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19화 (19/686)

第十八章 ― 상부상조(相扶相助)

탐욕스런 불꽃은 동산 산적들의 산채가 있던 곳을 철저하게 집어삼켰다. 바닥은 온통 재투성이였고, 반경 백 장이나 되는 공간이 새카맣게 불타 버려 이젠 원래 이곳의 모습이 어땠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완전한 폐허.

목탑은커녕 주변을 둘러싼 목책들조차 성하게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뭐야, 이건.”

설마 다 타 버렸을 줄은 몰랐다.

올라오면서 산적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산채 자체를 홀라당 태워 버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거, 곤란한데…….’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던 장기린은 심히 당황했다.

그는 휘연의 부모님을 되찾아 가야 하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뭔가 석연치 않았던 산적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답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모조리 죽고 불타 버리다니…….

생존자가 단 한 사람도 없는데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설마, 휘연의 부모님도……?”

장기린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산채 바닥에 남은 흔적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까만 재와 부서진 잔해가 두텁게 쌓여 있지만, 그래도 그것들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흔적을 찾아보니 몇 가지 단서가 나왔다.

이런 곳에서 가장 큰 단서가 되어 주는 것은 바로 시체다.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새카맣게 타 버렸기에 사인(死因)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몇 명이, 어느 곳에서, 어떤 방향을 바라보며 죽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단서가 되는 것이다.

장기린은 익숙한 눈빛으로 산채 내의 시체들을 꼼꼼히 살폈다.

“산적들은……. 몰살당했군.”

마치 맷돌 사이에 짓눌리듯 앞뒤로 포위당해 죽은 오십 명가량의 인물들이 본래 이곳의 산적일 것이다.

“이쪽은 서른가량. 계획대로 산적들을 처리했으나……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에 의해 오히려 전부 당해 버린 거다.”

바깥쪽에 남아 있던 시체들은 모두 한 점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늘어선 채 쓰러져 있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소수’를 포위했다가 오히려 다 쓰러져 버린 모양새였다.

“……좋지 않군.”

장기린의 이마에 깊게 골이 패였다.

산적들의 뒤통수를 누군가가 쳤고, 그 누군가의 뒤통수를 또다시 나타난 누군가가 쳤다.

그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 산적들이 잡고 있던 인질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귀찮기 그지없는 인질이 있다면……?”

죽인다.

산적들뿐만 아니라, 군에서도 급박한 상황이 오면 인질을 가장 먼저 처리한다. 귀찮은 짐인 데다, 굳이 식량까지 축내는 존재를 살려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장기린은 산채를 샅샅이 살펴보고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휘연의 부모는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장기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입맛이 썼다.

기껏 싸움을 하지 않겠다던 맹세를 깰 각오까지 하고 왔건만, 이미 한발 늦었던 것이다.

장기린은 일단 풍운객잔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말도 없이 나왔으니 분명 다들 걱정하고 있을 테고, 더군다나 휘연의 부모님이 이곳에 없다면 더 이상 남아 있는 것도 무의미하다.

“휘연…….”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말하지 않고 숨길 수는 없다. 그건 거짓말을 하는 셈이니까.

‘하지만, 말할 수도 없어.’

산적들이 몰살당했다. 부모님도 그 와중에 돌아가셨을 가능성이 높다.

그 말을 하면……. 휘연은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지금 그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생존자가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하다못해 정말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돌아가자.”

장기린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산을 내려갔다.

오늘따라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난히 밝은 보름달이었다.

☆ ☆ ☆

“객주님!!”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건지. 휘연은 풍운객잔 앞을 서성거리다가 장기린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달려왔다. 샛노란 경장을 입고 쪼르르 달려오는 모습을 보니, 마치 어미 닭을 발견한 병아리처럼 보인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다가와 안기는 듯싶더니, 느닷없이 허리를 꼬집었다.

꾸욱―!

“읏! 왜 이러는 거야?”

장기린은 평소와 다른 휘연의 행동에 깜짝 놀라 물었다.

“왜 이러냐구요? 정말 몰라서 물어요?”

가녀린 손목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는지 다시 한 번 허리를 꼬집는 손길이 정신이 번쩍 날 만큼 매서웠다.

장기린은 눈을 찌푸리며 한마디하려고 했으나,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휘연의 눈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루 온종일 말도 없이 사라져 놓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혹시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혹시 지난번처럼 누가 습격이라도 한 건 아닐까, 부모님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밤새도록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시냐구요! 정말, 뒤에 남겨진 사람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생각 안 하시는 거예요?”

지금은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 오는 새벽녘.

휘연은 밤을 꼬박 새며 기다린 모양이었다.

휘연이 그를 진심으로 걱정했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장기린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휘연의 호수 같은 눈동자에 물기가 점점 차오르더니, 결국 주르륵 흘러내리고 말았다.

‘이런……!’

울렸다.

휘연을 울려 버렸다.

지난번에 우는 모습을 한 번 보긴 했지만, 그가 울린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기린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휘연은 마치 또다시 장기린이 사라져 버릴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그의 앞섶을 두 손으로 꼭 붙잡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큰소리로는 울지 못하고, 숨죽여서 속으로 운다.

그 모습을 보자 장기린은 마음이 짠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준다.’

전우애나 동료애 같은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

그건 생소하면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묘한 느낌이었다.

“휘연, 울지 마라.”

“……흑.”

어떻게든 달래려고 하자 휘연은 감정이 더 북받치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휘연은 그녀의 부모님이 그랬듯, 장기린도 언제든 떠나 버릴 수 있다는 것에 큰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장기린은 그녀에게 미리 말을 해 두고 다녀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잖아. 산채에 붙잡혀 있는 부모님을 찾으러 간다고…….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거짓말로 대충 둘러대는 일은 더더욱 할 수 없다. 거짓말은 비겁하게 결과를 회피하려는 자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장기린은 난감한 심정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지금 이 상태라면, 부모님에 대한 건 말할 수가 없다.’

지금 휘연에게 그 말을 한다면 얼마나 충격적일까.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뺨을 때리는 격이 아닌가.

‘시간을 두자. 꼭, 지금 당장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휘연,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하며 휘연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데, 객잔 안에서 소란을 들었는지 세 개의 인영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객주님!”

“객주님―!”

잘생긴 얼굴에 늘씬한 체격의 풍운객잔의 ‘하인’인 남궁휴였다. 그는 들고 있던 싸리비를 문 옆에 기대어 놓고는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몽롱한 얼굴에 눈이 퉁퉁 부은 아칠과 아팔 형제도 뒤뚱거리며 뛰어왔다. 그들의 얼굴엔 안도하는 표정이 가득했다.

“오셨군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남궁휴는 만면에 다행이란 미소를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으우, 객주님. 어디 갔다 오셨어요? 걱정했다구요.”

“맞아요. 누님은 걱정하시느라 잠도 한숨 못 자셨어요. 계속 문 앞에 서 있으셨다구요.”

“어찌나 안쓰럽던지.”

“맞아. 객주님이 만약 오늘도 안 들어오셨으면, 휘연 누님이 먼저 쓰러지셨을걸요?”

이어지는 아칠, 아팔 형제의 귀여운 추궁.

장기린은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게 가족이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모든 것을 항상 함께하는 동반자들.

“……음?”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이쪽을 쳐다보는 은밀한 인기척을 느꼈다.

소름이 돋고 정신이 번쩍 든다.

이렇게나 은밀한 기척이라니. 하마터면 모르고 넘어갈 뻔했다.

만약 저자가 공격을 했다면?

분명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기린은 깜짝 놀라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던 휘연을 재빨리 등 뒤로 감추고, 남궁휴와 아칠, 아팔의 앞을 막아섰다.

방향은 서북쪽.

정확히 한 지점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장기린이 쳐다봤을 때, 이미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공간에 바람만 휑하니 불고 있었다.

‘인기척 두 개. 적이라면 대단히 위협적이다. 그런데 어쩐지, 좀 익숙한 느낌인데…….’

뭔가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장기린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등 뒤에서 아칠과 아팔, 그리고 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객주님……?”

“왜 그러시는……?”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아니. 일단 들어가자.”

장기린은 일단 식구들을 데리고 풍운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주변을 경계했으나, 눈에 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그런데, 운찬은?”

모두가 모여 있는데 운찬만 안 보이는 것이 이상해서 묻자, 아칠과 아팔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아!”

뭔가를 깜빡하고 있었다는 듯 탄성을 토했다.

‘설마 다들 깨어 있는 건데, 혼자 자고 있는 건가?’

애초에 잠도 안 자고 기다려 주길 바란 건 아니지만, 막상 이렇게 되자 조금 괘씸한 심정이다.

“강 숙수님은 새벽 시장에 가셨어요.”

“야채랑 고기는 새벽 시장이 싸고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밤새도록 식탁 앞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가셨는데, 잘 사오시려나 모르겠네요.”

“실수해서 저번처럼 당근만 잔뜩 사오시는 건 아닌지 몰라.”

“그러게. 그러면 큰일인데.”

아칠과 아팔이 장난스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괜히 의심한 것 같아 조금 민망해졌다.

“크흠!”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돌리는데, 옆에서 따가울 정도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한 쌍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보였다.

“휘연.”

“…….”

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물은 더 이상 흘리지 않았지만, 이젠 잔뜩 토라졌는지 부루퉁하게 뿔이 난 채다.

그녀는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셨었어요?”

“…….”

“어딜 가셨기에 우리한텐 한마디 말도 없이 나가서 하룻밤을 꼬박 새고 오신 거죠?”

우리 사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냐고 묻는 듯한 섭섭한 눈빛.

그녀뿐만이 아니다. 나머지 세 사람도 호기심과 섭섭함이 절묘하게 합쳐진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으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답해 줄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네 부모를 구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이미 산적들이 몰살당해 있는 것을 보니 네 부모도 살아 있기 힘들겠다. 그런 말을 어떻게 전하느냔 말이다.

“대답 못 하시네요? 정말로 숨기셔야 할 일인가 봐요?”

“……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없어요? 왜요?”

“…….”

“그러시군요. 숨겨야 할 일이군요?”

휘연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더니, 결국 휙하니 몸을 돌렸다.

“아칠! 아팔!”

“에……. 네?”

“난 이만 잘래. 잠도 안 자고 기다린 게 아깝네. 너희도 푹 자 두렴.”

휘연은 장기린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성큼성큼 뒤채로 걸어가 버렸다.

졸지에 분위기가 무거워져 버렸다.

아칠과 아팔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하지 못했고, 그 옆에 있던 남궁휴는 난감한 듯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장기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칠, 아팔. 너희도 쉬어라. 밤새도록 제대로 못 잤다면서?”

“저기, 하지만…….”

“괘, 괜찮아요, 객주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칠과 아팔의 눈은 보는 사람이 다 졸릴 만큼 퉁퉁 부어 있었다.

“가서 자. 어차피 가게를 제대로 여는 건 저녁부터니까.”

“하, 하지만…….”

“괜찮아. 말 들어.”

아칠과 아팔은 장기린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쭈뼛거리면서 뒤채로 건너갔다.

이제 남은 건 남궁휴와 장기린뿐이다.

남궁휴는 싸리비를 든 채로 잠시 망설이다가 옆으로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객주님. 아시다시피 제가 화류계에 오래 있었잖습니까. 원래 그런 곳에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여심(女心)입니다. 제가 그쪽으론 잘 아는 편인데……. 도와 드릴까요?”

순간적으로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휙 고개를 들었으나, 어디까지나 남궁휴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런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남녀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처음이 중요한 법입니다. 여자가 투정을 부리고,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는 것은 상대가 이미 자신에게 넘어왔다고 확신할 때이지요. 상대가 넘어오기 전엔…… 예쁘고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 게 여자의 마음이거든요.”

“뭐……?”

“그러니까 바로 지금이, 소위 ‘길들이기’라는 단계에 들어선 겁니다. 누가 우위에 서나, 그런 걸 정하는 단계랄까요. 바로 여기서 지배당하느냐, 지배하느냐, 또는 동등하게 가느냐가 결정되지요.”

여심에 대해 강론하기 시작하는 남궁휴는 어딘가 은은한 현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어떤 한 가지에 통달한 당대 최고의 석학처럼 지혜롭고 유식한 분위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지금까진 몰랐던 남궁휴의 새로운 면모.

마치 이 기회에 여심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심어 주겠다는 듯 일장 연설을 시작하는 남궁휴의 모습에, 장기린은 황급히 손을 들어 이야기를 정지시켰다.

“잠깐! 가장 중요한 게 잘못되어 있어. 휘연과 나는 남녀 사이라고 부를 만한 관계가 아니다.”

“……그렇습니까?”

남궁휴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엔 곤란이 가득하고, 눈빛엔 무지몽매한 농민을 보는 듯한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그 얼굴, 왠지 울컥하는데.”

“앗, 죄송합니다.”

남궁휴가 황급히 얼굴을 수습했으나 이미 늦었다.

“…….”

“에, 으음…….”

자신도 모르게 눈빛이 강해졌던 걸까. 남궁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럼, 객주님, 저도 이만 방으로…….”

도망치듯 돌아가려는 남궁휴.

장기린은 그런 남궁휴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잠깐, 남궁휴.”

“어, 저기, 예?”

남궁휴는 잔뜩 긴장한 채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장기린은 그런 그를 향해 입꼬리를 최대한 위로 끌어올려 주었다.

웃는 얼굴. 여전히 익숙지 않지만, 최대한 상대를 안심시킬 수 있는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남궁휴는 그 표정을 보자 오히려 더욱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 남녀 관계는 아니지만 말이야. 으음! 여심이라는 것, 좀 더 듣고 싶은데.”

“…….”

“뭐랄까. 화를 풀어 주는 방법이라던가…….”

시선을 천장으로 향하며 슬쩍 찔러 넣듯이 말했다. 왠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남궁휴의 웃음소리가 조금 거슬렸지만 이번만큼은 꾹 참아 주기로 했다.

잠깐의 못마땅함보단 미래의 평안함이 중요한 거다.

장기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남궁휴가 말하는 핵심 비법들을 금과옥조처럼 새겨들었다.

☆ ☆ ☆

“휘연.”

이름을 부르자 방긋 웃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본다.

“네?”

“음, 그게…….”

“아, 아칠! 아팔! 그건 그쪽에 치우면 안 돼! 있다가 임 목장님이 와서 고쳐 주시기로 했어. 그건 이쪽으로 옮겨 줄래? 죄송해요. 지금 조금 바빠서.”

이야기 중에 한참 소리치던 휘연은 웃는 얼굴로 말한 뒤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멀어져 버렸다.

눈이 부실만큼 환한 웃음.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웃음이지만, 어딘가 위압감이 가득한 무서운 웃음이기도 하다. 적어도 장기린에겐 그랬다.

‘휴의 말대로잖아?’

장기린은 오늘 아침 남궁휴가 해 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여인이 화를 내는 방식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중에 지금의 상황, 그리고 진 침모님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 아마 두 가지 중 하나의 모습을 보여 주실 겁니다. 첫 번째, 냉기가 흐르는 얼굴로 딱딱하게 대답만 하고 어울려 주지 않는다. 두 번째,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하지만 어딘가 무시무시한 거리감이 느껴지고, 피하듯이 말을 섞지 않는다. 그중 첫 번째라면 조금 기다렸다가 한 번 웃겨 주면 풀릴 테니 차라리 다행이지만……. 만약 두 번째라면 좀 더 까다롭습니다. 이건 감정보다 깊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기 때문이지요.”

‘즉, 그 말대로라면, 지금 상황이 좀 더 까다로운 상황이라는 건가?’

장기린은 성큼성큼 다가가 휘연의 어깨를 꾹 붙잡았다.

남궁휴의 조언을 떠올리고, 그대로 미리 생각해 뒀던 대화를 시작한다.

“휘연, 함께 식사하는 게 어때?”

순간적인 정적.

휘연은 눈을 깜빡거리며 방금 자신이 들은 것에 대한 불신의 표정을 지었다.

“네에……?”

가면처럼 쓰고 있던 휘연의 웃는 얼굴이 휘청 흔들렸다.

“시, 식사요?”

“창해루에서. 미리 자리를 잡아 뒀어.”

“차, 창해루?”

“그래, 창해루.”

휘연은 너무나 놀란 듯 석류처럼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멍하니 굳어져 버렸다.

‘효과가 있나?’

내심 쾌재를 불렀다.

대화가 통하기 시작했다.

답답했던 상황에 뭔가 돌파구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자는 분위기에 약합니다! 비싼 것을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충고에 더해, 남궁휴는 직접 발로 뛰면서 고관대작들도 마련하기 힘들다는 창해루의 특급 객실을 수배해 주었다.

어떤 여인도 최고급 대접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은 모양이다.

장기린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휘연의 얼굴을 보며 곧 떨어질 승낙의 말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잠깐, 이상한데요.”

그러나 휘연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장기린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대번에 느꼈는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이쪽을 탐색했다.

“지금 저에게 식사를 함께하자고 하신 거예요? 단둘이? 그것도 서호제일루라는 최고급 객잔 창해루에서?”

“맞아.”

“어째서요? 왜 우리가 창해루에 가서 식사를 해야 하죠?”

갑자기 의외의 질문이 날아왔다.

“……어?”

“그런 곳에 단둘이 가는 건 연인끼리일 때뿐이에요. 객주님과 저, 우리 연인인가요?”

“……!”

장기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연인.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단어다.

반 각의 시간이 억겁처럼 지나가고, 마치 화약에 불을 붙인 것처럼 대번에 휘연의 눈이 싸늘해졌다.

“그게 아니면, 제 화를 풀어 주려고 그러시는 건가요? 저 화 안 났어요. 봐요. 웃고 있잖아요.”

휘연은 빙긋 웃어 주었다. 조금 전에 봤던 것과 똑같이. 여전히 아름답고, 무서운 거리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저 화 안 났으니까 그런 곳에 쓸데없이 돈 낭비하지 않으셔도 되요.”

“…….”

“그리고 휴에게는 제가 말할 게요. 옆에서 이상한 조언하면 안 된다고.”

여자의 직감이 과연 무섭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의 행동이 그렇게나 어설펐나 자책해야 할까.

휘연은 남궁휴가 옆에서 조언했다는 것도 쉽게 알아차려 버린 모양이었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왠지 뭔가 잘못한 걸 숨기고 있다가 들킨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화도 났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한 기분이었다.

“휘연. 거짓말하지 마.”

“……네?”

“화났잖아. 평소와 다른 얼굴이야. 그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어.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하지? 화가 나는 일이 있다면 그걸 이야기하고 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할수록 화가 났다.

생각하면 그렇다. 그가 잘못한 건 없다. 그런데 왜 휘연에게 그가 잘못한 듯한 기분이 들어야만 하는가.

아침의 일? 말하지 못할 만하니까 말하지 못했다. 휘연이 그를 믿는다면, 그걸 그냥 믿고 이해해 주면 안 되는 것인가?

“이야기하고 풀자구요?”

휘연이 이쪽을 휙하고 돌아본다.

이젠 웃지 않는다.

눈빛도 날카롭고,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어째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거죠? 하루 온종일 기다리게 해 놓고. 밤새도록 서서 걱정한 건 전데, 어째서 저를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는 거죠?”

“말할 수 없는 일이니까.”

“네. 객주님은 대단하시니까요. 분명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일들도 있겠죠. 어쩌겠어요? 참아야죠.”

“지금, 비꼬는 건가?”

“분란을 만드시는 건 객주님이에요. 전 잘 참고 있었다구요. 섭섭해도 참고, 웃고 있었는데……. 제가 화낼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그런데 하필 그런 말을 해서…… 사람을 기대하게 하고…….”

휘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장기린은 움찔하며 뒤로 조금 물러섰다.

여자의 무기는 눈물이라고 했던가. 오늘은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실감했다.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눈물을 보자 울컥 솟아올랐던 화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오히려 안타깝다.

뭔가 해 주고,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데 방법을 모른다.

장기린은 손끝만 움찔거리며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휘연은 새하얀 손으로 눈물을 닦아 내더니, 장기린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연인도 아니고, 화를 낼 만한 자격도 없다는 것.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최근에 기분이 좀 안 좋아서……. 예민했나 봐요.”

“…….”

“그만 가 볼게요, 객주님. 오늘 정말로 할 일이 많거든요.”

휘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총총걸음으로 멀어졌다.

장기린은 그녀를 붙잡으려했으나, 붙잡지 못했다.

안타까울 만큼 어깨를 축 늘어뜨린 휘연.

그리고 그녀에게 부모님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 두 가지가 혼합되어서 마음을 괴롭힌다.

“이런…….”

장기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계획은 실패한 것 같았다.

☆ ☆ ☆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계획이 실패했음에도 남궁휴에게 다시 상담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남궁휴는 휘연이 웃으면서 거리감을 줄 수 있다고 정확하게 예측하지 않았던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논의해 볼 가치가 있었다.

“이건 정말 곤란한데요. 자신의 위치, 그리고 자격에 관련된 문제라서…….”

남궁휴는 난감해하는 듯했다.

“자격? 위치?”

“그게, 조금 그렇습니다. 따지고 보면 침모님도 객주님께 고용된 입장이고. 그전에 은혜를 입은 것도 있는 것 같고. 그러니 솔직하게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달까요? 원래 이런 관계는 한쪽에 빚이 있으면 좀 껄끄러운 법입니다.”

머리로는 조금 알 것도 같지만, 그렇다고 이해가 되진 않았다.

“……휘연이 나에게 빚이 있다니.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

“으음, 그게…… 침모님 입장에선 그렇지가 않을 겁니다.”

“어째서? 난 그걸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뭐랄까요……. 그게 조금,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만…….”

남궁휴는 설명하기 곤란한 듯 더듬거리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이건, 객주님의 마음의 결정이 중요합니다.”

남궁휴는 뚫어져라 이쪽을 응시하며 뭔가를 탐색하고 있었다.

“뭐?”

“객주님은 진 침모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객주님에게 침모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

“해법은 있습니다. 침모님이 객주님을 미워하거나 그런 게 아니니, 꾸준히 정성을 표현하면 풀리게 되겠죠. 하지만 그런 것보단 근본적인 해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객주님께서 침모님과 어떤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가. 그것에 따라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남궁휴의 진지한 물음에 장기린은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마음.

그렇다. 중요한 건 그거였다.

자신은 휘연과 어떻게 지내기를 바라는가?

앞으로 휘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 건가?

‘함께하고 싶다.’

답은 금방 나왔다.

지금처럼 함께 풍운객잔을 운영하고, 함께 뭔가를 이뤄내 보고 싶다. 함께 웃고, 함께 생활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마음만으론 운찬이나 아칠, 아팔, 그리고 남궁휴에게 갖고 있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휘연에겐 좀 더 다른 뭔가가 있었다. 좀 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속삭이는 따뜻한 감정이.

‘아니, 아니다.’

연인?

그는 휘연을 사랑하고, 그와 평생을 함께하길 바라는가?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자,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십 년 전,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시절에 겪었던 사건.

충격적인 만월(滿月)의 밤.

양손을 끈적하게 적시던 뜨거운 피.

‘나는…… 그런 걸 할 수 없는 놈이다.’

장기린은 냉소를 지었다.

어쩌면 평범함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이미 평범하지 않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나는, 휘연과 지금처럼만 지냈으면 좋겠다.”

남궁휴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지금처럼…… 입니까?”

“그래.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침모님께 이번 일에 대해서만 섭섭함을 풀어드리는 걸로 하죠.”

남궁휴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어떤 행동으로 기분을 풀어 주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 몇 가지를 조언해 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주방 쪽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식사 시간입니다―! 자자, 모두들 영업 시작하기 전에 식사들 하세요!”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활기찬 목소리.

운찬이었다.

그는 얼굴 한가득 유쾌한 미소를 지은 채 손수 쟁반에 커다란 대접을 담아서 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도는 붉은색 국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대접 안엔 노란빛이 감도는 국수가 온천수에 몸을 담근 용처럼 고고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모습은 얼마나 면발에 탄력이 있는지를 말해 주고, 코끝으로 스며드는 구수하면서 매콤한 향기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요리에 다가가고 싶어지게 만든다.

운찬은 그 대접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자, 오늘은 담담면(擔擔麵)입니다! 면발이 가늘고 탄력이 있는 것이 특징! 고소하면서 매콤한 국물엔 저만의 특별한 비법까지! 이건…… 하하, 차세대 신천지 요리랄까요!”

최근의 경험이 자신감을 북돋아 준 것인지 운찬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이건 맛있는 음식이다.

운찬의 얼굴만 봐도 그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칠과 아팔이 담담면이 담긴 대접을 두 개 더 들고 나오고, 뒤채에서 온 휘연이 자리에 앉았다.

휘연이 앉은 곳은 평소와 같은 장기린의 바로 옆자리. 하지만 의자는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

“…….”

침묵이 흘렀다. 둥그런 식탁엔, 운찬이 담담면을 작은 사발에 담아 주는 소리만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저기, 형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운찬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미 눈치 빠른 아칠과 아팔, 그리고 남궁휴는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상황이다.

운찬은 장기린과 휘연의 사이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없어요.”

동시에 나온 대답.

장기린과 휘연은 여전히 서로를 쳐다보지 않은 채 앞에 놓인 사발만 바라보았다.

“예에…….”

운찬은 어색하게 웃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분위기가 묘하게 차가워졌지만, 눈앞에 있는 담담면은 그런 분위기를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맛있어 보였다.

장기린은 앞에 놓인 죽통에서 저금을 꺼내 들고 담담면을 듬뿍 집어 들었다.

후르륵―!

쫄깃쫄깃하면서 가느다란 면발.

구수하면서 매콤하고, 진한 육수.

입안에 화하게 퍼지는 대파 향과 함께 탄력 있는 감촉이 식감을 살린다.

“맛있다, 운찬.”

장기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오오! 그런가요!”

“그래, 신천지 소면에 뒤떨어지지 않아.”

“하하!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구요!”

운찬은 기뻐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당장이라도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듣고 싶어 하는 듯 들뜬 상태다.

아칠, 아팔, 남궁휴. 세 사람도 담담면을 먹어 본 뒤 최고라는 찬사를 보냈다. 특히 최근 운찬의 음식에 푹 빠져 있는 남궁휴는 담담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음식에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아칠.”

“네?”

“거기 있는 저금 좀 주지 않을래?”

휘연의 부탁에 아칠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금이 담겨 있는 죽통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장기린에게 더 가까이 있는 것이다.

다른 죽통은 운찬의 앞에 있으니, 아칠에게 부탁하는 것은 괜히 식탁 건너에 있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 여기.”

장기린이 그런 그녀의 앞에 저금을 하나 밀어주었다.

잠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휘연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시선을 먼저 피하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장기린은 시선을 돌려 국수 사발만 쳐다봤다.

‘친절함.’

‘정성의 표현.’

남궁휴는 그런 것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장기린은 아무래도 그런 것에 익숙지 않았다.

이렇게 필요한 게 있다면 슬쩍 밀어주는 정도가 한계인 것이다.

휘연은 담담면의 맛을 보고 맛있다며 감탄사를 내뱉었고, 식사 분위기는 다시 활기차게 변했다. 모두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찬사의 연속이었다. 그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으핫핫! 대성공!!”

운찬은 어깨춤을 추면서 기뻐했다. 그가 만든 요리가 맛있다는 것이 정말로 기쁜 듯했다.

“자, 그럼 마무리로 수선(水仙)차를 준비해 뒀어요. 담담면은 아무래도 맛이 진해서 끝 맛이 오래가니까요. 개운하게 입을 헹구기엔 수선차가 최고죠. 아 참, 수선차는 여기 작은 잔으로 드셔야…….”

“아! 그건 제가 할 게요.”

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운찬으로부터 찻주전자를 받아 직접 찻잔에 따르더니, 그 찻잔을 장기린의 앞에 살며시 놓았다.

“아…….”

장기린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려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의외였던 것이다.

이건 화해를 청하는 거라고 생각해도 좋은 것일까?

휘연을 쳐다보자 그녀는 차를 한 잔 더 따르고 있었다.

“헤에…….”

“으흠! 흠!”

아칠이 무심코 감탄사를 발하자, 옆에 있던 아팔이 헛기침을 하면서 말렸다.

갑자기 식탁에 앉아 있던 남궁휴가 벌떡 일어나더니 운찬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강 숙수님, 제가 항상 묻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에? 예? 에?”

어물쩍거리는 사이 운찬은 남궁휴에게 질질 끌려갔다.

“아칠, 아팔. 너희도 좀 도와줄래?”

“아……. 네!”

“네! 저도 갈게요!”

아칠과 아팔은 이쪽의 눈치를 힐끔 살핀 뒤,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가 버렸다.

“음…….”

장기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앞에 놓인 수선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도 아이들이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줬다는 것을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건 휘연도 마찬가지인지, 찻잔을 입에 가져가는 그녀의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죄송해요.”

먼저 사과를 한 것은 그녀였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말하고 나서 바로 저금을 달라고 하는 건 너무 뻔뻔한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전에 아칠에게 저금을 달라고 했던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이제 얼굴 전체가 빨개져 있었다.

‘돌아왔어.’

갑자기 긴장이 탁 풀리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지금 이 모습이야말로 평소의 휘연이다.

“그건…… 그럴 수도 있지.”

“네…….”

“그보다 휘연, 할 말이 있어.”

장기린은 모든 걸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휘연이 스스로 한 발짝 물러나 양보해 준 지금이야말로, 그가 최대한 솔직해야 하는 순간이다.

“휘연은 나를 믿고 부모님과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지. 그 부분은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

“아……. 네…….”

“그리고 휘연이 나를 믿어 주는 만큼, 나는 휘연을 지켜 줘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어제 나갔던 일도, 그것 때문이었지.”

장기린은 휘연을 응시했다.

한 점도 숨기는 것 없이.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그녀를 바라봤다.

구해 주지 못했다.

그가 늦었기에, 그녀의 부모님을 구해 주지 못했다.

“휘연, 너의 부모님은…….”

“객주님, 마음은 잘 알겠어요.”

안타까움에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그 순간, 휘연은 그의 말을 끊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눈을 몇 번 문지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그녀는 웃고 있었다.

처연하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을 보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괜찮아요, 객주님. 저는, 어쩌면, 처음 그날부터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어요.”

“휘연…….”

“아, 차가 식었네요. 다시 따라 드릴까요?”

찻물을 버리고 주전자를 통해 새로 따라 주는 휘연.

내심을 숨기려고 하지만, 그녀의 손은 쳐다보기가 안쓰러울 만큼 덜덜 떨리고 있었다.

꾸욱―.

장기린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더 이상 떨리지 않게, 힘을 줘서 꽉 붙잡았다.

‘그래, 이걸로 됐다.’

그녀는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말로 설명할 것 없이,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어제 어딜 갔다 왔는지도 다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껏,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어.”

“네……?”

“부모님의 얼굴을 본 적도 없어. 갓난아기 때 보따리에 싸여서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거지 왕초가 주워다 키운 게 다니까. 그나마도 두어 살 때 돈을 받고 팔아 버렸다더군. 무정한 세상이야. 사람의 목숨보단 돈이 더 중요한 세상이지.”

휘연의 눈물이 멎었다.

그녀는 놀란 듯, 흔들리는 눈으로 장기린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장기린은 피식 웃었다.

이건 대(隊)의 형제들조차 모르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에겐 난생처음 하는 이야기지만, 그는 부모를 잃고 불안해하는 휘연에게 꼭 해 주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네 살 때까진 제대로 밥이라는 걸 먹어 본 적이 없었지. 생생하진 않지만 어렴풋이 기억이 나. 그때는 매일 뭔가 잡아먹을 걸 찾아서 사방을 헤매고 다녔었어. 달팽이라던가, 뱀이라던가. 아, 개구리나 두꺼비도 있었지.”

정확히 말하자면 동굴에 갇힌 채, 다른 아이들과 생존경쟁을 했었다. 이상하게 생긴, 지금 생각해 보면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생김새를 가진 동물들을 먹으면서.

대장군의 말론, 어떤 무림 문파에서 목적을 가지고 키웠다는데……. 그때의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련하게, 거칠고 냉혹한 세계에서 외롭게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이 난다.

그때 동굴 속에 있던 많은 아이들 중에 살아남은 것은 단 한 명.

이 세상에서 장기린 혼자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다.

“…….”

문득 고개를 들자, 휘연은 입을 꾹 다문 채 안타까운 눈빛으로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장기린은 헛기침을 했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깊게 흘러가 버렸다.

“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누구에게나 불행은 찾아온다는 소리야. 그걸 이겨 내느냐, 못 이겨 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지. 난 나름대로 불행을 이겨 냈고, 지금은 평범한 생활을 해 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 있어.”

장기린은 진지하게 휘연을 응시했다.

“나는 널 버리고 떠나지 않아.”

휘연의 눈빛이 떨렸다.

“객주님…….”

“난 내 목숨이 다하는 때까지, 지금의 이 평범한 생활을 지켜 낼 거다. 이것만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휘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믿을 게요.”

붙잡고 있던 휘연의 손이 마주 잡아 오는 것을 느꼈다.

따뜻한 찻잔 위에서 겹쳐진 손.

두 사람은 그 찻물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서로의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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