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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九章 ― 긴장강화(緊張强化)
장기린은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노리고 달려드는 세 개의 박도. 서로서로 교묘한 균형을 이루며 비스듬하게 내리긋고 있는 투로는 분명 오랜 시간 합(合)을 맞춰 보며 단련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단련했다는 것은 그만큼 습관이 굳어졌다는 뜻.
셋 중 한 명의 손목을 덥석 잡고 반대쪽으로 쭉 끌어당기자, 졸지에 앞으로 꼬꾸라질 듯이 끌려 나온 대머리의 칼이 다른 두 명의 칼을 막아 주는 꼴이 되어 버렸다.
까강!
“큭!”
“크윽……!”
장기린의 눈앞에서 세 개의 박도가 서로 맞물려 있다.
부들부들 떨리는 칼끝.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균형.
독두삼살들은 제각각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면서까지 칼을 다시 회수하려고 했으나, 하나로 맞물린 박도는 어째서인지 그들이 아무리 힘을 줘도 빠지지를 않았다.
단단한 바위틈에 칼을 꽂아 넣은 것 같았다.
독두삼살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장기린을 쳐다봤다.
“큭……!”
그리고 신음을 흘렸다.
가까이에서 본 장기린의 눈은 감히 마주 보기 힘들만큼 무섭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어볼 게 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
“대답 안 할 건가?”
독두삼살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움직이지 않는 칼날과 장기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셋이서 동시에 칼을 손에서 놓았을 뿐이다.
파앙! 파파팡!
정권, 파미각(波尾脚), 수면 차기.
상중하를 노린 공격이 마치 미리 짜 맞춰 둔 것처럼 일제히 맞물린다.
장기린은 잡고 있던 손목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독두삼살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에 떨어진 박도를 주워들고 다시금 달려들었다. 살기가 불꽃처럼 피어오르며, 세 개의 박도가 가슴을 가를 듯이 일제히 날아온다.
“음…….”
장기린은 난감해졌다.
상대가 이 정도로 집요하게 나오면 맨손으로 제압하긴 힘들다. 지금 세 쌍둥이의 눈빛은 전장에서 많이 보아 온 눈빛이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쿠빌라이 휘하, 텐챠이 수호대였나?’
아무리 큰 상처를 입어도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달려드는 독종들. 포로로 잡는 것 따윈 불가능한, 오로지 단칼에 죽여주는 것만이 해결책인 집요한 놈들.
어째선지 세 쌍둥이는 그런 자들과 눈빛이 똑같은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장기린은 뒤로 훌쩍 물러나서 객잔의 지붕에 덧대어 놓았던 대나무를 손으로 뽑아 버렸다.
“흡……!”
달려들던 독두삼살의 입에서 놀란 경호성이 터져 나온다.
안 그래도 부실한 지붕에서 골격인 대나무마저 뽑아 버리자, 앞쪽의 처마가 우르르 무너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무너지는 장소는 공교롭게도 마침 그들의 바로 한 걸음 앞.
그들은 황급히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후두두둑―!
바닥에 떨어져 깨져 버리는 기왓장.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뿌연 흙먼지.
독두삼살이 흙먼지에 휘말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잠시 주춤하는 사이, 마치 커다란 화살이 쏘아지는 듯한 섬뜩한 파공음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쒜에에엑―!
샛노란 불빛.
전뢰의 섬광이 일직선으로 그들을 관통했다.
까아앙!!
“큽!”
“큭!”
“크윽……!”
독두삼살이 일제히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그들의 얼굴엔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아직까지도 여력이 남아 ‘지잉’거리며 떨리는 박도. 그리고 손바닥이 찢어졌는지 벌겋게 물들어 버린 박도의 호수구(護手具).
칼날이 부러지지 않은 게 기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강맹한 일격이었다.
‘믿을 수 없다.’
세 사람이 나눠 가진 충격이 이 정도다. 만약 혼자서 이 공격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칼날이 부러지고, 가슴이 찢겨졌다.’
‘어쩌면 몸이 반으로 접혔을지도…….’
‘무서운 일격이다. 그야말로 일격 필살.’
세 사람 모두, 각자 자신들이 박살 나서 뒤로 튕겨 나는 처참한 광경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은 무공이 아니다.
일격 필살의 살인기(殺人技)다.
후우웅―!
옅은 밤바람에 서서히 가라앉는 흙먼지.
그 사이로 맹수의 안광만큼이나 섬뜩한 불빛 두 개가 그들을 노려보았다.
“너희, 누구냐? 나를 어떻게 알고 있지?”
질리지도 않고 같은 것을 묻지만, 이번 물음은 그전의 물음과는 무게감이 다르다.
잔뜩 긴장한 채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는 독두삼살.
그들 중 이마에 커다란 사마귀가 하나 나 있는 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에 대해선 잘 모른다. 이곳 풍운객잔의 전 주인에게서 네 이름을 들었을 뿐.”
옆에 있던 독두삼살 중 나머지 두 사람이 퍼뜩 놀라 그를 쳐다봤다.
반면, 장기린은 그 대답에 흥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아직 그의 과거는 그를 쫓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평범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그런가?”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독두삼살. 청풍객잔에서 일하고 있다.”
“……!”
이제 옆의 두 사람은 완전히 아연실색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그가 그런 사실을 스스로 털어놨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마귀 사내만을 멍하니 바라봤다.
“청풍객잔이라……. 집요하군.”
“물론. 이곳은 그들이 원하는 곳이니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다.”
“계속 이곳을 노릴 거라는 뜻인가?”
“아마도.”
장기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포기해야 할 거다.”
“…….”
“가서 전해라. 더 이상 귀찮게 하면 내가 직접 찾아가 박살을 내겠다고.”
“……그러지.”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심지어 무림의 고수가 말한다 해도 독두삼살은 코웃음 치며 비웃었을 테지만, 장기린의 말엔 순순히 수긍했다.
쿵.
장기린은 손에 들고 있던 대나무를 바닥에 푹 꽂아 버렸다.
더 이상 전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마귀 사내는 바닥에 꽂혀 있는 그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나무를 잠시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가자.”
“예? 하지만…….”
독두삼살 중 나머지 두 사람은 사마귀 사내의 말에 반박하려고 했다. 그들로선 지금의 결정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째서 물러나야 하지?’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우린 물러서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한데 그들의 불만을 느낀 사마귀 사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전혀 다른 인물로부터 벽력같은 외침이 튀어나왔다.
“네 이놈들―!”
빠악!
“으아아악―!”
뒤쪽에서 길을 막아서고 있던 독두파의 사내 두 명이 마치 목각 인형마냥 훨훨 날아올라 골목 구석에 처박혀 버렸다.
공기가 급박해졌다. 예상외의 인물이 등장하자, 모두의 눈빛에 긴장감이 어린다.
두 명이 날아가 버린 빈틈을 벌리며,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큰 거구의 사내가 억지로 비집고 들어왔다.
워낙 거구에 험악한 인상을 가진 사내다 보니 그 한 사람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골목 전체가 꽉 차 버리는 것 같았다.
퉁방울처럼 큰 눈, 부리부리한 인상에 밤송이처럼 삐쭉삐쭉 튀어나온 짧은 수염.
이런 사내가 항주에 둘 이상 있을 리 없으니, 모두가 한눈에 알아봤다.
청월루 철우파의 두목.
철우가 등장한 것이다.
“독두삼살! 네놈들이 금선지약(金仙之約)을 모르지 않을 텐데!”
“…….”
“독두파. 아니, 청풍객잔은 그 금선지약을 깨겠다는 건가? 제대로 전쟁이라도 해 보겠다 이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니 마치 천둥이라도 치는 것처럼 그 위세가 굉장하다.
골목에 있던 모두가 질린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동요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은 수뇌부인 독두삼살정도뿐.
그중 사마귀 사내가 앞으로 나서서 철우를 마주 봤다.
“금선지약. 물론 알고 있다.”
“그걸 아는 놈들이……!”
“엄밀히 따지면 이곳 풍운객잔은 금선지약과 관계가 없을 텐데? 뭐, 철우파가 관계되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런 건가?”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질문.
그 말에 할 말이 없어진 것은 오히려 철우 쪽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에잇, 될 대로 되라’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론이다! 관계가 있지!”
“……그런가? 알겠다. 우리는 물러나지.”
“뭐?”
“물러나겠다. 너희! 갈 채비를 하지 않고 뭐하나!”
사마귀 사내는, 마치 철우 때문에 물러나 준다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까지의 경과를 모두 지켜본 장기린이 보기엔 그것은 굉장히 능청스런 행동이었다. 애초에 가려고 한 건 그들이었으니까. 지금은 울고 싶은데 뺨 때리듯 핑계를 만들어 줘서 고맙다는 듯한 느낌이랄까.
독두파에서 나온 사내들은 사마귀 사내의 말대로 철우에게 얻어맞고 기절한 두 사람을 부축하며 모여들고 있었다.
반대로 철우는 독두삼살이 이렇게나 쉽게 물러난다는 것이 의외인 듯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끝까지 경계심을 풀지 않고 함께 온 다섯 명가량의 덩치들과 함께 독두파를 노려보았으나,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태연하게 사라져 버렸다.
“크흠! 어이, 괜찮나?”
철우는 어딘가 불편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문제없소.”
“뭐, 그래 보이는군. 근데, 설마 그 대나무 쪼가리로 저놈들과 싸우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아서라. 저놈들은 정말로 위험한 놈들이야. 가볍게 보다간 목이 달아날 거다.”
철우는 장기린이 옆에 세워 둔 대나무를 보며 쯧쯧 혀를 차고 있었다. 그는 건들거리면서 괜히 머리를 긁적이더니,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고 있었다.
장기린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도와주러 온 것이오?”
“……음?! 아, 아니. 뭐,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지나가다가 말이지. 아니, 원래 저 독두파 녀석들과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말이야.”
“…….”
“그게…… 그렇다니까. 이런 곳에선 자주 있는 일이고. 또, 그 뭐냐…….”
철우는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애초에 말주변이 없는데다, 핑계는 더더욱 못 대는 성격이다. 싸움을 할 때의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말을 잘 못하는 모습은 순박하기 이를 데 없다.
장기린은 그 모습이 묘하게 마음에 들어 버렸다.
‘이러면 다른 뜻이 있다고 해도 화를 낼 수가 없잖아.’
분명, 아무 이유 없이 이곳에 오진 않았을 것이다. 굳이 끼어들어서 싸움을 말린 것도 풍운객잔을 돕기보다는 청풍객잔을 견제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고.
하지만 이제 와서 그걸 추궁하기엔 철우가 마음에 들어 버렸다.
“고맙소.”
“크흠! 아, 아니. 그런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이…….”
“들어와서 술이라도 한잔하겠소?”
술이란 말에 굳어 있던 철우의 안색이 확 풀려 버린다.
정말로, 알기 쉬운 사내다.
장기린은 과거에 그가 동생들에게 했던 행동 그대로, 뒤쪽을 향해 힐끗 고갯짓을 한 뒤 묵묵히 등을 돌렸다.
그라면 분명히 알아듣고 따라온다.
아니나 다를까, 두 걸음 정도를 떼었을 때 묵직한, 그래서 누군지 알기 쉬운 발소리가 쿵쿵 가까워졌다.
“이곳에 앉…….”
장기린이 평소에 애용하던 탁자를 가리키며 말을 꺼내려는 찰나,
“어……?”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척추에서 치달아 오른 뜨끈뜨끈한 감각이 번개를 맞은 것처럼 온몸을 관통한다.
그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건지 철우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모든 것은 등 뒤에서 들려온 한 줄기 비명 소리 때문이었다.
이곳 풍운객잔의 뒤쪽인 별채. 그쪽에서 들려온 인기척. 싸움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소란스러움.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아악―!”
아칠과 아팔의 것으로 보이는 비명 소리가 다시금 들려오는 순간, 장기린의 몸은 이미 별채를 향해 뛰어나가고 있었다.
불과 칠팔 장(丈)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
문과 벽으로 막혀 있지만 않으면 두 걸음밖에 안 되었을 거리다.
별채로 가는 쪽문을 발로 부수듯 차서 열어 버리자, 그가 야채를 다듬기도 했던 뒤뜰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아칠과 아팔이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배를 걷어차인 모양이다. 몸을 둥그렇게 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재빨리 다가가서 살펴보자, 꽤나 강하게 걷어차여서 반쯤 정신이 나갔지만 뼈나 장기는 무사한 것 같았다.
“아아…….”
“으으, 아파…….”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 아무리 억척스럽게 살아온 두 아이라곤 해도 이렇게나 인정사정없이 걷어차여 본 적이 있었을까?
통통한 얼굴 위로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을 보자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컥 솟아오른다.
게다가 그 순간, 물 흐르듯 유연한 몸놀림으로 담벼락을 넘어가고 있는 흰색 장포의 사내가 그의 눈에 가시처럼 아프게 박혀 들었다.
“감히……!”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하게 화가 났다.
풍운객잔이라는 보금자리에 쳐들어와, 한 가족이 된 아칠과 아팔을 상처 입혔다.
고난 끝에 얻은…….
이제 막 시작하려는 평범한 생활을 망쳐 놓고 있다.
“감히……!!”
그리고 흰색 장포의 손에 붙잡혀 함께 끌려가 버린 한 사람. 축 늘어져 있어서 얼굴을 알아보진 못했으나, 하나로 질끈 묶은 윤기가 흐르는 흑단(黑檀)색 머리카락과 병아리를 생각나게 하는 노란색 경장을 보고도 그게 누군지 모를 리가 없다.
“휘연……!”
으득!
이를 악물었다.
휘연이, 잡혀가 버린 것이다.
☆ ☆ ☆
깜빡 정신을 잃었던 휘연은 싸늘한 냉기를 느끼며 살며시 눈을 떴다. 몽롱했던 정신이 돌아오고, 주변의 모습이 예상과 다르다는 것을 느낀 순간, ‘핫!’하고 소리를 지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여긴……? 윽!”
휘연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으나, 뻣뻣하게 굳어서 감각이 통하지 않는 몸 때문에 다시 무릎을 찧듯 주저앉아 버렸다.
차갑게 식은 바닥 때문이었을까?
온몸이 쥐가 내린 것처럼 욱신거리고 저릿저릿했다.
‘잡혀 온 걸까?’
워낙 머리가 멍해서 뭐가 뭔지 아직 잘 파악이 안 되었다.
기절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고 싶었다.
가슴이 시려서 살짝 상체를 들자, 휘연은 자신이 팔을 뒤로 묶여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알에서 깨어나는 새끼 새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문득 다리를 잡는 묵직한 느낌에 돌아보니 양쪽 발목에도 한 뼘 정도 되는 제법 질겨 보이는 천이 그녀를 꽁꽁 묶고 있었다. 조금 손을 움직여 보았지만, 팔의 감각조차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꼴로……?’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아칠, 아팔과 함께 별채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날 장에 가서 사야 할 것들을 이야기하고, 앞으로 객잔을 꾸미는 데 뭐가 필요한지 이야기하고, 객주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즐겁게 웃다가…….
‘그래. 흰색 옷의 남자! 그 남자가 달려들었어. 얼굴이 하얗고 입술이 새빨간 무서운 사람. 얼굴을 보는 순간 뒷목이 아프면서 정신을 잃었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칠과 아팔의 비명 소리도 들렸던 것이 불안했다. 걱정이 된다. 그 아이들은 괜찮은 걸까?
“호오, 깨어났네?”
깜짝 놀란 휘연은 가녀린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당신은…….”
사실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짐작하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선 그때 그 남자의 느낌이 났던 것이다.
“안 그래도 너무 오래 기절해 있다 싶어서 깨우려고 그랬지. 다행이네. 일어나 줘서.”
“나를…… 왜 데려온 거죠?”
“당연한 걸 왜 물어? 원래 있던 곳에 돌려놓으려고 데려온 거지.”
휘연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말에서, 그가 홍화객잔의 사주를 받고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걸까?’
풍운객잔에서 장기린과 함께하며 행복했지만, 가슴속엔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이 항상 있었다.
홍화객잔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이런 일이 있었으니, 분명 보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설마 이렇게, 비열하게 납치를 할 줄은 몰랐지만.’
보복을 한다면, 장사를 방해하는 쪽으로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휘연은 가슴이 떨렸으나 그럴 수록 머릿속을 차갑게 진정시켰다.
“사무혁 총관이 시킨 건가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럼 당신은, 파락호?”
“묻는 게 너무 많은데? 말 많은 여자는 싫어.”
남자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어두운 곳에서도 하얀 옷과 하얀 얼굴을 가진 그는 마치 밤하늘에 뜬 달덩이처럼 훤하게 보였다. 화화공자처럼 잘생긴 얼굴이지만 새빨간 입술과 광대처럼 웃고 있는 가느다란 눈빛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다.
그가 살랑거리며 다가와 뱀처럼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예쁘네. 예전의 천화만큼. 아니, 당당한 걸로 따지면 그보다 더 매력 있어.”
입술을 핥는 그의 모습에 강한 거부감이 든다.
본능적으로 이 사내는 여자의 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 치워요.”
“호오, 반항까지?”
“손, 치워요!”
“자꾸 날 유혹하지 마. 난 반항이 심할수록 짓누르고 싶어지거든.”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뱀의 혀처럼 징그럽다.
휘연은 노골적인 경멸을 담아 말했다.
“불쌍한 사람.”
“……뭐?”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군요.”
짧은 말이었으나, 그 말은 핵심을 찌른 듯했다.
가면처럼 항상 웃고 있던 얼굴이 한순간 얼어붙은 듯이 경직된다. 어딘가 공허했던 눈빛을 채우는 것은 독 오른 뱀처럼 사나운 분노.
사내가 갑자기 휘연의 어깨를 뒤로 확 밀어 버렸다.
“윽……!”
휘연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켰다.
뒤로 넘어지면서 묶여 있던 손가락을 바닥에 찧는 바람에 눈물이 나올 만큼 아팠지만, 절대로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이 사내에겐 비명을 지르는 것은 선물을 주는 것과 같다.
그러니 절대로 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원하는 것은 내주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꾸욱.
둔중한 충격과 함께 배 위에 묵직한 게 올라왔다. 도저히 사람이 움직일 수 없도록 상대를 옭아매며, 새하얀 얼굴이 코가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계집들은 어리석어. 다들 자기가 황후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콧대를 세우고 상대를 깔보지. 자기보다 강하다는 것만 알게 되면, 온갖 아양을 떨면서 숨을 헐떡이는 천박한 것들이……!”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거친 손길이 앞섶을 잡아챈다.
부욱!
노란색 경장이 찢어지며 잡티 하나 없이 뽀얀 살결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매끄러운 어깨, 부드러운 비단 천으로 감싸여진 탄력 있는 두 개의 봉우리가 오돌토돌하게 소름이 돋은 채로 파르르 떨린다.
“윽……!”
무슨 일이 있어도 참겠다고 생각했으나, 휘연도 여인이다. 그것도 이제껏 외간 남자에게 단 한 번도 몸을 보여 준 일이 없는 순결한 여인으로서, 자신도 모르게 싫은 듯이 허리를 비틀며 저항하고 말았다.
그러자 대번에, 모닥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사내의 기세가 강해졌다.
“후후. 거봐라. 너도 똑같지. 너도 똑같다. 다들 특별한 척하지만 결국은 똑같아!”
차갑고 가느다란 손이 목을 졸라 온다. 광기에 가득 찬 눈빛엔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는 듯한 잔인한 희열이 담겨 있다.
휘연은 목이 졸라지는 가운데, 더듬더듬 말했다.
“날…… 데려…… 가려던 것…… 아닌가요……?”
“응? 뭐라고?”
“기녀로…… 하악, 쓰려고…… 데려…… 윽, 가려는 것…… 아니냐구요……. 총관이…… 하아, 하아, 가만두지…… 않을…… 텐데…….”
숨이 막혀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머릿속까지 몽롱해지려고 했으나, 어떻게든 꾹 참고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을 했다.
“후후. 하하하! 넌 내가 누군지 모르는구나. 내 이름은 옥승이다. 아, 혹시 모르나? 그럼 옥룡파는 알겠지? 그게 내 건데 말이야.”
“……!”
“되도록 총관의 비위를 맞춰 주는 게 좋을 테지만, 내가 꼭 그 명령을 들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이 말이야. 까짓 거 나중에 잔소리 좀 들으면 돼. 그리고 너 처녀지?”
휘연은 이를 악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옥승은 아무런 대답도 필요 없다는 듯 싱글싱글 웃었다.
“몸에 손 닿는 걸 극도로 싫어하더라고. 남자를 아는 것들은 그렇게 안 하지.”
“…….”
“네 처녀값은 비싸겠지만…… 뭐 좋아. 그깟 거 지불하지. 대신 넌 멀리서 내 그림자만 봐도 벌벌 떨면서 주저앉게 만들어 주겠어.”
‘휙’하고 목을 조르던 손이 떨어져 나간다.
휘연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막혔던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깊은 안도감이 들지만, 이건 오히려 다른 일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깨물며 각오를 다졌다.
‘그래. 어차피 기루에 팔려 갈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야. 참자. 참는 거야. 첫날 마음먹었던 것. 홍화객잔에서 해내려던 원래의 목표로…… 돌아가는 거야.’
강한 이성과는 달리, 뿌옇게 흐려졌던 눈에서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어째서 이럴 때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알 수가 없다. 무표정하게 얼굴을 감췄지만,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옥승은 그 눈물을 봤는지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는 묶여 있는 발목을 그대로 둔 채 휘연의 무릎을 양옆으로 벌렸다.
휘연은 저항하듯 다리에 힘을 줬으나, 억센 힘을 버텨 낼 수는 없었다.
“참지 말고 울어라. 입을 벌려. 그리고 고통에 신음해라. 그게 덜 괴로울 거야.”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잔인하다.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여전히 그런 말이냐?”
“난, 절대로. 당신에게 굴복하지 않아요.”
눈물을 감춘 채 휘연은 다짐하듯 그렇게 말했다.
“한 번 보자고. 그럴 수 있는지. 나중에 울며불며 매달리지나 마.”
“…….”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혀는 깨물지 말고. 되도록 살아야지?”
옥승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포악한 말을 내뱉으며 휘연의 다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미 상체가 찢어진 얇은 경장은, 늘씬한 그녀의 몸을 가리기보단, 오히려 더욱 강조하기 위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읍……!”
옥승의 손이 다리에 닿는다.
뱀처럼 민활하게 움직이는 손이 남은 옷을 끌어내리기 시작한다.
소름 끼치는 감각과 강렬한 수치심.
휘연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오려는 순간,
“컥……!”
빠각!
나무가 하나 통째로 박살 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그녀의 무릎을 잡고 있던 손이 사라졌다.
“아……?”
휘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잔인했던 얼굴이, 섬뜩했던 웃음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뒤쪽으로 튕겨 나간 옥승이 깨진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바닥에 주저앉는다.
곧장 다시 일어나 달려들려고 하지만 반토막 난 대나무 막대가 옥승의 왼쪽 다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빠악!!
“크악……!”
이번엔 제대로 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대나무 막대가 바닥에 떨어진다.
멱살이 잡힌 옥승이 공중으로 한 뼘가량 떠오르고, 소름이 끼칠 만큼 강렬하게 뺨을 세 대나 맞은 뒤 배가 걷어차여서 쓰레기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아……! 아아……!”
휘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픔과 억눌린 한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다. 그녀는 양팔과 양다리가 모두 묶인 몸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어깨를 움츠리며 볼을 붉혔다.
아마 꼴이 엉망일 것이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여 주기가 싫었다.
상대가 옥승이라면 그저 괴로울 뿐이지만, 이 사내라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에게라면, 너무나도 보여 주기 싫은 부끄러운 일이다.
“객주님…….”
물기가 그렁그렁한 목소리를 들었는지, 옥승을 잠시 내버려 둔 채 그 사내가 이쪽을 돌아본다.
무서운 눈빛을 하고 있지만, 그 속만큼은 누구보다 따뜻한 사내.
새하얀 백창의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그는, 풍운객잔의 객주 장기린이었다.
장기린은 머릿속이 폭발할 것 같은 흥분을 잠시 가라앉힌 뒤, 휘연에게로 다가갔다.
눈을 마주치기 힘든 건지, 아니면 부끄러운 것인지 그녀는 시선을 살짝 내린 채 볼을 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으음…….”
얼굴에 상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시선을 내렸는데, 훤히 드러난 백옥 같은 피부를 보자 평소에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않던 장기린이라도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수줍게 드러난 매끈한 어깨, 가녀린 목선, 그리고 그 밑에서 얇은 비단 천 하나에 둘러진 채 탄력 있게 솟아 있는 가슴.
남자인 이상 그곳에서 눈을 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장기린은 헛기침을 하며 힘겹게 시선을 돌린 뒤, 휘연의 팔을 묶고 있던 줄을 풀어 주고, 입고 있던 백창의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 사이, 하얀 목에 남아 있는 새빨간 손자국을 본 그의 눈빛이 잠시 차가워졌다.
“괜찮아?”
걱정스럽게 묻자, 휘연이 고개를 휙 들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장기린은 움찔 놀랐다. 처음으로,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채다.
“객주님……!”
“어……?”
“객주님……! 으우으……. 저, 저, 무서워서……. 하지만 참았지만…… 객주님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얼마나 긴장하고 무서웠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깨라도 토닥여 주자 싶어서 손을 들어 올리는데, 갑작스레 달려든 휘연이 목을 끌어안고 몸을 기대 왔다.
“……!”
“으우……. 우우…….”
백창의를 어깨에 걸쳐 주긴 했어도 여전히 앞섶은 훤히 열려 있는 채다. 게다가 이쪽은 상의를 벗어 준 덕분에 위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
‘이건…… 곤란한데…….’
상체에 닿는 뭉클하면서 매끈한 감각이 평정심을 뒤흔들고 있었다.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운 감촉. 기분은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저기…….”
“으우우……. 으우우……!”
떼어 놓으려고 했으나, 워낙 서럽게 울고 있으니 그것도 왠지 힘들 듯했다.
“휘연.”
“우으, 네?”
“잠……!”
휘연을 말로 설득하려던 장기린은 황급히 몸을 반전시키며 휘연의 허리를 잡고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피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어깨 부근에 얇은 실선이 그어진다. 몸을 스치고 지나간 단검은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개, 자식이―!”
옥승은 눈이 벌겋게 된 채로 흥분해서 달려들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웃고 있다는 것이 조금 섬뜩하다.
오른쪽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언제 꺼냈는지 모를 한 뼘 길이의 소도(小刀).
몸놀림은 짐승처럼 날렵했고, 움직이는 발동작, 손동작엔 제대로 가르침을 받은 듯한 절도가 있었다.
‘가볍게 볼 수는 없다.’
더군다나 휘연을 몸에 달고 싸워선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뒤로!”
장기린은 재빨리 휘연을 등 뒤로 옮긴 뒤, 달려드는 옥승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내리치는 단검을 피하고 그 틈에 손목을 잡으려 하니, 옥승은 손목을 기묘하게 뒤틀면서 그 손을 피한다. 이번엔 내려갔던 단검이 위로 반전하며 비스듬하게 올려친다.
목표는 이쪽의 목.
맨손으로 막으려고 하면 방심하기 쉬울 텐데도, 옥승은 절대로 이쪽의 손과 칼날을 마주치지 않고, 마치 사납게 달려드는 겨울의 파도처럼 거친 공격을 이어 나갔다.
좌, 우, 위, 아래로 열세 번.
휘두르는 소도의 칼날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 특이했다.
‘눈치가 빠르군. 잡혀 주면 좋았을 텐데.’
장기린은 아쉬움에 속으로 혀를 차면서 미묘하게 상체를 살짝살짝 뒤틀었다.
칼날이 스쳐 지나간다.
장기린이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채로 그 모두를 피하자, 옥승의 눈에 경악의 빛이 어렸다.
“네놈, 어떻게……?”
그 놀라움이 냉정을 찾아 준 것일까? 옥승의 눈에서 광기가 사라져 간다.
미친 듯이 공격하는 것을 멈춘 그는, 슬쩍슬쩍 공격에서 힘을 빼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듯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다.
여전히 웃는 낯으로.
쥐새끼처럼 눈을 굴리며 퇴로를 궁리하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도망치려고?’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감히, 이런 짓까지 저질러 놓고.
아칠, 아팔, 그리고 휘연을 상처 입혀 놓고 무사히 도망칠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번쩍 눈을 부릅뜨며 맹호처럼 달려드는 장기린.
평범한 생활로 회귀한 뒤, 처음으로 사용하는 군대 무술이다.
한 팔로 아름드리나무를 부러뜨리는 대호(大虎)의 힘처럼.
반권(半拳) 형태로 살짝 주먹을 쥔 채, 온몸의 무게를 실은 강력한 공격이 옥승이 들고 있던 소도를 강타했다.
쩌엉!
강렬한 울림과 함께 소도의 칼날이 마치 유리 부서지듯 산산조각 났다.
눈빛이 떨리는 옥승.
그대로 한 걸음을 더 내딛으며 이번엔 왼쪽 손으로 그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쥔다. 힘차게 내딛은 왼쪽 발. 일자로 쭉 펴고 무게를 지탱하는 오른쪽 다리.
눈빛에 질리고, 기세에 눌린 옥승은 반항하지 못했다.
‘용의 수염 자세! 이대로 꺾어 버리면, 죽…….’
거기서, 상념을 멈춘다.
죽인다?
간단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 이상 그는 과거와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장소만 바꿨을 뿐, 사람을 죽이고, 피를 보는 예전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된다.
풍운객잔의 객주 장기린이 아니라, 북로전쟁의 악귀 장기린이 되어 버린다.
“으음…….”
찰나간 고민하던 장기린은, 목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 주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가랑이 사이를 있는 힘껏 차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꺼……! 끄어아아악―!”
바닥에 주저앉은 옥승이 사타구니 사이에 손을 넣고 데굴데굴 구른다. 입은 거품을 물었고, 눈은 까뒤집어진 채다. 바짓단 사이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인의 천적.
지금까지 수많은 여인들을 짓밟아온 옥승의 행태에 걸맞은 최후였다.
“네놈은…….”
장기린은 주먹을 들어 올리다가, 다시 힘을 빼고 늘어뜨렸다.
물을 것은 많다. 싸우고자 한다면 알아내야 할 것도 많다.
하지만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받은 휘연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보자,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평생 참회하며 살아라.”
장기린은 냉랭하게 말한 뒤 등을 돌렸다. 그의 백창의를 입고 앞섶을 손으로 꼭 여미며 수줍게 볼을 붉히고 있는 휘연을 데리고 어두침침한 곳을 빠져나갔다.
“아……!”
밖으로 나오자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화려한 별빛들이 폭발하듯 쏟아져 내렸다.
휘연은 그제야, 그녀가 갇혀 있던 곳이 금선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폐사당(廢祠堂)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옥승 역시 추격자를 신경 쓰느라 여러 번 가짜 장소에 들렀을 뿐, 실제론 가까운 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항주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꽤나 절경을 갖춘 지역이었다.
휘연은 상처 입은 마음이 씻기는 듯한 감동에, 참지 못하고 감탄을 토해 냈고, 장기린은 그런 그녀를 옆에서 묵묵히 부축해 주었다.
“저, 저기, 객주님.”
“어, 말해.”
“……감사해요. 구해 주셔서.”
그녀는 문득 사당 안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는 듯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그래. 고생했어.”
장기린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짧게 말을 끝냈다.
그는 이럴 때, 묵묵히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던 것일까. 휘연은 그것에 더욱 안심한 듯, 평소의 얼굴로 더욱더 몸을 기대 왔다.
“크흠!”
팔을 감싸는 따뜻한 감촉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휘연이 헤헤 웃으며 무방비한 얼굴로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다면 더욱더.
장기린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이제 걸을 수 있지 않아?”
“아뇨. 아직이요.”
장기린이 보기엔 못 걸을 정도는 아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정말?”
“아직 안됐어요! 정말…… 객잔에 도착할 때까지만 좀 참아 주세요.”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휘연을 부축한 채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장기린.
그런 그에게 한껏 몸을 기댄 휘연.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언덕길을 천천히 내려왔다.
어두운 밤하늘 위의 환한 보름달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항주를 훤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 ☆ ☆
“크윽…… 큭, 이…… 개자식……! 가만히 안 둘 테다……! 절대로……!”
꿈틀꿈틀.
폐사당에서 벌레처럼 기어 나온 옥승은 극렬한 고통을 참으며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단단한 나무 기둥을 짚고 겨우겨우 일어선 옥승은 손을 뒤로하여 허리춤을 더듬었다. 분명 그쯤에 옥룡파에게 신호를 보내는 폭연전이 있을 터였다.
“이걸 찾나?”
그런데 갑자기 뒤쪽에서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옥승은 크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너는……!”
거인이 있었다.
키가 칠 척에 가까운 거구.
금강신의 동상처럼 단단한 육체를 가진 채, 그것만으로도 주변을 자연히 위압하는 무서운 기도의 소유자가 부리부리한 안광을 빛내고 있다.
“철우……!”
철우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단단한 대나무로 만든 한 뼘 길이의 폭연전이다.
어딘가에서 떨어뜨렸던 것인가.
그렇게 잠시 고민하며 낙담하는 사이, 철우는 그것을 꽉 움켜쥐어서 완전히 박살을 내버리고 말았다.
빠자작!
“네, 네놈……!”
옥승은 바닥에 후드득 떨어지는 폭연전의 잔해를 보며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단순한 악력으로 물건을 박살 내는 그 놀라운 괴력은 둘째 치더라도, 저 폭연전이 없다면 지금 그는 이곳에 고립이 되어 버린다. 지금 이 몸 상태로 스스로 돌아갈 수도 없고, 더군다나 뒤를 받쳐 줄 부하들도 없는 상황에서 철우와 단둘이라고 하는 상황은 절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역시……. 여자가 없어졌다고 할 때부터 네놈일 줄 알았지.”
철우는 화약이 묻은 손을 탈탈 털어 내며 귀찮은 듯이 가슴팍을 긁적거렸다.
“너…… 나를 죽일 거냐?”
옥승은 긴장한 표정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만.”
“…….”
“그래도 그건 금선지약을 깨는 거겠지.”
옥승은 평소의 미소를 되찾았다.
금선지약이 얼마나 개똥같이 쓸모없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핑계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지금 중요한 건 철우가 그를 죽이지 않을 거란 사실이다. 옥승은 여유롭게 폐사당의 문에 등을 기댔다. 그가 죽지만 않을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럼 여기에 왜 있는 거냐?”
“…….”
“흥! 이유가 없으면 당장 꺼져라. 네놈 면상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철우의 입매가 불편하게 꿈틀거렸다.
“……죽이지 않는다는 걸 알자마자 그 태도인가? 과연, 네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당연하지. 그러니까 꺼지라고.”
“하나만 알아 둬라. 옥 가야. 내가 널 죽이진 않는다고 했지만, 몇 달간 방구석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패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옥승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철우를 노려보며 손에 들린 단검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지만, 결국 ‘쳇!’하고 코웃음 치며 먼저 고개를 돌렸다.
“흥! 원하는 게 뭐냐?”
“뭐, 한 가지만 묻지.”
“말해.”
“난 네놈이 누군지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몰골이냐? 전력을 다해 놓고도 그렇게 당한 건가?”
옥승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날…… 안다고?”
“해남파의 파문 제자 강옥승. 사저를 간(奸)하고 도망쳐서 파문되었지만, 그전까진 제법 재능 있는 일대제자로 주목을 받았었다던데.”
“…….”
“그 칼, 꺼내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내가 이 사실을 주변에 소문낼 것 같으면,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내가 필요한 건 네가 그 무공을 사용했음에도 졌느냐는 사실뿐이다.”
옥승은 분노에 찬 얼굴로 잠시 철우를 노려보았으나, 결국 이번에도 허탈한 한숨과 함께 팔을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네놈도, 알려져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른 놈이었군.”
“…….”
“뭐, 답해 주지. 맞다. 나는 전력을 다했고, 그놈은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은 채 공격을 다 피했다. 됐나?”
이번엔 철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 발짝도……?”
“선공을 당해서 당황한 것도 원인이고, 한 오 년간 제대로 칼을 안 잡아 본 것도 원인이다. 그리고 내 손에 들려 있던 것이 태도(太刀)가 아니라 소도였다는 것도 원인이겠지?”
주절주절 말했으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 옥승도 알고 철우도 알고 있었다.
오 년 넘게 놀았다고 말은 하지만 구대문파 중 하나의 일대제자였던 기본 실력이 어디로 가진 않는다.
즉, 기본적인 ‘급’이 다르다면, 옥승이 태도를 쥐든 소도를 쥐든, 설령 무기가 아니라 젓가락을 하나 쥔다고 해도 상대는 옥승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전력을 다한 공격에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피해 냈다?’
그 말은, 오히려 반대였다는 소리다.
옥승의 ‘급’이 그 사내의 ‘급’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렇군.”
철우는 심각한 얼굴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할 말이 있다.”
“또, 뭐야.”
“풍운객잔은 건드리지 마라.”
옥승이 의외의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서? 이봐, 이쪽은 차세대 항주제일화를 잃었다고. 그런데 그냥 무작정 참으라는 거냐?”
“그에 대한 대금은 받은 걸로 아는데?”
“그깟 걸로 총관 나으리의 화가 풀리지 않으니까 문제지.”
“참으라고 해라. 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으면.”
철우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귀찮은 듯 나른한 얼굴로, 눈빛만은 차가운.
평상시 전투 직전의 철우다.
“……진심이구먼.”
“물론.”
“어째서? 너희 청월루는 풍운객잔과 무슨 관계지?”
“알 것 없다. 그저 풍운객잔을 치려면 우리와 상대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만 알아 둬라.”
옥승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허!’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을 텐데?”
“안다.”
“……뭐, 좋아. 우리 총관 나으리에겐 그렇게 전하지.”
철우는 그 말을 듣자, 그걸로 됐다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철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옥승은 ‘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썅! 깜빡했다. 폭연전……!”
폭연전이 없다면, 이 언덕을 내려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옥승의 얼굴이 더더욱 허옇게 질렸다.
“이 개―자―식―아아―!”
항주 북로 폐사당 쪽에선, 누구에게라고 말할 수 없는 욕설이 하루 종일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