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三章 ― 채무만장(債務滿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철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해 준 일장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좀 복잡하긴 하지만…… 결국, 이 녀석의 빚은 모두 철우파에게 일임되었다는 이야기 아니오?”
장기린이 딱 잘라 정리하자, 철우는 수긍했다.
“뭐, 결론적으로는 그렇지.”
“더 이상 그 백로파라는 것은 남아 있지 않은 것이고?”
“완전히 전멸. 주요 간부들은 모두 항주에서 활동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고, 졸개들과 그 채권은 모두 우리 철우파가 가졌으니까.”
철우의 대답이 마무리되자, 모두의 시선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스무 살 청년에게로 모여들었다.
몇몇은 동정, 한 사람은 한심함.
말할 것도 없이, 그 한 사람은 휘연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빚을 불리기만 하면서 살 수가 있죠?”
“……크흠.”
“이야기를 들어 보니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네요. 그런 상태로 밥은 어떻게 먹고 다녔나요?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닐 텐데.”
남궁휴는 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조금, 도와준 적이 있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흐음, 열화남이라는 거군요. 돈이 아깝지 않았던 만큼, 친구들을 도와줄 때도 화끈하게 도와줬었나 보죠?”
“…….”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일 것 같은데, 아닌가요?”
남궁휴는 망부석처럼 굳어져서 아무런 말도 못 했다.
“휴우…….”
휘연은 ‘하아, 속 터져.’라는 듯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겉보기만으로는 가련하기 그지없건만, 분위기와 기세가 겨울밤의 서릿바람처럼 차갑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기린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금전적인 문제가 있을 경우 휘연은 저렇게 무서워질 수 있다. 반드시 기억해 둬야 할 사항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이네요.”
운찬의 질린 듯한 목소리는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불과 오 년.
그 짧은 시간 동안 금자 오십 냥이라는 큰 빚을 진 것은, 정말로 복잡하고 기괴한 암흑가의 역사가 일조하고 있었다.
오 년 전, 처음 남궁휴가 빌렸던 돈은 불과 은자 열 냥이었다.
서민들에겐 적은 돈이 아니지만, 남궁가의 장남으로서는 하루 용돈으로도 부족한 돈.
남궁휴는 그 돈으로 지하 도박의 꽃이라는 검패(劍牌)를 했고, 은자 아홉 냥을 다 잃어버린 뒤에, 스무 배짜리 행운을 만나 은자 스무 냥을 땄다고 한다.
마지막 판에서 벌어진 일발 역전의 행운.
그 길로 열 냥의 빚을 갚고, 추가로 얻은 은자 열 냥을 가지고 돌아갔으면 그걸로 오래오래 행복했을 일이지만……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칼로 무 베듯이 썰리는 것이던가?
남궁휴는 주변의 바람잡이들이 운수 대통의 날이라며 부추기는 바람에, 오히려 은자 스무 냥을 더 빌려서 입장금만 사십 냥짜리 중방(中房)에 들어갔다고 했다.
거기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십 냥 중 서른여덟 냥을 잃고, 마지막 두 냥짜리 판에서 터진 사십 배짜리 행운.
그때, 남궁휴의 별명이 일발 역전의 사나이, 운수 대통남이었다고 한다.
기세를 탄 운수 대통남은 그대로 은자 스무 냥을 더 빌려서 입장금 백 냥짜리 상방(上房)에 진출.
하지만 상방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결국 거기서 주머니에 먼지 한 푼 남지 않게 탈탈 털린 뒤에 남은 것은, 은자 육십 냥을 빌렸다는 차용증서뿐이었다.
분노와 자괴감.
그러면서도 아직 갚아야할 빚이 있다는 도박장과의 묘한 유대감.
그때라도 개값 물었다고 생각하고 빚을 갚아 치웠어야 했건만, 그때의 남궁휴는 도박의 빚은 도박으로 갚아야 한다는 함정에 빠져서 세가의 총관에게 받은 돈으로 이번엔 곧장 상방에 들어갔다고 한다.
입장금 백 냥짜리 고급 판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도박 전쟁.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궁휴는 제법 도박에 대한 자질이 있었고, 금방금방 실력이 늘어난데다, 운도 잘 따라 줘서 매번 꽤나 큰돈을 따곤 했다.
빚은 줄지 않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늘지도 않던 상황.
그렇게 이 년쯤 지나서 어느 정도 관록이 붙자, 남궁휴는 상방보다도 더 큰판이 있다는 곳을 알게 되었다.
도신(賭神)들이 노닌다는 천외천.
입장금 최하 삼백 냥짜리 천방(天房).
대륙 최고의 도수들이 모두 항주에 모여서 거금을 놓고 싸운다는 말을 들은 순간, 이미 남궁휴는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그 당시, 겁도 없이 자기가 고금 최고의 도수(賭手)라고 생각했다는 남궁휴는, 대차게 암흑계의 고리대로 은자 이백 냥을 더 빌려, 그동안 모은 돈과 합해서 천방에 뛰어들었다.
초심자의 운이었을까?
의외로 남궁휴는 천방에 들자마자 승승장구.
단 하루 만에 은자 삼백 냥이 은자 삼천 냥으로 변해 버렸다.
검패뿐만이 아니다.
투계, 투전, 마작, 서역에서 들어온 화부(畵附) 놀이까지.
온갖 종류의 도박들을 하나둘씩 섭렵하며, 이미 밖에서 거부(巨富)라고 불리기에 마땅한 돈을 손에 쥔 남궁휴.
하지만 그는 만족이라는 것을 몰랐다.
도박에 미쳐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도박장을 떠나지 않았고, 때론 빈털터리가 되기도 하고, 때론 삼천 냥보다도 더 큰돈을 딴 거부가 되기도 하면서 그는 지하 세계를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도박계에 입문한 지 사 년째 되었을 때.
남궁휴는 팔도신(八賭神) 중의 한 명으로 꼽히고 있었다고 한다.
최연소로 도신의 자리에 오른 암흑계의 유망주로서.
“뭐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
이것은 이야기를 듣던 중 너무나 놀란 운찬의 반응이었다.
하여간, 그러던 남궁휴는 한 조직의 두목에게 불려 가, 앞으로 항주의 패권을 놓고 벌어질 도박판에서 도움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그게 바로 백로객잔의 파락호 단체 백로파였다.
그들의 조건은 간단했다.
상권(商權)과 현금을 놓고, 다른 파의 도수와 한판 붙는다. 즉, 직접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도수를 대리인으로 두고 도박으로 싸우는 것이다.
도수와 자파의 피해 부담률은 정확하게 절반.
즉, 잃으면 도수도 똑같이 잃고, 따면 도수도 똑같이 딴다.
다만, 자본금의 준비는 백로파의 몫.
그렇게 목숨을 건 도박을 하며 일 년을 보냈다.
처음엔 조금 땄지만, 나중에 팔도신 중 나머지 일곱 도신들도 각자 한 명씩 다른 파에 투입되는 바람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거기서 성적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쌓인 빚이 금자 오십 냥.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하지만 사실 이것이 금선로의 파락호들과 객잔들의 싸움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피해 축에도 못 드는 편이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백로객잔은 청풍객잔의 계략에 빠져 객잔을 잃어버리고, 백로파는 세력이 흩어져서 결국 철우파에게 모든 문서와 권리를 넘긴 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금자 오십 냥…….”
장기린은 고뇌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난감하다고. 어쩌다 보니 사업체와 함께 넘겨받긴 했지만, 우린 도박판 쪽이랑은 별로 친하지 못해서 말이지.”
철우 역시 이번 일이 난감한 듯 불편한 안색이었다.
“액수라도 적으면, 그냥 봐줘서 보내고 싶은데. 금자 오십 냥이면 장난이 아니고 말이야. 그래서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일단 잡아 오라고 했는데…… 저놈이 필사적으로 도망가 버린 거다.”
철우가 손가락으로 남궁휴를 지목한다.
이제껏 죽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궁휴가 그 지적에 부당하다는 듯 얼굴을 번쩍 들었다.
“이, 이유 없이 도망친 게 아닙니다!”
“그럼?”
“철우파의 중간 간부라는 사람이 와서 분명히 그랬단 말입니다. 단 시일 내에 그 돈을 갚지 못하면…… 몸을 팔아서 갚게 될 거라고.”
남궁휴는 그때의 살벌함이 떠오르는 듯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야. 중간 간부 놈들 중에 거친 놈들이 한둘이어야지.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어쨌든 너는 큰돈을 빚진 채권자 아닌가? 지금처럼 큰소리칠 입장이 되나?”
철우의 눈에서 한기가 감돈다.
장기린만큼은 아니더라도, 감히 보통 사람이 상대할 수 없는 살벌한 눈빛이었다.
남궁휴는 잠시 오기를 부리듯 버텼으나, 이내 깨갱하는 강아지처럼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뭐, 그래서?”
장기린은 철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할 거요? 이젠?”
“으음…….”
“도박 말고, 금자 오십 냥을 갚을 방법이 있소?”
어찌 보면 순진해 보일 만큼 직설적인 장기린의 질문에, 주변의 모두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금자 오십 냥. 은자로는 천 냥.
그런 돈을 손쉽게 벌 수 있다면 누가 매일매일 힘들게 일을 할까.
“으음…….”
그런데 철우는 뭔가가 떠오른 듯 눈을 번쩍였다.
“하나, 있긴 한데…….”
“이, 있어요?”
“그런 게 있어요?!”
오히려 당사자인 남궁휴보다 운찬과 아칠, 아팔이 더욱 큰 관심을 보였다.
“어떤 거요?”
“지하투기장.”
“……!”
그 말에, 기대감을 가졌던 운찬과 아칠, 아팔이 일제히 입을 꾹 다문다.
장기린은 질문을 던졌다.
“그게 뭐하는 곳이오?”
“……뭐,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지. 쉽게 말하자면 투견장 같은 곳이다. 개가 싸우는 게 아니라 사람이 싸울 뿐이지. 보통 전쟁터의 퇴역 군인이나 족보 없는 낭인들이 많이 나온다만.”
“…….”
“아가야. 잘 들어라. 거기에 걸리는 돈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해. 모르는 사람들은 감히 상상을 하기 힘들 정도다. 거기에 출전해서 몇 번만 좋은 성적을 거두면, 그 정도 돈은 금방 벌 수도 있을 테지.”
철우는 분명 남궁휴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눈은 줄곧 장기린을 향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가 장기린이 이곳에 출전해 보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만큼.
‘내 실력을 보고 싶은 건가?’
그렇지 않다면, 굳이 오 년간 싸움도 못 해 봤다는 남궁휴에게 그런 걸 권할 리가 없다.
큰돈을 번다는 건 ‘좋은 성적’을 거둘 때뿐이지, 그냥 나갔다 들어온다고 해서 큰돈을 주는 것은 아닐 테니까.
철우는 이 녀석의 빚을 탕감해 주고 싶다면, 직접 그곳에 나가서 싸워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 것이다.
“해 볼 건가?”
철우는 눈으로는 장기린을 보면서, 입으로만 남궁휴에게 말했다.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하던 남궁휴가 결연하게 대답하려는 찰나.
“해 보겠…….”
“아니, 거절하겠소.”
장기린이 나서서 딱 잘라 거절했다.
“아니, 어째서? 이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텐데?”
철우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것에 기분이 상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쪽의 기분도 사실 좋은 것은 아니다.
‘싸움, 그리고 돈.’
장기린은 머릿속에 대장군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래. 되도록 피를 보지 말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거라. 좋은 여자 찾아서 가정도 꾸리고. 일을 해서 돈도 벌어 보고. 너는 원래 싸우는 것을 싫어했잖느냐?”
‘그래. 여기 와서까지 싸움으로 돈을 번다면, 평범하게 사는 이유가 없지.’
드륵.
장기린은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똑똑히 말했다.
“난 절대로, 싸움으로 돈을 벌지는 않을 것이오.”
“……!”
“다른 방법을 말해 주시오.”
강력한 자신의 마음을 기세로 뿜어내자, 불편해 보이던 철우의 기세가 점차 누그러진다.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가 안 것이다. 장기린이 한 번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가 침묵을 지켰고, 철우는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크음, 어쩔 수 없나…….”
철우는 낙담한 듯,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퉁명스레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다. 아쉽지만 그것 말고는 그 정도로 큰돈을 벌 방법은 없어.”
“……그렇소?”
“어쩔 수 없군. 어떻게든 도박장에서 이용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건가…….”
철우는 고민했고,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남궁휴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누가 봐도 고착 상태.
문제는 있지만, 해결책은 없는.
그렇다고 대충 넘어갈 수도 없는 골치 아픈 상황.
“휴우, 할 수 없네요.”
휘연이 앞으로 나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노란색 경장을 입고, 환한 미모를 뽐내는 여인.
마치 팔선녀를 거느리는 서왕모처럼 당당하게 일어선 그녀는, 원망스럽다는 듯이 장기린을 한 번 흘겨본 뒤 철우에게 시선을 던졌다.
“철우씨. 도박판을 제외하면, 사람을 돈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인신매매밖에 없죠?”
그 당돌한 말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인신매매. 사람을 노예로 사거나 파는 건 암암리에 행해지든 어쨌든, 불법행위다.
“아니, 솔직해지자구요. 어차피 암흑가에선 흔한 일이고, 상황을 알아야 앞으로를 논의할 수 있지 않겠어요?”
“으음…….”
“그래서? 여기 이 사람을 팔면 철우파에선 얼마나 챙기실 수 있죠?”
휘연의 질문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
철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내 진지한 눈으로 남궁휴를 뜯어보았다.
“건장한 남자. 얼굴은 제법 반반하고. 무공도 익혔지만…, 남궁세가 출신이라는 건 오히려 짐이지. 잘해야 백 냥. 그 정도밖에 못 벌 것 같은데?”
철우는 솔직하게 평가를 내렸다.
“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백이십냥을 드릴게요.”
“……뭐?”
“휘연?”
철우와 장기린이 모두 놀라서 휘연을 쳐다봤다.
하지만 휘연은 오히려 태연했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백이십 냥을 드린다니까요.”
“아니, 그 말은……. 뭐냐? 나보고 이 녀석을 팔라는 건가?”
“우리 객주님께서 꽤나 마음에 드신 것 같으니까요. 저는 아무래도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휘연은 장기린에게 곱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처음엔 장난인가 생각하던 철우도 그녀가 진지해 보이자 화가 나서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람을 놀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금자 오십 냥짜리 빚을, 고작 은자 백이십 냥에 팔아 버리라고?”
누가 들어도 어이가 없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같은 식구인 운찬이나 아칠, 아팔조차 이해하기 힘들만큼 너무나 억지스러운 이야기다.
“왜, 말도 안 되죠?”
“하! 뭐라고?”
“그 금자 오십 냥이라는 거, 그냥 서류에 있는 빚일 뿐이죠. 게다가 빚을 진 주체도 백로파지 철우파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휘연은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그 기세에 눌려, 철우조차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닌가 순간적으로 고민할 만큼.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그 채권을 인수했으니, 그 빚은 우리 거다.”
“그 채권 말인데, 금자 오십 냥을 주고 그 채권을 사신 건 아니죠?”
“뭐……?”
“그냥 사업체 넘겨받으면서 덤으로 넘겨받았죠? 이건 그 돈을 받든 못 받든, 부차적인 수입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구요. 제 말이 틀린가요?”
철우의 눈빛이 조금이지만 흔들렸다.
“……틀린 건 아니지만, 그건 우리 쪽 사정이야. 빚을 진 입장에선 어느 쪽이든 갚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아뇨. 그런 원칙적인 거 말고, 현실적으로 이야기해 보자구요. 그럼 철우 씨는 저 사람을 데려가서 어떻게 돈을 회수할 건데요?”
“도박판에…….”
“도박판이 얼마나 불확실한 곳인지는 잘 아시죠? 다 아시잖아요. 저 사람이 가진 금자 오십 냥이라는 빚이 어디서 생긴 건지. 백로파가 저 사람을 도박에 이용하려다가 생긴 빚이라고요. 책임은 똑같이 반반씩 지기로 했으니, 아마 백로파의 손해도 그 정도가 났을 거구요.”
“……!”
“즉, 도박으론 돈을 회수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죠. 그럼 남는 건? 아까 말씀하신 지하투기장인가요? 하지만 거긴, 특출 나게 실력이 좋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노예상 쪽에 팔아 버리는 것보다도 돈을 못 받을 텐데요? 그렇죠?”
철우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되어 버려서 끄응하고 신음만 흘렸다.
휘연의 말이 맞았다. 장기린처럼 뭔가 특별한 게 있는 자라면 모를까, 싸움터에 나가 봤자 시체치울 일만 늘려 놓을 인물이라면, 오히려 노예상보다도 돈을 못 받는 것이 지하투기장이다.
“허어…….”
생각이 거기까지 가자, 철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휘연의 말이 맞았다. 자신으로서는 남궁휴에게서, 더 이상 돈을 뽑아낼 방법이 없다.
“자, 그러니 빨리 결정하세요. 참고로 저희는 백이십 냥 이상은 절대로 드릴 수가 없어요. 그것도 시세보단 많이 쳐 드린 거라고요.”
“…….”
“고민하실 건가요? 케케묵은 채권을 처분하기에 이만큼 좋은 기회는 없을 텐데도?”
팔짱을 낀 채 살짝 상체를 뒤로 젖힌 휘연은 너무나도 위풍당당하다.
할 테면 하고, 말 테면 말라는 듯한 배짱.
게다가 좀 전에 철우가 장기린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갚아 주는 당돌한 언사까지.
“큭, 하하하! 크하하하!”
철우는 가슴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큰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크핫! 이봐, 풍운객주. 정말 좋은 여자를 얻었군.”
“무, 무슨 소릴……!”
돈 거래를 할 때는 그렇게나 당당했던 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라 버렸다.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휘연.
반면에, 장기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나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소.”
“개, 객주님?!”
“크하하! 놓치지 말라고. 저 여자 놓치면 분명 후회할 테니.”
철우는 입구 쪽을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거기! 누구 있냐!”
“예! 제가 있습니다, 형님!”
“가서 남궁휴 채권 가지고 와라. 빚 증서랑, 각서랑, 관련된 서류 다 가지고 와.”
“옛!”
철우파의 덩치 하나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자, 여기 남궁휴와 관련된 모든 문서다. 이제 이 빚에 대한 권리도 모두 넘기는 걸로 하지.”
철우는 여전히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얼굴로 장기린에게 문서를 건네주었다.
장기린은 그 문서를 휘연에게 건네주었고, 휘연은 문서를 꼼꼼히 살핀 뒤, 철우에게서 그 문서를 양도받았다는 지장까지 받은 후에야 백이십 냥을 건네주었다.
돈을 받은 철우는 밖으로 빠져나가려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하나만 묻지. 그 녀석은 어디에 쓸 건가?”
어깨를 움찔하는 남궁휴를 보며 장기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인.”
“하인?”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던 차였소.”
철우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파핫! 하하! 역시 여긴 특이해. 남궁세가의 장자이자, 항주 팔도신 중 하나를 하인으로 쓴다? 좋아, 좋지. 그것도 좋지.”
혼자서 대소하던 철우는 떠나기 전에 다시 말했다.
“그리고 다음번엔 정말로 술 한잔하자고. 매번 여기선 뭘 마시려고만 하면 사건이 터지는구먼.”
그 말을 남기고는 즐거운 얼굴로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 버렸다.
“…….”
철우가 나가자, 이제 객잔 안에 남은 것은 식구들과 남궁휴뿐이었다.
슬슬 저녁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으나, 누구 하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남궁휴는 아직까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휘연.”
“네?”
“고마워.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되었다.”
휘연은 볼을 살짝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이게 제 할 일인 걸요.”
“휘연이 없었으면 못 했을 일이야.”
휘연의 볼이 점점 더 붉어진다.
장기린은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시선을 남궁휴에게로 돌렸다.
“남궁휴.”
“……예.”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예?”
남궁휴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까 말했듯이, 우리는 허드렛일을 도와줄 하인이 필요하다. 힘이 세고, 잡일도 잘할 수 있다면 좋겠지.”
“…….”
“할 수 있겠나? 아니면, 죽어도 못 하겠나?”
머뭇거리던 남궁휴는 천천히, 어휘를 조심하며 말을 꺼냈다.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닌…….”
꿈틀.
자연스레 장기린의 미간이 좁혀진다.
남궁휴의 대답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전에 철우와 휘연이 대화할 때도, 남궁휴는 자신의 인생이 마치 물건처럼 거래되고 있음에도 불만은커녕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인생이 아닌 것처럼.
‘그래, 그게 문제였군.’
장기린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수동적인 것.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하는 것.
원래 그런 것은 절대로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스스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피식 웃은 뒤, 옆에 서 있는 휘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휘연.”
“네?”
“빚 문서 좀 줘 봐.”
휘연은 별다른 의심 없이 종이 뭉치를 건네준다.
언제 얼마를 빌렸는지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고, 그에 대한 남궁휴의 지장까지 찍혀 있는 진품 서류였다.
장기린은 그것을 받아서…….
쫘악!
모조리 양쪽으로 찢어 버렸다.
“악……!”
“헛……!”
당황하는 휘연과 경악한 얼굴로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남궁휴였다.
남궁휴는 그의 눈앞에서 흩날리는 빚 문서 조각들을 보며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것이, 너의 오 년을 속박해 오던 것이겠지?”
“……!”
“너를 묶고 있던 것은 이렇게나 가볍다. 어린아이도 힘을 주면 찢어 버릴 수 있을 만큼 약한 것에 너는 묶여 있었어. 알고 있었다면 그럴 리가 없지. 네 마음이 스스로 이깟 빚 문서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남궁휴는 입을 다문 채 지금 장기린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깊게 집중한 것이 느껴진다.
고뇌하는 것이 느껴진다.
장기린은 이 순간 그에게 꼭 해 줘야 할 말을 알 수 있었다.
“네 스스로 속박을 풀어라. 남궁휴.”
‘아…….’
남궁휴는 뜨거운 무언가가 그의 양쪽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숨이 격해지고, 가슴속이 조여 오듯 아파 왔다. 믿겨지지가 않는다. 이 정도로 감정이 흔들리다니.
‘지난 오 년간 없었던 일…….’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고,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던 것은.
아마, 이화 부인이 동생을 조혼시키겠다는 것으로 위협을 가해 왔을 때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가슴을 열어 본 적이 없다. 스스로를 꽁꽁 닫아 놓고, 마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주변엔 가짜 웃음만을 보여 주며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느닷없이 꽁꽁 숨겨 두었던 감정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원인은 눈앞에 있는 남자다.
오늘 처음 본 사람.
빗자루로 그를 무자비하게 두들겼던 사람.
오른쪽 귀가 없는 험상궂은 외모에, 두 눈에는 습관처럼 살광을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사람.
‘스스로, 속박을 풀어라?’
그의 한마디에 모든 것을 깨닫는다.
그는 반항아였다.
무관심한 아버지.
그를 불행으로 밀어 넣은 아버지.
너무나 그릇이 커서, 자그마한 가족 따윈 안중에도 없는 아버지.
그는 그런 아버지에게 관심 좀 가져 달라고 떼를 쓴 거나 다름없다.
쉬운 길만 찾아다니는 주제에, 핑계만 잔뜩 만들어 놓고, 아버지에게 관심 좀 가져 달라며 괜히 사고 치고 다니는 어린아이였다.
‘그것이 스스로의 속박.’
처음 밖에서 사고를 쳤을 때, 아버지가 했던 말이 있다.
가신들이 걱정을 하고, 이화 부인이 그가 집안 망신을 시킨다며 목소리를 높여 고함을 지를 때, 아버지는 나직한 한마디 말로 그 일을 종결시켰었다.
“스스로 하게 두시오.”
……그때는 그게 무관심이라고 생각했었다.
가족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무시해 버리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야. 아버지는 기다리셨던 거였어.’
스스로 속박을 풀 때까지.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아버지…….”
한 번 눈물을 흘리자, 도저히 멈춰지지가 않았다. 숨을 꺽꺽 토해 내면서, 지난 세월 쓸데없이 낭비한 돈과 세월을 돌이켜 보았다.
“남궁휴.”
“……예.”
눈물범벅이 된 채로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무심한 듯한 표정이지만, 어딘가 조금 전보다 훨씬 따뜻해 보이는 얼굴로 사내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깟 종이에 적힌 액수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한다. 넌 나한테 빚을 졌지만, 그게 얼마나 큰지는 네가 스스로 느끼는 정도에 따라 다를 테지. 때론 동전 한 푼이 어떤 보물보다 값지게 느껴질 때도 있고, 때론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별로 큰 감흥이 없을 때가 있는 법이야.”
사내는 마지막 남은 종이 한 장까지 찢어 버린 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액수 따윈 신경 쓰지 마라. 넌 빚을 하나 졌어. 그것뿐이다. 여기에서 내가 필요한 하인 일을 해 줘도 좋고, 밖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갚겠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지만, 남궁휴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머지는 네가 선택해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 사람은……!’
남궁휴는 심장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적게는 은자 백이십 냥, 많게는 황금 오십 냥의 가치가 있는 종이를 망설이지 않고 찢었다.
그리고, 마음대로 하게 해 줄 테니, 갈 테면 가도 좋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객주님.”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남궁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크게 숨을 들이키고, 새로 태어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말했다.
“객주님을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고, 간절히 청한다.
사내는 엄격한 눈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정말로 그걸로 되겠냐고, 다시 한 번 묻는 느낌이었다.
“남궁휴라고 합니다. 편하게 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 그제야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며 소개를 시켜 주었다.
“여기는 숙수인 강운찬. 여기는 점소이인 왕칠, 왕팔 형제. 그리고 여기는 총관이자 침모를 맡고 있는 진휘연.”
사내는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이곳 풍운객잔의 객주인 장기린.”
남궁휴는 웃지 않았으나, 옆에서 ‘풋’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
사내 장기린이 살짝 눈치를 주자, 왕칠, 왕팔 형제가 입을 가리고 재빨리 고개를 숙인다.
왠지 가족처럼 정겨운 분위기다.
남궁휴도 그대로 웃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너.”
“예?”
부르는 줄 알고 대답했으나, 장기린은 다른 사람들을 소개했듯 손으로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풍운객잔의 하인, 남궁휴.”
‘아…….’
남궁휴는 다시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하인이라는 직책이지만, 분명 그는 지금 이곳에 가족으로서 ‘소속’되었다.
“풍운객잔에 온 것을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