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8화 (18/686)

3권

第十七章 ― 산중격전(山中激戰)

우르릉―!

번개가 쳤다.

어두운 밤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르는 새하얀 섬광 아래, 천계에서 하강한 듯 위풍당당한 명마에 올라탄 두 사람이 통나무로 엮어 만든 튼튼한 방책을 앞에 두고 서릿발처럼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단한 방책은 안쪽이 보이지 않도록 시야를 가리고 있었지만, 두 사람에겐 그 안의 광경이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코가 마비되어 버릴 것 같은 짙은 혈향.

이따금씩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 소리.

더군다나 두 사람은 십 년이 넘는 시간을 지금 이곳처럼 피 냄새 짙은 곳에서 보내서 누구보다 이런 공기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한창이네요.”

히히힝―!

키는 작지만 건장한 갈색의 종마 위에 앉아 있던 청년이 뭔가를 꾹 눌러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고삐를 움켜쥔 손등에도 힘줄이 시퍼렇게 돋아나 있다.

눈빛은 강렬했고, 씩 웃고 있는 입매에선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 옆에 서 있던 청명한 인상의 청년이 주의를 줬다.

“진구. 흥분하지 마.”

“……네.”

“우리 생각이 맞는다면, 그놈들, 지금쯤 한창 목격자들을 제거하고 있을 거다.”

청명한 인상의 청년 부운화는 서늘한 눈빛으로 방책을 응시했다.

“목격자라……. 평범한 산적들 말인가요?”

“그래. 정체를 숨겨야 할 그놈들에겐 산적들이 방해일 테니까.”

진구는 웃기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

“산적들도 불쌍하네요. 매번 양민들을 습격할 줄만 알았지, 습격받은 적은 없었을 텐데.”

“뿌린 대로 거두는 거지. 자업자득이다.”

부운화의 시선을 따라 진구도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봤다.

피슈슉―!

온몸이 끈적끈적해지는 불쾌한 공기 속에서 화살이 쏘아지는 파공음은 유난히도 선명하게 들렸다.

바람이 갈라지고, 그때마다 곳곳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뭔가가 털썩털썩 쓰러졌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진구는 고개를 저었다.

“일방적이네요.”

“그래. 반항도 못 하고 있어.”

“화살 숫자로 봐선 최소한 마흔 명 이상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도 그 정도일 거라 생각하지만, 올라가 봐야 확실히 알 것 같은데.”

두 사람의 시선이 이 장 높이가 넘는 방책 위를 향했다.

튼튼한 동아줄로 묶여 있는 통나무 방책.

그 위에 올라서면, 아마 안쪽에서 어떤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진구가 고민하는 얼굴로 물었다.

“부술까요?”

“부숴? 시선 다 잡아끌고, 양쪽에서 한꺼번에 공격받으려고?”

부운화가 어이없다는 듯이 묻자, 진구는 장난기가 조금 돌아온 얼굴로 씩 웃었다.

“뭐, 솔직히 그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너다운 대답이구나. 하지만 현명한 방법은 아니야.”

“흐음……. 그럼, 저 위로 올라가는 건가요?”

“그래, 그게 낫겠다.”

부운화가 솔선수범하여 말에서 내리자, 진구도 조금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며 말에서 내려왔다.

“방책을 부수면서 ‘짠!’하고 멋있게 등장하면 좋을 텐데요.”

“그런 허황된 만용 때문에 네가 매번 대형에게 혼나는 거다. 충동적으로 행동하면 계획을 짜는 게 아무 의미가 없어져.”

“쳇! 남아로 태어났으면 한평생 멋들어지게 살다가 가야죠. 그리고 예전에 대형은 그런 적이 있잖아요? ‘꽝!’하고 목책을 박살 내면서 정면으로 들어간 다음에, 당당하게 적장의 목 베어 오기.”

“대형이랑 너랑 같으냐?”

부운화는 입을 삐쭉거리며 툴툴거리는 진구에게 피식 웃어 준 뒤, 곧장 구름을 밟고 오르는 듯한 몸놀림으로 방책 위에 올라섰다. 신선처럼 유유자적하고 신묘한 모습이였다.

그걸 본 진구도 곧장 펄쩍 뛰어 따라 올랐다.

“헤에!”

“흐음…….”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보며 진구는 흥미로워하는 듯한 감탄성을, 부운화는 고민하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제법 실력이 있네요. 싸워 볼 만하겠는데요?”

“골치 아프군. 지형 조건이 너무 불리해. 다 잡긴 힘들겠어.”

산적들의 산채는 제법 구색을 갖춰 놓고 있었다.

석재를 쌓아서 지은 건물이 산채의 중심에 탑처럼 솟아 있었는데, 그 주변을 튼튼한 통나무 담장으로 반경 십 장 정도 원형으로 둘러놓았다. 바깥쪽의 통나무 방책과 안쪽의 통나무 방책, 그리고 중심에 솟아 있는 석탑.

마치 여러 개의 원을 겹쳐 놓은 듯한 모양새였는데, 산적들은 다들 그 원과 원 사이에 끼어 있었다.

바깥쪽 방책은 대머리 무사들이 지키고 있었으며, 안쪽의 탑 위엔 궁사들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화살을 쏘아 댔다. 앞뒤로 포위를 당해서 공격받는 셈이니, 산적들은 힘도 못 쓰고 쓰러져 갔다.

“역시, 훈련을 제대로 받은 놈들이야.”

“그러네요. 화살 쏘는 솜씨하며, 진형을 흩트리지 않는 태도하며, 군에서 제대로 배웠어요. 산적들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이유가 있었네요.”

부운화와 진구가 진중하게 살피는 사이, 상황은 급격하게 진전되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바깥쪽 방책을 통과하려는 자들은 모두가 대머리 무사들의 칼에 베여 쓰러졌고, 안되겠다 싶어 탑 쪽으로 숨어들려고 하는 자들은 궁사들의 화살에 맞아 픽픽 쓰러졌다.

피가 강처럼 흘렀고, 어느새 백여 명이 넘던 산적들 중에 살아서 서 있는 건 불과 서너 명밖에 남지 않았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단말마의 비명 소리만 점점이 들려왔다.

“끝났군.”

부운화는 그런 그들을 냉정하게 내려다보며 중심 탑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만약 주의 깊은 사람이 저 탑 위에 있다면, 목책에 오른 두 사람을 볼 수도 있을 터. 하지만 탑 위의 궁사들은 산적들에게 정신이 팔렸는지 목책 쪽은 관심도 없었다.

“진구.”

“네, 둘째 형님.”

“성동격서다. 네가 바깥쪽 대머리들을 맡도록 해.”

“형님은 안쪽의 탑으로 가시구요?”

“그래, 그러려고.”

“…….”

“왜? 네가 안으로 가고 싶은 거냐?”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부운화는 머리를 긁적이는 진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원래 그는 안쪽으로 돌격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맨 앞에 서서 선봉장 역할을 하는 것은 진구, 아니면 추룡. 항상 그래 왔기에, 진구는 지금 안쪽으로 직접 쳐들어가겠다는 부운화의 말에 의아해하는 것이다.

“안쪽은 돌격이라기보단 잠입에 가까워. 내가 편하게 들어가려면, 네가 시선을 끌어 줘야 한다.”

“아……!”

진구는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음대로 날뛰어도 되나요?”

“그래.”

진구가 씩 웃었다.

“마침 잘됐네요. 저도 화살만 쳐 내는 것보다는 저놈들이랑 치고 박고 싶었거든요.”

진구는 씩 웃으며 등 뒤에 돌려 메고 있던 철창을 앞으로 뽑아 들고는 창을 둘러싸고 있던 두꺼운 천을 풀어 버렸다.

진구의 창은 특이한 모습이었다. 창날과 창대를 같은 재질로 만든 온통 묵빛의 일체형 창. 창대엔 붉은빛이 감도는 적철(赤鐵)로 입을 쩍 벌린 사나운 용의 형태를 새겨 놓았고, 창날은 뾰족한 극점(極點)으로부터 아래쪽으로 갈수록 점점 날이 넓어지는 삼각형 꼴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창날이 종횡으로 두 개가 겹쳐져서 십(十)자형의 작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꿰뚫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병기.

마치 입을 쩍 벌린 용의 이빨처럼 십자형의 창날이 회전하면서 몸을 관통하면, 분명 상대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길 것이다.

창의 이름은 적룡(赤龍).

명 황실 최고의 장인(匠人)인 풍 도공(刀工)이 만든 오룡창(五龍槍) 중의 하나이자, 적룡기마대의 선봉장만이 쓸 수 있는 병기의 이름이었다.

“당연히 제가 동(東)이죠?”

진구는 창을 휙하고 휘두르며 물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공격한다.

즉 동쪽이 미끼라는 뜻이니, 이번 싸움에서 진구가 할 일은 스스로 미끼가 되는 것이다.

“그래. 내가 서(西)다.”

“너무 느긋하시다간, 아예 다 박살 내 버리고 제가 서쪽으로 갈 수도 있어요?”

진구의 장난스런 도발에 부운화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또 그러는구나. 아직은 무리라니까.”

강자로서의 여유가 묻어나는 모습에 진구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어어? 안 믿으시네? 저 정말로 진지하게 합니다?”

“얼마든지. 하지만 내가 더 빠를 텐데?”

“그건 해 봐야 알죠.”

부운화와 진구는 웃음 띤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이 북쪽에서 으레 그랬듯이, 위험한 놀이 하나가 지금 시작된 것이다.

“그럼, 먼저 갑니다.”

진구는 마치 먹이를 발견한 늑대처럼 한차례 씩 웃은 뒤, 그대로 바닥을 향해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쿵―!

땅이 울리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주변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부웅― 부웅―!

진구는 그걸로도 모자란지 철창을 머리 위에서 휘돌려 더욱 큰소리를 만들어 냈다.

“침입자다!”

그만큼 소란을 피우는데 모를 수가 없을 터.

마지막 남은 산적을 처리한 대머리들이 진구를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진구는 ‘우두둑’ 소리가 나게 목을 몇 번 꺾은 뒤, 씩 웃으며 적룡창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누구긴 누구야! 지금부터 너희들 목숨을 접수하실 분이다!”

그리곤 갑작스런 질주.

대머리 사내들이 놀라서 칼을 들어 올렸지만, 그들이 미처 검을 다 들어 올리기도 전에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진구의 몸이 오른쪽으로 회전했다.

후우웅―!

“하아압!!”

바람이 갈라지고, 검고 붉은 적룡창이 허공에 길게 잔상을 남겼다.

쩡―!

마치 그릇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가장 앞쪽에 서 있던 사내들 셋이 일시에 뒤로 튕겨져 나갔다. 칼날은 단번에 박살 났고, 비명을 지르는 사내들의 입에선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커허!”

“쿨럭!”

부러진 갈비뼈를 붙잡고 부들부들 떠는 세 사람.

창날이 아니라 창대에 맞은 것임에도, 그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진구가 씩 웃으면서 당당하게 턱을 쳐들자, 그 뒤에 서 있던 대머리 사내들이 흉흉하게 눈을 빛내며 제각각 칼을 들고 뛰어나왔다.

“잡아! 죽여!”

“끼요오옷―!”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외침과 함께 대머리들이 기묘한 기합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앞에서 셋.

옆으로 다섯.

각자 일정한 거리를 벌린 채 주변을 포위한 상태였다. 막무가내로 싸우다간, 점점 더 그물에 칭칭 감겨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는 제법 정교한 합격진이었다.

“쳇! 이런 건 싫어하는데.”

진구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불쾌한 듯 창을 한차례 옆으로 털었다.

“게다가 내가 아까부터 느낀 건데 말이야. 그 끼욧거리는 기합성. 암만 들어 봐도 몽고 놈들이랑 너무 똑같단 말이야. 기분 나쁘게.”

진구는 코끝을 씰룩이며 입가에 주름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진구는 오른쪽 다리를 한 걸음 뒤로 빼며 몸을 비스듬하게 돌렸다. 왼쪽 손은 앞으로 쭉 뻗고, 적룡창의 손잡이를 허리에 딱 붙인 채 창끝은 정면을 향했다.

그 자세 그대로, 진구는 적룡창을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웅웅― 후우웅― 후우웅―!

처음엔 미약했지만, 곧 회전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바람이 둘둘 말리는 듯한 묵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잔상이 생기며 창이 점점 커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인간의 몸으론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신기(神技).

십자형으로 갈라져 있던 창날이 이젠 커다란 하나의 무게 추처럼 보였다.

“적룡일식(赤龍一式)! 대붕추(大鵬錐)!”

삐아아아악―!

“헉!”

“크악……!!”

회전하는 창으로 작게 원을 하나 그렸을 뿐인데, 마치 커다란 새가 울부짖는 것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정면에서 서로 합(合)을 맞춰 달려들던 세 명의 대머리 사내들이 각자 귀를 틀어막고 몸을 휘청거렸다. 옆에서 달려들던 다섯 명도 움찔 몸을 굳히고 달려들지를 못한다.

마치 사자후(獅子吼)와 같은 엄청난 소리!

그사이 진구의 적룡창이 강력한 회전력을 담아 앞으로 쏘아졌다.

성벽을 향해 공성추를 날리듯이.

‘쾅!’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의 흙이 터져 나가고, 앞에 있던 세 명의 사내들은 망치에 얻어맞은 조약돌처럼 가볍게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크아아악―!”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날아간 사내들은 땅바닥에 처박힌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날아가서 정신을 잃은 것이 세 명. 굉음에 놀라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은 것이 다섯이다.

주변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단 일격에 여덟 명의 공격을 막아 낼 줄이야.

게다가 바닥에 남은 흔적이 엄청났다.

아무리 단단한 철창이라고 해도 겨우 직경 두 치 정도밖에 안 되는 두께건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창으로 후려친 바닥에는 성인 남자 두 명이 나란히 누워도 남을 만큼 커다란 구덩이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아, 이런……. 고작 몇 십 일 쉬었다고 힘 조절이 잘못되었네.”

진구는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진구를 쳐다봤다.

힘 조절이 잘못되었다니……. 너무 센 힘을 썼다는 건가?

“너무 약하게 했잖아. 싹 다 날려 버렸어야 하는데.”

진구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하는 말에 모두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의 눈빛이 더욱 독해지며, 이번엔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우르르 달려들어 주변을 포위했다.

기세가 사나웠다. 칼을 뽑아 들고 눈초리를 위로 추켜올린 모습이, 꼭 굶주린 들개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과연. 무서워하는 게 없네. 쿠빌라이의 충견들이다, 이거지?”

그 말을 들었는지 다가오던 대머리들이 움찔 몸을 굳힌다.

당황하는 눈빛.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더더욱 눈에서 살광을 뿜어낼 뿐 물러서는 기색은 없다.

정체를 아는 자는 모조리 죽인다.

그것이 그들의 율법인 것이다.

진구는 창을 앞으로 겨눈 채로 슬쩍 고개를 들어 방책 위를 올려다보았다. 방책 위엔 둥그렇게 뜬 보름달만 보일 뿐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구와 함께 서 있던 사람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여간, 둘째 형님. 빠르다니까.’

청아한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거나, 조용히 잠입하는 것에 있어서는 적룡기마대에서 부운화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싸우는 건 그렇게나 요란한데 말이지. 커다란 장군검을 쌍으로 쓰면서 조용히 잠입을 하다니……. 안 어울리잖아?’

그는 피식 웃으며 창을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부웅― 부우웅―

마치 벌 떼가 몰려오는 듯한 바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미 대붕추를 한 번 겪어 본 대머리들은 잔뜩 긴장해서 다시금 진형을 갖추었다. 한쪽 손으론 귀를 틀어막고, 다른 한쪽 손으론 무기를 잡은 채.

머뭇거리면서도 꾸준히 다가오는 그들을 쭉 둘러본 진구는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며 웃었다.

“자, 그럼 한번 놀아 볼까!!”

진구의 몸이 펄쩍 뛰어 앞으로 쏘아졌다.

살기충천한 사내들의 눈빛이 부딪쳤다. 기묘한 기합성이 울리고, 바닥이 폭발하는 굉음이 몇 번이나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불꽃과 함께, 살이 터지고 피가 튀는 거친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챙―! 채챙―!

“설마 산적들이 아직도 버티는 건가?”

미리 준비해 둔 지하 통로로 내려가려던 사내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병장기 소리에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키가 크고 마치 바위를 깎아서 만든 듯 단단한 몸을 가진 사내였다. 그는 병장기 소리가 날 때마다 불쾌한 듯 어깨를 움찔거렸는데,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은 것을 애써 참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아닙니다. 진가장주를 처리하고 올 때 만났던 그놈들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 같습니다.”

“뭐?”

사내는 부하의 말에 놀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날렵한 몸을 가진 청년이 한 자루 철창을 든 채 호랑이처럼 날뛰는 모습이 보였다. 몸놀림이 어찌나 빠르고 난폭한지 혹독한 수련을 견뎌 낸 그의 수하들이 손도 못 써 보고 줄줄이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창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꼭 한 명이 쓰러진다.

수하들이 주변에서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지만, 붕붕 휘돌리는 철창의 사정거리 내엔 개미 새끼 한 마리 비집고 들어갈 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위력은 또 얼마나 센지. 한 번 창이 땅바닥을 후려칠 때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굉음이 터져 나오는 중이다.

“인랑대(人狼隊) 둘로는 부족할 만하군. 한두 번 싸워 본 솜씨가 아니야.”

사내는 고민했다. 인랑대가 아무리 정신교육이 확실히 되어 있는 전사들이라고는 해도, 경험으로 따지면 한참 부족한 햇병아리 신입들이다. 척 보니 싸움을 밥 먹듯이 해 본 저런 놈을 잡을 수는 없을 것이 당연했다.

‘그렇다면 강한 전사를 내보내야 한다는 뜻인데…….’

그러자니 저놈의 목적을 모른다.

원래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선 그 목적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던가.

싸우는 데 격식이나 겉멋이 없는 것을 보니, 산적들을 소탕하겠답시고 나선 철없는 무림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인이 죽어서 복수를 하러 온 것 같지도 않다.

히죽히죽 웃으면서 싸우는 걸 보니, 싸우는 게 좋아서 달려들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저놈은 도대체 뭐지?”

사내는 불쾌하고 짜증스런 눈빛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머지않아 ‘그분’이 오신다. 그의 임무는 그때를 위해 항주 근방에서 터를 잡아 두고 기다리는 것인데, 개울을 흐리는 미꾸라지마냥 저놈 하나 때문에 모든 게 망쳐지고 있지 않은가.

“으음…….”

그는 왼쪽 눈을 덮고 있던 안대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듯이 꾹 눌렀다. 사 년 전에 다친 눈은 그가 화가 날 때마다 칼로 쑤시는 것처럼 욱신거린다.

“만만치 않은 놈이군.”

사내는 고통을 꾹 눌러 참으며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카카이.”

처음 그에게 상황을 알렸던 거구의 사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예, 장군.”

“만만치 않은 놈 같으니 네가 처리해라. 저놈을 없애고, 여기 산채는 다 태워 버려. 아직은 우리 흔적을 드러내선 안 된다.”

카카이는 알겠다고 대답했으나, 이내 덩치에 맞지 않게 조심스런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데, 원래 제가 옮기려던 재물은 어떻게 할까요?”

장군이라 불린 사내는 카카이의 뒤에 시립한 서른 명가량의 전사들과 그들이 끌고 있는 웬만한 마차 두 개를 합친 만큼 커다란 수레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내가 옮긴다.”

“예, 알겠습니다.”

사내는 군말 없이 고개를 숙이는 카카이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준 뒤, 몸을 돌리려다가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수레로 다가갔다.

수레를 덮은 두꺼운 천을 걷어 내자 튼튼한 나무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는 그중 가장 앞에 있는 상자를 열고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재화들 사이에서 금괴 두 개를 꺼내 카카이에게 내밀었다.

“네가 해 줄 일이 있다. 일을 마치고 곧바로 집결지로 오지 말고, 이걸 가지고 ‘눈’이 있는 곳에 가라. 아무래도 금괴에 쓰여 있는 번호가 익숙해.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카카이의 이마 한가운데에 깊은 골이 패였다.

“이건……. 그, 객잔 주인이 가지고 있던 금괴가 아닙니까?”

“맞다.”

“여기에 문제라도……?”

카카이는 의아해했다. 금괴는 아무리 봐도 평범했다. 그로서는 대체 뭐가 이상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금괴는 관(官)에서 철저하게 통제를 받는다. 금괴를 만들어 낸 곳이 어딘지, 어느 지역의 허가를 받고 만들었는지 문양을 새기고 그 번호를 찍지. 그 금괴가 누구에게 주어졌다는 것도 조사할 수 있어. 이곳을 봐라. 금괴 중심에 새겨진 구름 문양과 팔(八)로 시작하는 네 개의 번호. 이게 나타내는 것은……. 내가 알기로 북(北)쪽 거용관 너머의 전쟁 자금밖에 없다.”

사내가 무거운 목소리로 설명하자, 카카이는 눈을 부릅뜨고 놀랐다.

“거용관 너머의 전쟁 자금이라면……!”

사내는 동요하는 카카이에게 눈빛을 보내 진정시켰다.

그들로선 북쪽이란 말을 절대로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저 퇴역 군인 하나가 항주에 와서 모아 놓은 돈을 썼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명(明)에서 비밀리에 공작을 하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만에 하나라도 우린 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야.”

“예, 물론입니다.”

“그러니 그 금괴를 ‘눈’에 가져가서 확실하게 조사를 요청해라. 정말로 북쪽의 전쟁 자금인지, 그리고 그렇다면 그 금괴는 누구에게 전달되었는지.”

“예, 알겠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인 카카이가 그 금괴를 품 안에 넣고는 공손하게 뒤로 물러났다.

사내는 그 길로 등을 돌려 미리 준비되어 있던 지하 통로로 들어갔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전사들과 수레도 그의 뒤를 따랐다.

쿠르르릉―

돌벽이 양옆으로 맞물리며 지옥의 입구처럼 쩍 벌어져 있던 통로가 닫혔다.

카카이는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뒤 연기가 올라오는 향로를 뒤엎어 그 안의 불씨로 목탑 안에 불을 질렀다.

불은 순식간에 번졌다. 벽에 걸린 천이나 가죽들을 태우기 시작하더니, 이내 목탑의 뼈 대라고 할 수 있는 통나무에도 불꽃이 옮겨붙은 것이다.

타닥― 타닥―

불꽃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고, 이내 목탑 안은 숨을 쉬기 힘들 만큼 검은 연기로 가득 찼다.

원래 불꽃이라는 건 몸집이 커질수록 더더욱 많은 것을 잡아먹는다. 탐욕스럽게 커진 불꽃은 목탑에서 시작해 주변의 목책들까지 모두 태워 버릴 것이다. 어쩌면 주변의 숲까지도.

임무를 하나 완수한 카카이는 밖으로 나섰다.

갑자기 뒤에서 예상치 못했던 인기척이 들려오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누구냐?”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카카이는 등 뒤에 메고 있던 커다란 마상도를 뽑아 들었다.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는 것은 적이라는 뜻. 연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경계할 이유는 충분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마상도를 뽑아 드는 순간, 허깨비처럼 시야에서 ‘훅’하고 사라져 버린 인영이 갑작스레 눈앞에서 튀어 올랐다.

쩌어엉―!

“큽……!”

카카이가 이렇게나 다급한 심정이 되어 버린 것은, 맹세코 그가 지랑대(地狼隊)의 전사가 된 뒤 처음이었다.

아래에서 펄쩍 뛰듯이 검을 위로 쳐올리더니, 이젠 왼쪽, 오른쪽 가리지 않고 공격이 날아온다.

다음번엔 어디를 공격할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왼손잡이인 것 같은데, 길이가 사 척 가까이 되는 장군검을 폭풍처럼 휘두를 때마다 도저히 버텨 내기 힘들 만큼 육중한 공격이 퍽퍽 쏟아져 나왔다.

그가 들고 있는 마상도는 무게가 오십 근이 넘는 기물(奇物)인데, 상대의 장군검은 오히려 그의 마상도보다 훨씬 무겁고 튼튼한 것처럼 느껴졌다. 공격을 받을 때마다 몸이 휘청휘청 꺾이면서 손목이 끊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카카이는 경악하며 정신없이 뒤로 밀려났다.

거구의 몸을 타고난 만큼, 신력(身力)에 있어서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벽에 등을 찰싹 붙여야 할 만큼, 불과 한 호흡 만에 절박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속도면 속도, 기교면 기교, 힘이면 힘.

뭐 하나 이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아아압―!”

그때 앞에서 튀어나오는 낭랑한 기합성.

카카이는 그 순간 하늘이 갈라지는 환상을 보았다.

왼쪽 위에서 사선으로 내려치는 은빛의 참격이 불꽃을 가르고, 연기를 가르고, 영혼마저 갈라 버렸다.

그 순간 간신히 마상도를 가슴 위로 들어 올린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꽝!

그는 포탄을 몸으로 막은 것 같은 통증과 함께 등에 대고 있던 벽을 부수며 목탑 밖으로 튕겨 나가 버렸다.

눈앞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점멸을 반복했다. 숨을 쉬기 힘들 만큼 가슴이 아팠다.

기침을 쿨럭이며 흙바닥에서 간신히 일어선 그의 눈에, 활활 불타는 목탑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준수한 얼굴의 청년이 보였다.

“넌…… 누구냐……?”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며 묻자, 청년은 귀티가 흐르는 얼굴에 지독히도 어울리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쿠빌라이의 충견에게 가르쳐 줄 이름은 없다.”

“……!”

카카이의 손끝이 떨렸다. 상대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몽고에서 왔다는 것과 쿠빌라이 가문에 충성하는 텐챠이 수호대의 일원이라는 것까지.

“황실의…… 끄나풀인가……?”

“…….”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카카이를 뚫어져라 응시했을 뿐이다.

“실력으로 봐선 지랑대쯤 되는 것 같은데, 북쪽 전장에는 한 번도 안 와 봤나 보군. 암중에서 일하는 비밀결사 같은 건가?”

놀라움에 놀라움이 더해졌다. 청년은 모르는 게 없었다.

그가 경악한 기색이 역력하자, 청년은 자연스러운 얼굴로 그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분명 네가 대장은 아닐 테지. 병사들도 더 있었고.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다. 비밀 통로가 있다는 뜻인데……. 이미 목탑을 불태워 버려서 찾기는 힘들 테지?”

“…….”

“그렇다면 어디서 집결하는지를 물어야 할 테지만……. 쿠빌라이의 충견인 너는 절대로 대답하지 않고 차라리 자결할 테고?”

카카이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청년은 마치 대답을 들은 것마냥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면 여기서 깔끔하게 죽여주는 편이 낫겠군. 칼을 들어라, 충견. 마지막은 목을 베어 주겠다.”

태연한 얼굴, 태연한 목소리로 참수(斬首)를 논하는 청년.

그 모습은 저 귀티가 흐르는 청년이 얼마나 험하게 살아왔는지를 말해 주는 반증이나 다름없었다.

카카이는 그 순간 자신의 앞날을 예감했다.

자신의 목숨은 이곳에서 끝난다. 청년의 말대로 목이 잘려 나갈 것이다.

‘투마르 장군. 당신은 오늘 틀렸습니다.’

카카이가 혼자 처리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틀렸고, 금괴를 ‘눈’에 가져가서 알아보는 일도 틀렸다.

상대는 개울물을 흐리는 귀찮은 미꾸라지가 아니라, 하늘에서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는 용이었다.

카카이는 이번에 그들이 항주에서 하려는 일이 크게 잘못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축제를 벌이자.’

목숨이 아까워 본 적은 없다. 마지막으로 한없이 싸움이나 해 보자는 심정으로 칼을 들어 올린 카카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청년은 왼쪽 손에 장군검을 든 채로, 오른쪽 손을 허리춤으로 돌려 또 하나의 장군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두 개의 검끝을 아래로 내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본래 양수검(兩手劍)이었던가……!’

양수검을 쓰는 자가 좌수(左手)만을 사용했다.

카카이가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시험당한 것이다.

그리고 좌수만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었는데, 그가 양수검을 모두 뽑아 들었다면…….

“카하하핫!”

카카이는 큰소리로 웃었다. 강한 자에게 죽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하늘의 신께서 진정한 전사인 그를 환영해 줄 것이다.

“키아앗! 북천(北天)의 광영을 위해……!”

카카이는 절규하듯 소리치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방어는 도외시하고 오로지 공격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이빨을 세우고 물어뜯어야 한다.

단지 실낱같은 상처만을 남기더라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하다 죽는다.

충견이란 그런 의미다.

“키햐아앗―!”

그런 그에게, 한 쌍의 장검이 은빛을 번뜩였다.

☆ ☆ ☆

부운화는 목이 잘려 나간 거구의 시신을 찝찝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랑대 출신의 충견은 꽤 강했지만, 애초에 적룡기마대 내에서도 장기린을 제외하면 적수가 없는 부운화와는 비교가 안 되는 일이다.

정확하게 삼 합(三合).

그 이후에 목을 베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삼초지적에 불과한 상대인데 부운화도 왼쪽 손등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끈질기게 달려들던 상대가 마지막에 쓰러지면서 놓친 칼이 우연히도 손등을 살짝 스친 것이다.

“역시 충견을 상대하는 건 기분이 나쁘군.”

부운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뒤, 거한의 품 안에서 두 개의 금괴를 꺼내 들었다. 그는 그 금괴에 새겨진 문양과 번호를 유심히 살폈다.

“역시, 대형의 금괴로군.”

북쪽 관문을 상징하는 구름 문양과 팔(八)로 시작되는 번호.

부운화도 그것과 똑같은 금괴를 몇 개 가지고 있기에 착각할 리가 없었다.

거한이 금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마지막 삼 초 중 두 번째 합을 겨룰 때 알았다.

본래 그때 가슴을 베어 낼 수 있었는데, 하필 그가 가슴에 품고 있던 금괴가 공격을 막아 준 것이다. 그때의 흔적으로 두 개의 금괴엔 지금도 깊은 선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이걸 대장도 아닌 자가 따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횡령? 아니, 아니지. 뭔가 다른 것이 있을 텐데…….”

부운화는 골똘히 생각하며 금괴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지낭(智囊)인 섭우생이 이곳에 있었다면 좀 더 명확한 답을 내려 주었겠지만, 아쉽게도 부운화로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그는 사람을 보는 통찰력은 있지만, 그것을 주변과 연결시키지는 못한다. 원의 잔당들이 뭔가를 꾸미는 이번 일도, 섭우생이 와야만 확실하게 답이 나올 듯했다.

“진구는…… 끝났군.”

어느새 진구의 싸움도 다 끝나 있었다.

스무 명가량의 대머리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이 팔다리가 한두 개 부러진―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전투 불능의 상처였으나, 그중 몇몇은 이미 독단을 깨물고 자결한 상태였다. 아마 머지않아 나머지도 그렇게 할 것이다. 쿠빌라이의 충견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미친놈들이었다.

“후우, 형님. 다 끝나셨어요?”

그런 그들을 불쾌하게 내려다보던 진구가 적룡창을 땅에 ‘쿵’ 박아 넣으며 부운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아, 역시 둘째 형님은 아직 이길 수가 없네요. 어떻게 이렇게 빨리 끝내신 거예요?”

진구는 씩 웃으면서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다들 도망쳤어.”

“아, 그랬…… 네에? 도망쳤다고요?”

“그래. 비밀 통로가 있었나 보더라. 거기다가 목탑에 불을 질러 버린 바람에 더 찾아보지도 못했다.”

“으윽! 그러면…….”

난감해하는 진구에게 부운화는 품에서 금괴를 꺼내 보여 주었다.

“아, 대형의 금괴……!”

진구 역시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운이 좋은 건지, 마지막에 남은 녀석이 갖고 있었다.”

“으아, 다행이네요. 그거 때문에 여기 온 거였는데.”

“그래,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금괴를 찾았으니 목적은 달성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빛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장기린을 쫓아 항주에 왔고, 항주에 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원의 잔당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

이것을 우연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확실하게 파헤쳐서 알아봐야 하는 것일까?

“혹시, 대형이 우리 몰래 다른 임무라도 맡은 것이 아닐까요?”

“글쎄…….”

“자세히 알아봐야겠죠?”

진구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야겠지.”

“관에 알려야 할까요?”

“아니, 일단은 우리끼리 은밀하게 조사해 보자. 관에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건…… 최후의 수단이다.”

부운화는 관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관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앞에 강력하기로 소문난 적룡기마대가 다시 나타난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은밀하게 수작을 부리려는 자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기껏 제대하고 그 지옥을 빠져나왔는데, 그래서는 안 될 일.

지금은 일단 몸을 숨기고 사태를 주시해야 했다.

섣불리 몸을 드러냈다간 자칫 엉뚱한 곳에서 칼을 맞을 수도 있었다.

“일단 항주로 가자. 그곳에서 찬찬히 이번 일을 조사해 보도록 하지.”

부운화와 진구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은 단기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단은 눈앞에 놓인 일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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