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二章 ― 남궁풍운(南宮風雲)
나이 스물.
이제 막 약관을 지나 한창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해 열정이 들끓는 뜨거운 나이가 아니던가.
항주 금선로에서 그 들끓는 열정으로 유명해 열화남(烈火男)이라고도 불리는 남궁휴(南宮烋)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리고 있었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겠지만, 그는 남궁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다.
대(大)남궁세가(南宮世家).
그 이름은 강호 무림은 물론이고 대륙 전역을 위진시키는 유명한 무림의 강호로서, 특히 하남 쪽의 안휘와 합비 지방에서는 거의 일국의 왕이나 다름없는 위세를 가진 명문 중의 명문 세가이다.
금력(金力), 병력(兵力), 위명의 성세(成歲).
어느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남 지역의 모든 위정자들은 남궁세가를 상전 모시듯 대우해 주며, 지방 상권의 거부들과 무파(武派)들은 안휘 지방에서만큼은 남궁세가에 깊이 복종한다.
남궁휴는 그런 곳의 장남이다.
장남, 즉 일공자.
차기 남궁세가를 이을 자격이 주어지는 후계자로서의 서열 일 위.
하나 그러면 무엇을 하는가?
대협객이신 아버지는 그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가문 안에서 그는 내놓은 자식이자, 도저히 갱생이 불가능한 망나니였다. 남궁의 이름값 따위 남궁휴에겐 술값 외상을 할 때 도움이 되는 담보 정도밖엔 안 되는 가치다.
하지만 대역 죄인이라도 다 이유는 있는 법이라고.
남궁휴에게도 이렇게 된 이유가 다 있다.
그는 첩실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창천대협(蒼天大俠) 남궁무원의 첩실인 백 부인의 아들이 바로 남궁휴였다. 워낙 몸이 약했던 백 부인은 남궁휴를 낳고, 그다음 해에 여동생인 남궁연을 낳은 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저승길로 떠나 버렸다.
그리고 그 다다음해.
본처인 이화 부인으로부터 남궁휴와 세 살 터울의 동생인 남궁혁이 태어난다.
여기까진 좋았다. 남궁휴와 남궁연이 첩실의 자식이라고는 하나, 이미 질투해야 할 모친이 죽은 뒤였기에 이화 부인도 그들을 친자식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섭섭지 않을 만큼 자식 대우를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란의 씨앗은 아버지였다.
과거 삼국시대에 대협이라 불렸던 유비가 조조에게 쫓길 때, 부인과 자식 들은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버렸으면서, 장익덕, 조자룡 같은 수하들은 제몸처럼 아끼고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말하자면 대인배(大人盃).
평범한 사람으로선 감히 측량할 수도, 따라 할 수도 없는 거대한 그릇.
그것은 멀리서 보면 동경하게 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너무나 상식 밖의 모습에 무섭고 두려움마저 느끼게 되어 버린다.
그런데 하필이면 강호 무림에서 대협으로 칭송받는 그의 아버지 남궁무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남궁휴가 열세 살이 되던 해.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모두가 나의 자식. 나의 피를 이은 아이인데, 적자와 서자라는 것은 불필요한 구분일 뿐이오. 나는 휴아를 우리 남궁세가의 장자로 대할 것이며, 앞으로 남궁세가의 후계자는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뽑게 될 것이오. 가신 여러분은 부디 협의에 걸맞는 소신 있는 선택을 해 주시기 바라오.”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대인배이자 대협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그 말에 의해, 남궁휴와 동생 남궁연의 인생은 지금까지와 정반대로 뒤집어져 버렸다.
아무리 자식 대우를 해 주던 이화 부인이라고는 하나, 친자식이 아닌 첩실의 자식이 남궁세가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다는데 담담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남궁휴와 남궁연 두 사람에게 냉랭하게 대했고, 그것은 남궁휴가 무공에 제법 자질을 보이기 시작하자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세가 내에서 발붙일 곳이 없어져 버렸다.
애초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가문이라 할 만한 곳이 없는 분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기대기엔, 남궁무원이란 사람은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가정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대로 이화 부인은 현재 안휘 도지휘사를 맡고 있는 명문 이가장(李家莊) 출신의 아가씨.
게다가 그녀의 아들 남궁혁은 명문의 피를 이은 적자이며, 아직 열 살 남짓이라곤 하나 영특하여 그 자질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누가 봐도 가신들의 선택은 명백하다.
무게 추는 선명하게 기울었다.
세가 내의 가신들은 모두 이화 부인과 이공자 남궁혁을 대우해 주었다.
딸인 남궁연에게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경쟁 상대나 다름없는 일공자 남궁휴에겐 얼굴을 맞대기가 무섭게 찬바람이 불 만큼 차갑게 대했다.
아마, 그걸 이겨 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대협이라는 그릇.
한 시대를 제패할 인물이 되려면 그런 시련 따위 웃으면서 넘기고, 내실을 다지는 데 신경을 써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휴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딱히 남궁세가를 가지겠다는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남궁세가로 천하를 제패하겠다거나 하는 포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대의 제패?
그런 것을 해서 뭐하는가?
그저 귀찮고 힘겨웠다.
휴(烋)라는 이름처럼, 그저 뽐내고, 기쁘고,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 탓이다.
차라리 적자인 남궁혁을 후계자로 하겠다고 말했으면 편했을 것을. 서자로서 차별을 하고, 편애를 했다면, 마음이 편했을 것을. 괜한 기회를 열어서 그를 점점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게 무겁고 힘겨웠다.
그는 필사적으로 이 무거운 짐을 회피할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기대를 배신할 수는 없었기에 무공만은 놓지 못했다.
나이 열 다섯이 되었을 때.
이화 부인이 동생 남궁연을 시집보낼 의사를 비쳤다.
그때 연의 나이가 불과 열넷.
아무리 조혼(早婚)이 가능한 게 명문의 법도라지만, 말도 안 되게 이른 나이다.
남궁휴는 알 수 있었다. 그건 경고였다. 이 이상 그녀의 앞길을, 아니 남궁혁의 앞길을 막는다면 동생과 너를 모두 파멸시켜 주겠다는 섬뜩한 경고였다.
그때 남궁휴는 열 살 이후로 단 하루도 놓지 않았던 검을 손에서 놓았다.
처음으로 기루를 출입했다. 숙부인 남궁무회의 안내였는데, 지금 그 숙부가 이화 부인의 심복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다분히 계획적인 소개였던 것 같다.
거기서 여자를 알게 되었고, 화류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거기에 미쳐서 검을 놓았다.
무공은 뒷전이었다.
기루, 술, 여자.
그러다가 도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박엔 여러 종류가 있다.
투계(鬪鷄), 투견(鬪犬), 그리고 제법 실력 있는 낭인들로 만드는 지하투기장(地下鬪技場).
그곳은 완전한 별세계였다.
삶이 있고, 뜨거웠으며, 어떠한 부담감도 날아가 버리는 마력이 있었다.
동전 한 문을 걸어 은자 몇 십 냥을 딸 수도 있는 게 도박이고, 판돈을 올려서 은자를 걸면, 금자 몇 십 냥을 딸 수도 있는 게 또한 도박이다.
돈 따윈 걱정하지 않았다.
이름뿐이라고는 해도 그는 남궁세가의 일공자.
소국의 왕자와 같은 신분이다.
처음엔 도련님의 용돈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액수가 높아졌다. 돈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어쩐지 돈을 잃을수록, 어깨 위에 얹혀 있던 무거운 짐도 함께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착각이었지만.
나중엔 그 액수가 총관에게 융통할 수 있는 액수를 훨씬 넘어 버려서, 이름값을 팔아 뒷골목 방파의 고리대(高利貸)를 통해 돈을 빌렸다.
날이 갈수록 빚이 쌓이고, 그렇게 빚이 쌓이면 또 다른 빚으로 그 빚을 갚았다.
그렇게 오 년을 살았다.
고리대의 빚은 처음의 몇 십 배로 불어나 있었다. 집안에서는 더 이상 그에게 돈을 빌려 주지도, 가족으로서 찾는 사람도 없었다. 더 이상 그를 남궁세가 일공자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열화남(烈火男).
도박에 대한 열정 하나로 모든 것을 태워 버린, 자신을 조롱하듯 부르는 이름이다.
“거기 서! 제길, 저 자식 잡아!”
“거기 서지 못해! 야, 임마!”
우당탕!
골목의 노점상을 모조리 박살 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우락부락한 덩치들이 집요하게 뒤를 쫓아왔다.
황급히 옆으로 비켜서는 행인들. 난장판이 되는 금선로.
남궁휴는 골목에 들어가는 척하다가 몰래 근처에 세워져 있던 마차 밑에 기어들어 간 채로 도망칠 기회를 엿보았다.
“후우…… 후우…… 젠장! 집요한 자식들!”
남궁휴의 얼굴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명색이 남궁세가에서 일류 무공을 익힌 자가 파락호들에게 맞고 다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정말로 모르는 소리다.
시골 변두리의 파락호라면 모를까.
이곳 항주의 파락호들은 ‘파락호’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대단한 자들이 수두룩했다.
일류 살수 출신, 대방파의 파문 제자 출신, 추살령을 받은 죄인 출신.
한순간의 실수로 인생을 망쳐 버린 자들이 몸을 의탁하는 곳이 바로 어둠의 세계인데, 그들 중에서 제일 위험한 놈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항주 파락호들의 세계인 것이다.
처음엔 남궁휴도 대들었었다. ‘지들이 그래 봤자 파락호지!’라는 생각으로 고리대를 빌린 자들의 본거지에 가서 배 째라는 식으로 난동을 피웠었다.
그 결과?
죽을 뻔했다.
그날 죽지 않은 것은 단지 그가 남궁이라는 성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통틀어서, 그날만큼 그 성씨가 고맙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갔나……?’
남궁휴는 숨을 죽이고 있다가, 파락호들의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조심스레 마차 밖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저기 있다!”
‘젠장……!’
남궁휴는 곧바로 구르듯이 빠져나와 미친 듯이 앞으로 내달렸다. 등 뒤를 쫓아오는 기세가 무시무시하다.
쫓아오는 파락호들의 간부가 그랬다.
이번에야말로 잡히면 몸을 팔아 빚을 갚던가, 아니면 그냥 죽으라고.
“썅! 그렇게 쉽게 죽을 줄 아나…….”
남궁휴는 골목의 노점상을 뒤엎고, 근처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방패 삼아 요리조리 도망쳤다.
어릴 적에 종아리 맞아 가면서 배운 천리호정(千里戶庭) 신법이 이럴 때는 정말 요긴하다.
그는 폴짝폴짝 뛰어다니면서 눈으로는 필사적으로 그가 숨어들 곳을 찾았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어야 돼. 뛰어다니는 걸론 이 녀석들을 못 떼어 내.’
벌써 이 바닥에서 오 년이다.
이대로 있으면 잡힌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여긴 어디……? 젠장! 금선남로네. 어디로 가야 하지? 청풍객잔? 운중루? 아냐, 거긴 다 나를 알잖아. 이 문제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잡아다가 넘겨줄 테지. 파락호들이 있는 객잔은 안 돼. 젠장! 어디로 가야……?’
고민하던 남궁휴의 눈에 허름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평소엔 눈길도 주지 않던 곳이, 지금은 중생을 구제하러 이 땅에 강림하신 관음보살처럼 환한 후광을 내뿜고 있었다.
남궁휴는 보자마자 알았다.
여기다. 여기가 바로 그가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풍운객잔……!”
금선로에서 제일 허름한 객잔.
객잔 벽 하나 새로 세울 돈이 없는 곳.
그리고 금선로에서 유일하게 뒷배를 봐주는 파락호가 없는 곳.
‘여기라면 쫓겨나지 않아.’
사나이 열화남.
파락호들만 아니면 어디 가서 꿀릴 것 없는 놈이다.
남궁휴는 쫓아오는 파락호들과의 거리를 확인한 뒤, 옆에 있던 사과 장수의 수레를 냅다 뒤엎어 버렸다.
우당탕!
“이, 이게 무슨……!”
“신세 좀 집시다!”
남궁휴는 어이가 없어서 굳어 버린 사과 장수의 어깨를 툭 쳐 준 뒤, 옆에 있는 골목으로 몸을 날렸다.
한쪽을 소란스럽게 만든 뒤, 재빨리 빠져 버린 것이다.
“이, 이, 쳐 죽일 노옴―!”
“쫓아! 잡아!”
“넓게 돌아가!”
멀리서 욕을 내뱉는 사과 장수의 목소리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파락호들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려왔다.
남궁휴는 뒷골목을 한 바퀴 빙 돌아서 다시 풍운객잔 앞으로 돌아왔다.
주변을 몰래 살펴보니 파락호들은 흩어져서 그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지금……!’
잠시 파락호들의 시선이 분산된 것이 기회였다.
곧바로 풍운객잔의 입구를 향해 돌진하는데, 그의 몸에 뭔가 가녀린 것이 툭하고 부딪쳤다.
“꺅!”
짧고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
남궁휴는 그 비명을 들은 뒤에야 알았다. 노란색 경장을 입은 여인이 그의 어깨에 부딪쳐 옆으로 넘어진 것이다.
“젠장, 왜 거기에 서 있어?”
마음속으론 미안해했지만, 입에선 지난 오 년간 습관처럼 붙은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게다가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 못한 상황.
남궁휴는 나직하게 윽박지르며 가던 길을 가려고 했으나, 어느새 사태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여인이 넘어지며 옆에 있던 사다리를 툭 쳐 버렸고, 툭 건드린 사다리는 꼭대기에 올라서서 객잔 벽을 보수하고 있던 사람과 함께 옆으로 넘어져 버린 것이다.
“우아아아아―?!”
우당탕!
사다리에 올라가 있던 중년의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꽈당!’하는 소리와 함께 중년의 사내가 끙끙거리며 자신의 팔을 붙잡았다. 다행히 그리 높지 않은 사다리였음에도 충격이 상당해 보였다.
‘젠장, 허약하긴. 이 낡아 빠진 객잔이 드디어 벽을 새로 갈아엎나? 근데, 왜 하필 지금하고 난리야. 난리가!’
남궁휴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만한 소동이 시선을 끌지 않을 리가 없다. 주변에 있던 행인들의 눈이 다 이곳으로 몰린다. 졸지에 관심이 집중된 풍운객잔.
그 말인즉, 파락호들의 눈도 이쪽으로 향한다.
“저, 저……!”
그중 안면이 있는 파락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남궁휴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풍운객잔 안으로 뛰어들었다.
잡히면 죽는다.
일단 냅다 뛰어야 한다.
뒤에서 “어이, 저곳은……!” 이라거나, “야, 어떡하지……?”라는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가 후문으로 내달렸다.
“자, 잠깐만 손님……!”
“그리로 가시면 안 돼요―!”
자그마한 그림자 두 개가 다급하게 앞으로 뛰어들었으나, 그건 마차 앞으로 갑자기 개구리가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엇……!”
오히려 놀란 건 남궁휴다.
남궁휴는 황급히 발을 멈추려고 했으나, 이미 그의 몸에 부딪친 두 아이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뒤였다.
우당탕!
“악!”
“윽!”
엉덩방아를 찧은 두 아이가 신음을 흘렸다.
“아, 아야…….”
“으으…….”
단번에 집중되는 아이들의 원망스런 눈빛.
“저, 저기, 난…….”
순간적으로 사과를 할 뻔했으나, 남궁휴는 문득 드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고 오히려 가슴을 꼿꼿이 폈다.
자신에게 무슨 시간이 있다고 지금 여기서 사과를 하고 설득한단 말인가? 어차피 이 아이들의 눈엔 자신은 나쁜 놈이다.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것은 지난 오 년간의 화류계 생활로 잘 알고 있었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재수 없게! 빨리 비키지 못해?”
남궁휴는 목소리를 쫙 깔고 윽박지른 뒤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들을 지나쳐 가려고 했다.
성큼성큼.
자신이 지금 분노했다는 것을 보여 주며 다리를 움직이는데, 갑자기 가만히 있던 아이들이 그의 양쪽 다리를 덥석 붙잡았다.
“못 가요!”
“가면 안 돼요!”
‘이, 이것들이……!’
아이들의 야무진 손이 마치 잃어버린 엄마라도 찾은 것처럼 끈질기게 바짓단을 붙잡는다. 대단한 용기다.
남궁휴는 이대로는 바지가 내려갈 것 같아서 황급히 허리춤을 붙잡았다.
“야, 이거 못 놔?”
“못 놔요!”
“그리로는 가면 안 된다니까요!”
아이들은 결연하게 외치고 있었다.
남궁휴는 웅성거리는 바깥쪽의 공기와 그를 유혹하듯 반쯤 열려 있는 후문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비, 빌어먹을.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저리로 도망쳐야 내가 사는데!’
도대체 후문에 뭐가 있다고 이렇게 끈질기게 귀찮게 구냔 말이다.
남궁휴는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아이들을 강하게 밀쳐 버렸다.
“이거, 놔!”
꽈당!
“아……!”
“으윽……!”
아이들은 바닥에 넘어지면서 부딪쳤는지, 벌겋게 변한 이마를 붙잡고 울상을 지었다.
남궁휴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음에도 막상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이런……!”
양심이 찔린다. 애들이나 때리는 천하의 못난 놈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그래도 죽을 수는 없잖아?’
남궁휴는 ‘으득’하고 이를 악물었다.
“조, 조심하라고!”
경고인지 사과인지 모를 말을 더듬거리며 외친 뒤,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듯 후문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아이들도 그를 붙잡지 못했다.
“왠지 시끄러운데? 무슨 일…… 우왁!”
“비켜!”
“어엇! 다, 당신 누구…… 억!”
주방에서 나오던 젊은 청년 하나를 안으로 도로 밀어 넣어 버린 뒤, 남궁휴는 달리는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복도를 지나, 이제 후문 손잡이가 코앞이다.
‘자, 이제 뒤뜰로 가서, 담장을 넘고, 곧장 항주를 벗어나면 된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설마 아무리 대단한 놈들이라도 항주 밖에서는 못 찾겠지.’
남궁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득의양양하게 후문을 열었다.
그리고 급하게 한 걸음을 내딛는데…….
빡!
“억……!”
남궁휴는 정면으로 부딪친 코를 붙잡고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눈앞에서 별이 번쩍거렸다.
손을 들어 코를 감싸 쥐자 뜨끈한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뭐, 뭐야, 이거? 벽에 부딪힌 건가?’
의아해서 고개를 들어 보았다.
두 개의 다리. 튼튼한 어깨.
부딪히는 느낌이 너무 단단해서 벽에 부딪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사지 육신을 멀쩡히 가진 ‘사람’이었다.
“이런, 썅! 뭐하는…….”
본능적으로 내뱉은 욕지거리가 차츰차츰 줄어들다 마침내 땅으로 꺼질 것처럼 작아진다.
눈빛 때문이다.
후문 앞을 사천왕상처럼 당당하게 가로막은 한 사내의 눈빛은, 보자마자 어깨가 움츠러들고 간이 콩알만 해질 만큼 위협적이었다.
‘무, 무슨 놈의 눈빛이……!’
남궁휴의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나름대로 험하게 살아온 이십 년 인생.
특히 지난 오 년간은 살수니 파락호니 하는 별의별 종자를 다 만나 봤건만, 그중에서도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눈빛은 처음이었다.
맹수 앞에 선 토끼의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
남궁휴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숨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이럴 수록 지면 안 돼! 대차게 나가자! 대차게! 지가 어쩔 거야? 죽이기야 하겠어? 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남궁휴는 아랫배에 한껏 힘을 줬다.
“뭐, 뭘 꼬라 봐? 앙? 눈깔에 쇠 심지를 박았나, 왜 사람을 노려보고 지랄이야!”
“…….”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왜 대꾸를 안 해! 내가 누군지 알아? 앙? 철우 형님을 따르는 청월루 철우파 소속이란 말이야!”
남궁휴는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보아 온 대로라면, 파락호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할 경우, 객잔에선 웬만하면 싸우는 걸 피하고 좋게 좋게 해결하는 게 관례다.
파락호를 사칭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지만…… 어차피 잡히면 죽을 몸.
남궁휴는 이왕 사칭하는 거, 대차게 철우파의 일원이라 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계획이 최고였다.
“…….”
다행히도 눈앞의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허세가 통한 모양이었다.
‘좋아. 이제 빠져나가자.’
“내가 진짜, 바쁘지만 않아도 다 뒤집어엎는 건데. 캬악―. 퉤! 봐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 비켜! 나 나가야겠으니까!”
“…….”
“아 놔, 비키라고!!”
소리를 버럭 질러 봤다.
험악한 살기를 뿜으며 노려보기도 했다.
‘어라? 동요하지 않네……?’
그런데 반응이 이상했다.
이쯤 되면 “예, 예…….” 하면서 문을 비켜 줄 만도 한데, 그 앞을 막아선 사내는 단단한 동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벼룩의 눈알 만큼도 동요하지 않은 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더니, 뭔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뒤쪽을 바라봤다.
‘자, 잠깐, 거기를 보면…….’
남궁휴는 그 순간 엄청난 불안감을 느꼈다.
사내가 바라보는 뒤쪽.
그곳엔 도주하기 위해 미친 듯이 저지른 ‘악행’의 증거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으우…… 아칠, 아팔! 임 목장님이 다치셨어! 아까 뛰어 들어간 사람 대체 어디로…… 어……? 아칠! 아팔! 왜 그래? 왜 그렇게 주저앉아 있어?! 이마는 또 왜 그렇게 빨게?!”
깜짝 놀라 꼬마들에게로 달려가는 여인의 목소리.
걱정스럽게 묻는 여인에게 아픔을 참으며 괜찮다고 대답하는 꼬마들.
“저 사람입니다! 저 사람이 밀치고 지나갔어요!”
그리고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쪽을 향해 원망스럽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주방에서 나오던 젊은 사내.
그 말에 눈앞에 있던 살벌한 눈빛이 더욱더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
새카만 눈동자가 지그시 이쪽을 응시한다.
속을 꿰뚫어 보듯이.
남궁휴는 침묵이 때론 어떤 험악한 욕설보다 무섭다는 것을 이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이런 썅! 그래서, 어쩌라고! 이깟 더러운 객잔이 그렇게 대단해?!”
‘으, 으아아……!’
남궁휴는 안색도, 머릿속도 온통 하얗게 변해 버렸다.
어차피 기호지세다. 호랑이 등에 매달렸으면 끝까지 달려야 한다. 그 결과가 호랑이를 잡을 수 있게 되든, 아니면 반대로 잡아먹히든. 끝까지 가 봐야 한다.
그러니 있는 힘껏 배짱을 부려 봤다.
사실 두려울 게 뭐 있나? 이미 목숨을 반쯤 내놓은 상황인데.
“……더러운 객잔?”
그런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분노가 담기자, 그런 배짱이 단번에 사라져 버렸다.
남궁휴는 놀라서 움찔 몸을 떨었다.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강렬한 눈빛.
오른쪽 귀가 잘려 나간 살벌한 인상.
그제야 머릿속에 떠오르는 뒤늦은 후회.
‘나…… 실수한 건가?’
사내는 잠시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후문 옆에 세워 둔 대나무 빗자루를 집어 들고 있었다.
반 장(丈) 길이의 길고 매끈한 몸체.
그 끝에 가지런히 묶여 있는 뾰족한 싸리 한 뭉치.
그는 그걸로 한쪽 손바닥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일단, 좀 맞자.”
누런 대나무 빗자루가 허공을 갈랐다.
☆ ☆ ☆
빡! 빠악! 빠각! 딱!
“큭, 컥, 케엑…… 컥……!”
노란빛이 허공에 번뜩일 때마다 남궁휴는 폭풍에 휘말린 조각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고통.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쭈그려 앉고 싶은 공포.
하지만 잔인하게도 대나무 빗자루의 주인은 그가 주저앉을 만하면 힘이 빠지는 반대쪽을 후려쳐서 강제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대단한 기술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덕분에 지금 남궁휴는 다리가 풀렸음에도 꼿꼿이 서 있는 것처럼 되어 버린 상황이다.
‘마, 막을 수가 없어……!’
누가 뭐래도 그는 남궁세가의 장자.
그것도 십오 세까진 착실하게 일류의 무공을 수련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지금 날아오는 빗자루를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막기는커녕 그 궤적을 눈으로 쫓는 것도 벅찼다.
“그, 그, 그만……!”
퍽! 빠악! 퍽!
“이, 썅! 그만하라고…… 켁! 컥…… 쿠헉!”
거칠게 말을 내뱉는 순간, 빗자루에 들어간 힘이 더욱 강해졌다. 전신에서 터지기 시작하는 극렬한 고통은 도저히 버텨 낼 만한 게 아니었다.
‘제, 젠장. 언제까지 패는 거야?’
의아해하던 그 순간, 남궁휴는 깨달았다. 눈앞의 살벌한 인간은 지금 그의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뭔가’를 건네주기 전까진 이 빗자루는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크윽, 젠장. 제길. 빌어먹을!’
남궁휴는 한참 동안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그, 그만, 용서해 주세요…….”
털썩.
빗자루가 멈추고, 힘이 빠져서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남궁휴는 양팔로 머리를 감싼 채였다. 그의 몸이 거듭된 충격으로 파르르 떨렸다.
저벅.
“흡……!”
한 걸음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반사적으로 머리를 방어하는 남궁휴.
뼛속까지 공포가 스며들어 버린 증거였다.
“고개를 들어.”
“…….”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봐라.”
나직한 목소리엔 항거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벌벌 떨던 남궁휴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사내의 눈을 쳐다본다.
갸름하면서 선이 굵은 외모, 오른쪽 귀가 날아가 버린 험악한 인상,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그리고 그 얼굴의 중심.
‘흡……!’
남궁휴는 실수로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돌이 되어 버렸다는 망부석 전설처럼, 사내의 강렬한 눈빛을 보는 순간, 몸과 사고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특이한 녀석이군.’
장기린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는 약관의 청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추룡과 닮았다고 해야 하나? 겉으론 거칠고 난폭해 보여도, 속은 여리고 섬세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녀석.’
적룡기마대의 셋째 추룡.
불의를 못 참는 다혈질에 막무가내의 성격인데다,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고 거칠게 보일까만 평생 연구한 것 같은 녀석이 바로 추룡이다.
장기린은 눈앞의 청년에게서 그 추룡의 느낌을 받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똑같았다.
반항적인 말투. 웬만해선 절대로 굽히지 않는 자존심. 하지만 속으로는 꽤나 확실한 주관을 가진 올곧은 눈빛.
“고개를 들어.”
“…….”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봐라.”
잠시 부들부들 떨며 고민하던 청년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이쪽의 눈과 마주쳐 왔다.
“……!”
그리고, 정면으로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커다랗게 확장된 동공이 경악과 공포를 담아 좌우로 흔들렸다.
“왜 이런 짓을 한 거냐?”
“…….”
“이유가 있을 텐데?”
질문을 던졌지만, 듣지 못하는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장기린이 잠시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음? 뭐야? 열화남이잖아?”
머리를 긁적이며 나타난 철우는 앞에 있는 청년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열화남?”
“아아, 화류계에 빠진 도련님. 남궁휴라는 이름은 꽤 유명한데…… 혹시 들어 본 적 있나?”
“남궁휴……? 아니, 들어 본 적 없소.”
“그래? 뭐, 아무튼, 그런 거지. 나도 이 도련님한테 볼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한데?”
철우는 남궁휴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객잔의 입구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잠시, 실례하지. 금방 돌아올 거야.”
철우는 그 말만을 남기고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남궁휴…… 저도 들어 본 적 있어요.”
그때, 왼쪽 손목을 주무르며 휘연이 다가왔다.
“남궁세가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아세요?”
“……아니.”
“네. 그럴 줄 알았어요. 아무튼, 이 사람은 그런 꽤 큰 가문의 첫째 도련님이에요.”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지, 청년은 두 눈에 초점을 되찾은 채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아까 저랑 임 목장님을 어깨로 치고 지나갈 때, 누군가에게 쫓긴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그게 이 사람이라면 이해가 가네요.”
“쫓긴다고?”
“네. 도박 빚이 굉장히 많다고 들었거든요. 아마 쫓는 것은 그에 관련된 사람이 아닐까 싶은데요.”
휘연의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도박, 화류계. 어느 쪽도 솔직히 관여되고 싶지 않은 종류니까 당연한 일이다.
장기린은 철우가 밖으로 나간 문을 잠시 쳐다본 뒤, 남궁휴에게 말했다.
“너, 할 말이 있지 않나?”
“예……?”
“네가 밀쳐서 다친 휘연과 임 목장, 그리고 이마가 벌겋게 부어오른 아칠과 아팔. 그들에게 할 말이 없나?”
차갑게 응시하자, 남궁휴는 대번에 기가 죽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옆에 다가와 있던 그들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소저, 죄송합니다.”
“…….”
휘연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사과를 받아들였으나 대꾸는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내가 흥분해서 실수했었어. 사과할게.”
“아니, 뭐…….”
“괘, 괜찮아요.”
아칠과 아팔은 사과를 받자 오히려 당황해했다.
“미안합니다.”
“하하, 아니, 뭐……. 그리 큰일은 아니었고…….”
운찬은 사과를 받자마자 금방 풀어져 버렸다.
반항하고 거친 모습과는 달리, 사과를 하는 모습에선 제법 명가의 후예다운 기품이 보인다.
장기린은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다가 말했다.
“너, 설명해.”
“예……?”
“왜 이렇게 되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 보라고.”
남궁휴는 잠시 고민하듯 눈을 굴렸다.
“눈 굴리지 말고.”
“예……?”
“잔머리 굴리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곧바로 대답해. 셋을 센다. 하나, 둘, 셋…….”
“자, 자, 잠깐만요! 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장기린이 다시 대나무 빗자루를 잡으며 말하자, 남궁휴는 황급히 그를 만류했다.
“제가 저기, 빚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쫓기고 있었는데…….”
“얼마야?”
“예?”
“빚이 얼마냐고.”
“…….”
“하나, 둘, 셋…… ”
“그, 금자 오십 냥 정도……!”
옆에서 ‘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의자까지 가져다 놓고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휘연, 운찬, 아칠, 아팔의 목소리였다.
“그, 금자 오십 냥이라니…….”
“도대체 도박을 얼마나 하면 그런 빚이 생기지?”
“아니, 그보다……. 그만한 돈을 빌려 주긴 하는 건가요?”
“남궁씨잖아. 가문을 보고 빌려 준 게 아닐까?”
두런두런 자기들끼리 상의하던 네 사람은 장기린이 눈치를 주자 곧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
장기린은 잠시 머릿속에서 액수를 계산해 보며 말했다.
“금자 오십 냥이면…… 금괴 하나 반, 아니 두 개쯤 되는 건가?”
“예? 아, 예. 뭐, 그 정도 되는…….”
장기린은 문득 머릿속에서 뭔가가 떠올랐다.
이건 운찬이나 휘연과 비슷한 상황.
어쩌면 상부상조하는 좋은 결과가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궁휴라는 녀석도 잔머리를 굴리려고 하는 경향은 있지만,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것을 보니 그리 까탈스러운 놈도 아닌 것 같고.
“그걸 갚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지?”
“예……?”
남궁휴는 상상치도 못 했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쉽게 말해. 그 빚을 갚을 수 있다면 너는 뭘 할 수 있냐는 거다.”
“그 말씀은, 혹시……. 제가 빚을 갚을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그래, 어쩌면.”
“예?”
장기린은 남궁휴를 찬찬히 뜯어보며 물었다.
“너, 힘 세냐?”
“……예?”
“힘 세냐고. 무거운 물건도 잘 옮기고, 부지런하게 일하고. 그럴 수 있……?”
“안 돼요!!”
단호하게 빽 지르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기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허리에 손을 얹고, 싸늘하게 안색을 굳힌 휘연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서 있었다.
“왜 그러는 거야?”
처음으로 장기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쪽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객주님의 생각 다 알아요. 하여간 사람이 너무 좋다니까요. 저는, 절대로 그 일에 찬성할 수 없어요! 두고 보세요. 끝까지 반대할 거예요!”
일참(一斬)의 기세로 칼같이 단호하게 끊어 말하는 미녀. 그 가녀린 몸 어디에 이런 기백을 숨기고 있었는지.
장판파를 막아선 장익덕처럼, 제자리에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그녀의 의지는 도저히 꺾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하지 않았나?’
아직 아무 말 안 했음에도 속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점이 무섭다.
주변을 보니 운찬, 아칠, 아팔은 모두가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오직 휘연만, 그의 속을 읽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가 뭘…….”
“빚을 대신 갚아 주려고 하시는 거잖아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객주님은 돈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침모로서, 아니 이곳 풍운객잔의 자금과 경영을 총괄하는 총관으로서, 절대로 반대합니다!”
감히 한마디도 토를 달 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에에―?!”
“대, 대신 갚아 주려 했다고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아칠과 아팔의 경악성.
운찬의 멍한 중얼거림.
그리고, 남궁휴의 확인 질문이 날아왔다.
“저기…….”
“안 돼요.”
“하지만 우리 하인도 필요하고…….”
“절대, 안 돼요.”
장기린이 말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무참하게 침몰했다.
생긋 웃으며 말한다는 점이 이쪽의 말문을 더욱 막히게 한다.
휘연은 오연하게 버티고 서서 이쪽을 지그시 살펴보더니, 오히려 질문을 던져 왔다.
“객주님은, 왜 그 사람을 도와주려는 거죠?”
“뭐?”
“처음 보는 사람이잖아요. 그것도 좋지 않은 인상의.”
“그건…….”
장기린은 대답할 말이 궁해져 버렸다.
굳이 대답하자면, 남궁휴가 셋째 동생이었던 추룡과 닮았기 때문이며, 그리고, 거친 외견 속에 숨어 있는 선한 심정을 믿어서다.
그리고 또 하나 느낀 점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 말은, 아무리 열정적으로 말해 봤자 다른 사람들에겐 조금도 공감을 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저는 저 사람을 믿지 못해요.”
“음?”
고개를 돌려, 이번엔 남궁휴를 응시하는 휘연의 눈빛은 그녀에게 저런 모습도 있었나 싶을 만큼 싸늘해 보였다.
“저 사람은 기루와 주루에서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화류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죠. 거기다가 마지막엔 도박까지. 금전 감각이 없는 객주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금자 오십 냥을 도박으로 날려 버리려면 보통의 담력으론 안 돼요. 완전히 도박에 미쳐서 정신이 나가 버린 사람이거나, 아니면 책임감과 계획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무모한 사람이라는 뜻이겠죠.”
휘연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남궁휴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저희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여자, 술, 도박에 미친 남자는 절대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 지금 이 사람은 한 끼 밥 먹을 돈이 있다면, 그 돈까지 도박에 다시 밀어 넣을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의 빚을 갚아 준다구요? 보나 마나 얼마 지나기도 전에 운이 좋았다고 희희낙락하면서 다시 도박장에 드나들기 시작할걸요?”
“…….”
“그러니 저는 절대로 이 일에 찬성할 수 없어요. 만약 제가 그 돈을 써야만 한다면, 차라리 객촌에서 한 끼 밥도 못 먹어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일 년 내내 무상으로 밥을 줄 거예요. 이 사람에게 돈을 쓰는 것은…… 무의미해요.”
휘연은 싸늘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일축했고, 남궁휴는 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장기린도 휘연의 논리정연한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도박이든, 술이든, 그리 쉽게 빠져나올 수 없기에 그걸 ‘중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있어요.”
“뭐지?”
“저 사람은 이러니저러니해도 그 ‘남궁세가’의 사람이라고요. 그것도 장남. 그만한 뒷배경이 뒤에 버티고 있는데, 도박 빚 따위가 의미가 있겠어요? 그걸 갚아 줘 봤자 객주님의 아까운 돈만 낭비하는 거예요. 저 사람의 가문은 그런 돈은 푼돈으로 생각할 만큼 힘이 있는 곳이라고요.”
코웃음 치는 휘연.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궁휴의 고개가 처음으로 번쩍 들어 올려졌으나, 장기린의 말이 좀 더 빨랐다.
“그렇지는 않을 거다.”
“네?”
“정말로 갚아 줄 마음이 있고, 가문에서 이 녀석을 신경 쓰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쫓기고 있을 일도 없었겠지. ……이 녀석은 외톨이야. 이곳에 모인 모두처럼.”
휘연은 물론,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세 사람까지 눈빛이 흔들렸다.
이것이었다.
그가 남궁휴에게 마음이 갔던 이유.
모든 것으로부터 버려진 채, 오직 반항과 일탈만 남아 있는 외톨이.
꿈을 잃어버릴 뻔했던 운찬.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칠과 아팔.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휘연.
그들과 똑같은 존재.
그 모습은, 적어도 장기린에겐 그 누구보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하, 하지만…….”
휘연은 그 말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빚을 갚아 줘선 안 된다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휘연의 말도 맞다. 이건 내가 갚아 줘선 안 되는 거지. 스스로 갚아야 해.”
휘연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고, 남궁휴의 어깨는 절망한 것처럼 아래로 축 늘어졌다.
장기린은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갚을 수 있는 기회 정도는 만들어 줘야 하지 않나 싶은데.”
“예……?”
“객주님……?”
나란히 의문을 표하는 남궁휴와 휘연.
장기린은 그들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아까부터 정문 쪽에서 서성이던 거구의 사내를 쳐다봤다.
“철우, 할 말이 있으면 하는 게 어떻겠소?”
휙!
모두의 시선이 입구 쪽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철우를 향했다.
운찬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남궁휴의 표정 위로 공포가 덮인다.
철우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쿵쿵 거리며 다가왔다.
“크흠! 안 그래도 끼어들려던 참이긴 한데…….”
철우는 근처에 있는 의자를 하나 빼내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지.”
그는 난감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