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六章 ― 송년회(送年會)
장기린은 보기만 해도 머리 아픈 한자라든가, 유식한 티를 팍팍 내는 성어(成語)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몇 개 있었다.
과거, 적룡기마대의 지낭(智囊)이었던 섭우생은 말했다.
“양약고어구이이어병, 충언역어이이이어행(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而利於行)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이롭고, 충고하는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그 행실에는 이롭다……라는 뜻이지요.”
“에? 그 말은 즉 좋은 약이랑 충고는 짜증난다는 뜻인가요?”
“……진구야. 넌 뜻을 매우 잘못 이해하고 있어.”
“그게 아니면, 충고를 할 때는 상대가 듣기 좋게 신경 써서 하라는 뜻이거나…….”
“크흠! 대형, 이 말의 핵심은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간신배들을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달콤한 아첨은 겉으로 보기에만 화려한 독버섯 같은 존재이지요. 뒤에선 어떤 치명적인 무기를 감추고 있을지 모릅니다. 본래 뛰어난 주군일수록 그런 아첨과 충언을 구별해 내야 하는 법입니다.”
‘양약고어구이이어병, 충언역어이이이어행이라……. 우생아,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이곳은 독버섯 천지구나.’
장기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항상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술을 절제하는 장기린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쓰러져 버릴 때까지 독주를 들이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변에서 경쟁하듯 번갈아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모두 너무 달아서, 듣는 귀의 고막이 타 버릴 것 같은 말들뿐이었다.
“아아―! 명월 소저, 당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니 내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습니다. 두 눈으로 직접 하늘의 태양을 본들 이것만 할까요. 이제 다른 여인들을 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듯하니,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아아―! 부끄러워하시는 모습도 너무나 아름답군요. 이제 저는 명월 소저 말고는 그 누구도…….”
“이런! 혜화 소저, 왜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시는 건가요? 너무 기름진 음식이 입맛에 안 맞으시다구요? 아아―! 이런 슬픈 일이……. 제가 그럴 줄 알고 직접! 손수! 만든 심태연을 가지고 왔어요. 이건 비밀인데요. 이 심태연이 최상급 대추랑 꿀을 써서 맛이 새콤달콤한데다, 피부 미용에도 좋은 건데…… 아무 데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어때요? 맛있죠? 제가 특별히 혜화 소저께는 삼 일에 한 번씩 만들어 드릴 수도…….”
장기린은 결국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키고 말았다.
삼장법사의 법문을 듣는 손오공이 이런 심정일까? 문화적 충격이요, 견딜 수 없는 고문이다.
어떻게 저렇게 온몸에서 소름이 돋을 것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지……. 쉰네 명의 기녀들을 상대로 두 청년의 아첨 경쟁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연습이라도 했던 건가?’
장기린은 마음 같아선 두 사람을 앉혀 놓고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기녀들이 그걸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기린의 입장에선 귀를 씻어 내고 싶을 정도의 극랄한 언행인데, 막상 그 말을 듣는 당사자들은 “어머…….”라며 볼을 사르르 붉히거나, 눈을 반짝이며 그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장기린은 아삭거리는 소채를 조금 집어먹으며 새삼 그가 있는 곳을 다시금 확인했다.
붉은색 옻칠이 된 원형 기둥이 7장이나 되는 천장까지 뻗어 있고, 구름과 달 문양의 상감이 새겨진 벽면엔 해태나 기린과 같은 신수들의 모습을 한 풍경(風磬)들이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다. 수백 명이 들어와 있어도 충분할 것 같은 연회장은 눈이 부실 만큼 화려했다.
그런 쪽으론 안목이 없는 장기린이 봐도 한눈에 비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고급 탁자와 번쩍거리는 도자기들. 눈이 돌아갈 만큼 비싼 물건들이 발에 채일 만큼 널려 있는 곳에서, 가채와 비단옷으로 한껏 치장한 아름다운 기녀들이 무려 쉰네 명이나 있으니, 옥황상제가 사는 천궁에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치스러운 곳이 청월루에 있어서는 고작 제칠 별채밖에 안 된다는 점이 놀랍다. 일곱 번째 별채가 이 정도라면, 실제 본관은 얼마나 화려하다는 것일까?
“강 숙수님과 휴, 모두 열심히 하네요. 노력하는 게 눈에 보여요.”
옆에서 휘연이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오늘 평소의 노란 경장이 아니라, 소맷자락이 바닥까지 내려오는 장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장점인 늘씬한 다리가 감춰진 셈인데도, 한 팔로 감을 수 있을 것 같은 잘록한 허리와, 부드럽게 떨어지는 등의 곡선 같은 게 강조되어서 오히려 더욱 여성스러워 보인다는 점이 신기했다.
거기다가 살짝 분칠을 해서 더욱 뽀얗게 보이는 피부와 평소보다 붉은 입술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실제로 근처에 앉은 기녀들이 지나갈 때마다 휘연의 자태를 칭찬하곤 했다. 그녀들 사이에선 과거 ‘차세대 항주제일화’가 유명했던 모양인지, 휘연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
장기린은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을 감추기 위해 황급히 탁자 위의 소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쿡.”하고 웃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은 아마 착각일 것이다.
장기린은 당황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여인들은 저런 말을 좋아하는 거야?”
“네? 아…… 강 숙수님이나 휴가 하는 말 말인가요?”
“그래. 내가 듣기엔 거북하기만 한데, 어째 여인들은 꽤나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서.”
휘연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실 여인들도 저렇게 노골적인 말은 안 좋아해요.”
“그래……?”
“네. 특히나 어떻게든 점수를 따려고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어떻게 좋아하겠어요? 다만, 어찌 됐건 외모를 칭찬해 주고 그녀의 환심을 사려 한다는 노력이 가상해서 웃어 주는 거죠.”
장기린은 운찬과 휴가 작업을 하고 있는 현장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두 사람의 옆에 있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겉으로 봐선 절대로 저게 대충 맞장구를 쳐 주는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정말이야……? 저게 그냥저냥 웃어 주는 거라고?”
“어머나, 그럼요. 여인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데요. 이야기를 들어주는 정도는 너무나 쉬운 거죠.”
장기린은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었다.
“그럼 여인의 진심을 알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흐음, 이걸 가르쳐 드려도 되려나……?”
“…….”
“쿡! 특별히 가르쳐 드릴게요. 여인의 마음은 말이죠.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눈?”
“네, 눈이오.”
장기린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자, 휘연의 커다란 눈망울이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여자는요, 마음이 가는 상대에게는 눈빛이 달라져요. 항상 시선으로 그 사람을 쫓고…… 항상 아련한 눈빛으로 보게 돼요.”
“그걸 알아볼 수 있나?”
“물론이죠. 특히 여자들끼리는 한눈에 보면 아는걸요?”
장기린은 “끄응.”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투항한 병사가 말하는 정보의 진실 여부는 귀신같이 판별해 낼 수 있는 장기린이지만, 여인의 마음이란 것은 그것보다도 더욱 복잡한 모양이다.
아무리 근처 기녀들의 얼굴과 눈빛을 살펴봐도, 가짜라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걸 알아차리면 객주님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곤란하다구요.”
“모르는 게 나은 건가?”
“그래요. 그런 거 모르셔도 돼요. 특히 ‘여인’에 대해서는 절대로 관심 가지지 마세요.”
휘연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확고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듯한 한기가 느껴진다.
그러겠노라고 순순히 대답한 장기린이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주변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칠과 아팔은 이미 초반에 기녀들이 귀엽다며 따라 준 독한 화주를 마시고 뻗어 있는 상태.
어느새 운찬과 휴가 한 명씩 대담(對談)을 끝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사자(死者)의 죄를 판별하는 염라대왕처럼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선 철우가 큰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마무리하자!”
철우가 신호를 보내자, 연회장의 입구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커다란 징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데에에엥―!
징 소리와 함께 재잘거리던 기녀들의 수다 소리가 약속이라도 하듯 단번에 뚝 그친다.
장기린은 그 순간의 혼란을 틈타 휴가 옆의 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철우는 장내가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뒤, 그의 커다란 주먹을 공중을 향해 힘차게 치켜들었다.
“자자, 다들 결정한 건가? 정화(頂花) 어때? 다들 마음은 정했나?”
연회석의 중심에서 한 여인이 일어났다.
그녀는 이립(而立)이 넘어 보이는, 기녀로선 효용이 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이였는데, 그림을 그린 듯한 미인은 아니지만 분칠을 해서 새하얀 얼굴, 가늘면서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눈썹. 그리고 차분한 몸놀림 같은 것이 묘한 기품이 되어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근처에 있는 몇몇 기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대답했다.
“네, 철 가가. 다들 마음을 정했다네요?”
“좋아!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 섭섭하지. 그래서 내가, 오늘의 주인공인 두 아가들한테 마지막으로 재주 좀 떨어 보라고 말했다. 어때? 혹시 보기 싫은 사람 있나?”
주변에서 꺅꺅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럴 리가요!”, “어서 보여 주세요!”와 같은 고성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항상 자신들이 재주를 부리다가, 이젠 그 재주를 감상하는 입장이 되어서일까? 기녀들은 모두 못내 즐거워 보였다.
“자, 첫 번째! 나와라!”
철우가 옆에 서 있던 시종의 북자루를 뺏어 들고 징을 후려치자, 하늘이 흔들릴 것 같은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징 소리를 신호로 연회장을 밝히던 등불들 중 절반 정도가 꺼져 버렸다.
하지만 반대로 오히려 불이 밝아진 곳이 있으니, 바로 연회장의 입구 쪽이다.
‘쿵―!’하고 갑자기 입구가 열리며, 그곳에서 새하얀 백의를 입은 여인 한 명이 연회장 안으로 펄쩍 뛰어들어 왔다.
소맷자락이 바닥에 닿고, 치맛자락은 뒤로 1장이나 늘어지는 치렁치렁한 예복. 무서울 만큼 새하얗게 분칠한 얼굴과 연지를 바른 새빨간 입술. 그리고 머리에는 화려한 금관을 쓰고 있었다.
‘여인이 아니다……?’
장기린은 놀라 버렸다.
방금 들어온 사람.
여인의 복장을 하고, 화장까지 짙게 했으나, 그 몸놀림이 여인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기린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골반이 움직이는 각도. 어깨의 움직임. 곡선이 아니라 직선적으로 꺾여 있는 몸매.
그 모든 것들이 그가 남자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江)―산(山)―일(一)―변(變)―홍(紅)―!”
여인의 그것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연회장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그)는 여인보다 더욱 여성스러운 몸짓으로 몸을 살짝 비틀더니 살랑살랑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천천히, 부드럽게. 하지만 이내 순풍을 탄 배처럼 유려하게 움직이는 몸짓은 순식간에 연회장 내의 모두를 매료시켰다.
입으로는 낭랑한 목소리로 고시(古詩)를 읊고, 몸으론 한 마리의 학처럼 우아하게 춤을 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기린은 이내 짙은 분가루 밑의 얼굴이 그가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휴잖아……!!”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서 말하고 말았다.
경극의 한 장면을 재연하다니……. 휴가 항주 뒷골목을 전전하면서 여러 가지 재주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경극까지 능숙하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와……!”
옆에서 들려오는 탄성에 고개를 돌리자, 휘연 또한 흥미진진한 얼굴로 휴를 응시하고 있었다.
“대단하네요……! 설마 별희를 할 줄이야……!”
“별희?”
“네, 패왕별희요. 특히 저 역할은 경극단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배우가 맡기로 되어 있거든요. 배우 중에서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역할인데……!”
장기린은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휘연의 말을 듣고 그게 대단한 일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원래 잘생긴 남자 배우가 저 역할을 한다고……? 여자 배역을?”
“네. 그래서 더욱 인기가 있는 거예요. 여자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잘생기고, 재능 있는 남자라는 뜻이니까요. 휴도 대단하네요. 이 정도면 강 숙수님이 이기기 힘들 것 같은데요?”
휘연의 말이 아니더라도 주변의 분위기는 이미 휴를 향해 흐르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 보였다. 쉰네 명의 기녀들 모두가 호기심과 감탄이 담긴 뜨거운 눈빛으로 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휴의 반응은 어땠냐면, 오히려 그 시선을 즐기듯 기녀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여인네 같은 눈웃음을 짓거나 교태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리곤 했다.
“꺄아악―!”
“남궁 공자! 대단해요!”
그러니 사방에서 기녀들의 교성이 한층 더 커지는 것도 당연한 일.
양쪽의 무게를 비교하는 천칭이 있다면, 지금 이 일로 무게가 한쪽을 향해 확 쏠려 버린 느낌이다.
장기린은 생각했다. 운찬이 자신의 차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모르지만, 이것 이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이번 싸움의 승리는 휴의 것으로 굳어지는 듯 보였다.
차창―! 쩡―!
어느새 꺼내 든 검 두 자루가 서로 부딪치며 영롱한 소리를 울린다.
고시를 읊는 휴의 목소리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그의 몸짓 또한 절정에 올라, 하늘하늘하던 춤사위는 격정적이고 화려한 검무로 변해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하강한 천녀(天女)처럼.
울분을 딛고 하늘을 향해 승천하는 용(龍)처럼.
쩡. 쩡. 쩡.
검이 만들어 내는 장단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세 박자, 두 박자, 한 박자.
종래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잔상이 남을 만큼 빨리 검을 휘둘러야만 박자를 맞출 수 있을 만큼 장단이 빨라졌다.
“아아……!”
“대단해……!”
그 움직임에 몰입했는지, 기녀들은 검의 움직임이 빨라짐에 따라 그에 맞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집중하고 있었다.
장기린은 눈에 이채를 띠고 그 모습을 묵묵히 감상했다.
검무를 추는 휴의 눈은 그 어느 곳도 응시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움직임에 완전히 몰입한 느낌. 처음의 교태로운 표정이나 여유 같은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어느새 춤 자체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 가진 바 모든 것을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걷는 법, 숨 쉬는 법. 내가 가르친 것을 모조리 활용하고 있어……!’
장기린은 감탄했다. 휴의 재능이 이 정도로 뛰어났을 줄이야. 휴는 그가 지금껏 가르쳐 준 모든 것들을 한 번에 뭉뚱그려 보여 주고 있었다. 예전의 휴로서는 도저히 보여 줄 수 없는 실력을 단번에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소가 안 좋아.’
만약 혼자 조용한 장소에서 저 과정을 겪었더라면, 아마 더욱더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이곳은 아리따운 여인들이 교성을 질러 대는 연회석이었다.
휴는 이내 집중력을 잃고 다시 정신을 차려 버렸다. 흐름을 타서 한참이나 검을 휘두른 뒤,
“대에에(大)― 미이이(尾)―!”
끝을 알리는 별희의 목소리와 함께 휴의 검이 다시 정갈한 검집 속으로 돌아갔다.
“…….”
잠시간의 무거운 침묵.
그리고.
“꺄아아아―!”
“어머, 어머, 어머!”
“남궁 공자, 최고―!”
연회석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여인들의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휴는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손을 흔들어 준 뒤, 그제야 등을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는 연회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 순간까지, 실제 별희가 그러듯 기품 있고 교태로운 몸짓으로 걸어 나갔다.
장기린은 주변의 여인네들이 그러듯,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말았다. 휴의 연기는 마지막까지 트집을 잡을 구석이 없을 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대단하네요. 설마 이 정도까지 할 줄은…….”
휘연은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뜬 채,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교였을 텐데…….”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한 여자아이에게서 시작된 말싸움이 이렇게 규모가 커진데다, 두 사람이 이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할 줄이야.
게다가 어느샌가 본말이 전도되어서, 이 싸움을 일으킨 장본인인 소교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장기린이 미간을 꿈틀거리는 사이, 철우가 다시 한 번 징을 울리며 “두 번째―!”라고 외치고 있었다.
끼이익―.
“…….”
문이 열리고, 바퀴 달린 인력거가 연회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휴의 공연을 본 흥분이 가시지 않은 기녀들의 눈에 의아한 감정이 떠올랐다.
수레 위에는 두꺼운 천으로 덮인 물체가 기둥처럼 서 있었는데, 그것의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력거를 끌어다 준 시종 두 사람은 연회장의 중심에 인력거를 조심스레 세워 놓은 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뒤를 이어, 입구에서 운찬이 비장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저기, 저는 경극 같은 화려한 재주도 없고, 말솜씨도 변변치 않아서…… 딱히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냥 제가 잘하는 것을 보여 드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운찬은 우물쭈물하면서 쑥스러움과 긴장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신선한지 주변의 기녀들도 어느새 운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저기…… 제가 어제 정성을 다해 만든 것입니다.”
운찬이 조심스레 천을 걷어 내자, 수레 위에 있는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어머……!”
주변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 밝지 않은 빛을 영롱하게 반사시키는 투명한 물체.
주변에 뿌연 안개를 만들어 내는 그것은 커다란 얼음덩어리였다.
그런데 단순한 얼음덩어리가 아니다. 그 얼음은 한 사람의 모습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채, 수줍은 듯 해맑게 웃는 미소. 동그랗고 귀여운 눈동자. 아직 젖살이 다 빠지지 않았지만, 그만큼 더 순수해 보이는 얼굴.
그 모습은 수수하게 표현된 의복과 어울려서 한 송이의 은초롱꽃처럼 청초하고 순수한 소녀를 그려 내고 있었다.
‘저건……!’
장기린이 그 외모를 보고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기녀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 소녀, 어쩐지 소교를 닮지 않았어?”
“누구? 소교가 누구야?”
“걔 있잖아. 금 침모님 옆에서 수발을 드는 애.”
“아, 걔……! 어머, 정말이네? 그러고 보니 완전 판박이야.”
“그런데 왜 걔를 조각했지? 혹시 강 숙수님이……?”
쉰네 명의 기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운찬을 향해 쏟아진다.
운찬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그게,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아름다운 여인’을 조각하려고 하니까,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아서……. 생각해 보면 이번 일이 모두 걔 때문이기도 하고……. 그, 그, 그렇다고 해서 제가 소교를 좋아하는 건 아니구요! 그게, 그러니까, 저기 뭐라고 해야 할지…….”
운찬은 자신의 말에 더욱 당황했는지 말을 하면 할수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기녀들이 지그시 응시하자 운찬은 결국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못 하고 말았다.
“…….”
휴의 공연이 끝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의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잠시 후.
“흥! 우리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면서, 다른 여자의 모습을 조각한 얼음을 보여 주는 거예요?”
기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다던 정화라는 여인이 자못 새치름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녀의 얼굴은 즐거운 듯한 미소가 역력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운찬은 그녀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목소리만 듣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정화의 말이 신호였는지, 주변 여기저기서 기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흥! 맞아! 너무하네. 우리한테 저런 ‘부러운 거’나 보여 주고.”
“그러게!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뭐야?”
“우리가 다른 여자 조각상을 보고 기뻐할 거라 생각하는 걸까?”
운찬의 고개가 점점 푹 숙여진다.
어디선가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운찬을 쏘아붙이던 목소리들이 묘한 어조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아―! 나한텐 저런 선물해 주는 남자 없으려나? 저런 순정을 마지막으로 본 적이 언제더라? 동녀(童女) 시절이었나?”
“그립네. 나한테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고, 괜히 속으론 좋으면서, 마음 없는 척하고 그러던 거 말이야.”
“꺄―. 그렇게 말하니, 우리 너무 나이 들어 보인다.”
“맞아. 화나네. 그러지 말고, 확 뺏어 버릴까? 소교보단 내가 잘해 줄 자신이 있는데?”
주로 기녀들치곤 나이가 좀 있는 여인들이 순수한 운찬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았다.
물론 그래 봐야 이제 겨우 서른 안팎인 젊은 처자들이지만, 삶의 세파를 일찍 겪은 그녀들에게 ‘순정’이라는 건 그 말만으로도 그리운 일인 듯했다.
운찬은 이게 지금 어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듯 얼떨떨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그의 뒤에선 어느새 화장과 분장을 모두 지우고 돌아온 휴가 얼음 조각상과 까르르 웃는 기녀들을 번갈아 응시하고 있었다. 그로서도 이런 식의 반격은 예상 못 했는지 급소를 찔린 것처럼 씁쓸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연회장의 입구에선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안쪽을 훔쳐보는 귀여운 인상의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초롱초롱하고 촉촉한 눈망울로 자신을 꼭 닮은 조각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빛은 마치 꿈결 속을 거니는 것처럼 몽롱했다. 특히 운찬을 바라볼 때의 그녀의 눈빛은,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곤 했다.
‘과연, 눈빛이 다르다는 건 그런 뜻인가.’
장기린은 이제야 휘연의 말뜻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의 마음을 아는 방법은 태도나 웃음 따위가 아니었다.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눈빛이야말로 그 사람의 마음을 알려 주는 커다란 창문이었던 것이다.
“자, 자. 그럼 됐지? 이제 볼 건 다 본 것 같은데. 마음들 확실히 정했나?”
철우가 재촉하자, 기녀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지……?”
“아아, 고민이다. 색기 있는 남궁 공자도 좋고, 순수해서 귀여운 강 숙수도 좋고.”
“꼭 하나만 정해야 하는 거야?”
“아이, 도저히 못 정하겠어. 어떻게 하면 좋지?”
기녀들은 모두 이래저래 복잡한 얼굴들이다.
정화가 대표로 나서서 철우에게 말했다.
“철 가가, 시간을 좀 주세요. 엉킨 실타래보다도 복잡한 것이 여인의 마음인데, 저렇게 쟁쟁한 두 사람을 놓고 어떻게 마음을 쉽게 정할 수가 있겠어요?”
정화와 철우가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는다.
철우는 “흠!”하고 신음을 흘리더니, 이내 호쾌하게 박수를 쳤다.
“좋아. 그럼 시간을 좀 주지. 일각이면 되겠지?”
“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정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철우는 북채를 들고 징을 한 번 더 울렸다.
데에에엥―!
“자, 일각의 시간을 준다. 그 안에 마음을 정하도록 해! 여기 걸린 상품이 큰 거 알지? 꼭 확실하게 정해야 돼!”
기녀들은 입을 맞춰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연회장의 한쪽으로 모여 수군대기 시작했다.
가끔 입구 근처에 서 있는 운찬과 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토론을 하는 모습이, 금방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음…….”
장기린은 어색한 기분을 느껴 버렸다.
지금 이 넓은 연회장에 그 혼자만이 남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옆을 보니 휘연은 몇 명의 기녀들과 함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쉽게 이야기가 끝날 분위기가 아니다.
휴와 운찬은 입구 근처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고, 아무래도 장기린이 대화를 나눌 만한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일각인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엔 상당히 긴 시간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밖에 나가 바람을 좀 쐬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뒤쪽에 조용한 공간이 있었지?’
연회장은 이 층인지라 뒷문 같은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바깥공기를 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연회는 재밌었지만 워낙 그와 안 어울리는 행사인지라 정신적으로 지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용한 곳에서 바람을 쐬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장기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갔다.
“후우.”
얇은 창호지 문을 열고 나와서는 입김이 나올 것처럼 차가운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원단(元旦:1월 1일)을 하루 앞둔 한겨울이라 그런지 바람이 매우 쌀쌀했다.
호수에 떠 있는 나룻배처럼 밝은 초승달이 검은색 밤하늘을 부유하고 있고, 주변을 감싼 은은한 구름과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장기린은 탁 트인 밤하늘을 보자 조금 가라앉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산해관 너머 전장에서 보는 거나, 항주 중심가에서 보는 거나 밤하늘의 모습만큼은 조금도 다르지 않고 똑같았다.
다른 점은 그 밑의 풍경.
과거의 장기린이 보아 온 ‘밤’의 풍경이 주변을 밝히는 횃불과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이었다면,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풍경은 지평선이 절대로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전각들과, 낮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만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화려한 항주의 야경이었다.
장기린은 이 층의 난간 위에 우뚝 선 채 멍하니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밖으로 나오면 조용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정이 가까워진 이 시각의 항주는 연회장의 그것보다 더욱 시끄럽고 왁자지껄한 것이다.
취객들의 고함 소리.
은은하게 들려오는 악곡.
거리를 뜨겁게 밝히는 홍등.
높은 전각 위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의 모습은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듯했다. 퇴폐적이고 향락적이지만, 사람 냄새가 짙게 느껴지는 기묘한 광경.
‘나는 지금,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건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투성이의 전장에서 굴렀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마치 한편의 꿈을 진하게 꾸고 일어난 것처럼. 이젠 복잡하고 화려한 항주의 모습이 더욱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사람은, 아니 장기린 자신은 이렇게나 적응을 잘하는 존재였던가?
드르륵―!
‘음?’
항주의 야경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보던 장기린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문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처음엔 ‘휘연인가?’라고 생각했으나,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새빨간, 적색(赤色)이었다.
피와 같은 붉음이 아니라,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과시하는 만개한 홍화(紅花) 같은 붉은색.
장기린은 그 화려함에 눈을 뺏겨 순간적으로 말을 잃고 말았다.
매끄럽고 고급스러운 붉은색 비단에, 황후의 예장이 부럽지 않을 만큼 아름답게 수놓아진 금빛 문양은 가히 충격적이다.
앞머리는 특이하게도 매끄럽게 일자로 잘라 두었는데, 귀를 타고 가슴까지 내려오는 옆머리와 머리 위로 부드럽게 틀어 올려 금색 비녀로 고정시켜 놓은 뒷머리까지, 전체적으로 머리 모양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빛나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여자치고는 짙은 눈썹과 쌍꺼풀이 있는 진한 눈매. 거기에 끝이 뾰족한 콧날과 유난히 붉은 입술이 합쳐지니,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한 미모를 완성시켰다.
단 한 번 보았더라도,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다시 기억하려고 하면 선명하게 다시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깊은 인상이다.
장기린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휘연과 남궁연 등을 만나면서 그동안 미인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앞에 있는 여인은 그녀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존재였다.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기품……? 기세……? 아, 그래! 색기(色氣)다! 이건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어.’
그 말로도 부족한 듯하지만, 그 이외엔 딱히 지금의 느낌을 표현할 만한 단어가 없었다.
이 여인에게선, 지금껏 만나 본 어떤 여인들보다도 ‘여자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진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휘연과는…… 다르다.’
장기린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휘연과 비교하고 있었다.
휘연과는 느낌이 다르다거나, 외모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누가 더 낫나? 같은 생각을 하며 굳어 있는 사이, 여인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눈빛으로 그를 주시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선객이 있는 줄을 몰라, 실례를 범했습니다.”
은방울을 흔드는 것 같은 영롱한 목소리, 양갓집 규수처럼 기품 있는 말투였다.
장기린은 입을 닫고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기도 했고, 무표정한 얼굴로 사죄를 하기에, ‘곧바로 다시 나가려나 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탁―!
‘음?’
그런데 그녀는 의외로 서슴없이 다가와 뒤에 있는 문을 닫아 버렸다. 난간 안쪽에 좁은 공간밖에 없는 곳에 두 사람이 남겨진 셈이다.
장기린은 조금 당황해 버렸다.
대체 이 여인은 정체가 무엇일까. 저 쉰네 명의 기녀들 중 하나일까?
복장이나 분위기로 봐선 기녀인 것 같았지만, 이런 외모를 가진 여인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눈에 띄었을 테니, 지금껏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장기린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눈 위를 걷는 것처럼 사박사박 가벼운 발소리가 들린다.
한 걸음 옆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피어올랐다.
“연회가 즐겁지 않으셨나요?”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 목소리에, 장기린은 그녀에게서 애써 시선을 뗀 채, 다시 항주의 야경을 바라보며 답했다.
“……이런 분위기는 익숙지 않아서.”
“그렇군요. 사실은 저도 그렇답니다. 소란스럽게 들떠 있는 공기 속에서 혼자만이 남겨진 것 같을 때, 저는 종종 이곳에 와서 바람을 쐬곤 했지요.”
아무래도 연회장의 공기가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이 고독하다고 느껴 보신 적이 있나요?”
“……글쎄.”
“천장 절벽의 끝에 혼자 매달려 있는 듯한 기분. 세상의 다른 것들과 철저하게 격리되어서 가둬진 것 같은 기분. 주변의 모두가 함께 어울려 덩실덩실 춤추고 있는데, 나만은 그들과 ‘다르다’라고 느끼는 기분.”
“…….”
“그런 기분은, 느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공감할 수 없지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고 싶다는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없으니까요.”
장기린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여인을 쳐다봤다.
처음에 ‘고독’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때만 해도 너무 뜬금없다 싶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장기린은 그 말에 공감하고 말았다.
세상과의 차이를 느끼는 점.
격리된 고독을 느끼는 점.
그리고 ‘평범’을 바라는 점.
마치 장기린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똑같지 않은가?
여인은 여전히 야경 쪽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매끄러운 앞머리 아래에 있는 짙은 눈매와 틀어 올린 뒷머리 아래로 보이는 새하얀 목덜미가 묘하게 시선을 자극한다.
‘……잠깐.’
장기린은 놀라서 동요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상대의 말에 동요하고, 여인의 목덜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니……. 이건 평소의 그답지 않은 처사였다.
‘이 여자…… 뭔가 특이하다.’
처음 만나 말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인데, 마치 그녀와 자신이 동일한 경험, 동일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듯한 일체감을 느낀다.
장기린은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흔들리는 눈빛을 바로잡고, 차분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건, 그쪽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요.”
여인은 망설이지 않고 즉답했다.
“제가 본 첫인상을 말로 표현해 본 것이랍니다.”
“……그래?”
그 첫인상이 누구에 대한 첫인상인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대단한 여자였다. 처음 말 몇 마디로 상대에게 동질감을 줘서 마음을 열게 하다니.
장기린이 이 정도라면, 여인네들에게 약한 보통 사내들은 앞에서 시선만 닿아도 녹아내릴 것이 분명했다.
“제가 지금껏 보아 온 그 누구보다 외로워 보이는 모습이었어요. 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 어떤가요? 즐거운가요? 행복해 보이나요?”
그녀는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듯했다.
“글쎄…….”
장기린은 야경을 바라보았다.
왁자지껄한 밤거리에서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들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신년을 맞아 사자탈이 춤이라도 추는 모양이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듯한 그 노래엔 시름도 없고, 걱정도 없고, 그 순간을 즐기는 열정만 있을 뿐이었다.
장기린은 생각했다.
저 사람들도 자신처럼 유년기에 고난을 겪었을까? 매일같이 피로 몸을 씻고, 제 손으로 직접 타인의 생명을 거두는 일을 횟수도 세지 못할 만큼 지겹게 해 보았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장기린은 세상에 익숙지 않지만, 자신과 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드물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장기린은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아픔을 감추듯, 애써 태연한 말투로 대답했다.
“세상은 세상일 뿐이지. 내가 어떤 사람이든 세상은 보이는 모습 그대로일 뿐이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과연, 그런가요.”
그녀는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드럽게 몸을 돌려 장기린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고명한 도사분께서 오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분께서 그러셨어요. 풍진세상이 더럽다고 불평하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자는 하인(下人)이요, 세상이 더러우니 내가 바꿔 놓겠다고 나서는 것은 중인(中人)이다. 그리고 세상은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저 어울려 가며 살아가는 것이 상인(上人), 즉 진인(眞人)이다.”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급 주루에 드나드는 도인이라는 작자를 믿어도 되는 건가 싶지만…… 그 사람이 했다는 이야기만큼은 가슴에 깊이 공감될 만큼 뜻깊은 말이다.
“세상은 그저 세상이지요. 하지만 그것을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런가?”
“네, 당신은 특별해요.”
장기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평범하게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는데, 또 평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역시, 자신은 평범하게 살기는 그른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장기린의 불편한 기색을 느낀 것일까? 여인은 단정한 몸놀림으로 곧바로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천녀(賤女)가 부족하여 실례를 범했습니다.”
“……별로, 실례랄 것까지는 없어.”
“그렇다면,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녀는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었다.
정중하게 사과를 할 때는 언제고, 괜찮다고 하자마자 당돌하게 고개를 들고 대꾸한다.
‘그런데도 화가 안 나는 건, 신기한 일이군.’
장기린이 피식 웃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곧장 질문을 던졌다.
“혼인을 하셨는지요?”
“아니.”
“하지만 곁에 두고 있는 여인은 있으시겠지요?”
“…….”
여인은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무표정할 때는 황후 못지않게 도도해 보이더니, 웃음을 짓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주변을 딱딱하게 감싸고 있던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지는 느낌이랄까.
거기에 이쪽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
왠지 반박하고 싶어지는 기분이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한 여인의 모습이 생각나는 장기린으로서는 빈말로라도 부정할 수 없는 질문이다.
“뭐, 가족처럼 지내는 여인이라면 한 사람 있지.”
“‘가족처럼’이오?”
“그래. 가족처럼.”
여인은 마치 속을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 장기린을 지그시 바라봤다.
“과연, 그런가요.”
“…….”
“분명 대단한 여인이겠죠.”
그녀는 한마디로 단정 지었다. 그 생각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일까?
“제가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신가요?”
“…….”
그녀는 정말로 장기린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에게도 자랑은 있습니다. 보통 사내들이 저를 처음 만나면, 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는 점이지요. 고매한 학사분들이나 중들도 예외는 아니랍니다.”
그녀의 말은 분명 사실일 것이다. 그녀처럼 특별한 외모와 매력을 가진 여인은 장기린도 처음 보았다.
“하지만 당신께선, 별로 흥미가 없다는 듯 곧바로 야경을 바라보시더군요. 제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아요.”
그녀는 그래서 오기가 나서 자신도 야경을 계속 바라보았었다며, 소매로 입을 살짝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마치 협봉검으로 심장을 찌르듯, 직선적인 질문이 날아왔다.
“그녀를 연모하시나요?”
“…….”
장기린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뭐라고 답할지 고민하거나 속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런가요.”
그녀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왠지 모르게 조금 기쁜 듯 눈초리가 휘어졌다.
똑똑―.
그때, 창호지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지그시 장기린을 한 번 쳐다보더니.
“차회(次回)에 다시 만났을 때, 제가 술을 한잔 올리겠습니다.”
“차회……?”
“그럼, 천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장 객주님. 부디 남은 시간 ‘평범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양손을 가운데로 모으고 부드럽게 굽혀지는 허리.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몸놀림으로 인사를 한 뒤, 그녀는 손수 문을 열고 연회장 안으로 사라졌다.
사라락. 사라락.
치맛자락이 끌리는 소리가 멀어져 간다.
장기린은 문이 닫힌 뒤에도, 그녀가 나간 뒷모습을 쫓듯 가만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음번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마치 당연히 그렇게 될 것처럼.
경황이 없어 미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할 때쯤, 이상한 점을 느꼈다.
‘……잠깐, 장 객주님이라고?’
분명히 그는 대화 중에 그의 이름을 밝힌 적이 없다. 게다가 객주라면…… 그가 하는 일마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 연회장 안을 살폈다.
여전히 왁자지껄하게 달아오른 공기. 쉰네 명의 기녀들이 내뱉는 교성과 웃음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장기린이 재빨리 연회장 안을 둘러보았지만, 붉은빛의 화려한 그녀는 이미 연회장 내에 없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새 연회장 내에서 사라져 버리다니.
그가 황당함을 느끼며 제자리에 굳어 있는 사이, 연회장의 입구 쪽에 서 있던 철우가 평소의 우렁찬 목소리로 장기린을 불렀다.
“어이, 이봐! 혼자 거기서 뭐하는 거야! 결과가 나왔다고!”
장기린은 그제야 지금 이 연회가 ‘여심대회전’이라는 전무후무한 이름으로 개최된 운찬과 휴의 대결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재밌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철우의 옆에서, 운찬과 휴는 어째선지 초조하고 당혹스런 얼굴로 서 있었다. 특히 운찬은 괴로운 듯 머리를 쥐어뜯고 있기까지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소?”
“아마 들으면 놀랄걸?”
철우는 호쾌한 웃음을 얼굴에서 좀처럼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쉰네 명의 기녀들의 의견. 종합해서 이십칠 대 이십칠. 즉, 정확하게 동점이다.”
장기린은 눈을 크게 뜨며 양 패로 갈라진 기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들도 신기한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뭐, 지금 이렇게 된 걸 보면 그런가 보지.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하고 이해해라.”
철우는 씩 웃으면서 철판 같은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팡팡 때렸다.
옆에서 운찬과 휴의 불만스런 한탄이 들려왔다.
“또다시 대회를 열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이젠 더 이상 보여 줄 것도 없는데…….”
“동점이라니……. 이럴 수가! 일생의 수치!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입니다.”
절망하고 있는 두 사람의 심정은 각각 다르지만, 둘 다 이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점은 일치하는 듯했다.
장기린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한쪽이 이겨서 감정이 상하는 것보다야…… 무승부인 게 차라리 낫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장기린.
그런데, 철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뭐, 일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사내’들의 승부에서 무승부라는 건 있을 수 없지! 안 그러냐, 아가들?”
철우의 말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 두 사람이 고개를 번쩍 든다.
하지만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 흥미진진하게 사태를 지켜보는 쉰네 명의 기녀들을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또다시 보여 줄 것도 없고…….”
“그렇다고 다음번에 또다시 연회를 열자니, 폐가 될 것 같기도 하구요…….”
두 사람은 쭈뼛거리며 망설이고 있었다.
철우가 정신 차리라는 듯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크게 박수를 쳤다.
“어이, 정신 차려! 그렇다고 해서 근성도 없이 이대로 넘어갈 거냐? 고작 그 정도 결의로 이 몸을 움직이게 한 거다 이거야?”
아무리 웃고 즐기는 중이라도, 철우는 철우다.
항주 뒷골목을 주름잡는 그가 인상을 쓰고 목소리를 깔자, 대번에 주변의 공기가 냉각되어 버렸다. 특히 정면에서 그 기세를 받은 두 사람이 딱딱하게 굳어졌음은 물론이었다.
“어이, 아가들. 잘 들어 봐라. 분명 이대로는 승부를 볼 방법이 없겠지. 더 이상 보여 줄 것도 없을 거고 말이야. 하지만, 내가 지금 기가 막힌 생각을 하나 떠올렸다 이거야.”
철우는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우리 청월루에 자랑이 하나 있지. 일견즉통(一見卽通)이라, 어떤 사람이든 간에 한 번만 보면 곧바로 그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고, 그 가치를 판별할 줄 안다. 황궁에 드나드는 관리들마저 예를 갖추고 정중히 의견을 물어보는 그런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 따위는 쉽게 해결해 주지 않겠어?”
거기까지 말하자, 장내에 있던 기녀들은 모두 철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는지 각자“아……!”하고 탄성을 토하거나, “어머, 어머!”하면서 흥분해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운찬과 휴도 철우의 말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쌍둥이마냥 똑같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번쩍 들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철우를 바라봤다.
“설마…….”
“그 말씀은……!”
철우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설마야. 일견즉통. 천하에서 가장 지혜로운 꽃, 낭화(浪花). 그녀야말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에 적격 아니겠냐?”
순간 눈을 부릅뜬 운찬과 휴는 어찌나 흥분했는지 입만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장기린이 보기엔 그 낭화라는 여자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느냐 싶다.
일견즉통이라니.
그 말이 맞다면 신통한 점쟁이나 도력 높은 도사나 다름없는 수준이 아닌가.
‘잠깐, 도력 높은 도사라고?’
장기린이 머릿속에서 그와 연관된 생각을 떠올리려는 때, 옆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맑고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이 점점 재미있게 되어 가네요.”
어느새 이야기를 나누던 기녀들과 떨어져 나왔는지, 휘연이 옆에서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재미있다고? 이게?”
“네, 물론이죠. 결국은 정말로 낭화를 보게 된 거잖아요? 그녀는 보통 기녀가 아니에요. 훨씬 더 특별하죠.”
“……그래?”
“고관대작들도 함부로 만날 수 없는 여인이라, 하룻밤 수청은커녕 한 번 만나기 위해서만도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하더라고요. 일견즉통이라는 말은 헛소문이 아니라는 뜻이겠죠? 대체 얼마나 대단하면 그렇게 소문이 났을까요?”
휘연의 눈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에 호기심과 동경이 섞여 있다는 것은 명확하니, 장기린으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낭화라는 여자가 그 정도로 대단한 건가?’
휘연은 한때 유명한 상가의 외동딸로서 어릴 적부터 가문에서 여러 가지 교육을 받아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다. 계산이라든가, 사람 다루는 능력이라든가, 지금껏 객잔에서 보여 준 그녀의 능력만 해도 장기린으로선 상상도 못 할 만큼 대단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녀가 저렇게나 동경하는 여인이라니, 장기린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객주님은 실감을 못 하시는 것 같지만, 이건 사실 엄청난 행운이라고요.”
“그런 건가?”
“그럼요! 아직도 실감이 안 나시면,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우리 객잔이 보름 동안 장사를 해서 생기는 총수입보다도 더 큰돈을 내야만 만날 수 있는 여인을 공짜로 만날 수 있다. 즉, 그 돈만큼 우리는 이득을 본 거다……라는 거죠.”
그녀는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들떠 있었다.
잔뜩 흥분한 그녀를 보자 옆에 있던 장기린도 괜히 낭화라는 여인을 만나 보고 싶어졌다.
사실 그녀의 정체가 어렴풋이 짐작이 되긴 한다. 확실한 것은 아니고, 단지 여러 가지 단서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지만, 상황이 이쯤 되면 부처님도 돌아앉아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다음번엔 술 한잔을 하자는 약속을 하기도 했고.’
장기린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자, 휘연은 기대감이 섞인 시선을 그에게로 돌린다. 아마 휘연은 장기린이 그녀의 의견에 공감해 주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한 번 보고 싶긴 하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그 말에 만족한 듯 보조개가 폭 파일 만큼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아까는 어디에 가셨었어요?”
“음?”
“조금 전에 일각 동안 기녀들이 상의했을 때요. 그때 아무리 찾아도 객주님이 없어서 얼마나 놀랐었는데요?”
장기린은 흠칫했다. 기녀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바쁜 줄 알았는데, 그녀는 장기린의 동태를 주기적으로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일각가량 연회장에서 사라졌던 것은, 분명 뒷문 너머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서 바람을 쐴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흠칫한 게 실수였을까. 장기린을 쳐다보던 휘연의 눈이 살며시 가늘어진다.
“그냥 답답해서 바람을 좀 쐬었어.”
“혼자서요?”
“…….”
“혼자서, 바람만 쐬셨나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여자의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휘연만이 가지고 있는 예리한 통찰력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 직접 보진 않았을 텐데도 너무나도 날카로운 질문에, 순간 정직하게 대답을 해도 좋은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음, 그게…….”
장기린이 고민하며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갑작스레 들려온 운찬과 휴의 목소리는 구세 주나 진배없었다.
“낭화를 볼 수 있다면 이미 상품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정말로, 낭화를 볼 수 있는 겁니까? 언제요? 언제 그 질문을 할 수 있습니까?”
멍하니 굳어 있던 정신을 어느새 수습했는지, 운찬과 휴는 기대감 섞인 목소리로 다그쳐 묻고 있었다.
철우는 그런 그들의 심정을 다 안다는 듯 씩 웃더니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언제긴 언제야. 물어볼 거면 지금 바로 물어봐야지.”
“예에―?! 정말입니까?”
“저, 저기. 바쁘진 않을까요? 오늘은 연말인데다, 워낙 유명한 소저인데…….”
철우는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두 사람을 보며 즐거워했다.
“연말이야말로 주루의 입장에선 가장 한가한 날이지. 의외로 원단은 자신의 집에서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고. 내가 연회를 오늘로 잡은 것도 그런 이유야.”
“그, 그런 건가요?”
“그래. 즉, 손님이 없으니 인기가 높은 낭화도 오늘만큼은 한가하다는 뜻이지. 특히 이 시간쯤 되면 웬만한 손님들은 다 집에 돌아간 뒤라는 거다.”
신년의 첫날만큼은 자신의 집에서 보낸다. 대륙의 오랜 전통인만큼 술을 좋아하는 술꾼들조차 그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자, 그럼 그렇게 하지. 어이, 너희도 불만 없지?”
철우가 기녀들에게 묻자, 마치 미리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네에―!”하고 대답한다.
철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씩 웃고는 커다란 몸을 성큼성큼 움직여 연회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가 돌아오기까지는 불과 일각 정도 걸렸을 뿐이다.
장기린이 은밀히 추궁을 가해 오는 휘연의 질문에 곤혹스러워하다가 결국 진상을 토해 내야 하나 고민할 때쯤, 연회장으로 돌아온 철우의 곁에는 몹시 아름다운 여인이 함께하고 있었다.
“아……!”
“과연……!”
운찬과 휴는 턱이 땅에 닿을 만큼 입을 쩍 벌리고 놀란 분위기다.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
심지어 같은 여자인 휘연까지 그녀에게 혼이 빨린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어이, 여기 기녀 아가들은 알 테고, 너희한테 소개하지. 우리 청월루의 자랑, 낭화다.”
그 말에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아름다운 여인.
고급스러운 붉은 비단에 눈이 돌아 갈 만큼 화려한 금실 상감이 새겨진 옷을 입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머리 모양을 한 채, 하지만 그 무엇보다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진 그녀가 장기린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 때처럼 도도한 무표정.
하지만 북해(北海)의 만년설처럼 차갑게 굳어 있던 그녀가 장기린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옅은 미소를 띠며 분위기를 바꾼다.
그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아는 사람을 향한 호의(好意)가 담긴 인사였다.
“어……?”
옆에서 휘연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겨우 입술 끝만 살짝 끌어올린 옅은 미소라고는 하나, 그 주체가 낭화이다 보니, 마치 번데기가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커다란 변화였다.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는 하늘에서 따스한 빛줄기 하나가 내리쬔 듯한 모습이랄까.
그녀는 자신이 언제 웃었냐는 듯 순식간에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으나, 이미 그녀의 웃는 얼굴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뒤였다.
“지금……?”
“낭화가…… 웃은 거야?”
살짝 입꼬리를 올린 것뿐인데, 그게 무슨 큰일인 것처럼 웅성대는 기녀들.
장기린은 “크흠!”하고 헛기침을 하며 애써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휘연이 가늘어진 눈으로 낭화와 장기린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낭화는 사박거리는 발걸음으로 걸어 나와, 왜인지 천장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철우의 옆을 지나쳤다.
그녀는 운찬과 휴의 앞으로 다가가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했다.
“이야기는 철우 공께 들었습니다. 두 분께서 여인에 대한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 승부를 하고 계셨다구요?”
낭화의 영롱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연회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네에…….”
“크흠! 그렇습니다.”
운찬과 휴는 낭화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에 기뻐하면서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쑥스러워했다.
여인에 대한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 승부라니…….
낭화의 입을 통해 그 말을 들으니 새삼 부끄러워진 모양이다.
“과연…….”
낭화는 그런 그들을 한 번씩 지그시 응시하더니, 이내 뭔가 판단을 내린 듯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께선 사람은 땅[地]의 형상을 하고, 하늘[天]의 기품을 이어받았다고 말씀하셨지요. 지금 이곳에선 땅의 형상을 놓고 승부를 벌이셨으니, 제가 판단해야 할 것은 하늘의 기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을 천지인(天地人)에 빗대어 표현했던 공자의 말.
하지만 공자의 말씀 같은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딴 나라 말이나 마찬가지다.
아니나 다를까. 운찬과 휴는 약간 멍해져 있었다.
낭화는 그 이야기를 꺼낸 뒤, 몸을 돌려 철우를 바라보았다.
“철우 공, 분명 제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하셨었지요?”
확실하게 다짐을 받는 듯한 이야기.
철우는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물론. 제일 괜찮은 사람을 골라서 술 한잔 같이해 주면 돼. 그걸 고르는 과정은 네 마음이다.”
“꼭 오늘 안에 결론을 내려야 하나요?”
“부족한가? 뭐, 그것도 네 결정이야. 마음대로 하라고.”
“다행이군요.”
낭화는 기품 있는 동작으로 손을 모으고, 몸을 비스듬하게 돌렸다. 화려한 긴 소매가 마치 날개처럼 치렁치렁하게 늘어진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어째선지 장기린이 서 있는 방향이다.
“…….”
그녀는 다시 한 번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기는 듯한 웃음을 지은 뒤, 운찬과 휴를 보며 다시 무표정하게 변했다.
“내일까지.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특기’를 준비해서 저에게 보여 주세요. 저는 그 후에 누가 가장 매력이 있는지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운찬과 휴는 그녀의 말을 몇 번이나 되새기다가 깜짝 놀랐다.
“자, 잠깐만요.”
“특기라니요? 이미 조금 전에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그걸 다시 보여 달라는 뜻입니까?”
낭화는 냉정한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아뇨. 방금 두 분은 ‘보여 주고 싶은 특기’를 보여 준 것이죠. 제가 바라는 것은 두 분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진정한 ‘특기’예요. 멋있는 것이든, 초라한 것이든, 자기자신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것이기만 하면 됩니다.”
“아…….”
“즉, 여기 강 숙수님은 요리, 저는…… 크흠! 아무튼, 제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을 보여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낭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후, 다시 낭화의 시선이 장기린을 향하고, 그녀는 어김없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는다.
장기린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벌써 시선이 마주치고 미소를 지어 준 것이 여러 번.
이쯤 되면 다른 사람이 눈치를 못 채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실제로, 옆에서 느껴지는 휘연의 시선은 이제 따가운 게 아니라, 칼이라도 겨눈 것마냥 살벌한 지경이다.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그럼, 내일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하는 낭화의 말에 연회는 자연스레 파장을 맞았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지난 한밤중.
풍운객잔으로 돌아오는 길에, 객잔의 식구들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새해를 맞아 들뜬 공기. 그 틈새를 타고 청월루에서부터 그들을 은밀하게 뒤따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