으니 더더욱 수상쩍기만 하다. 그는 보면 볼 수록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사내였다.
“그년을 도로 데려와라.”
“그년이라니, 누구 말씀이십니까?”
“누구긴 누구야! 저 머저리 같은 놈들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놓친 년이지!”
사무혁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덩치 좋은 사내 두 사람이 팔다리가 밧줄에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으…… 으으…….”
당장에라도 꺼져 버릴 듯한 신음 소리가 위태롭게 흘러나왔다. 한참을 매달려 있었는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갛다. 게다가 눈을 허옇게 뜨고 있는 것을 보니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닌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화화공자도, 사무혁도 그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아, 그거 말이군요.”
“……계속 장난칠 텐가?”
“장난이라뇨.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그나저나 미래의 항주제일화라던데……. 정말로 그렇게 예쁩니까?”
환하게 웃는 얼굴 사이로 보이는 하얗고 고른 치아.
사람의 시선을 끄는 몽환적인 표정.
여자로 태어났으면 천하의 색기(色妓)가 되었을 인물이다.
사무혁은 그를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손대면 안 된다.”
“네, 네. 그건 물론이죠. 상품에 손대면 안 되죠. 그럼요.”
“그 약속을 깬 게 몇 번이나 되는 줄 아나?”
“정확히 다섯 번이죠. 하나같이 참기 힘들만큼 예뻐서 말입니다.”
그때를 회상하듯 입맛을 다시는 사내.
반면 사무혁의 얼굴은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빙글빙글 웃으면서 사람을 우습게 보는 걸로 모자라 무슨 말을 하면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다. 그 능력만큼은 인정하지만 도대체가 함께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사내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만큼 예쁘면 못 참고 건드릴 거다?”
“글쎄요…….”
사무혁이 다탁을 ‘쾅!’ 내리쳤다.
“글쎄요가 아니야! 이번에 건드리면 정말로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라!”
“천화(天花) 때처럼 말이죠?”
“……내 장담컨데, 그 두 배는 더 괴롭게 해 주지. 진가장 때부터 내가 이 일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기나 하나?”
사내는 ‘아이구, 무서워라’라는 듯한 표정으로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
“그런 상황에 왜 저한테 그 일을 맡깁니까?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사무혁은 이를 바득 갈았다.
“당연하지 않나. 네놈, 옥승(玉昇) 말고는 믿고 맡길 만한 놈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옥승. 홍화객잔과 홍화루를 지키는 옥룡파의 두목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호오!”하고 탄성을 토해 냈다.
“제 밑의 간부들도 일 잘합니다만.”
“그야 그렇겠지.”
“그런데요?”
“내가 보기에, 이번에 그놈은 심상치 않다. 장님인 척했지만 장님이 아니었고, 그 대찬 말투하며……. 분명 뭔가가 있어. 일을 더 이상 복잡하게 만들어선 안 돼.”
잠시 뜨여진 옥승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반짝이고 지나갔다.
사무혁은 어떤 일이든 쾌도난마로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다.
‘이 사람을 이렇게 망설이게 만들 정도라……? 대체 어떤 놈이지?’
옥승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재미있겠군요.”
“뭐?”
“쿡쿡, 재밌겠단 말입니다. 총관께서 그 정도로 말하는 사람이라니.”
옥승은 쿡쿡 웃으며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라서 기품 있는 동작으로 들이켰다. 마치 주변은 조금도 신경 안 쓰는 듯, 차의 향기에만 집중하는 태도였다.
사무혁은 그게 또 마음에 안 드는지 눈썹을 꿈틀꿈틀거리다가 결국 벌떡 일어섰다.
“그럼 맡기고 가겠다.”
“아아, 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절대로’ 손대지 마라. 알았나? 정말 중요한 손님이 기다리고 있단 말이다.”
“네, 네. 알겠습니다.”
옥승은 건성으로 대강 대답한 뒤, 계속 눈을 지그시 감고 차만 음미하고 있었다.
사무혁은 문을 쾅 닫고 성질을 부리듯 나가 버렸다.
“미래의 항주제일화. 그리고 신기한 사내라…….”
옥승은 자신의 새빨간 입술을 혀로 한 번 핥은 뒤, 다시 조용히 차 맛에 집중했다.
중간 중간 거꾸로 매달린 사내들로부터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제외하곤 지극히 고요한 시간이었다.
☆ ☆ ☆
“자, 아― 하세요.”
장기린은 그의 눈앞에 있는 대나무 저금(젓가락)과 그 사이에 가지런히 잡혀 있는 붉은빛의 동그란 고기 경단을 보며 정말 오랜만에 ‘당황’해 버렸다.
“……이게 뭐야?”
“당초소배골(糖醋小排骨)이죠. 강 숙수님이 자신 있다고 하신 만큼 아주 맛있어요.”
부드러운 돼지갈비 살을 저며서 매콤한 고추 양념을 발라 튀기고, 거기에 꿀을 발라 달콤함을 첨가한 요리.
운찬이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워낙 자신 있게 설명했던 뒤라, 장기린도 그건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저기, 나 혼자 먹을 수 있어.”
“어머나. 부끄러워하시는 거예요?”
“……부끄러워하긴, 누가.”
“그럼 빨리 아―, 하세요. 저 팔 아파요.”
장난스레 울상을 짓는 휘연의 얼굴을 보자 몸에 힘이 탁 풀렸다. 정말이지 금강동인도 사르르 녹여 버릴 것 같은 아름다운 미모였다.
텁.
자신도 모르게 벌린 입속으로 새콤달콤한 고기 경단이 부드럽게 들어왔다. 씹을 필요가 없을 만큼 부드러운 육질, 혀가 즐거워지는 달짝지근한 향기.
분명 운찬이 자신만만할 만큼 맛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장기린에겐 그 맛을 진지하게 음미할 정신이 없었다.
“…….”
“…….”
식탁 너머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갑다.
아칠과 아팔은 힐끔힐끔 이쪽을 보며 뭐가 그리 좋은지 킥킥거리면서 소곤거리고 있었고, 운찬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으로 자신과 휘연을 번갈아 쳐다봤다.
휘연이 방긋 웃는 낯으로 물었다.
“맛있어요?”
“……맛있어.”
“강 숙수님은 정말 솜씨가 좋으신 것 같아요. 어째서 청월루에선 저 실력을 못 알아본 걸까요?”
“대숙수가 멍청했거든. 운찬, 잘 만들었다. 맛있어.”
평소라면 자신의 요리에 대한 칭찬을 듣고 감격해 할 텐데, 운찬은 “예에…….”하고 힘 빠지는 목소리로 대답한 뒤, 뭔가를 결심한 듯 눈을 부릅뜨고 휘연에게 물었다.
“진 소저!”
“네?”
“형님만 입이 아닙니다! 저도 제 요리의 맛을 보고 싶어요!”
휘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거기에 저금이 있어요.”
“…….”
“안 드세요?”
휘연은 손수 저금을 뽑아 운찬에게 건네주었다.
운찬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힘이 빠져서 대답했다.
“예에…….”
그리곤 그 저금을 들어 자신의 당초소배골을 한입 먹었다.
“……맛있어!”
곧바로 감동으로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넌 네 자신의 요리에 감동을 받는 거냐?”
장기린은 황당해져서 물었다.
“그치만, 맛있는데요?”
“…….”
“이상한가요?”
“아니.”
운찬은 다행이라는 듯 해맑게 웃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당초소배골을 먹어 보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기뻐했는데, 그 얼굴이 우담바라를 손에 쥔 관음보살마냥 인자하고 행복했다.
운찬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오오! 제체백엽권(薺菜百葉卷)도 잘되었잖아? 오오! 나미육소매(촠米肉燒賣)도! 내가 했지만, 조합이 매우 잘 되었어!”
야채를 잘게 썰어 두부와 함께 말아 놓은 담백한 제체백엽권, 다진 돼지고기와 찹쌀을 섞어 양념을 해 만든 점심인 나미육소매.
운찬은 자신이 차려 놓은 요리들을 하나하나 맛보며 즐거운 얼굴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쯧, 그만큼 한이 되었던 건가?’
운찬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지금껏 워낙 억눌려 살아오다 보니, 이렇게 자신이 요리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거다. 그게 맛있다는 것도 신기한 것이고.
“객주님.”
“음?”
“아―.”
어느새 저금이 다시 눈앞에 와 있었다. 이번엔 나미육소매가 하나 집혀 있었다.
“으음…….”
우물우물 받아먹으면서 물었다.
“왜 음식을 먹여 주는 거야?”
“싫으신가요?”
“아니. 그렇진 않지만, 좀…….”
민망하다.
그런데 그 말을 직접 말하긴 더 민망했다.
휘연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저희 아버지께서 이렇게 제가 음식을 먹여 드리면 좋아하셨어요.”
“……아버지?”
“네. 역시 딸밖에 없다면서 박수를 치면서 좋아하셨죠.”
휘연의 낯빛이 조금 흐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부모나 가족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삼백 냥 가까이 되는 돈을 빚지고 기루에 팔려 왔으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될 뿐이었다.
“부모님은?”
자칫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그냥 물었다. 사정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조심조심하면서 모른 척 둘러대는 건 자신의 성격이 아니었다.
“아마, 사흘 후에 돌아오실 거예요.”
“멀리 가신 건가?”
“……네. 그런 셈이죠.”
휘연은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억지로 힘을 내듯, 밝게 웃으면서 다시 음식을 집어 이쪽으로 내밀었다.
야채와 함께 동그랗게 말린 두부 말이. 제체백엽권이었다.
‘부모님 대신이라는 건가?’
휘연이 이렇게 음식을 먹여 주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부모에 대한 불안한 마음.
부모님께 하고 싶은 응석, 애교.
그녀는 그를 부모님 대신과도 같은 존재로 보고 있었다. 사실 나이 차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위급할 때 구해 주고 그녀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게 느낄 소지는 충분했다.
‘……힘들겠지.’
밝게 웃고 있어서 티는 안 나지만, 사실 그녀 나름대로 큰 고통을 꾹 참고 있으리라.
“너도 먹어야지.”
“저도 먹고 있어요. 자, 아―.”
어색하게 받아먹자, 휘연은 자신이 먹는 것처럼 기뻐했다.
“휘연.”
“네.”
“내 눈이 무섭지 않나?”
휘연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장기린의 정면을,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과 눈 사이에 있는 콧날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서워요.”
“그래?”
“네. 근데, 낮에 봤을 때보다는 조금 편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네요.”
“으음, 그렇단 말이지…….”
“헤헤. 괜찮아요. 차차 적응이 되겠죠. 그리고 객주님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저는 더 이상 객주님이 무섭지 않아요.”
일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했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악귀라면 모를까.’
그가 좋은 사람이라니. 만약 몽고병들이 들으면 분통이 터져 그 자리에서 거품 물고 쓰러질 이야기다.
“아뇨. 좋은 사람이에요.”
휘연은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확고하게 단언했다.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한 것에 대해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생면부지인 저를 위해 선뜻 큰돈을 썼죠. 그리고 여기까지 데려왔으면서 음탕한 눈길도 보내지 않았구요. 그렇다고 기녀로 부려 먹으면서 돈을 벌 생각도 없으신 것 같구요. 거기다가 여기 있는 모두를 다 한 가족으로 포용할 줄 알구요. 또, 결정적으로…… 저를 아껴 줄 것 같구요.”
“큽……!”
장기린은 마시고 있던 찻물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볼수록 신기한 여자다.
귀하게 자란 여자는 저런 말을 내뱉는 것을 꺼려하는 것 아니던가?
예전에 북쪽에서 한 번 봤던 대장군의 딸은 어떻게 하면 조신해 보일까 고민하며 말 한마디, 걸음 한마디도 조심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입 밖으로 ‘남자’나 ‘사내’라는 말조차 함부로 내뱉지 못하고 부끄러워했다.
왜 그런 거냐고 물었을 때, 대장군은 원래 귀한 집 딸내미는 다 저렇게 행동하는 거라고 했었다.
‘귀하게 자란 게 아닌 건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얼굴이나 몸에 귀티가 흐른다.
그 정도면 척 보면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일을 하면서 자란 사람과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란 사람은 그 피부색이나 몸놀림에서부터 차이가 나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마 적응되고 나면, 똑바로 눈도 쳐다볼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래.”
“자, 아―, 하세요.”
다시금 다가오는 저금.
장기린은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고 덥석 받아먹었다.
그렇게,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갔다.
아칠과 아팔은 음식이 맛있다며 계속해서 칭찬했고, 운찬은 자기가 만든 음식에 빠져서 먹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휘연은 자신이 세 번 음식을 집어먹으면 꼭 한 번은 장기린의 입에 음식을 넣어 주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아칠과 아팔이 달그락 빈 그릇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객주님.”
“음?”
“내일 오전엔 휘연 누님이랑 같이 장에 다녀올게요.”
“장에?”
“네. 객잔을 꾸미는 데 필요한 게 있는데, 제가 안내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옆을 쳐다보자, 아칠, 아팔과 함께 그릇을 정리하던 휘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해.”
“네!”
아칠과 아팔이 짧은 걸음으로 바쁘게 주방으로 돌아갔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자 푸르고 붉은 화려한 불빛이 밖을 훤하게 밝히고 있었다.
이미 해가 진 지 오래건만, 밤에 영업을 시작하는 항주의 객잔들에겐 지금이 대낮이나 마찬가지였다. 시끌시끌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어디라고 할 것 없이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악기 소리는 은은하게 금선로를 울렸다.
여기도 문을 잠궈 놓은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손님이 올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운찬이 솔직하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이곳 풍운객잔은 손님이 없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사실은 벌써 몇 년 전에 망했어야 당연한 곳이었다고.
‘항주라…….’
저 멀리서 들리는 기녀들의 교태 어린 웃음소리와 고관대작들이 도착했다는 하인들의 고함 소리를 듣자, 그제야 항주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새삼 무기를 잡지 않은 손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지금 서 있는 이곳은 더 이상 전장이 아니다. 밤새 주변을 경계하느라 뒤척일 필요도 없고, 두꺼운 갑옷을 평상복처럼 입거나, 잠에 들면서도 손이 닿는 곳에 무기를 둘 필요도 없다.
사람 냄새가 나고, 사람 사는 느낌이 나는, 평범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시끌벅적한 하루였다. 객잔을 사고, 운찬, 아칠, 아팔, 그리고 휘연까지 얻었다.
단 하루 만에 얻은 인연치곤 거창하지 않은가? 새로운 세계에서 얻는 새로운 삶치고는 그 시작이 괜찮지 않느냔 말이다.
‘이제 남은 건, 하인 정도인가?’
지금껏 들어왔던 객잔의 모습에서 이제 부족한 것은 하인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고민이 되었다.
하인은 어디서 구하면 될까? 이번에도 아칠, 아팔을 구해 왔듯 운찬이 하인을 구해 올 수 있을까?
아니면, 그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힘이 좋은 놈으로 하나 골라 오는 게 좋을까?
끼이익―.
“음?”
“어……?”
모두의 시선이 갑작스레 열린 문으로 향했다.
한 사내가 터덜터덜 들어오고 있었다. 주변의 화려한 객잔들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이곳이 확실하다는 듯 자신감 있게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키가 크고 팔이 긴 사람이었다.
평범한 황색 장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큼지막한 코와 말처럼 긴 얼굴, 그리고 햇볕에 그을린 갈색 피부에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등 뒤에서 하나로 질끈 묶은 것이 꼭 건장한 말을 한 마리 보고 있는 듯했다.
그는 객잔 안을 한 번 슥 훑어본 뒤,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는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식사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의 눈빛이 흔들렸다. 손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