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1화 (11/686)

第十章 ― 풍운단장(風雲端裝)

주방 안에 마련된 객주석(客主席)에 앉아 운찬의 칼질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아칠과 아팔을 대동한 휘연이 사뿐사뿐 다가왔다.

여전히 잘 어울리는 노란색 경장.

그녀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칙칙했던 주방 안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객주님. 오늘 도와주셨으면 해요.”

휘연은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도움? 어떤…… 아, 운찬! 거기 팔꿈치가 한 치 올라갔다.”

“으앗, 예!”

“어깨는 움직이지 말고. 이번엔 왼손이 올라갔잖아.”

“으아앗, 예!”

장기린은 운찬의 자세를 몇 번 지적한 뒤, 다시 휘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데?”

휘연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객잔 정면을 수선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객주님과 함께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정면을 수선?”

“네, 건물을 고치려구요.”

“다시 짓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맞아요. 하지만 나무를 덧대서 꾸미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문가를 통해 알아보니까, 객잔 건물이 오래되고 낡았지만 골조만큼은 좋은 걸 썼다고 하더라고요.”

“흐음, 하긴……. 별채의 골조도 튼튼했지.”

“네, 맞아요. 그래서 임가촌(林家村)에서 목장을 한 분 데리고 와야 하는데, 아무래도 저랑 아칠, 아팔만으로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서…….”

휘연은 조금 씁쓸하게 말끝을 흐렸다.

장기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렵다니? 가져올 물건이라도 있는 건가?”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데?”

“……임가촌은 여자가 가면 손님으로 취급을 안 하거든요.”

장기린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미신일 뿐이지만 그런 경우는 많다. 바다에 나가는 첫 배에 여자가 타면 용왕의 저주를 받아 배가 침몰한다는 전설이라거나, 전쟁터에서도 여자를 만지면 사흘 안에 크게 다치거나 죽는다는 속설이 있기도 했다.

한마디로, ‘남자들의 세계’라는 거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힘쓰는 목공들의 마을이 임가촌이라면, 그런 식으로 몸을 사리는 것도 납득이 되었다.

“흐음, 어려울 건 없지. 그런데 내가 가서 설득을 해야 하는 건가? 나는 그런 쪽으로는 잘 모르는데.”

휘연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뇨. 함께 가 주시기만 하면 돼요. 옆에서 제가 이야기할 테니까, 그걸로 충분하거든요.”

“흐음, 그래?”

“네.”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가야 한다면 가면 되는 거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 상황. 휘연이 필요하다면, 도와주면 된다.

장기린은 운찬의 옆으로 다가가 칼질을 멈추게 했다.

“엇, 형님……?”

“잘 봐라. 이게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고, 이게 앞으로 해야 하는 행동이다.”

장기린은 운찬이 잘 썰어 보려고 아등바등하던 당근과 칼을 뺏어 들고는 두 번을 썰었다.

한 번은 상체의 무게를 실어 밀어 올리듯이 잘랐고, 다른 한 번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손목을 당겨 잘라 냈다.

서걱. 석.

그 둘은 칼날이 움직이는 소리마저 달랐다.

“어……?!”

옆에서 유심히 보고 있던 운찬도 그 차이를 느꼈는지 감탄사를 토해 냈다.

“원래 칼을 쓸 때는 칼에 무게를 싣는 것이 아니다. 지금 네가 하는 건 재료를 자르는 게 아니야. ‘써는’ 거지. 칼날을 표면에 살짝 박아 넣고 몸의 무게를 실어 찍어 누르면서 억지로 그 틈을 벌린다. 그게 나무에 도끼질을 하는 거랑 뭐가 다르다고 생각하나?”

“아……!”

“몸을 곧게 바로 세운 채 손목과 마음만을 움직여 칼을 당겨 베는 거다. 재료를 썰어서 다듬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는 칼로 ‘잘라서’, 그것을 ‘나누는 것’뿐이다. 그 생각이 중요해. 그 생각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결과물이 하늘과 땅만큼 달라질 거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한 가지를 강하게 염원할 때, 그것은 마치 기적처럼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법이다.

지금 운찬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머리와 마음은 없이, 그저 행동과 기예(技藝)만 따라 한다면, 백 년이 걸려도 활검은 요원할 터.

‘시간 날 때, 숨 쉬는 법이랑 생각하는 법도 가르쳐야겠어.’

장기린은 짐짓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잘못 말한 것 같다.”

“예……?”

“속도가 너무 느려. 이 정도론 어느 정도 사용하는 데까지 일 년은 무리다. 오 년, 아니 칠팔 년이 걸려도 될지 안될지 모르겠어.”

진심이었다.

운찬은 재능이 있지만, 적룡기마대원들처럼 칼이나 몸 쓰는 방법에 익숙지가 않다는 것이 너무나 큰 단점으로 작용한다.

이건 장기린도 생각지 못했던 사항이었다.

그동안 주변에 있던 동생들이 다 장기린과 똑같았던 탓에, 살아온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저, 정말입니까……?”

운찬은 당황과 실망으로 두 눈 가득 물기가 차올랐다.

장기린은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열심히 해라. 내일 죽어 버린다고 생각하고, 아낌없이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해. 그렇지 않으면 십 년이 걸려도 너는 활검을 얻을 수 없어.”

“저, 저기…….”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운찬.”

운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뒤, 장기린은 주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오기 직전에 고개를 돌려서 본 운찬은 멍하니 눈앞의 당근과 칼을 쳐다보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 객잔의 입구를 통과할 때쯤, 휘연이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객주님도 그런 걸 할 줄 아시네요?”

“무슨 말이야?”

“모른 척,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거요. 방금 그거 일부러 강 숙수님께 긴장감을 주려고 그러신 거죠?”

휘연은 그걸 어떻게 안 것일까?

놀라서 쳐다보자, 휘연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저도 진짜인 줄 알고 착각했었어요. 마지막에 객주님이 주방 안을 살짝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모를 뻔했어요.”

“……그래?”

마음을 읽혔다고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장기린은 괜스레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봤다.

“뭐, 사람의 마음이란 건 중요하니까.”

“강 숙수님이 나태해졌던 건가요?”

“딱히 나태했다기보단,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거다. 내가 한 말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야. 일 년이란 시간은, 운찬이 다른 모든 것을 버린 채 하나에 모든 것을 집중해서 최선을 다했을 때 걸리는 시간이니까. 지금처럼 위기감도 없이 설렁설렁 배우다간, 언제 활검을 깨우칠지 알 수 없어.”

“그런가요? 역시 쉬운 일이 아닌가 보네요.”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쉬운 일이 아니지. 대원들이 아니면 배울 수 없으니까.’

다른 병사들에게는 아마 무리일 것이다.

운찬이 재능이 없었다면, 이런 시도를 할 생각도 못 했을 만큼 꽤나 어려운 일이다.

“객주님은 다정하신 것 같아요.”

“뭐?”

휘연은 가까이 다가와 초롱초롱한 눈으로 빤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숨을 쉬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여서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췄다.

“쑥스러운 건지, 평소엔 툭툭 말하고 관심 없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세심하게 주변을 챙기시잖아요? 객주님은 다정한 분이세요.”

“난 다정과는 거리가 멀어.”

“같이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 신경 쓰잖아요?”

“그건…….”

“그게 다정한 거라니까요. 제 말을 믿으세요. 객주님은 다정해요.”

허리에 손을 얹고, 고집스럽게 입술을 꾹 다문 채 호수처럼 잔잔한 눈으로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햇빛을 받아 더욱 밝게 빛나는 새하얀 피부.

이런 얼굴에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장기린은 아무 말 못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자아―, 그럼 저희는 여기까지 배웅할 게요.”

그때, 장기린의 뒤에서 어딘가 즐거워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팔?”

“생각해 보니 객주님이 휘연 누님과 함께 가시면 저희가 꼭 따라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휘연 누님도, 저희가 같이 안 가는 게 편하실 거구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팔?”

휘연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히히, 아뇨, 아니에요. ‘두 분’이서 가시고, 저희는 남아서 할 일을 할 게요.”

“어……?”

“사실, 객잔에 할 일이 많이 남았잖아요? 객실도 치워 둬야 하고, 물도 길어 둬야 하고…… 아칠과 저는 여기에 있을게요.”

아팔은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 저기, 그, 그게…….”

휘연이 잠시 의아해하더니, 갑자기 뭔가를 깨달았는지 얼굴이 빨개지면서 당황했다. 평소답지 않게 허둥대는 모습이다.

장기린이 휘연을 이렇게 만든 ‘원인’인 아팔을 쳐다보자, 아팔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아칠과 조용한 목소리로 툭탁거리고 있었다.

“야? 왜 그래? 아침까지만 해도 다 같이 장에 간다고 좋아했잖아?”

“바보야. 넌 눈치도 없냐? 그냥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해.”

“에? 왜?”

“둔탱이. 그건…….”

아칠의 귀에 속닥이는 아팔.

그러고 나자, 아칠도 “아……!” 하고 감탄성을 토해 내더니, 이내 아팔과 똑같은 장난기 어린 얼굴로 웃으며 인사했다.

“아팔 말대로, 저희는 여기에 있을 게요. 다녀오세요, 객주님.”

“……함께 가고 싶으면 가도 돼. 일이야 조금 있다가 하면 되지. 굳이 그 정도 일로 내 눈치 볼 것 없어.”

장기린은 혹시 아칠과 아팔이 일 때문에 그의 눈치를 보는가 싶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니에요, 객주님. 저희는 객주님 눈치 보지 않았어요. ‘다른 게’ 더 신경 쓰여서 그래요. 이번엔 정말로 괜찮아요.”

그러면서 아칠과 아팔이 힐끗힐끗 휘연을 쳐다본다.

휘연은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그러는 거지?’

휘연이 왜 당황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칠과 아팔이 이 정도까지 말한다면 굳이 억지로 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알겠다. 그럼…….”

“네에,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이왕 나가신 거 ‘천천히’, ‘오래오래’ 구경하다가 오세요―!”

끝까지 평소답지 않은 말을 하는 아칠과 아팔.

그 두 사람은, 휘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자, ‘앗, 뜨거!’하는 표정으로 후다닥 객잔 안으로 도망쳐 버렸다.

“휴우…….”

휘연은 부드러운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고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봤다.

“가요, 객주님.”

“음, 그래.”

“이쪽으로 가시면 돼요.”

그녀는 방향을 안내하더니, 머뭇머뭇거리며 조심스레 손을 뻗어 소매를 붙잡아 왔다.

꾸욱.

“…….”

“…….”

소매 정도 잡혀 봐야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여 가만히 있었지만, 막상 소맷자락을 통해 휘연과 연결되고 나니 뭔가 어색한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의 소매를 붙잡고 옆으로 떨어지지 않는 휘연.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진 않지만, 그래도 그들의 눈엔 휘연과 자신이 어떤 사이로 보일까.

고개를 내리고 휘연을 쳐다보자, 그녀는 뽀얀 볼이 복숭앗빛으로 살짝 상기된 채 배시시 웃었다.

조금 전의 망설임은 어디로 갔는지, 마치 장터에 처음 나와 본 어린아이처럼 잔뜩 들뜬 기색이 역력하다.

“자, 저리로 가시면 돼요.”

휘연의 밝은 목소리와 함께, 장기린은 임가촌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실례합니다. 임 목장(木匠)님 계신가요?”

금선로에서 서쪽으로 걸어갔을 때, 일각 정도 떨어진 곳.

임가촌은 오동나무 향이 물씬 풍기는 목재 마을이었다. 그리 큰 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워져 있는 목재 건물들은 모두 튼튼하고 견고하기 이를 데 없어서 폭풍이 몰아쳐도 끄떡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마을의 중심엔 아직 다 다듬어지지 않은 커다란 목재들이 작은 언덕만큼이나 쌓여 있었고, 그곳엔 고집스러운 인상을 한 사내들이 다들 손에 대패와 톱을 하나씩 든 채로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톱밥이 흩날리고, 목향(木香)이 머리가 아플 만큼 진하게 배어 있는 마을.

목공들의 손놀림은 매우 능숙하고 빨랐으나, 어쩐지 그들의 얼굴에선 삶에 지친 고뇌와 피곤함이 느껴졌다.

그들에게 휘연이 아무리 반갑게 인사를 해도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목공들의 무관심을 받으며 들어가, 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세워진 튼튼한 흑단목 집에 도착했다.

휘연의 말로는 이곳이 바로 아칠과 아팔에게 소개받은 유능한 목장이 사는 곳이라고 했다.

“저기, 임 목장님?”

휘연이 다시 한 번 소리를 높여 불러 보지만, 여전히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장기린은 싸리문 너머, 얼핏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적막한 집을 살펴보며 말했다.

“안에 있어.”

“그래요?”

“아아, 방 안에 있는 것 같다. 자는 건지, 누워 있는 채로 꼼짝도 하지 않지만.”

휘연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런 걸 알 수 있으세요?”

장기린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문지방 앞에 신발이 있다. 숨소리도 들리고.”

“귀가…… 좋으시네요?”

“뭐, 조금. 단련해 두었다.”

휘연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아마 술에 취해 계실 거예요.”

“술?”

“네. 어제도 그랬거든요. 상당히 술에 취해 계셨어요. 뭔가 괴로운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게다가 여자한테는 일 의뢰를 받지 않는다고 한사코 주장하셔서, 어쩔 수 없이 돌아왔었어요.”

휘연은 “어떻게 하죠? 이대로 돌아가야 할까요?”라고 침울하게 말하며 갈팡질팡했다.

“……아니. 이대로 돌아가서야 안 되지.”

장기린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준 뒤, 잠겨 있지도 않고 살짝 닫혀 있을 뿐인 싸리문을 바깥에서 강제로 밀어 열었다.

휘연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끼이익―!

“앗! 개, 객주님……!”

주인이 열어 주지도 않는데 강제로 들어간다는 게 놀라운 모양이었다.

장기린은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 손을 내저어 주었다.

휘연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때론 규칙을 깨는 것이 필요한 법이다. 그가 생각할 때 지금 들어가서 저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없었다.

“나에게 맡겨.”

“객주님…….”

“임 목장이라는 사람은 지금 만나지 않으면 안 돼.”

기척으로 살펴봤을 때, 꽤나 위험하기도 하고 말이다.

장기린은 안쪽으로 들어가 임 목장이 있는 곳으로 보이는 집의 안채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들보를 넘어 단숨에 안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개, 객주님……!”

휘연의 소리 낮춘 비명이 들려오지만, 장기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 어떻게 이렇게 매끈하게 깎아 놓았을까 싶을 만큼 윤기가 흐르는 나무 구들장에, 코밑과 턱에 지저분하게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죽은 듯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역시, 술이네요…….”

방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던 휘연이 괴로운 얼굴로 코를 막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까탈스러운 게 아니라, 사람인 이상 당연한 반응이었다.

임 목장이 잠들어 있는 방 안은, 마치 술을 만드는 양조장(釀造場)이 아닌가 싶을 만큼 독한 주향(酒香)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냄새가 너무 짙어서 도저히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술뿐만이 아니야.”

“네?”

“눈 밑이 검고, 얼굴빛은 누렇다. 혈색을 잃고 파랗게 변한 입술이 미묘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것. 이건…… 독(毒)이다.”

잠시 멍하니 서서 그의 말을 곱씹던 휘연은 경악한 듯 봉목을 부릅떴다.

“……네에?! 도, 독이요?”

“아아, 예상하자면…… 사독(死毒)이나 석분(石粉)이라기보단 생독(生毒) 계열. 독버섯 종류인 것 같은데.”

휘연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사실 이건 장기린에겐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전장의 싸움.

그것이 꼭 창칼을 들고 부딪칠 때만 일어나는 싸움이었다면, 그렇게나 힘들고 메마른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에 인의를 팔아 버린 간자(間者)의 색출.

공적을 세우는 것에 불만을 가진 아군의 배신.

토사구팽당하지 않기 위한 전략의 해석.

그리고, 그를 악귀로 생각하는 몽고군의 지독한 원한.

그 모든 것들이 공통적으로 포함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뒤에서 검을 찌르는 암습.

장기린을 대상으로 한 암살(暗殺)이다.

‘횟수로 따지자면 다 세지도 못하지. 독살 위험만 오십 번쯤 된 것 같은데……. 이건 언제적의 현상이었지? 광대버섯이었던가?’

전장에서 십삼 년.

그동안 대륙에 존재하는 웬만한 독은 모두 몸으로 겪어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기린은 스스로의 경험을 되짚어 보며 중년인이 당한 독이 무엇인지 추리해 보았다.

“흰자위에 생긴 검은 점. 맞아! 버섯의 균독(菌毒)이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의원을 부르…… 아니, 의원에게 데려갈까요?”

“…….”

“아니, 일단 사람들부터 부를까요? 도움이 필요하잖아요?”

항상 차분한 편이던 휘연도 사람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니 당황해서 허둥대고 있었다.

“아니, 그래선 늦어. 이미 독이 몸에 들어간 지 꽤 오래되었다.”

휘연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설마, 그럼……!”

“아직 방법은 있어. 다행히 술과 함께 섭취된 모양이니까. 균독은 주정(酒精)과 친해서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으니, 아마 한곳에 다 모여 있겠지.”

장기린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술병들의 냄새를 맡아보며 말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술병은 모두 다섯 개.

그중 마지막에 마시던 것으로 보이는 술병에서 반쯤 남은 술과 함께 미묘하게 버섯 특유의 향기가 났다.

“휘연, 문 닫아.”

“네? 아, 네.”

“그리고 너도 밖으로 나가 있어. 혹시 균독이 방 안에 퍼질지 모르니.”

“저도 밖으로요? 하지만 그럼 객주님은……?”

“나는 괜찮아.”

휘연은 머리로는 납득했지만, 혼자서만 밖으로 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그녀는 곧바로 나가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민했다.

“괜찮아.”

“객주님…….”

“난 이깟 것에 다치지 않는다. 나를 믿어.”

“…….”

휘연을 만난 뒤 처음으로, 먼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확신을 담아 말했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마치 북로전쟁에서의 장기린처럼.

“……예. 알겠어요. 부디, 조심하세요.”

그 진심이 통했는지 휘연도 마지못해 납득하며 뒤로 물러섰다. 마지막까지 아쉽고 걱정스런 눈빛을 보냈지만 순순히 문을 닫고 밖으로 물러섰다.

‘정이 많구나.’

걱정하는 휘연의 따스함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자, 그럼…….’

장기린은 서서히 숨이 잦아들기 시작하는 중년인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몸을 일으키고 보니 바닥은 이미 코를 찌르는 지린내와 함께 축축한 액체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

생명이 위태로울 때 육체의 긴장이 풀어지면서 방광도 열려 버린 것이다.

“시간이 없군.”

실금까지 일어났다면 이제 남은 목숨은 일각 내외.

재빨리 중년인의 등 뒤로 돌아가 양쪽 어깨와 꼬리뼈 부근을 지압해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후우…….”

장기린은 조용히 숨을 가다듬으며 오른쪽 손바닥에 힘을 모았다.

지금껏 둘째인 부운화가 하는 것을 보기만 했지, 직접 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요령만큼은 몸으로 직접 터득해서 잘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장기린의 눈이 번쩍 빛났다.

“정신 똑바로 차리시오. 꽤…… 아플 테니.”

중년인의 귀에다 대고 확실하게 경고했다.

그리고 강력한 힘을 모아 둔 손바닥으로 중년인의 목 뒤에서부터 척추의 중심부까지. 마치 안마를 하듯 천천히 쓸어내리며, 중년인의 몸속에서 독기가 어디에 모여 있는지를 탐색해 내려갔다.

뜨거운 기운이 몸속을 훑어 내린다.

마치 눈앞에 인간의 장기를 펼쳐 놓은 것처럼, 중년인의 몸속 구조가 한눈에 보였다.

‘여기다……! 위(胃)와 간(肝), 균독이 한곳에 동그랗게 모여 있어.’

그리 크진 않지만, 중년인의 몸속에서 구슬처럼 동그랗게 모여 혈맥을 막고 있는 독의 운집체가 보였다. 독정(毒精)은 살아 있는 독물답게 꿈틀꿈틀 움직이며 중년인의 오장육부를 통째로 장악하려 하고 있었는데, 마치 깨끗한 물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보기가 좋지 않았다.

이미 독기가 퍼질 대로 퍼진 위와 간은 평소의 모습을 잃고 쭈글쭈글하게 구겨져 있었다.

게다가 그밖에도 다른 호흡기관에 거미줄처럼 펼쳐진 기운 때문인지 중년인은 곧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장기린은 곧장 손에 힘을 모았다.

“합―!”

짧은 기합성을 토하며 중년인의 왼쪽 허리 부근을 손바닥으로 올려쳤다.

파앙!

마치 잘 마른 이불을 터는 것처럼 맑은소리와 함께 중년인의 몸이 떨린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중년인의 몸속에서 그의 ‘힘’이 하늘로 승천하듯 치솟아 오르며 오장육부를 단번에 씻어 내고 있었다.

거칠지만, 확실하게.

그리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듯 중년인이 눈을 번쩍 떴다.

‘컥!’ 하고 벌린 입에서 시뻘건 피 분수가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푸화악―!

“쿠웨에엑……!”

상당히 보기에 역겨운 광경임에도 장기린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속을 노려보았다.

몸 밖으로 빼냈다고 끝이 아니다. 그가 찾는 것이 있었다.

잠시 후, 바닥에 우수수 쏟아지는 핏물 사이로 손가락 세 개만 한 동그란 물체가 바닥에 철퍽 떨어졌다.

꿈틀꿈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독정.

어느덧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짙은 주향(酒香)이 사라져 버리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 같은 것이 났다.

“핫―!”

장기린이 나선 것도 바로 그때.

허공으로 펄쩍 뛰어올라 산산조각 나 흩어지려는 균독을 왼쪽 발로 짓밟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해 왼발에 힘을 모으자, 잔뜩 달궈진 솥에 물을 한 대접 부은 것처럼, 짙은 연기와 함께 뭔가를 불에 지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장기린은 그걸로도 모자라, 바닥에 대고 발을 마구 비볐다.

치이익―!

무진이 발을 치웠을 때, 나무 바닥이 활활 타던 숯이라도 올려놓았던 것처럼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모든 것이 까맣게 타 버린 채 옅은 재만 후드득 떨어졌다.

“후우…….”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독정은 완전히 제거했고, 중년인도 살아났다.

혹시나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알고 있던 방법이 잘 통한 것이다.

“쿠웨에― 우어에에엑……!”

중년인은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계속해서 속에 든 것을 바닥에 게워 내고 있었다. 처절한 헛구역질은 이미 게워 낼 게 하나도 없는 상황임에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크어…… 소,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중년인은 엉엉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시뻘겋게 달궈진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소화까지 돼서 위와 간에 퍼져 버린 독정을 강제로 역류시켜서 입으로 빼냈으니, 아마 지금쯤 내장과 식도가 뜨거운 것에 덴 것처럼 화끈화끈할 것이다.

장기린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괜찮소?”

“커허…… 크허어…….”

중년인은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배를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른다. 잔뜩 찌푸린 얼굴엔 괴로움이 역력했다.

‘아프긴 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몸은 확실히 살아났으니, 일단 환기부터 시켜야겠군.’

장기린은 말없이 몸을 돌려 방문을 열었다. 시원한 공기와 함께 따스한 햇살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철컥.

“객주님!!”

문을 열자마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휘연이 달려와 갑자기 허리를 덥석 껴안는다.

허리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

장기린은 당황해서 물었다.

“왜 이래?”

“다행이에요. 멀쩡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설마 객주님도 독에 당하는 건 아닐까 하고…….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휘연의 목소리엔 촉촉한 물기마저 서려 있었다.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걸 어떻게 해요?”

“난 괜찮을 때만 괜찮다고 해.”

휘연은 휙 고개를 들더니, 어디 다친 데 없나 확인하는 것처럼 장기린의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순간 장기린은 또 한 번 당황했지만, 그래도 얼굴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 좋아서 가만히 있었다.

휘연은 마치 물건을 사는 새색시처럼 꼼꼼하게 얼굴을 살피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 발짝 떨어졌다.

“다행이네요. 정말 괜찮은 것 같아요.”

“……괜찮다니까.”

“네. 앞으론 믿을게요. 그런데 임 목장님은요? 살아나신 거예요?”

휘연은 조심스레 방 안을 살펴보려고 고개를 내밀었다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피범벅……!”

휘연은 얼굴이 창백해졌으나,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꽤 대단한 강단이다. 지금 방 안은 핏물과 토사물로 가득해서, 웬만한 여인이라면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휘연은 그 안으로 들어가더니, 방 한구석에서 끙끙거리는 임 목장을 부축해서 일으키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휘연의 노란색 경장에 핏물과 오물이 묻었음에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임 목장님! 괜찮아요? 정신이 좀 드세요?”

“으윽…… 끄윽…….”

“정신 좀 차리세요! 아, 안 되겠네요. 일단 물가에 가 봐야겠어요.”

휘연이 임 목장의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평생 목공 일을 하며 살아온 체격 좋은 목수를 부축하기엔 휘연의 팔 힘이 너무 약했다.

장기린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 대신 임 목장을 부축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이미 이 사람 목숨은 살렸다.”

“네? 하지만 그래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지만…… 아니, 됐다. 일단 물가에 데려가는 것까지는 도와주지.”

이해가 안 되는지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하는 휘연.

장기린은 그런 그녀에게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일단 임 목장이라 불리는 중년인을 어깨에 들쳐 업고 밖으로 나갔다.

“어엇……!”

“이, 임 형님?!”

피투성이가 된 임 목장을 어깨에 얹어서 나오자, 들어올 때는 눈길도 주지 않던 목공들이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주변을 포위하듯이 둥그렇게 둘러쌌다. 흥분해서 숨을 씨근거리고, 적대적인 눈빛으로 노려보는 것이, 임 목장을 이렇게 만든 게 장기린과 휘연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당신! 임 형님께 무슨 짓을 했어!”

잘 단련된 근육을 불끈거리면서 말하는 것이 제법 위협적이다.

장기린은 그런 그들을 마주 노려봐 주며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건, 이 사람이오.”

“뭐……?”

“여기서 물이 있는 곳이 어디에 있소?”

눈에 힘을 주고 묻자, 처음엔 강하게 나오려던 목공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동쪽에…… 우물이 하나 있소.”

“알겠소.”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몸을 돌려 우물을 향해 걸어갔다.

휘연은 옆에서 왼쪽 소매를 붙잡은 채다.

주변에 있던 목공들은 장기린이 워낙 당당하게 걸어가자 뭔가에 홀린 것처럼 우물쭈물하면서도 우물가로 따라왔다.

촤악!

“큽, 으푸푸……!”

차가운 물을 한 바가지 얼굴에 쏟아붓자, 눈을 감고 끙끙거리기만 하던 임 목장이 눈을 부릅뜨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다가,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내가…… 살아 있어……?”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한 모습.

장기린은 우물물을 한 바가지 더 떠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마시시오.”

“……자네는?”

“당신을 살려 준 자라고 해 두지.”

임 목장은 뭔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막상 시원한 물이 눈앞에 있자 갈증이 나는지 허겁지겁 물을 들이켰다.

‘속이 뜨겁겠지.’

내장이 다 뒤집어진 듯한 느낌이었을 거다. 시원한 물이 그에게는 가뭄의 단비처럼 절실했을 것이 당연했다.

“푸하―! 사, 살 것 같다!”

임 목장은 물을 다 마시고 기쁘게 외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얼굴빛이 침울해졌다.

“……아니, 기뻐할 일이 아니었군.”

그는 텅 비어 버린 우물 바가지를 바닥에 ‘쿵’하고 떨어뜨린 뒤 멍하니 중얼거렸다.

근처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목공들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임 형님!”

“임 사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왜 피투성이가 되셨어요!”

“이젠 괜찮은 겁니까? 멀쩡한 거예요?”

웅성거리며 묻는 목공들의 질문엔 진심 어린 걱정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임 목장은 그것이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슬프고 아픈 듯 인상이 점점 찌푸려져 갔다.

“그만! 그만하게! 나는 멀쩡해! 자네들이 걱정할 이유도 없어!”

“임 형……?”

“그만 돌아가게! 이럴 시간이 어디에 있나! 지금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왜 이런 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

임 목장이 추궁하자, 주변의 목공들이 모두 당황해 버렸다.

“이, 임 형님. 우린 형님이 걱정돼서…….”

“누가 걱정하라고 하던가! 난 걱정할 필요 없는 놈이야! 너희가 걱정은커녕 신경 쓸 가치도 없단 말이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지금 임 목장이라는 사람은 평상시와 매우 다른 모양이었다.

주변의 목공들이 상처받은 듯한 얼굴로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장 등을 돌려 떠나지는 않으니, 임 목장이라는 사람이 평소에 얼마나 많은 신뢰를 쌓아 놓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잠깐.”

장기린은 입을 열어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 뒤,

“이야기를 좀 하고 싶소.”

정확하게 임 목장을 지목해 대화를 신청했다.

“……나를 말이오?”

“그렇소.”

“혹시, 저 소저가 어제 했던 말 때문이라면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게 좋을 거요. 난 그 일을 맡을 수 없소.”

임 목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장기린은 옆에 서 있던 휘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휘연.”

“네?”

“우리에게 필요한 조건을 알려 줘.”

“지, 지금요?”

휘연은 당황한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그래, 지금.”

“하지만…….”

“어차피 무슨 일이든 안 할 생각이 십 할인 사람이다. 일단 조건부터 말해 줘.”

잠시 고민하던 휘연은, 이내 장기린의 생각을 무조건 믿기로 했는지 영리한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임 목장을 향해, 사심 없이 철저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풍운객잔의 수리 및 개장 건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부탁드릴 것은 풍운객잔의 정면이며, 반(半) 대나무를 현재의 정면 벽 겉에 덮고, 그 위로 담쟁이덩굴을 생장시키는 방식으로 풍운객잔의 정면을 장식할까 합니다. 보수는 은자 서른 냥 이내에서 드릴 수 있으며, 재료비는 별도로 지급합니다. 그 외에, 장인으로서의 요구와 그 요구에 드는 비용은 협의하에 진행합니다. 하지만 웬만하면 임 목장님의 의견에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신가요?”

뭔가를 보고 읽는 것도 아닌데, 마치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매끈했다. 언제나 준비된 계산 능력. 그것이 휘연의 장점이다.

임 목장은 장소가 ‘풍운객잔’이라는 점에서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평소의 침울한 얼굴로 돌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의 일이라도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소. 생명의 은인께는 죄송하게 되었으나, 나는 현재 은혜를 갚을 만한 사정이 아니오.”

“즉, 갚고는 싶은데 갚을 만한 사정이 아니다?”

“그렇소”

“그렇다면 그 사정을 바꾸면 되겠지. 그럼 질문도 바꾸겠소. 당신이 죽을 뻔한 이유는 무엇이오? 어째서 방 안에서 스스로 술을 자작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소?”

임 목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주변에 서 있던 목공들을 향했다.

“……나도 알 수 없소. 속이 좀 상하는 일이 있어서 술을 먹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뿐이오.”

장기린은 변명하듯 말하는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방법을 묻는 것이 아니오. 그건 다 알고 있으니까. 내가 궁금한 건 ‘왜’ 그랬냐는 것뿐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독버섯을 먹게 된 이유가 알고 싶다는 말이오. 임 목장이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리라 믿소만.”

잠시 붉으락푸르락하던 임 목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옆에 서 있던 목공들이 놀라서 물었다.

“임 형님……?”

“독버섯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설마 그놈들이 독살이라도 노린 겁니까?”

“내 이 자식들을 그냥……!”

대번에 주변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임 목장이 다급하게 그들을 말렸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진정들 하게.”

“예……?”

“내가 나중에 설명하지. 일단 기다려 주게.”

임 목장은 다시 장기린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방금 한 그 말은……?”

“이유 말이오. ‘이유’를 가르쳐 주시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더 필요 없소.”

“…….”

“아니면 뭐요? 내가 이 자리에서 말을 해야겠소?”

장기린은 비밀을 지켜 주고 있었다.

주변에 서 있던 목공들은 물론이고, 옆에 있는 휘연마저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며 물어 왔지만, 그 누구에게도 먼저 지금 상황이 된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넌지시 말하자, 결국 임 목장도 항복의 백기를 들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포연.”

“예, 예?! 형님?”

“잠시 물러나 다오.”

“형님……?”

“여기 이분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다.”

포연이라 불린 사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불편한 표정을 지었으나, 결국 임 목장의 뜻을 어기지 못하고 주변의 목공들과 함께 원래 일을 하던 광장 쪽으로 물러났다.

이제 단 세 사람만 남은 우물터.

장기린은 아직 영문을 모르는 휘연과 어두운 얼굴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임 목장을 지그시 쳐다봤다.

“왜 그랬소?”

장기린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이오?”

“일을 빨리 끝내고 싶다면 솔직하게 대답해 주는 것이 좋소. 왜 그런 결정을 내렸소?”

“…….”

“어째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냔 말이오. 술에 독버섯을 섞어서 마신 것. 그건 당신 자신이잖소?”

날카로운 지적.

정곡을 찔린 임 목장의 고개가 아래쪽으로 푹 숙여진다.

“네에?! 뭐, 뭐라고요?”

휘연은 너무나 놀라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째서요? 어째서 그런 결정을 하신 거예요? 임 목장님?”

“……당신들은 모르오. 이 마을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리고 어째서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 수밖에 없었는지.”

임 목장은 그렇게 말하며, 장기린과 휘연을 앞에 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한과 울분을 담아서 빠진 부분 없이 꼼꼼히 이야기했다.

“때는 반년 전…… 청풍객잔에서 식탁을 만드는 일을 맡은 것이 잘못이었소.”

임 목장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단순했다.

청풍객잔에서 임가촌에 식탁을 의뢰했다.

임가촌 목공들은 그 주문에 기뻐했다. 고급 원목을 사용한 통짜배기 식탁이고, 손이 많이 가는 만큼 가격도 턱이 빠질 정도로 높게 쳐주니 기분 좋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를 처리하니, 청풍객잔에선 또 다른 하나를 의뢰했다.

그다음 것.

또 그다음 것.

계속해서 의뢰가 날아오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의뢰비도 두둑하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풍객잔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시커먼 장포로 얼굴까지 덮어 버린 사내는, 커다란 철목을 하나 끌고 와 이곳에 구멍을 뚫어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마치 구슬에 실을 꿰듯, 두꺼운 밧줄로 원목을 통째로 통과할 정도면 된다고.

가능하면 끝 부분을 뾰족하게 깎아 두라는 말까지 하며, 그는 선금으로 무려 금 오십 냥을 내밀었다.

임 목장이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철목은 그야말로 신외지물.

어린 오동나무의 씨앗이 철광석이 나는 광맥의 중심부에 싹을 틔어 철기(鐵氣)를 빨아들이며 성장한다. 그렇게 백 년이 넘게 자라나서 거목이 되면, 그것은 평생 스스로를 단련한 목공이 오십 근짜리 도끼로 내리찍어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귀물(鬼物)이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철목은 목공들에겐 천년설삼만큼이나 귀한 물건이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목공들의 호승심을 자극하는 발칙한 물건이다.

그런 것에 바늘을 꼽듯 일직선의 구멍을 내라?

끝을 다듬어 뾰족하게 만들라?

……말도 안 되는 소리.

인간인 이상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도끼로 내리찍으면 도끼날이 깨지고, 불에 달궈도 끄떡없는데, 대체 그런 것을 어떻게 다듬는단 말인가?

임 목장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려 했으나, 시커먼 장포의 사내는 막무가내였다.

이미 금자 오십 냥을 지불했으니, 계약을 파기하고 싶으면 그 두 배인 백 냥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지금껏 원목 식탁에 지불한 돈을 다 토해 놓으라고 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냐며 항변하자, 반년 안에 결정하고 해결 방법을 선택하라고 했다.

철목에 구멍을 뚫을 것이냐, 아니면 마을에 있는 목공 모두가 책임을 지고 청풍객잔의 아래로 들어갈 것이냐.

속이 훤히 보이는 계략이었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 임가촌을 장악해 버리려는 청풍객잔의 마음속이 훤히 보였지만…… 힘없는 그들에겐 그에 대항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

마침내 그들과 약속한 시한이 바로 이틀 뒤로 다가왔다.

그동안 별의별 방법을 다 써 봤으나 모조리 실패한 임 목장은 결국 극단적인 생각에 이르게 된다.

자신이 못난 탓이다. 자신의 잘못을, 자신을 믿고 따라 준 다른 목공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킬 수는 없었다.

이걸로 끝내야 한다.

황금 오십 냥도.

그 배가 넘는 위약금도.

못난 목숨 하나로 모든 것을 묻어 버려야 한다.

자주 가던 버섯 서식지에 가서 큼지막한 광대버섯을 따왔다. 그리고 독한 술에 섞어 단번에 들이켰다.

그것이, 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철목?”

“평범한 사람은 겉에 흠집조차 낼 수 없는 괴이한 물건이오. 새싹 때부터 철 가루를 먹고 자라서 그 강도와 유연성만큼은 천하제일이지.”

“…….”

“이럴 때가 아니오. 지금이라도 목숨을 내놓고, 이 일을 끝내야겠소.”

임 목장은 당장이라도 다시 그 광대버섯 술을 마시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앉으시오.”

툭.

“어엇……?”

장기린이 어깨에 살짝 손을 대자마자, 온몸에 힘이 빠져서 주저앉아 버린 임 목장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야기는 알겠소. 하지만 당신이 자결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소.”

“하, 하지만 그 이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소!”

“당신이 죽는다고 해서 저들이 포기할 것 같은가? 아마, 오히려 임가촌의 목공들이 청풍객잔 밑으로 들어가는 것만 더 빨라질 테지. 그리고…… 결국 이건, 철목에 구멍을 뚫는 것이 문제라는 것 아니오?”

“……그렇긴 하오만.”

“철목 문제만 해결되면 우리 객잔 일도 해 줄 수 있는 거고. 맞소?”

“마, 맞소.”

임 목장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장기린은 그럼 됐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시오.”

“……안내라니, 설마……?”

“철목으로 안내하시오. 내가 구멍을 뚫어 주겠소.”

임 목장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옆에 있던 휘연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얼굴이다.

“철목은…… 강철과 똑같은 강도를 가지고 있소. 알고는 있는 거요? 당신이 지금 한 말은 아름드리만 한 강철 덩어리에 구멍을 뚫어 놓겠다는 것과 같단 말이오.”

임 목장은 재차 조심스레 물었다.

“알고 있소.”

“그런데 어떻게?”

“강철을 꿰뚫는 것엔 익숙하오. 여기서 설명을 하긴 그러니, 일단 안내부터 해 주시오.”

“……!”

이쪽이 워낙 당당하니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임 목장은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입을 쩍 벌린 채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저기, 객주님.”

“음?”

“정말로 철목에 구멍을 뚫으실 수 있어요? 철목은 강철과 같은…… 아니, 어떤 면에서는 강철보다도 강하다고 소문난 귀물이라고요.”

임 목장의 뒤를 따라가는 길에 휘연이 옆에 다가와서 물었다.

“아마도.”

“……아마도, 뚫을 수 있다구요?”

“내 생각과 같다면. 가능해. 그런데 쇠로 된 막대나 창 같은 게 있어야 할 텐데…….”

“……!”

무기가 있어야 강철도 뚫을 수 있다.

그런데 휘연은 그 말만으로도 놀라운 듯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객주님은…… 정말로 알아도 알아도 끝이 없는 사람이네요.”

“무슨 뜻이야?”

“아뇨. 아니에요. 저는 그냥…… 객주님을 믿을 게요.”

휘연은 배시시 웃으며 다시 소맷자락을 붙잡고 걷는다.

영문을 모르는 장기린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걷고 있었다.

임 목장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피투성이가 된 방을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쳐다본 뒤, 뒤뜰에 놓인 꽤나 커다란 마당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아, 이게……!”

휘연이 옆에서 탄성을 내뱉는다.

“이것이 그가 가져온 철목이오.”

장기린은 눈에 들어오는 그 커다란 물체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높이는 이 장. 둘레는 장정 두 명이 한껏 손을 뻗어 맞잡을 정도로 두꺼웠다.

몸체는 진짜 철광석처럼 온통 거무튀튀하고 윤기가 흘렀는데, 척 봐도 보통 사람은 흠집조차 내지 못할 만큼 튼튼하고 강해 보였다.

가까이 가서 손으로 툭툭 두드려 보자, 둔중하면서도 맑은소리가 ‘퉁― 퉁―’ 울렸다. 소리가 맑다는 것은 겉과 속의 재질이 모두 같다는 뜻이었다.

“어떻소? 할 수 있겠소? 강철에 구멍 뚫는 것은 익숙하다고 했잖소?”

임 목장의 말투엔 비웃음이 실려 있었다. 그는 장기린의 말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할 수 있소.”

“……뭐, 뭐요?”

“다만, 쇠로 된 막대나 창이 있었으면 하는데, 갖고 있소?”

임 목장은 당황한 얼굴로 장기린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것이 거짓인가, 진실인가, 판별하려는 눈처럼 보였다.

최근 활검을 익히면서 눈빛의 살기가 많이 누그러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목공치고는 대단한 담력이었다.

“죽을 각오를 했다고 해서, 놀림을 당하는 것까지 참진 못하오.”

“나는 그쪽을 놀릴 만한 이유가 없소.”

“…….”

“…….”

이쪽의 눈빛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임 목장은 이내 마당의 한구석으로 가서 일 장 길이의 강철 막대를 가지고 왔다.

“구멍을 뚫는 데 쓰려던 강철 창이오.”

“흐음…….”

“내가 잘 아는 철장(鐵匠)에게 부탁해서 받은 거요. 화려하진 않지만 기능성은 최대한 살렸다고 들었소.”

장기린은 손에 들어온 창을 그리운 얼굴로 이리저리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군. 제법 좋은 창이오. 창대가 곧고, 창날에도 휘거나 끊긴 부분이 없소. 일류의 도공이 만든 창이군.”

“……창을 볼 줄 아시오?”

“그렇소.”

장기린은 창끝을 잡고 하늘을 향해 곧게 세운 뒤,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창대를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부우웅―!

“……!”

창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세가 달라진다.

손에 닿는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

그 무엇보다도 든든한 싸움의 동반자.

긴 몸체에서 나오는 무게감과 그 끝에 달린 창날의 날카로운 예기.

“후우우…….”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낮고, 가늘게.

그러면서도 언제든 뿜어낼 수 있는 호흡을 몸 안에 가두며.

양손으로 창대를 잡고 자세를 낮춘 뒤, 시선은 철목을 향한 채로 물었다.

“구멍은 어디에 뚫으면 되는 거요?”

“……매, 맨위에서 일 척. 중심부에 뚫어야 하오.”

“알겠소. 귀를 조심하시오. 휘연, 너도 귀를 막고 있어.”

대답이 들린 것 같았지만, 듣지 못했다.

장기린의 온신경은 철목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지금 꿰뚫어야 할 적.

그 적을 해석하고, 분석하고, 약점을 찾아낸다.

거무튀튀하고 윤기가 흐르는 철목.

위쪽에서 일 척만큼 내려온 곳의 중심이 심장이다.

그곳을 꿰뚫어야만 싸움이 끝난다.

‘찾았다.’

철목의 결이 눈에 보인다.

모든 것엔 결이 있다. 흐르는 물살에도, 빳빳한 종이에도, 심지어 단단한 바위에도 그 몸체를 구성하는 미세한 결이 존재한다. 이 세상에 완전무결하게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은 없다. 처마에 얼어붙은 고드름을 손으로 툭 치면 쉽게 지붕과 분리되듯이, 모든 것은 ‘붙어’ 있을 뿐이다.

마치 황금의 선이 그어진 듯, 한눈에 들어오는 철목의 결.

“눈을 떠라.”

아직까지 한 번도 제대로 사용되어 본 적이 없는 순결한 창에게 명했다.

우우웅―!

대답을 하듯 미세하게 떨리는 철창.

그 순간, 망설이지 않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하아앗―!”

공중으로 떠오르는 몸.

꼿꼿하게 세운 허리.

이 장에서 일 척만큼 떨어진 높이.

창대를 허리에 붙이고 왼손은 앞으로 뻗은 채로 나아가야 할 길을 조준한다.

그리고, 허리를 휙 돌리며, 전력을 다해 손에 들린 창을 앞으로 쏘아 낸다.

까아아아아아아앙―!

천지가 뒤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손에 들린 창날이 철목의 중심부를 관통했다.

푹!하고 박히는 느낌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창날은 확실하게 반대편 끝까지 뚫고 나갔다.

“후우웃……!”

‘꿰뚫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창을 다시 당겨 빼며 발로 철목의 몸을 박찬다.

까드드득―!

뭔가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창으로 뚫고 들어갔던 곳의 구멍이 강제로 넓혀지며 일정한 굵기의 구멍이 뚫렸다.

바닥에 다시 내려서자, 주변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동그랗게 뜬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휘연.

귀를 막으라는 말을 믿지 않았는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경악한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임 목장.

“저, 정말 구멍을 뚫다니……!”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철목과 장기린을 번갈아서 계속 쳐다봤다.

우르르―!

“뭐, 뭐야?”

“무슨 일이야?”

그리고 그 굉음을 들었는지 어느새 몰려든 임가촌의 목공들이 소리를 질렀다.

“우악! 철목에 구멍이 뚫렸다!”

“처, 철목에 구멍이 뚫리다니!”

“어, 어떻게? 무림 고수도 불가능하다고 했던 것 아닌가? 어떻게 저기에 구멍이……?!”

모두의 시선이 천천히 장기린을 향한다.

장기린은 뜨겁게 달궈져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철창을 땅에 툭툭 두드린 뒤, 여전히 철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멍은 뚫었고, 이젠 끝을 뾰족하게 하는 건가?”

장기린은 임 목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임 목장은 그 시선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임 목장. 끝을 뾰족하게 한다는 건, 저 구멍 위를 비스듬하게 깎아 내면 되는 거요?”

“그, 그렇소.”

“음, 알겠소.”

장기린의 눈이 다시 철목을 향한다.

분석하고, 해석하고, 결을 찾아내고.

“하앗―!”

다시 공중에 떠오른 장기린.

그리고,

까아아아아아앙―!

거친 굉음과 함께, ‘서걱―’ 뭔가가 잘려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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