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六章 ― 동방래자(東方來者)
항주의 동쪽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해도 일단 상해를 들 수 있다.
바다와 인접한 곳에 위치하여 온갖 해산물과 물류 들이 교류되는 항구도시. 먹거리가 풍부하며, 그 시장엔 없는 게 없다는 대도(大都).
게다가 상해에서 북로(北路)를 타고 조금만 올라가면 남경(南京)이 나오는데, 남경과 상해를 이어 주는 길은 황금로(黃金路)라고 불릴 정도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겐 극도로 중요한 무역 통로였다.
상해와 남경.
둘 다 큰 도시이며, 항주의 동쪽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항주의 사대문 중에서도 동문이 가장 발달하였고, 그곳을 통과하는 인원만 해도 하루에 수천이 넘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 형님, 왜 이렇게 한적하죠? 원래 항주로 가는 길은 좀 더 사람들로 바글거렸던 기억이 있는데요.”
커다란 대로를 각자의 말을 타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두 사람.
그중에서 키는 작지만 다부져 보이는 말을 타고, 까무잡잡한 피부 위로 호감 가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청년이 조금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구, 네가 여기에 있을 때는 사람이 많았었나?”
“네에. 많았죠. 제 기억엔 이쪽 길에 사람이 없었던 적이 없는데요.”
“음…… 그래?”
“네. 지금 이 모습은 아무래도 이상하다구요. 항주는 이 동로(東路)를 이용해서 남경과 상해를 오가는데, 여기가 이렇게 한적해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매일 이렇다면, 항주에 있는 상인들은 다들 말라죽을 걸요?”
“……그래, 이상하구나.”
“네, 이상하죠.”
운화와 진구는 서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표정이 굳어져 버렸다.
전쟁터에서 살다 보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철칙이 있다.
작은 것도 쉽게 넘어가지 마라.
그냥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면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빈틈. 그런 작은 빈틈이 곧 자기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동료들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게 전쟁터인 것이다.
“진구.”
“네, 둘째 형님.”
“북동쪽, 거리 삼십 장. 지켜보는 눈이 있다.”
다각. 다각.
운화와 진구의 침묵 속에서, 그들의 애마 은수와 삭풍이 걸음을 옮기는 소리만 관도를 울렸다.
진구는 그 말을 들었다고 곧장 그쪽을 쳐다보는 그런 초짜배기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다. 얼굴을 정면을 향한 채로,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떴을 뿐이다.
“네, 확인했어요.”
“숫자도 알겠어?”
“둘, 아니, 셋. 세 명이 한 조인 모양이네요.”
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기척을 숨기지 못하는 걸 보면 별거 아닌 놈들이야.”
“헤에, 산적일까요?”
“그렇겠지.”
“어디서 할까요?”
진구는 마치 재밌는 장난을 발견한 것처럼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운화는 이미 새카맣게 물든 밤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말했다.
“오늘 만월(滿月)이구나.”
만월. 보름달.
진구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월전(月戰)인가요?”
“장소는 저 언덕 끝.”
“미끼는요?”
“물어볼 것 있나?”
“하긴, 그렇네요. 그럼 형님, 내기라도 할까요?”
서로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대화였다.
진구는 도전적으로 눈을 빛냈다.
“아서라. 넌 아직 안 돼.”
“하하하! 그래도 해 봐야 알죠!”
진구는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 걱정도 없는 듯한 맑은 목소리로.
아마 이 목소리를 들은 산적들은 상대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방심할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네요.”
“뭐, 그렇지. 민생과 치안을 방치한 나라가 죄다.”
“오오!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캬―, 둘째 형님이 관리가 되셨으면 나라가 훨씬 좋아졌을 텐데요.”
“난 대형 곁에 있을 거다. 날 관리로 만들고 싶으면 대형부터 설득해.”
운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진구의 농담을 다 받아 주었다.
“쳇! 그럼 불가능하죠. 대형이 어디 관복 입을 성격인가요?”
“하하! 글쎄다. 대형이 막상 관리가 되면 의외로 잘할지도 모르겠는데?”
“헤에, 그런가요?”
진구는 장난스런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으음, 하긴요. 만약 된다면 동창에 가셔야 할 거예요. 대형이 나서서 그 살벌한 눈빛으로 ‘다 알고 왔다.’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고관대작이든 뭐든 벌벌 떨면서 없던 죄도 다 말할걸요?”
“뭐? 하하! 맞다! 맞아! 네 말이 맞구나.”
“헤헤. 아―, 벌써 그립네요. 대형의 그 살벌한 눈빛.”
두 사람은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언덕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나지막한 언덕의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진구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둘째 형님, 여기서 쉬고 가시죠?”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곧장 말에서 내렸다.
☆ ☆ ☆
어두운 숲의 수풀 속.
울창한 수풀이 미미하게 흔들리며, 한껏 몸을 낮춘 사내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이, 저놈들 쉬나 본데?”
“기회 아냐? 습격할까?”
작은 짐승들의 가죽을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가죽옷을 입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사내들이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은 근처 동산채(東山寨)에 소속된 산적들.
본래는 이곳의 정찰과 감시가 임무지만, 단둘밖에 안 되는 여행객을 보자 욕심이 생긴 것이다.
“요새 우리 산채를 장악한 그놈들 때문에 남는 것도 없잖아?”
“맞아. 이러다 내 처자식 굶어 죽이겠어.”
“어떻게든 몰래 빼돌려야 해. 그놈들이 모를 때 영업을 해야 한다고.”
세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다만 전투원도 없이 이렇게나 소수로 영업을 하는 건 처음이라 그들도 긴장했다.
“저기, 괜찮을까?”
“당연하지. 원래 산적들이랑 제대로 싸우려는 놈들은 없어. 숨어서 활 좀 쏜 다음에, 우리가 ‘동산채 소속이다!’라고 겁만 주면 된다고.”
“그러면 되려나?”
“그럼. 그렇게만 하면, 알아서 통행세로 내고 지나간다고. 쉬운 일이야. 쉬운 일.”
“그, 그래도 가끔 반항하는 놈들도 있잖아?”
한 사람이 겁을 먹자, 세 사람 중 가장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주먹으로 그 사내의 어깨를 툭 때렸다.
“이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나? 그리고 솔직히 무림인들만 아니면 산적들한테 대드는 놈들 따위 아무도 없어.”
“그, 그런가? 그럼 저놈들은?”
“무림인은 아니야. 내가 분명히 봤다고. 무기도 없었어.”
험상궂은 사내는 애써 좋은 말만 하며 사내를 달랬다.
사실 그는 날이 너무 어두워서 상대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사람에게 야밤에 삼십 장 거리는 너무나 먼 거리인 것이다.
그래도 일단 무기가 없었다고 말해 주니, 겁먹었던 사내는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세 사람은 살금살금 기척을 줄여 가며, 말을 세우고 쉬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히히힝―!
작게 피워 놓은 모닥불 앞. 투레질을 하며 괜히 앞발로 땅을 툭툭 박차는 말 두 마리가 보인다.
이미 십 장 안쪽까지 들어온 그들은 그제야 확실하게 보이는 말의 모습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어이, 말이 보통 말이 아닌데?”
“명마야. 저 잘빠진 몸매 좀 보라고. 하루에 천 리도 거뜬히 가겠어.”
세 사람의 눈빛이 강해졌다.
말이라는 건 평범한 촌민들이 느끼기엔 아득히 비싼 고가의 동물. 게다가 저런 명마라면 부르는 게 값일 것이다.
“호, 혹시 대단한 사람 아니야? 저런 말을 가지고 있는데?”
“…….”
“우리, 돌아가자. 느낌이 안 좋아.”
처음부터 겁에 질려 있던 사내가 돌아가려고 한다.
나머지 두 사람은 황급히 그를 뜯어말렸다.
“안 돼!”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지.”
“이번 한탕만! 이번 한탕만 하면 된다고. 저 주인 놈들한테서 저 말만 빼돌려도 한탕 제대로 해 먹을 수 있어!”
두 사람은 강한 어조로 그를 설득했고,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이 일제히 활에 화살을 먹이고 시위를 당긴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피슈슈슉―!
모닥불 근처에 위협하듯 땅에 박혀 드는 세 개의 화살.
그와 동시에, 활을 바닥에 내려놓은 세 사람이 각자 칼을 빼 들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와아아아―!”
“모두 동작 그만!”
“여긴, 우리 동산채의 영역…… 엥?”
힘차게 달려 나와 허공에 칼을 마구 휘두르던 세 사람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없다……?”
“이게 무슨?”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닥불 앞에 앉아서 두런두런 뭔가를 이야기하던 두 사람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귀신? 우리가 헛 걸 봤나?”
“하지만 봐, 말은 그대로 있…… 컥!”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맨앞에 있던 사내가 앞으로 꼬꾸라진다.
그리고 동시에.
푸욱―!
무언가를 뚫는 듯한 중저음이 들린다.
위에서 아래로.
걸음을 내딛으려던 다리 사이를 정확하게 관통한 철창은 창날을 땅속 깊이 파묻은 채 꼿꼿하게 서서 몸체를 부르르 떨고 있었다.
“으, 으어어…….”
제법 강단이 있어 보이던 거구의 사내였으나, 오줌이라도 쌀 듯한 얼굴로 그대로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아 버렸다.
옆에서 보면 영락없이 몸이 꿰뚫린 모습이었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사내의 사타구니 사이는 철창이 지나갈 때의 마찰열로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까맣게 타 있었다.
한 치만 올라갔어도 사내의 후손이 끊겼을 것이다.
삼류 산적 따위가 의연한 척 버텨 낼 만한 일이 아니었다.
“으, 으아. 으아아― 으아아―!”
강단 있는 사내들이 순식간에 당해 버렸는데, 원래부터 겁이 많던 사내는 어떻겠는가?
그는 동료들 앞에서 허깨비처럼 휙 솟아오른 두 청년을 보며 곧바로 등을 돌려 걸음이 나 살려라 도망쳤다.
그런데 하필이면 도망치는 방향이 말들이 묶여 있는 장소였다.
“잠깐! 멈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놀란 듯한 외침이 들렸지만, 사내에겐 이미 들리지 않았다.
히히힝―!
“비켜! 비켜! 멍청한 말들!”
잔뜩 겁에 질려 눈에 뵈는 게 없던 사내는 투레질을 하는 말들에게 욕을 하며 주먹질을 했다.
그런데 말들이 콧김을 거칠게 내뿜을 뿐 비키지 않는다.
그래서 사내가 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 대 치려고 하는데…….
히힝!
“어……?”
체구가 조금 작지만 다부져 보이는 갈색 말이 갑자기 등을 돌렸다.
그리고 갑자기 눈앞에 번쩍이는 별빛.
빠아악―!
“케엑……?!”
사내의 이성은, 하늘 높이 훨훨 날아오른 몸과 함께 아득한 어둠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 ☆ ☆
“아아, 하필이면……!”
진구는 탄식했다.
도망을 쳐도, 왜 하필 그리로 가는가!
슬쩍 포위망을 열어 놓은 작은 오솔길도 있고, 울창한 수풀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삭풍에게로 달려드냔 말이다.
“차라리 나한테로 오지…….”
그랬으면 힘 조절이나 해 줬을 텐데.
삭풍이라는 놈은, 애초에 전장에서 병사들을 밟고 뛰어다니기를 좋아하는 거친 놈이다. 게다가 덩치는 좀 작아도, 힘으로만 따지면 흑룡을 제외하곤 아무도 견주지 못하는 장사였다.
“죽지는 않았으려나?”
진구가 돌아보니, 이미 운화가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죽지 않았다.”
“휴우, 다행이네요.”
“하지만 갈비뼈가 넉 대나 부러졌어. 아마, 몇 달은 누운 채로만 지내야 할 거다.”
운화는 왼쪽 손은 사내의 가슴 위에 얹고, 오른쪽 손으로 뒷목을 잡은 채 힘을 줬다.
우드득―!
사내의 몸이 갓 잡은 붕어처럼 펄떡대고, 섬뜩한 소리와 함께 부러진 갈비뼈가 제자리를 찾았다.
진구는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며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기절해 있는 사람이 저만큼 반응할 정도면 맨정신으론 버티기 힘들지 않았을까?
“너, 이 녀석. 너 때문이야! 내가 여기선 사람을 차면 안 된다고 했어, 안 했어!”
히힝…….
“어어? 모른 척한다고 될 일이야. 이게?”
히힝! 히히힝!
삭풍이 억울하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투레질을 한다. 달려든 건 저놈이 먼저인데 왜 자기가 혼나냐는 식이다.
진구는 허리에 척 손을 얹고 삭풍을 노려보았다.
삭풍도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눈을 피하지 않았다.
“너 말이야. 사람을 네가 발로 차 버리면 말이야. 맞는 사람은 얼마나 비참한 기분이 들겠어? 엉? 네가 좀 이해해 주란 말이야. 우리들 사이에서, 말보다 못한 놈이라는 게 얼마나 큰 욕인 줄 아냐? 넌 인정도 없…… 아니지 마정(馬情)도 없어? 저 사람은 앞으로 평생 말을 무서워하며 살아갈 거란 말이야. 말 그림자만 봐도 갈비뼈의 고통을 되새기며 벌벌 떨겠지. 넌 한 남자에게 그런 상처를 남겨 준 거란 말이야!”
히히히힝―!
“어어? 야! 너 정말, 반성 안 할 거야?!”
히히힝! 히히히힝―!
삭풍은 그 말을 듣자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들고 가슴을 쭉 폈다.
약한 수컷은 약한 대로 사는 거다.
우월한 이 몸이 그런 놈들을 신경 써 줄 필요는 없다.
갈색의 명마는 그런 말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거만한 눈빛으로 진구를 내려다봤다.
“이게 진짜……!”
“진구, 연설은 그쯤 해 둬라.”
진구는 꽉 움켜쥐었던 주먹을 펴고 몸을 돌렸다.
운화가 어느새 고른 숨을 내뱉는 사내를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또 다른 산적이다.”
“예?”
“우리 때문은 아닌 것 같고,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어. 곧 이쪽으로 올 것 같다.”
운화의 눈이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언덕의 옆에 있는 산을 향했다.
잠시 후 진구도 알게 되었다.
수풀이 흔들리고 나뭇잎이 바스라진다. 밤공기가 진동하며 기척을 내뿜는다.
도망치는 것은 한 사람. 아니,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을 쫓는 것은 십여 명이 넘는 건장한 산적들이었다.
탁!
“가르륵…….”
상황이 변하자마자 갑자기 제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운화는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던 사내의 뒷목을 쳐서 쓰러뜨렸다. 마치 구름처럼 부드럽고 현묘한 몸놀림이었다.
안 그래도 가랑이 사이에 박힌 철창 때문에 긴장해 있던 그는 결국 실금을 하며 기절해 버렸다.
“둘째 형님?”
“시간이 없어. 이들이 미리 경고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아…… 그렇죠. 그렇네요.”
진구의 얼굴에 즐거운 듯한 미소가 만들어졌다.
진구에게 있어 전투는 또 하나의 놀이였다. 많이 하면 할수록 즐거운 종류의 것이다.
“이번에도 월전인가요?”
“아니, 야전(野戰)으로 하자.”
“헤에, 야전이요? 좋네요. 야전, 제가 좋아하잖아요.”
“너무 날뛰진 말고.”
“하하! 당연하죠, 형님!”
야전이라면 작전보단 개인의 기량이 가장 중요한 자유로운 싸움.
진구의 얼굴이 싱글벙글이었다.
“아……!”
운화가 갑자기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형님?”
“진구, 느꼈나?”
“무엇을…… 아……!”
이내 진구도 깨닫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운화는 그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가자.”
“예!”
사사삭―
두 사람의 모습은, 불어오는 바람에 근처의 나뭇잎이 한 번 흔들리는 순간, 귀신처럼 사라져 버렸다. 자리에 남은 것은 제각각의 방법으로 기절한 세 사람. 그리고 불만스럽게 투레질을 하고 있는 명마 두 마리뿐이었다.
“헉……. 헉…….”
밤의 숲을 정신없이 달려가는 두 사람은 마치 그들이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양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원인은 간단하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크게 다친 것이다.
중년의 부부는 서로를 의지하며 이 험한 산기슭을 미친 듯이 달려왔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버티시오. 버티시오. 정신을 잃으면 안 되오.”
“여보…….”
중년인은 비통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부인은 다쳐 있었다. 산채에서 도망칠 때, 감시하고 있던 산적 놈들이 쏜 화살이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관통한 것이다. 곧바로 뽑고 지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밤중에 험한 길을 달려온 그녀는 상처가 더욱 벌어져 온몸이 피범벅으로 변해 있었다.
“여……보…….”
“정신 차리시오!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
“부인! 부인! 깨어 있소?”
“……예.”
“절대로, 정신 놓지 마시오. 곧 도착한단 말이오.”
피가 빠져나가면 원래 정신도 몽롱해지는 법.
중년 여인은 점점 대답하는 시간이 느려지고 있었다.
중년인의 얼굴은 점차 다급해졌다. 부인의 상세는 심각하고, 이 사태를 해결할 방도는 없다. 장사에 미쳐 지내느라 무공 같은 건 배워 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아아……!”
그때, 외마디 신음과 함께 여인의 몸이 축 늘어졌다.
“부인? 부인?! 부인!!”
“미안……해요. 어서…… 도망…….”
“정신 차리시오! 당신을 두고 내가 어딜 간단 말이오!”
중년인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그가 평생을 두고 사랑한 여인이다. 한때 항주제일미로 불렸으며,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고운 미색을 유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
그녀가 지금, 숨을 헐떡이며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고마운…… 분…….”
“부인!”
“연이는…… 어찌…… 되었을까요……. 보고 싶은…….”
“봅시다! 보면 되는 거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어나서, 직접 두 눈으로 보면 되잖소!”
중년 여인은 창백한 안색 위로 애잔한 미소를 띠었다.
“여……보…….”
“부인!”
“사랑…….”
중년 여인은 마지막 말조차 끝까지 하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중년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부이인―!”
너무 많은 출혈 때문에 고통이 없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일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중년인은 고개를 숙이고 오열했다.
때를 탔음에도 여전히 고급스런 청색 비단옷 위로 사내가 흘리는 뜨거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사사사삭―.
그런 중년인의 주위를 일단의 무리가 포위했다.
두 사람의 뒤를 쫓던 동산채의 산적들이다.
그들은 활과 칼 같은 흉흉한 무기를 든 채 장난치듯 잔인한 얼굴로 두 사람을 둘러쌌다.
“큭큭. 거봐. 내가 분명히 맞췄다고 그랬지?”
“젠장. 진짜네? 아니, 가슴도 뚫린 년이 어떻게 이렇게 멀리 뛰었대?”
“한 냥 빚진 거야. 기억해 둬.”
마치 토끼나 여우를 사냥한 듯한 가벼운 말투였다.
킥킥거리던 그들은 뒤따라서 한 사람이 나타나자, 슬쩍 입을 다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동산채 채주 곽정(?訂).
야밤의 추격전을 지시하고는 꽁지가 빠져라 달려온 장본인이었다.
“이런, 죽어 버렸나?”
곽정은 자신의 밤송이 같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아직 얼굴도 반반하던데, 진작에 팔아 버릴 것을……. 젠장! 그러게 왜 계속 숨겨 둬야 한다고 그래 가지고…… 괜히 내가 개값만 물게 생겼네.”
곽정은 누군가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도리를 벗어난 그의 말에, 부인의 죽음에 오열하던 중년인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말을 조심해라! 산적질이나 하는 더러운 망나니 주제에!”
“……!”
주변의 동산채 산적들이 대번에 발끈했다.
“뭐야?”
“감히 어디서……!”
곽정은 손을 들어 올렸다.
“됐다, 됐어. 곧 죽을 인간이 뭔 말을 못 하겠냐.”
“천벌을 받을 것이다! 덜떨어진 잡종 같은 놈!”
“……어이, 입 좀 다물지?”
“평생토록 아무런 발전도 없이 이깟 산적질이나 하다 죽게 될…… 큭!”
그때, 두 사람 사이를 빛살처럼 갈라낸 가느다란 실선이 중년인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끄윽……!”
중년인은 고통에 신음하며 허리를 새우처럼 구부렸다.
저벅. 저벅.
그런 중년인에게 다가간 곽정은 어깨에 박힌 단검을 거칠게 붙잡고는 곧장 위로 뽑아 버렸다.
푸쉭―!
“끄아악―!”
하늘 높이 치솟는 붉은색 피.
듣는 이가 모골이 송연해질 법한 비명.
곽정의 눈빛이 불그스름해졌다.
“이봐. 내가 말이지,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아. 당신 집안에서 가져온 몸값도 다 딴 놈한테 빼앗겼고, 간만에 잡은 대박…… 그 뭐더라? 영달인가 하는 놈. 풍운객잔의 객주라나 뭐래나 했던 놈이 갖고 있던 번쩍거리는 금괴도 다 뺏겨 버렸단 말이야! 그런데 성질을 긁어? 정말로 힘들게 죽는다는 게 뭔지 보여 줄까? 앙?”
곽정은 피를 흘리는 중년인의 어깨를 발로 차서 기어코 바닥을 뒹굴게 만들었다.
울컥!
넘쳐흐른 피가 땅바닥을 적신다.
곽정은 중년인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아 올렸다.
“큭.”
“어? 웃어?”
그런데 그 순간, 중년인의 입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푸욱―!
“컥, 이, 이런 샹!”
곽정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감촉.
딴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곽정은 그 순간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단검을 휘둘러 중년인의 왼쪽 가슴에 박아 넣었다.
푸우욱―!
뭔가를 깊숙이 꿰뚫는 묵직한 소리.
중년인은 털썩 주저앉았다. 단검을 가슴에 꽂은 채, 비틀린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부인 옆에 나란히 쓰러졌다.
곽정이 살펴보니, 그의 옆구리를 파고든 건 여성의 은비녀였다. 아까 부둥켜안고 울고 있을 때 몰래 머리에서 챙겨 둔 모양이었다.
“이런 썅! 오늘 마가 꼈나…….”
곽정이 인상을 찌푸리며 툴툴거리는 찰나였다.
“그래. 마가 낀 모양이네.”
휙―.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갈색 피부의 청년이 나타나 그를 노려보았다.
“뭐, 뭐야?!”
놀란 것도 잠시, 곽정 주변의 수하들이 모두 들고 있던 무기를 들어 올렸다.
대번에 흉흉해지는 분위기.
웬만한 사람은 지금 이 광경에 무릎을 꿇을 텐데, 청년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청년은 바닥에 쓰러진 중년 부부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 뒤, 날카로운 눈빛으로 곽정을 노려봤다.
“당신, 그 입에 볼일이 있다.”
“……뭐야? 이 호적에 피도 안 말랐을 놈이!”
“호적에 피가 말랐든 안 말랐든. 그건 호적을 담당하는 관리가 신경 쓸 일이야. 그보다 아까 말했던 풍운객잔에 대해 자세히 말해 봐. 객잔 주인이 뭘 가지고 있었다고?”
“뭐?”
“금괴라고 했지? 분명 금괴라고 했어. 하! 내가 귀를 의심했다니까?”
곽정은 이건 또 무슨 미친놈인가 하는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다가 손을 휙 들어 올렸다.
“죽여!”
피슈슈슈슉―!
주변에서 한 점을 향해 화살 수십 개가 날아간다.
그리고,
차차차창!
허공에 생겨난 둥그런 막과 함께 화살 수십 개가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자꾸 귀찮게 할래?”
진구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날아오는 화살은 창으로 다 쳐 냈다. 문제가 있다면 그가 화살을 쳐 내는 모습을 보자마자 곽정이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하더니,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갔다는 점이다.
피슈슈슉!
“아, 진짜!”
게다가 치밀한 명령에 따라 계속해서 날아오는 화살들.
“……다 죽었어!”
폭풍이 휘몰아친다.
커다란 방패처럼 회전하는 창대에 화살들이 모조리 튕겨 나간다.
곧바로 ‘쿵―’하고 내딛는 발.
진구는 그대로 달려들어 양손으로 창을 잡고 도끼를 사용하듯 창을 휘둘렀다.
퍼억!
둔탁한 굉음과 함께 창대에 허벅지를 얻어맞은 산적 세 명이 공중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면서 철푸덕 엎어졌다.
“헉……!”
“마, 말도 안 돼!”
경악하는 산적들.
진구는 그들에게 창대를 휘두르는 것으로 보답했다.
갖가지 비명과 함께 산적들이 쓰러졌다. 중간에 전의를 상실한 산적 몇 명이 도망을 치려 했지만, 진구는 애초에 맨발 기동력으로는 대(隊)에서도 최고였던 자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단 한 명도 도망치도록 놔두지 않았다.
“으으…….”
“끄윽…….”
순식간에 열댓 명이 넘는 산적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했다.
진구는 “흥!”하고 코웃음을 토해 낸 뒤, 오연한 얼굴로 그제야 들고 있던 창끝을 내렸다.
“아차! 두목은……!”
그제야 생각나는 두목의 행방.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진구의 눈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두목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떠는 두목이었다.
그리고 그 두목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운화의 모습이 보였다.
‘하여간, 둘째 형님. 뭐 하나 놓치는 법이 없다니까.’
철저하고 냉정하기로는 아마 명군 전체에서 최고일 것이다.
안심한 진구가 더 싸울 놈들은 없는지, 한번 둘러보고는 운화의 곁으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의 발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어……?”
깜짝 놀라서 돌아보자, 처음에 두목에게 단검을 맞고 쓰러졌던 중년인이 희미한 눈빛으로 그의 바짓단을 붙잡고 있었다.
“살아 있었어요?”
“…….”
대답은 하지 못하고, 희미하게 웃는다.
진구는 그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진구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세요?”
전쟁터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슬퍼할 필요는 없지만, 마지막을 존중하고 말은 들어줘야 한다.
“진……가장…….”
“예, 진가장.”
“휘……연…….”
“휘연? 이름이에요?”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그는 소매 속에서 손바닥만 한 천 조각을 꺼내 진구에게 건네주었다.
진구가 무슨 내용인지 들여다봤으나, 한자는 한자인데, 도저히 알아볼 수 없게 비틀려서 써 있는 기괴한 문자였다.
“으음?”
암호 같은 건가 하고 천 조각을 이리저리 돌려 보는데, 중년인이 그의 바짓단을 잡아당겼다.
“부탁…… 전해…….”
“알겠어요. 전해 드릴게요. 근데 진가장은 항주에 있어요?”
“…….”
“고개를 끄덕인 거죠? 그럼 됐어요. 전해 줄 수 있어요.”
그 말에 안심했는지 중년인의 눈에서 급격하게 생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맙…… 이 은혜…… 천당…….”
“천당까지 가서 은혜 갚지 않아도 돼요. 이깟 거 별거 아니니까.”
진구는 그렇게 말하고는, 보란 듯이 그 천 조각을 품 안에 소중하게 집어넣었다.
중년인은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부인을 바라보며,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음…….”
죽어서까지 금슬이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진구는 그 모습을 보며 복잡 미묘한 기분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는 돌아서서 운화를 향해 걸어가려다가, 머리를 벅벅 긁은 뒤, 다시 몸을 돌려 중년 부부에게 돌아왔다.
“에잇! 그냥 은혜 갚아요. 내가 지켜볼 거예요. 도와주나 안 도와주나.”
진구는 쓰러져 있는 산적의 허리춤에서 박도를 빼앗아 그걸 부삽 삼아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 하도 하던 일인지라, 몇 번 파내기도 전에 금세 커다란 구덩이가 두 개나 만들어졌다.
“두 분이 사이가 그렇게나 좋은데, 어떻게 산에 버려두고 가요? 보나 마나 일 년은 마음이 찜찜할 게 분명한데. 치사하다, 치사해. 아저씨, 아줌마. 이럴 거 다 알고 있었죠?”
진구는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정성을 들여 두 사람을 나란히 파 놓은 구덩이에 각각 내려놓고, 흙을 덮어 무덤을 마련했다.
별로 대단할 것 없는 것이지만, 나름대로 정성이 들어간 봉분 두 개가 산 중턱에 만들어졌다.
“그럼, 극락왕생하시길…….”
전쟁터에서 대충 주워들은 말로 염불을 외우는 진구였다.
거기까지 하고 고개를 들자, 두목의 앞에 있던 운화가 그런 진구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 했나?”
“……하하. 죄송해요. 늦었죠?”
“아니. 마침 이야기를 다 들은 참이다.”
사실 이야기는 훨씬 전에 끝났지만, 운화는 그런 진구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형이 풍운객잔에 계신 모양이다.”
“어엇! 진짜요? 그쵸? 제가 금괴라고 들었던 거, 금괴 맞죠?”
적룡기마대원들은 모두가 퇴역금으로 금괴를 가지고 있었다. 풍운객잔 전 주인이 금괴를 갖고 있었다면, 그건 장기린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터였다.
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풍운객잔의 전 주인이라는 자가 이 산을 넘어가다 잡혔던 것 같다. 산적들이 짐을 뺏었는데 금괴가 두 개나 있었고.”
“그, 금괴가 두 개요?”
“그래.”
진구는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두 개라니…… 금괴 두 개라니……! 그 낡아 빠지다 못해 폐가 직전인 건물을 금괴 두 개나 주고 샀다구요?! 젠장, 그 전 주인 놈 어디에 있대요? 안 되겠어요. 내가 그 자식을 잡아서 족쳐야지……!”
“전 주인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갔다더구나.”
“젠장……! 근데, 대형도 그렇지! 제가 분명히 얘기해 드렸었다구요! 금괴 하나면 객잔을 두 개는 살 수 있는데, 특히 풍운객잔은 금괴 반 개도 안 된다고……!”
흥분해서 방방 뛰는 진구를 보며 운화는 설핏 웃었다.
“대형이 물건값 흥정하는 것 본 적 있냐?”
“……끄응, 아뇨.”
“그런 거야. 분명, 전 주인이 바가지를 씌우고, 대형은 군말하지 않고 그 가격에 샀겠지. 하지만 내 장담하건대, 아마 대형은 그게 바가지를 쓴 거라고 말해도 아쉬운 마음이 하나도 없을 거다.”
“으윽…….”
진구는 한숨을 푹 쉬었다.
“분명 ‘그때의 인연대로 값을 치른 거다. 나의 탓이니, 후회는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하하! 정말 꼭 닮았다!”
운화는 드물게 큰소리로 웃었다.
“대형은 워낙 사람의 그릇이 커서 그런 건지, 그런 쪽으론 이상할 만큼 무지식(無知識)하고 무관심하니까.”
“그러니까요! 도사나 중이라도 그렇게는 못 살걸요?”
“하하, 확실히 도사보다 더한 분이지.”
“으음……. 그래도…… 끄응, 분해요. 으윽, 분하다!”
진구는 아무리 그래도, 아끼는 사람이 바가지를 썼다는 사실에 분을 참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운화는 부드럽게 웃으며 씩씩거리는 진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쉬우면, 산채로 가서 되찾아 오면 될 거 아니냐.”
“예?!”
진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기, 그 말은, 산채로 쳐들어가시게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얼마 전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서 산적들을 제압했다던데, 풍운객잔의 전 주인을 데려간 것도 그놈들이야. 과도하게 산적질을 시켜서 동로(東路)의 통행을 막은 것도 그놈들이고.”
“에? 산적질로 통행을 막아요? 왜요?”
“글쎄. 그건 모르겠다. 다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진구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씩 웃었다.
“저야 좋죠, 뭐. 아직 제대로 몸도 못 풀기도 했고.”
“그래. 그럼 한번 가 보자.”
“하하, 옙!”
곧장 산을 오르려던 진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둘째 형님. 그런데 산채는 어디에 있대요? 저 산 위에 있으려나?”
“나도 모른다.”
“……예에?!”
“하지만 우리에겐 안내해 줄 사람이 있잖냐.”
운화는 차분한 눈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동산채 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 차분한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두목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오, 정말 좋은 생각인데요? 어이, 두목. 당장 우릴 산채로 안내하……형님!”
차차창!
다급하게 창을 휘두르는 진구.
운화도 재빨리 허리춤의 장군검을 뽑아 들고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 냈다.
화살 공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이삼십 발 정도를 쏘아붙이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공격이 뚝 끊겨 버렸다.
“이게, 무슨……!”
진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날아오는 화살이 놀라운 게 아니다. 화살 공격을 받을 때까지, 그들이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당했구나.”
“예? 혹시, 다치셨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사람 말이다.”
운화가 가리키는 곳을 보며, 진구의 눈이 부릅떠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겁에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던 동산채의 두목이, 지금은 화살을 여섯 발이나 가슴에 꽂은 채 쓰러져 있었다.
“두목을 죽이기 위해 우리의 시선을 돌린다. ……싸움에 익숙한 자들인데요?”
진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게다가 저길 봐라. 산적들까지 다 죽였어.”
“예에?! 저기도요?”
“목격자를 살려 두지 않는다……. 산채를 지워 버릴 셈이군. 역시 보통 놈들이 아니야. 가자, 뒤쫓아서 붙잡아야 해.”
운화는 다급하게 신형을 뽑아 올렸다.
구름 같은 몸놀림으로 앞으로 쑥쑥 나아가는 몸. 극성에 이른 제운종이었다.
“형님! 같이 가요!”
그에 뒤따르는 진구의 몸놀림도 예사롭지 않다.
하체뿐만이 아니라 상체까지 같이 움직이며 호표(虎豹)처럼 펄쩍펄쩍 뛰는 몸놀림.
제운종 같은 현묘함은 없지만, 그 속도와 무게감은 감히 경시할 수 없는 적룡기마대의 비전 신법 호왕보(虎王步)였다.
쉬이익― 사사삭―
바람이 뒤처질 만큼 빠른 속도로 주변의 광경이 멀어져 갔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수풀 들을 뛰어넘으며 달리길 잠시.
두 사람의 눈에 등 뒤에 활을 맨 채 놀랄 만큼 능숙하게 산을 타고 오르는 십여 명의 무리를 발견했다.
‘대머리?’
운화는 의아하게 눈을 찌푸렸다.
몇 명은 가죽 모자를 쓰고 있어서 확인할 수 없지만, 모자를 쓰지 않은 모두가 반질반질할 만큼 머리를 빡빡 밀어 둔 대머리였던 것이다.
그들도 운화와 진구를 발견했는지 자기들끼리 뭐라 쑥덕거리더니, 갑자기 두 사람이 대열의 뒤로 떨어져 나왔다.
그들은 허리춤에서 묵직한 박도를 뽑아 들고는 운화와 진구의 앞을 막아섰다.
‘한꺼번에 멈춰 서서 상대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떨어져 나와서 상대의 속도를 늦춘다. 시간을 중요시하는 이 움직임…… 군(軍)이다. 이자들은 군문 출신이야.’
운화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군 출신이라니…….
대체 어디에 있던 놈들일까.
운화는 이번엔 왼쪽 손으로 장군검을 뽑아 들었다.
무당 비전 양의심공(兩意心功) 덕분에 좌수검과 우수검을 함께 쓸 수 있게 된 부운화.
그는 상대의 기량을 확인할 때는 좌수검을 사용하는 버릇이 있었다.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마주 달려오는군. 저돌적이야.’
상대는 달려오는 운화에게 질세라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달리는 만큼 거리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운화는 상체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한쪽 발을 비스듬하게 돌려 땅을 짚었다.
빙글 회전하는 몸.
그 기세를 탄 채로 상대에게 검을 휘두른다.
쩌어엉!!
‘막았어?’
운화는 놀랐다.
한쪽 팔 정도는 벨 거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상대는 그의 일격을 막아 낸 것이다. 두 손으로 박도를 잡고, 주춤 한 걸음 물러서며 그것을 흘리듯이 후퇴한다.
다친 곳은 없다. 다만 놀랐는지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을 뿐이다.
‘진구도…… 막혔군. 놀랍다. 이자들은 대체 어떤 자들인가?’
살짝 옆을 확인해 보니, 진구도 창을 한 번 휘두른 채로, 기분 나쁜 듯이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물론 긴장할 상대는 아니다. 내력이랄 것도 없는, 오로지 육체만을 단련한 자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놀라운 것이다. 비록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라곤 하나, 적룡기마대의 부대주 부운화의 일 검을 막을 만한 자들이라니.
‘정체를 밝혀 주겠다.’
눈을 번쩍 뜨고는 검을 올려쳐서 상대의 도를 튕겨 낸다.
울리는 검극.
상대는 다시 튕겨지듯 후퇴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속도로 운화는 상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쩌어엉―!
“큭……!”
억눌린 신음.
불꽃이 튀면서 박도와 함께 사내가 통째로 날아간다.
이번엔 검을 내려친다.
공중에선 자세를 가다듬지도 못하고, 그는 간신히 도를 옆으로 해서 공격을 막아 내려 한다.
힘 대 힘.
파괴력과 파괴력의 싸움.
‘가소롭다!’
참격(斬擊)에 있어서는, 설령 상대가 장기린이라고 해도 밀리지 않는 부운화인 바, 그의 일격 일격은 온몸에서 웅장하게 소용돌이치는 내력을 통해 필살의 위력을 지닌다.
쩡!
부수듯 내리치는 검.
바위가 깨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살 난 도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키오오옷―!”
상대가 기묘한 기합성을 외친다.
도를 잃고 맨몸이 되었음에도 줄어들지 않는 투기(鬪氣).
상대는 그 불굴의 정신력으로, 무모하리만큼 단순하게 어깨를 밀고 들어와 운화의 허리를 잡아채려 들었다.
‘잠깐, 허리?’
몸을 낮추는 부보(퉕步)
그 이후에 이어진 등천각(登天脚)으로 상대의 턱을 차올리며, 운화는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
지금의 이 싸움. 처음 보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방식이 놀랍도록 익숙하다.
무기를 잃었다고 해서 곧장 허리를 잡아 오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남권북퇴(南拳北腿)라고 하지 않는가.
맨손이 되면, 남쪽 무인들은 주먹을, 북쪽 무인들은 각법을 믿는 것이 보통이다.
‘이자, 설마……?’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 버린 상대를 멍하니 응시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창대로 머리를 후려쳐 상대를 기절시킨 진구도 벌레를 씹은 것처럼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둘째 형님, 이자들…….”
진구도 운화와 같은 것을 느꼈는지 불안한 목소리로 말한다.
운화는 고개를 들어 산의 상층부를 응시했다.
어느새 나머지 사내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비정하게, 이 둘만을 남겨 놓고 떠나 버린 것이다.
휘이잉―.
뜨거웠던 싸움의 열기를 식히듯, 산정의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집요했다. 실력 차가 나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졌을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진구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았나? 이들의 싸움법?”
“…….”
“멈춰서 싸우기보단 달려들며 싸우고, 포기라는 것을 모르며, 생의 모든 불꽃을 태울 때까지 투쟁한다.”
진구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방금 운화가 읊은 구호는 북쪽에선 태평가보다 더 유명한 말이다.
“텐챠이 수호대…….”
쿠빌라이 가(家).
몽고의 지배자 칸의 가문을 지키는 최강의 수호장 텐챠이.
그리고 그가 이끄는 최고의 호위대.
“쿠빌라이의 충견들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이지?”
스스로 자문하듯 되묻는 운화의 말속엔 숨길 수 없는 동요가 드러나고 있었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던 북쪽의 싸움.
그것은 겨울이 되면 돌아오는 싸늘한 북풍처럼, 어느새 그들의 운명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이 산채, 그냥 지나칠 수 없겠다.”
운화의 말에, 진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다그닥! 다그닥!
불과 얼마 지나기도 전에, 험한 산로를 질주해 그들에게 다가오는 두 마리의 명마가 있었다.
“가자.”
긴장된 마음을 품은 두 사람. 험난한 북방의 대지를 휘젓고 다니던 이인(二人) 이마(二馬)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음?”
동쪽의 관도를 타고 걸어가던 장기린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반색했다.
‘전투가 있었나? 그럼 여기군.’
전투가 있었다면, 이 근처에 산적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장기린은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파헤치듯 뭉그러진 수풀.
모닥불을 피웠던 흔적.
그리고 그 근처에 박혀 있는 세 개의 화살들.
“위협 시(矢). 그 뒤에 세 사람이 뛰어나왔고, 각자 말을 타고 있던 두 사람은 그들을 물리쳤다…… 음?”
바닥에 남은 흔적으로 그때의 상황을 추측해 나가던 장기린은, 두 번째로 쓰러진 것으로 보이는 사내의 발자국 사이에, 동그랗고 깊은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
위치로 봐선 허벅지 사이를 지나갔을 각도다.
나무 위에서 매복을 하고 있다가 상대를 꼬치 꿰듯 꿰어서 제압한 것이다.
‘피가 없는 것을 보니 다치게 하진 않았다. 정확하게 조준을 한 걸 보면 제법 실력도 있군. 그런데…… 말, 그리고 창이라……?’
잠시 그리운 이름을 떠올리던 장기린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 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놈들은 지금쯤 전쟁터에서 정신이 없을 텐데.’
이 세상에 말이 몇 마리고, 사람이 몇 명이 있던가?
그중 우연이 겹쳤을 뿐이다.
‘만약 나를 찾으러 온다고 해도, 내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아는 그들이 이곳에 와 있을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장기린은 정신을 집중해서 다시 바닥에 남은 산적들의 흔적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발자국은 잠시 이 근처를 배회하다가, 갑자기 옆에 있는 산을 향해 뛰어갔다.
넓은 보폭, 다급하게.
그러다가 한순간, 뭔가에 놀란 듯 멈춰 선다.
“이건…… 생각보다 대규모군.”
장기린도 그 광경을 보며 놀랐다.
바닥에 널브러진 십여 구의 시체들.
모두가 활을 들고 거친 가죽 옷을 입은 걸 보니 산적들처럼 보인다.
그들은 반항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한 듯, 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화살에 죽임을 당했다.
‘어떤 이유에서 산적들은 모두 쓰러졌고, 그 틈을 노려 몇 십 명의 병력이 이들에게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전투 후에 만들어진 두 개의 봉분.’
장기린은 짧은 시간, 꽤나 정성 들여 만든 두 개의 무덤을 쳐다봤다.
‘동료를 묻어 준 건가? 아니면 원한?’
전투에 있어서 장기린의 안목은 굉장히 날카로운 편이다.
하지만 이곳에 섞여 있는 여러 가지 흔적은, 도저히 인과관계를 추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뒤통수를 맞은 것 같긴 한데…… 아직 모르겠군. 그보다, 이렇게 되면 위험하다. 산적끼리의 싸움이 일어났다면, 포로로 잡힌 휘연의 부모도 위험해.’
장기린은 들고 있던 창을 허리 뒤에 질끈 매고는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펄쩍펄쩍.
산에 잘 어울리는 호왕보가 자연스레 펼쳐진다.
뜨거워지는 심장, 달아오르는 피. 오랜만에 맛보는 전투 직전의 공기가 몸속을 긴장시킨다.
‘가자, 산의 정상으로.’
강렬하게 눈을 빛내는 장기린.
그는 친숙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산의 정상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갔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