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24화 (24/686)

第二十三章 ― 남궁연(南宮燕)

풍운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어느새 객잔으로 돌아와 탁자에 앉아 있는 운찬이었다.

“다녀오셨어요오……?”

운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힘이 쭉 빠지는 목소리로 인사한 뒤, 흐물흐물한 해파리 같은 몸놀림으로 다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멍하니 앉아서 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

이쯤 되면 묻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남궁휴는 오는 길에 잠시 살 게 있다며 시장으로 갔기에, 지금 이곳엔 운찬과 단둘뿐이다.

탁자에 가서 마주 앉자, 운찬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봤다.

“일……. 큰일이 있긴 하죠…….”

“무슨 일인데?”

“그, 대회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항주 대요리 경연은 이미 지난 하지(夏至) 때 끝났고, 남은 건 금선 숙수 대회뿐인데……. 그게……. 대회가 사흘 뒤에 열린대요.”

“뭐? 사흘 뒤?”

“예에……. 큰일이에요. 이번 대회를 놓치면 앞으로 일 년간 다른 대회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렇지만 사흘은 너무 빠듯하고, 재료도 요리도 준비한 게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운찬은 횡설수설 혼자서 중얼거리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장기린은 잠시 입을 다물고는 신음을 흘렸다.

요리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분명 참가자가 수백 명이 넘는 대회를 준비하기에 사흘은 너무 짧다.

‘부담이 크겠지.’

운찬의 성격상, 객잔의 운명이 자신의 어깨에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면 굉장히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일 년.

상당히 긴 시간이지만…….

그는 객주로서 운찬의 부담감을 덜어 주어야 했다.

“그래서, 힘들 것 같아?”

“……네?”

“대회 말이야. 참가하기 힘들 것 같은 건가? 그렇다면 너무 무리할 것 없어. 비록 내년을 기약해야 하더라도……. 나는, 아니, 우리 객잔 식구들은 너를 원망하지 않…….”

잠시 멍하니 쳐다보던 운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에?! 무슨 말씀이세요?”

“……어?”

“대회엔 당연히 참가해야죠. 지금 사흘이 문제인가요? 자칫하다간 객잔이 문을 닫게 생겼는데? 당장 내일 대회를 시작한데도 참가해야 할 판국이잖아요?”

운찬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형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태평하시네요.”

“……!!”

“저는 대회에 참가해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이왕 참가하는 거, 당연히 상을 타야 하니까요. 일 년 뒤를 기약하는 건……. 쯧, 너무 태평하잖아요?”

운찬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주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졸지에 덩그렇게 탁자에 홀로 남겨져 버린 장기린.

그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이 자식이……!”

기껏 걱정해 주며 부담감을 덜어 주려고 했더니, 사람을 나태한 놈 취급을 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는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주방 문을 벌컥 열고 한마디 해 주려는데…….

“……으음.”

막상 부글부글 끓는 물 옆에서 야채를 썰고 있는 운찬을 보자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마를 흥건히 적신 땀이 자꾸 눈에 들어가서 눈을 찡그리면서도 운찬은 자신의 땀을 닦지 못했다. 손을 한 번 들어 올릴 틈도 없이 요리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채를 썰고, 미리 준비해 둔 밑 재료를 조합하고, 끓는 물이 적당한 온도에 올랐을 때 재료를 데치고…….

보조해 주는 사람 한 명 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느라 운찬은 한시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손을 들어 땀을 닦기는커녕 숨을 내쉴 시간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요리에만 온 정신을 집중한 운찬의 모습은 옆에서 보기에 비장하기까지 했다.

‘손은 또 언제 저렇게 다쳤지?’

가만히 보니, 손이 온통 상처투성이다.

칼을 쓰는 오른쪽 엄지와 검지는 천으로 둘둘 감아 두었는데도 피가 점점이 배어 나오고 있었고, 왼쪽 팔등엔 벌건 화상 흉터가 가득 나 있었다. 물집과 상처로 성한 곳이 하나 없는 상처투성이 손이었다.

그걸 보자 최근에 운찬이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얼마나 고심을 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래, 부담감이 없을 리가 없지. 저 녀석은 나름대로…… 혼자서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숙수로서의 자격이 없어서 객잔을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

대회에서 입상을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

쾌활한 성격인 탓에, 남에게 우는소리도 못 하고 혼자서 끙끙 앓으며 괴로워했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거다.”

장기린은 조용히 주방 문을 닫고 뒤로 물러났다.

남궁휴는 시장에 갔고, 휘연과 아칠, 아팔은 객잔 수리를 상의하기 위해 임가촌에 갔다.

운찬마저 주방에 틀어박히자, 객잔 내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자신의 숨 쉬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고요하고, 평화롭다.

‘하지만 조금, 심심한가?’

예전엔 혼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았는데, 이젠 객잔 식구들이 없으니 뭔가가 빠진 것처럼 허전하고 심심하게 느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취향이 변했다고 해야 할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사람들과의 융화.

어색하지만, 기분 좋은 변화다.

항상 애용하는 구석의 탁자로 가서 그 위에 팔짱을 끼고 드러누웠다.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조금 쓸쓸하고 허전한 시간을 빨리 보내기 위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온몸을 편안하게 이완시켰다.

식구들이 도착할 때까지 휴식을 취해 두자.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끼이이익―!

“……?”

장기린은 조용히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식구들 중 한 명이 돌아왔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문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마치 처음 열어 보는 것처럼.

이걸 열어도 되나, 고민을 하는 마음이 여실히 느껴질 만큼 조심스럽고 어려워하는 듯한 기척이었다.

‘누구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옆을 더듬었다.

무기를 찾는 습관이었으나, 이내 이곳은 객잔이고, 그는 더 이상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객잔에선 이렇게까지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도 떠올랐지만,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하며 몸을 낮추고 ‘침입자’의 동태를 살폈다.

만약 뭔가 수작을 부린다면, 재빨리 뛰어들 수 있도록 퇴로도 확인해 둔 채.

“저기……. 음, 아무도 없소?”

하지만 그 경계심은 방문한 사람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소금이 물에 녹아 버리듯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젊은 미청년.

아니, 표면적으론 그렇지만, 청년이라기보다 그냥 ‘미인’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가녀린 다리, 잘록한 허리, 숨겨지지 않는 미묘한 골격의 곡선.

본인은 잘 변장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남들이 보기엔 변장했다고 말하기가 민망할 만큼 품이 넓은 청록색 장포가 어울리지 않았다.

몸은 펑퍼짐한 옷으로 가린다 쳐도, 길고 부드러워 보이는 손가락과 새하얀 목선, 갸름하고 매끈한 얼굴은 가릴 수가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일부러 굵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는 듯한 어색한 목소리는 차라리 ‘난 사실 여자입니다’라고 외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시오?”

“꺅……?! 아, 크흠! 노, 놀랐잖소!”

갑작스런 인기척에 놀랐는지, 그―그녀―는 양손을 가슴에 조신하게 얹은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왜, 왜 그런 곳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오? 장부는 항상 당당해야 하는 법이거늘. 어째서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긴단 말이오!”

제법 근엄한 말투로 장부의 몸가짐에 대해 질책을 가하는 그녀였다.

정작 본인은 이미 매우 귀여운 비명 소리를 질렀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자리에 누워 있다가 일어났을 뿐이오. 그보다, 지금 상황이 좀 뒤바뀐 것 같은데.”

“뒤바뀌다니? 무슨……?”

“객잔 주인은 나요. 갑작스런 방문에 놀란 쪽은 나라고 생각하오만.”

그녀는 순간 할 말을 잃었는지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지금 주인은 이쪽이고, 그녀 자신은 방문객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미, 미안하오. 내가 너무 놀라서 무례를 범했소.”

“아니, 뭐 사과를 할 것까지는…….”

포권까지 취하는 정중한 사과에 오히려 이쪽이 놀라 버렸다.

범상치 않은 외모에 화끈한 질책 때문에 상당히 고집이 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시원시원하게 사과를 해 버린 것이다.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상대가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성격이 괜찮군.’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며, 사과 후 어색해하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지금 풍운객잔은 영업을 하지 않는데……? 문 앞에 팻말이 붙어 있지 않았소?”

“아, 그건 알고 있소.”

“그런데?”

“에?”

“그런데, 왜 이곳까지 들어온 것이오?”

그녀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머뭇거렸다.

그보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상당한 미인이었다. 이지적으로 보이는 영롱한 눈과 시원하게 뻗은 콧날. 그리 작지 않으면서 매끈한 입술.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청명한 기분이 드는 시원한 인상이었다. 그림을 그린 듯한 미인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랄까. 오밀조밀하게 조화를 이룬 휘연의 얼굴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를 만나러 왔소.”

“음? 뭐라고 했소?”

“남궁휴라는 사람을 만나러 왔다고 했소.”

일부러 굵게 내는 목소리였다.

조금 어색해하고 부끄러워하는 듯한 말투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휴를 만나러 왔다고?’

의외의 말이었다.

아, 물론 남장을 한 미녀가 갑자기 찾아온다면 상대가 누구든 의외였겠지만.

그래도 남궁휴의 경우는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운찬이나 아칠, 아팔이라면 모를까. 휴는 우리 객잔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안 거지?’

갑작스레 경계심과 함께 의심이 생겨났다.

남궁휴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예를 들면 철우나 남궁무회 같은―을 제외하면, 누군가가 전문적으로 뒷조사를 하지 않는 한 남궁휴를 찾아 이곳까지 올 수는 없다.

“휴는 지금 볼일이 있어서 밖에 있소. 곧 들어올 것이오.”

“아……! 그렇소?”

“기다릴 거요?”

“그렇게 하겠소.”

그녀는 근처의 탁자로 가더니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남자의 옷을 입었으나, 여전히 매우 여성스런 몸놀림이었다.

“그런데, 휴와는 무슨 관계이시오?”

“관계……라니요?”

“휴를 찾아 이곳까지 올 정도면, 어떤 사이인가 궁금하단 뜻이오.”

질문을 던져 놓고 조용히 반응을 살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빈틈이 있다면 단번에 물어뜯어 주리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긴 그렇군. 관계…… 있소. 분명히. 아무한테나 밝힐 만한 것은 아니지만.”

“…….”

그녀는 어딘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픔이 서려 있는 듯한 그런 아련한 표정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군.’

남궁휴를 생각하며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 좋지 않은 목적으로 왔을 리는 없다.

장기린은 의심을 풀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선 말하지 않을 것이오.”

“어째서?”

“난 남궁휴를 보러 왔지, 다른 사람을 보러 온 것이 아니오. 그리고 그를 만나 보는데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한 것도 아니지 않소?”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 성격.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목소리가 그녀의 성격을 말해 준다.

‘역시 특이하군.’

이렇게 자기주장을 분명히 하는 것을 보면 역시 평범한 성격이 아니다.

“차라도 한잔하겠소?”

“아니, 괜찮소. 그냥 기다리겠소.”

그녀는 자리에 앉은 채로 입을 다물었고, 장기린 또한 다른 것을 묻지 않고 원래 누워 있던 구석의 탁자로 가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

“…….”

객잔 안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휘이이잉―

열려 있는 창문으로 꽤나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직 칼바람이라고 부를 것까진 없지만, 그래도 밖을 나다니는 사람들이 춥다고 느끼기 충분한 바람이다.

서서히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새 가을이 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니,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느낀다. 불과 올해 봄까지만 해도 피투성이인 채로 전쟁터를 전전했는데.

이렇게 객잔을 하나 통째로 사고, 식구들을 모아 영업을 준비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끼이이익―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장터에 사람이 많아서 늦었습니……다?”

깜빡. 깜빡.

새로 만들어진 듯한 싸리비 몇 개를 어깨에 짊어진 남궁휴가 객잔 안으로 들어오다가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눈을 깜빡거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있을 수 없는 일을 보고 있다는 듯이.

한참을 딱딱하게 굳어 있다가 더듬더듬 한껏 조심스런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연아……?”

딱딱하게 굳어 버린 것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남장 여인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울컥 감격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남궁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라버니…….”

이젠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숨기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남궁휴에게 다가갔다.

이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오라버니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퍼억―!

“컥……!”

그림을 그린 듯한 깔끔한 자세로 몸을 띄워 남궁휴의 얼굴에 원앙각을 꽂아 넣었다.

우당탕―!

남궁휴는 객잔에 들어온 것이 무색하게 다시 객잔 밖으로 무참히 튕겨 나갔다.

“이 웬수야……!!”

공중에 몸을 띄워 발뒤꿈치를 얼굴에 꽂아 넣고, 다시 깔끔하게 착지를 하는 것까지.

불과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랜 시간 스스로 단련했음이 분명한 여인의 기술은 실로 깔끔하고 능숙했다. 그녀는 금강명왕상처럼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버티고 서서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정면을 노려봤다.

반대로, 그 한 수에 얻어맞은 쪽은 어땠냐 하면…….

“끄으…….”

비틀거리면서도 오뚝이처럼 곧장 다시 일어나 꿋꿋이 객잔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연아,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리비를 놓지 않는 것이 대단할 지경이었다.

그가 애타게 불러 봤으나 ‘연’이라고 불린 여인의 선택은 명백했다.

그녀는 바닥의 웅덩이를 건너뛰듯 양다리를 앞뒤로 찢어 펄쩍 뛰어오르더니, 할퀼 것처럼 오므린 손으로 남궁휴의 전신을 난타했다.

찌르고, 조르고, 움켜쥐고, 꺾어 올리고.

순식간에 열아홉 가지의 부위를 열아홉 번의 공격으로 공격하는데, 남궁휴는 반항 한 번 못 해 보고 그대로 묵묵히 얻어맞고는 폭풍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커허! 쿨럭, 쿨럭……!”

남궁휴는 격하게 숨을 몰아쉬며 감격한 눈으로 여인을 올려다봤다.

“여, 연아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십 성을 이룬 천리호정에 빈틈없는 대연십구식(大衍十九式)이라니…….”

“오라버니가 약한 거예요!”

그녀는 실컷 두드려 놓고도 분이 안 풀리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점점 화가 나는 듯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외쳤다.

“대체 왜 이렇게 약해요? 어릴 적에 아무리 공격해도 한 번도 맞지 않던 그 오라버니는 어디 갔어요?”

“연아, 그건…….”

“조용히 해요!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요!”

동생의 위압적인 기세에 남궁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달랑 서찰 하나 남기고 갑자기 사라져 버리더니, 그 뒤로 오 년이라고요! 그 뒤로 일 년에 한 번. 고작 사람을 시켜서 서찰이나 하나씩 보내고. 오라버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나보죠?”

“그럴 리가 있겠어?! 나는……. 어쩔 수가…….”

이화 부인과 남궁무회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는데,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남궁휴는 더듬더듬 변명을 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억울하긴 하지만, 그로서는 다른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쁜 이야기를 해서 여동생까지 가문을 싫어하게 만드느니, 그냥 그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는 것이 나았다.

“게다가! 매번 들리는 나쁜 소문까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안 좋은 소문이 돌 수 있는 거죠? 기루에, 여자에, 도박에……. 거기다가 이제 보니 무공까지 수련하지 않았다니……!”

실망과 질책이 가득한 남궁연의 얼굴에, 남궁휴는 아무 말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남궁휴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남궁연은 그런 남궁휴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안 되겠어요.”

그녀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어떻게 여길 찾아냈는지 알아요?”

“……어떻게 찾았어?”

“저, 뇌안각에 들어갔어요. 뇌안각의 제일조장이 바로 저예요.”

“……!”

뇌안각이라고 하면, 남궁세가에서 운용하고 있는 정보 조직이었다.

남궁세가의 본거지인 합비에선 그야말로 옆집 밥그릇의 개수까지 알 수 있을 만큼 뛰어나고, 대륙에 다른 지역에도 상당히 많은 점조직을 가지고 있는 커다란 단체였다.

정보 조직인만큼 특히 기밀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기에, 남궁가의 직계혈족이 요직을 담당하는 중요한 곳이기도 했다.

“어째서…… 네가……?”

하지만 남궁휴는 걱정스러웠다.

아직 어린 동생이다. 열아홉이면 다 큰 성인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의 눈엔 어린 여동생일 뿐이다.

요직인만큼 노리는 사람도 많고 위험하기도 한 뇌안각에서 일하느니, 차라리 세가 내에서 수나 놓고 또래 여아들과 담소나 나누는 게 오라버니로선 마음이 편했다.

“우습게 보지 말아요. 저는 단지 혈연 때문에 일조장이 된 건 아니니까. 열여섯 살 때부터 그곳에서 일하면서 관록을 쌓아 왔다구요. 오라버니는 걱정할 필요도 없고, 또 그럴 자격도 없어요.”

“…….”

냉정한 말에 남궁휴의 고개가 다시 한 번 푹 숙여졌다.

그렇다.

그는 동생을 오 년간 방치해 둔 못난 오라비였다. 그녀를 걱정할 자격도 없었다.

‘난 이제 오라비가 아닌 건가…….’

생각해 보니 연아를 동생으로 부를 자격이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남궁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참고로 저는 제일조장으로서 잠시 뇌안각 항주 지부를 맡기로 했어요.”

“그래. 그렇구…… 뭐?”

“그러니, 앞으로 계속 지켜보겠어요. 방탕하게 살지 않고 똑바로 살고 있는지, 남궁세가의 아들로서 똑바로 무공은 수련하고 있는지. 뇌안각의 눈으로 계속 살펴볼 테니까 절대로 방심하지 말아요. 잠깐이라도 나태하게 굴면……. 동생으로서, 반드시 지옥을 맛보게 해 줄 거예요.”

남궁휴의 얼굴이 어벙해졌다.

과연 뇌안각의 제일조장답게 섬뜩할 만큼 위압적이고 무서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뜻은 그 정반대였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오라버니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못난 오라버니를 챙기고 보살펴서, 반드시 똑바로 고쳐 놓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

감격해서 할 말을 잊고 더듬거리는 남궁휴였다.

남궁연은 척 하니 팔짱을 낀 채로 냉정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볼에 살짝 묻어나는 홍조는 감출 수가 없었다.

오 년 만에 만난 동생과 오라비가 서로를 마주 본다.

서로 괄목할 만큼 변한 채로.

하지만 속만큼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로.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속마음을 교환했다.

“휴. 별채에서 차를 한 잔 끓여다 줬으면 하는데.”

“예? 별채에서요……?”

“그래, 별채에서.”

어째서 멀쩡한 주방을 놔두고 별채에서 차를 끓여야 하는가?

남궁휴는 눈빛으로 물었지만, 장기린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몇 번 눈짓을 보내자, 남궁휴는 그제야 알겠다며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

“…….”

장기린은 남궁연을 바라봤다.

그녀는 남궁휴가 나가자마자 몸을 비스듬하게 돌린 채,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눈을 닦고 있었다.

애써 참고 있던 감정이 남궁휴가 나가자 폭발한 것 같았다.

“장기린이라고 한다.”

“……남궁연이에요. 그런데 왜 반말을 쓰시죠?”

“휴는 가족이니까. 가족의 동생에겐 반말을 쓰는 게 옳겠지. 혹시 불쾌한가?”

남궁연은 눈물을 닦아 내던 것을 멈추고는 이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는 신기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과연, 미리 들었던 그대로네요.”

“음?”

“반말을 쓰셔도 좋아요. 저도 오라버니처럼 편하게 대할게요.”

장기린이 지금껏 많은 여인들을 보아 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궁연은 지금껏 보아 온 여인들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어딘가 자유롭고, 호쾌하다고 해야 할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대번에 오라버니처럼 대하겠다고 말하는 이런 모습도 그에겐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럼 본론부터 말하지. 남궁휴는 방탕하게 산 게 아니야. 그보단 오히려 가문에 보여 주기 위해 스스로 자학을 하며 살아왔다는 게 맞겠지. 너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것도, 너를 위한 일이었고.”

“…….”

“물론, 그건 너도 미리 알고 있었겠지만.”

남궁연은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알고 있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았죠?”

“너는 이곳에 와서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남궁휴를 원망하지 않았어. 그보단 투정이나 응석에 가깝달까. 만약 남궁휴가 왜 그랬는지를 몰랐다면……. 오 년간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던 오라비인데, 그렇게 따뜻한 눈으로 쳐다보긴 힘들었겠지.”

“……대단하네요. 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티가 많이 났나요?”

“뭐, 어느 정도는.”

남궁연은 피식 웃으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옆으로 내려온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꽤나 쓸쓸해 보였다.

“오라버니가 가문을 떠나고, 이 년이 지날 때까진 정말로 오라버니를 미워했었죠. 하지만 뇌안각에 들어가고 나서 모든 오해가 풀렸어요. 정보를 다루는 곳에 간다는 건…… 가문 내부의 정보도 알게 된다는 거니까요.”

남궁연은 장기린의 뒤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별채가 있는 방향.

지금쯤 남궁휴가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을 그곳이다.

“명문 세가에선 사소한 것들까지 모두 기록에 남겨 두는 걸, 알아요? 가족들 사이에서 나온 이야기, 별 의미 없는 시덥잖은 대화까지. 저는 그 덕분에 오라버니가 가문을 떠났던 해에, 저를 혼인시키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것도 근처 중소 가문의 망나니와. 이화 부인은 아마 그걸로 오라버니를 압박했을 거고, 오라버닌 어릴 적부터 저를 끔찍하게 아껴 주었으니까, 가문을 나가는 쪽을 선택했겠죠. 그 추측은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렇군.”

“결국, 오라버닌 저 때문에 가문에서 쫓겨난 거예요.”

쓸쓸해 보이던 얼굴에 갑자기 기합이 들어간다. 어떤 일이든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것 같은 단호한 얼굴로, 그녀는 남자처럼 씩 웃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요. 제가 원하기 전까진 혼인당할 걱정도 없고, 가문에서도 저를 크게 간섭하지 않아요. 힘이 생긴 거죠. 이젠 제가 오라버니에게 갚아 줄 차례예요.”

그녀는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남궁휴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해 주겠다고.

만약 남궁휴가 남궁세가의 후계자를 원한다면 후계자로 만들어 주고 말겠다고.

그러다가 휙 고개를 돌려,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에도 감사해요.”

“무엇을?”

“오라버니를 구해 주셨죠. 빚을 대신 갚아 주고, 목숨을 살려 주었잖아요.”

“……알고 있었나?”

“네. 오라버니에 대해선 다 조사해 두었으니까요.”

새삼 뇌안각이란 곳의 대단함을 느꼈다. 철우와 풍운객잔 사이에서 일어난 작은 일인데도,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대단하군.”

“아뇨, 별로 대단하지 않아요. 그쪽에 대한 것도 알아내지 못했는 걸요.”

“……!”

“뭔가가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황실에서 ‘특급’으로 분류하고 기밀로 감추는 사람이라니……. 대체 과거에 어떤 일을 하셨나요? 혹시 동창에라도 있었나요? 아니면, 금의위?”

순간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방심했다.

뇌안각에 있는 여자.

오라버니에 대해 조사했다면, 그 객잔의 주인인 자신에 대해서 조사하는 것도 당연한 것을.

‘……진정하자.’

순간적으로 당황했으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남궁연의 눈에 ‘의심’이라거나 ‘경계’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사람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결국 정보를 못 얻었다지 않은가.

그럼, 일단은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별거 없어. 그저, 지금은 평범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일 뿐이야.”

“평범이요? 재밌네요.”

남궁연은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거 알아요? 진짜 천재들은 자기가 특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미 특별하니까. 만약 누군가 마음속으로 자기가 특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이미 그 사람이 지금은 평범하다는 반증이에요.”

“그게 나라는 뜻인가?”

“네. 반대로 생각하면 간단하잖아요. 즉, 평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는 평범한 게 아닌 거죠. 어쩔 수 없이 특별한 사람인 거예요.”

남궁연의 말은 순간적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평범함을 바라는 순간, 이미 평범한 것이 아니다.

그 도학적이면서도 오묘한 말은 마음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저는 사실 걱정했었어요. 장기린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혹시 이상하거나 나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말은 안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남궁연은 오라버니를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제거’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에요. 이야기해 보니 그쪽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충분히 알겠어요.”

“……난, 좋은 사람이 아니야.”

“어머, 제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해야 하나요?”

스스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좋은 사람이 된다.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어버린 사이, 남궁연은 이쪽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눈이 부셔서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오라버니를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앞으로 장 가가라고 불러도 될까요?”

가가(哥哥)라면 오라버니를 뜻하는 말이다.

쾌활한 어조로 말해 놓고, 살짝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남궁연이었다.

조금 전에 허락했던 말도 있고 하니, 장기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네, 장 가가.”

다시 한 번 환한 웃음을 짓는 남궁연을 보면서도 장기린은 이 순간 알지 못했다. 즉흥적으로 허락한 이 별칭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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