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七章 ― 암습지야(暗襲之夜)
“아아, 도대체 뭘 만들면 좋을까?”
풍운객잔의 숙수 강운찬은 생선 기름[魚油]으로 만든 등불을 손에 든 채 어두운 주방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등불에 은은하게 비친 그의 앳된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내일 낭화를 만나서 보여 줘야 할 ‘특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직업은 숙수.
어린 시절부터 생각했던 천직(天職) 또한 숙수였으니, 그의 인생은 요리라는 단어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 내일 그가 낭화에게 보여 줘야 할 특기도 당연히 ‘요리’겠지만…… 문제는, 그가 할 수 있는 요리의 가짓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었다.
지금 주방에 남아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요리의 가짓수만 해도 백여 가지.
그중에 어떤 요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항주 최고의 여인이라고 평가받는 낭화가 그가 직접 만든 요리를 맛보고, 그의 인생 자체를 평가할 거라 생각하니,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실제로 운찬은 침소에 들어서 불까지 끄고 누워 있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나온 참이다.
‘나오면서 보니까, 휴 동생의 방도 불이 켜져 있었지.’
곧 해가 떠야 할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면…… 그건 휴도 운찬처럼 낭화를 만날 일을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자신만만해 보이던 휴도 그와 똑같이 긴장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운찬은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위로가 되는 것을 느꼈다.
“에…… 음……. 여인들은 과일 같은 새콤달콤한 것을 좋아하지. 그럼 간식 종류로 생각을 해야 할까? 아니, 그걸로는 좀 부족한데……. 명색이 낭화니까, 웬만한 음식으론 성에 안 찰지도 몰라. 뭔가 간단하면서도 마음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 요리를 해야 하는데…….”
달그락― 달그락―.
운찬은 이런저런 궁리를 해 가며 주방의 재료 창고 안쪽에 있는 과일 상자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 봐도 마음에 드는 재료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계절이 너무나도 추운 겨울인지라 제대로 된 과일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사과나 배 같은 햇과일들은 설령 청과상이 재고를 한가득 쌓아 두었더라도 이젠 다 뭉그러졌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이고, 그렇다고 산딸기 같은 봄 과일들은 아직 나오기에 너무 이른 때였다.
즉, 새콤달콤한 과일 요리를 만들기엔 시기적으로 너무나도 맞지 않았다.
“아아, 이걸 어쩐다. 과일은 포기해야 하나……?”
반 이상 뭉그러져서 도저히 식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을 듯한 사과 몇 개를 구석에 던져 버린 뒤, 운찬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이 시기에 재고가 있을 과일류는 대추나 밤 같은 견과류뿐……. 아! 견과류를 사용해 볼까? 고소한 맛에 벌꿀을 섞으면 괜찮은 맛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운찬은 창고의 구석에서 호두와 땅콩 자루를 꺼내 주방으로 돌아왔다.
생각을 했다면 곧장 시험을 해 봐야 한다.
운찬은 등불을 주방의 입구 쪽에 놓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등잔에 불을 옮겨붙였다.
등불이 두 개가 되니 대낮 못지않게 밝아진 느낌이다.
운찬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재료를 다듬을 준비를 하려는데…….
툭―.
“어……?”
갑자기 입구 쪽의 등불이 꺼졌다.
‘대체 왜?’라고 생각하며 운찬은 어둠 속에서 눈썹을 찌푸렸다. 가끔 주방 안으로 외풍이 들어오긴 하지만, 애초에 등불이란 물건은 바람 속에서 불빛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다. 이렇게 전조도 없이 픽 꺼져 버리는 것은 등불로써 실격인 것이다.
‘기름은 분명 가득 채워 두었는데……?’
다행히 등잔에 불을 옮겨 두었기 때문에 완전히 캄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밝았던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지니 눈이 침침해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불길하게도 ‘까득―’하고, 마치 발밑에서 나무 판을 가볍게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바닥 밑에 쥐라도 있는 것일까?
그래서 등불을 건드려서 기름이라도 쏟은 것일까?
‘아니야, 그랬으면 지금쯤 불이 났을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입구 쪽의 등불을 향해 다가가려던 운찬은 좀 전에 무심코 던져두었던 썩은 사과를 밟고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발이 옆으로 미끄러지며 단단한 나무 바닥이 눈앞으로 확 가까워진다.
“헛……·!”
바닥에 엎어져 코가 깨지기 직전,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조리대를 붙들고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숨이 거칠어진다.
순간적으로 이게 대체 무슨 불행한 일이냐며 한탄했으나, 옛말에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운찬은 속으로 불과 셋을 세기도 전에, 썩은 사과를 밟고 넘어질 뻔했던 것은 천하에 다시없을 행운이었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콰직!!
반짝이는 은빛의 칼날이 발치의 나무 바닥을 관통해 튀어나왔던 것이다.
“……!!!”
운찬은 목이 메여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입속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숨을 몇 번 쉬기도 부족한 찰나의 순간, 만약 꺼진 등불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면…… 썩은 사과를 밟고 넘어질 뻔하느라 의도치 않게 발을 옆으로 옮기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생각한 것만으로도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칼날은 사람의 손바닥만 한 길이였다.
일 척이 조금 못되는 직선형의 칼날. 좁은 칼날이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만들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찌르기 위해 특화된 칼일 것이 분명했다.
운찬이 경악과 공포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사이, 칼날은 나무 바닥을 ‘끼익. 끼익.’ 흔들며 배가 침몰하듯이 밑으로 쑥 사라져 버렸다.
떠나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비명을 지르며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데…….
운찬은 제자리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망치로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에 힘이 풀리고, 손끝이 덜덜 떨린다. 쿵쾅거리다 못해 이젠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심장의 고동에 몸을 떨면서, 운찬은 날카로운 칼날이 만들어 놓은 바닥의 구멍을 들여다봤다.
그때 뭔가가 보였다.
칼날 때문에 벌어진 바닥의 구멍 안쪽에, 마치 몰래 안쪽을 엿보는 듯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가 운찬을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흐, 흐악……!”
운찬이 한심한 목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선 순간, 그 뒤를 쫓듯이 칼날이 발밑 언저리에서 다시 한 번 튀어 올랐다.
콰직!
튀어 오른 칼날에 발끝에서 따끔한 고통을 느낀다. 운찬의 발바닥 안쪽이 살짝 베여 있었다.
“무, 무, 무, 무슨……?!”
아팠지만, 그 덕분에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운찬은 자꾸만 꼬이는 다리를 움직여 도마와 칼이 있는 조리대 위로 올라섰다.
뭐가 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습격자는 바닥 밑에 있다. 그렇다면 바닥에서 공격할 수 없는 곳으로 피해야 하는 것이다.
‘치, 침착해. 침착해야 돼……!’
운찬은 아랫입술을 덜덜 떨면서 필사적으로 바닥을 살폈다.
칼날은 어느새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다. 시뻘건 눈동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습격자가 아직도 그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까득―’거리는 소리와 나무를 가는 것처럼 사각거리는 인기척이 그것을 증명한다.
운찬은 공황 상태에 빠져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해야 하지? 비명을 지를까? 아니면 일단 무조건 별채 쪽으로 뛰어? 으아아―! 대체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생긴 거야?!’
운찬으로서는 처음으로 겪는 죽음의 공포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눈앞에 닥친 죽음.
누군가가 선명한 악의를 갖고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공포.
심지어 그를 향해 휘둘러지는 칼이라는 것도 그에게는 처음으로 겪는 경험이었다.
예전에 청월루에서 나올 때 철우에게 죽을 뻔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는 워낙 분노에 머리꼭지가 돌았던 상태라 기억할 수 없었다.
운찬은 지금 이 순간 뭘 해야 하는지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조리대 밖으로 고개를 쑥 빼고 사방을 살펴보는데…….
콰지직!
피슈슈슈슉―!
“우왁……!!”
이번엔 대놓고 나무 바닥을 쪼개며 뭔가가 튀어나오더니,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은빛 섬광을 앞으로 뿌렸다.
운찬은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처음에 너무 놀라 조리대에서 떨어져 버린 덕분에 엉덩이가 얼얼해진 것 말고는 상처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히익……!”
다만 은빛 섬광이 주르륵 박혀 있는 주방의 벽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신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아까 바닥을 꿰뚫었던 것과 동일해 보이는 단검들은, 나무 벽면은 물론이고 벽에 걸려 있던 작은 솥까지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쇠, 쇠로 만든 솥을 뚫어 버리다니……!’
그런 게 몸에 박혔을 경우엔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싫다.
‘지, 진정하자. 그래, 어쨌든 상대는 사람이야. 귀신이나 그런 게 아니라고. 귀신만 아니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마음만 굳게 먹으면…….’
운찬은 필사적으로 다짐하다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바닥을 뚫고 나온 그림자가 천천히 운찬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입구 쪽에서 운찬이 기대고 있는 구석으로.
자연히 조리대 위에 있던 등잔불에도 가까워지고, 그 정체가 드러난다.
새카만 암행복을 입고, 허리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작은 주머니들을 여러 개 매달고 있었다. 무릎의 각반과 팔목의 비구엔 단검의 손잡이들이 보이고, 등 뒤엔 길이가 삼 척쯤 되어 보이는 작대기 같은 것을 검은 천으로 휘감아 묵묵히 메고 있었다.
지금껏 이야기 속에서 듣고 상상해 오던 자객의 모습 그대로다.
다만 한 가지…….
지금 운찬을 극도의 공포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어, 어, 어, 얼굴이―!’
그는 자객답지 않게 어째선지 복면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굳이 본인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숨길 얼굴이 없는 것이다.
코는 대체 어디로 날려 먹었는지 마치 해골의 그것처럼 콧구멍만 두 개 뻥 뚫려 있을 뿐이고, 눈꺼풀은 칼로 잘라 냈는지 눈알 전체가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얼굴 이곳저곳엔 마치 거지들이 입는 누더기마냥 실로 기운 자국이 있었고, 군데군데 푸른색으로 변색된 피부엔 떼도 떼도 계속해서 생겨날 것 같은 딱지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반쯤 썩은 사과도 이것보다는 사람다웠을 것이다.
질척질척해서 당장이라도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은 피부를 보자, 운찬은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우, 우아아― 힉!”
팍!
소리와 함께 뺨을 스쳐 지나간 단검의 손잡이가 귀 옆에서 파르르 떨렸다.
운찬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목숨의 위협은 공포보다 더 크다.
자객은 끔찍하게 툭 튀어나온 눈알로 말하고 있었다. ‘입 다물어라.’라고.
“도, 도대체 왜……?”
그나마 한마디를 내뱉은 것은 운찬의 용기를 모조리 쥐어짠 덕분이었다.
그만큼 자객은 무서웠다.
끔찍한 생김새는 물론이고, 조금도 감추지 않고 살기를 내뿜는다는 점도 그랬다.
“…….”
아무 말도 없이,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시뻘건 눈으로 운찬을 응시하는 자객.
“히끅…… 후우…… 끄윽…….”
운찬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딸꾹질은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호흡이 엉킨다. 식은땀이 흐른다.
‘안 돼. 대화가 안 통해. 이대론 죽어!’
운찬은 대화를 포기하고 필사적으로 움직여 자신의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공포에 찌든 몸은 손발만 허우적거릴 뿐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터벅. 터벅.
별로 멀지도 않은 주방을 가로질러 자객이 점점 다가온다.
“……!”
한쪽 손에는 예의 그 뾰족한 단검을 가볍게 움켜쥔 채.
칼끝으로 벽면을 ‘끼긱. 끼긱.’ 긁으며, 눈으로는 확고한 살인 의지를 띤 채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운찬은 공포에 질려 자객을 올려다보았다.
“아, 안 돼……! 제발……!”
애원해 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자객은 죽음을 선고하는 저승사자처럼 벽면을 긁고 있던 단검을 들어 올리고, 시뻘건 눈으로 운찬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아니, 무심하게가 아니다.
운찬으로서는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온갖 질투와 탐욕을 불태우며, 자객은 높이 치켜들었던 단검을 단숨에 내리찍었다.
그 순간, 주방의 창고가 어스름하게 보이는 별채의 정원에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새하얀 백창의를 입은 사내였다. 나이는 이십 대 후반. 머리를 뒤에서 대충 질끈 묶은 뒤, 나머지 앞머리를 비스듬하게 내려서 눈을 가려 놓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야생동물에게 재갈을 물려 놓은 것처럼 묘하게 야성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자신이 곱게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 피부는 갈색으로 건강하게 그을려 있었고, 헐렁한 백창의로도 가릴 수 없는 탄탄한 어깨와 팔뚝은 금강석 같은 느낌의 근육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의 입매는 지금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건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뜻.
그는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앞머리를 걷어 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주저앉아 버릴 듯한 살벌한 눈동자가 분노를 가득 담아 본채의 주방을 노려보았다.
“감히, 내 객잔에서……!”
풍운객잔의 주인, 장기린.
그는 벽면에 기대어 있던 싸리비를 들고 그 끝을 밟아 싸리를 떼어 내 버렸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길이가 삼 척 정도 되는 대나무.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려 있었다면 그것은 그저 나무 위의 과일을 따는 데나 쓸 법한 장대에 불과할 테지만, 장기린의 손에 들린 순간부터 그것은 분명 무기였다.
사람의 몸을 부수고, 절단하며, 파괴할 수 있는 흉악한 무구.
장기린은 그것의 삼분지 일 지점을 오른손으로 붙잡은 뒤 능숙하게 감아올려 그 끝을 겨드랑이 뒤쪽으로 돌렸다.
그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길게 흩어져 나온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오직 한 지점.
주방과 재료 창고 사이의 벽면에 기대어서 공포에 떨고 있는 강운찬. 풍운객잔의 숙수다.
장기린의 강렬한 눈빛이 나무 벽면을 뚫고 그 너머를 꿰뚫어 보았다. 습격자는 이미 운찬의 코앞까지 다가가 있다. 살인에 능숙할 대로 능숙해 보이는 그에게 있어서 운찬은 그야말로 식후 간식거리조차 안 되는 간편한 사냥감일 터.
“흐읍……!”
장기린은 배가 빵빵해질 만큼 숨을 크게 들이쉬고, 곧바로 걸음을 내딛었다.
별채의 정원으로부터 주방까지의 거리는 약 삼 장(丈) 정도.
그는 그 거리를 단 세 걸음 만에 좁혔다.
보통 장기린이나 휴를 가르칠 때는 항상 한 박자 빠르게 움직이라고 했지만, 지금 장기린의 움직임은 이미 그런 박자의 개념조차 초월해 있었다.
한 박자를 빠르게 하고,
거기서 한 박자를 더 빠르게 하고,
그 상태에서 다시금 한 박자를 더 빠르게 하고.
그런 식으로 점점 박자를 앞당기다 보면 결국은 박자가 사라져 버린다.
이름하여 무박자(無拍子).
장기린은 모르지만, 대륙에서 불과 손에 꼽을 정도의 인물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절정 이상의 경지였다.
장기린은 산책을 나가는 듯 편안한 자세로, 어떠한 예비 동작도 없이 곧바로 주방 안으로 진격했다.
옆에서 보면 갑자기 사라졌다가 주방 앞에서 불쑥 나타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임가촌의 목장이 특별히 튼튼하게 만든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장기린이 앞으로 뻗은 왼쪽 손바닥이 닿자, ‘쾅―!’하고 썩은 나무처럼 부서지며 원형의 입구를 만들어 냈다.
지금의 장기린은 쏘아진 화살보다도 빠르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도 빨리, 기척으로 상황을 판별한다.
운찬의 머리 위로 습격자의 단검이 떨어져 내리는 상황.
장기린은 찰나를 쪼개고, 그 찰나를 다시 한 번 쪼개며 그들 사이로 짓쳐 들어갔다.
번쩍―!
그의 오른손에서 황색의 전격이 불을 뿜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운찬의 눈엔 그저 번개가 번쩍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단검은 멈췄다.
무려, 중간을 대나무에 관통당한 채로.
어느새 재빠른 판단으로 단검을 놓아 버린 자객의 손에서 벗어나, 장기린이 들고 있는 대나무의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
자객이 장기린을 보며 놀라는 것도 잠시.
그는 놀랄 만한 집념으로 이번엔 맨손을 뻗어 운찬의 목을 잡아 뜯으려고 했다.
파캉―!
“…….”
하지만 그 앞을 장기린의 죽창이 가로막는다.
자객의 검지와 중지는 각각 구부러질 리 없는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장기린의 강렬한 눈빛과 자객의 죽은 생선 같은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친다.
자객은 열세를 느끼고는 곧바로 몸을 뒤로 뺐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만약 한 번만 더 공격을 했다면, 손가락 한두 개가 아니라 어깻죽지가 날아가는 것을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장기린은 운찬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들고 있던 죽창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죽창의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단검은 반동강이 나며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더러운 얼굴이군.”
장기린이 거침없이 지적하자, 자객의 얼굴이 꿈틀 경련했다.
그는 허리춤의 주머니를 붙잡으려 했으나, 곧바로 장기린에 의해 제지당했다.
지금껏 어깨를 향하고 있던 창끝이 자객의 심장을 겨눈다.
그 이상의 움직임은 곧바로 죽음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너, 뭐냐?”
분노를 담은 질문이었으나, 자객은 그저 끔찍하게 튀어나온 눈으로 장기린을 살피기만 했다.
“자.연.체(自然體)……!”
그리고는 목젖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불분명한 발음으로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
흐물흐물한 피부 너머로 안면의 근육이 지렁이 떼처럼 꿈틀댄다.
장기린의 눈썹이 불쾌하게 찡그려졌다.
“벙어리는 아니었군.”
“…….”
하지만 그에 대해서도 묵묵부답.
장기린은 창날을 앞으로 향한 채 운찬을 흘깃 바라보았다.
한눈에 살펴본 결과, 운찬은 발에서 피가 좀 나는 것 말고는 멀쩡해 보였다.
다만 이 상황이 어지간히 충격적인지 혼이 빠진 것처럼 멍한 표정이다.
스릉―.
다시 시선을 자객 쪽으로 향하자, 그는 어느새 팔목의 비구에서 단검을 하나 꺼내 든 뒤였다.
잠깐 한눈을 판 것에 대한 대가.
하지만 그 정도는 이미 장기린도 예상했던 일이다. 단검을 뽑아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기에, 그래서 한눈을 팔았었다.
“벙어리는 아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테지?”
“…….”
“다만 궁금한 건, 내가 아니라 여기 이 녀석을 노렸다는 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를 생각해 낼 수가 없군.”
그 말을 마친 순간…….
허깨비처럼 휙하고 사라져 버린 자객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장기린을 향해 뛰어들었다.
바람 같은 몸놀림. 너무나 빨랐기에 허공엔 잔상조차 남지 않았다.
양팔을 뒤로 쭉 뻗은 채 달리던 자객은 바닥에 얼굴이 닿을 만큼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어느새 또 뽑아 들었는지 왼손에도 단검이 하나 쥐어져 있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양손의 단검을 장기린의 허벅지 부근을 향해 집어던졌다.
채챙!
날아온 단검이 맥없이 바닥을 구른다.
단검에 담긴 힘은 제법 강력했으나, 장기린에게 있어서는 그저 일반적인 수준이다.
양손으로 짧게 잡은 죽창을 휘둘러 단검을 쳐 내자, 자객은 곧장 허리춤의 주머니를 붙잡아 냅다 장기린을 향해 뿌렸다.
청색의 가루가 먼지처럼 뿌옇게 정면을 뒤덮는데, 코끝이 알싸하게 타들어 가는 느낌인 걸 보니 치명적인 독극물이 분명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주저앉을 상황.
하지만 장기린은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팔목을 빙글 회전시켰다.
손바닥 위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는 죽창.
회전하는 회전력 그대로, 이번엔 죽창의 중심을 붙잡고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회전시킨다.
회전은 순식간에 가속해, 죽창이 안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회전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속도가 빨라졌다.
속도가 빨라지면 불어 나가는 바람도 빨라지는 법.
폭풍 못지않은 바람이 앞으로 훅 뿜어지더니 청색 가루가 방향을 반대로 돌려 오히려 자객을 향해 날아간다.
“…….”
이쯤 되면 당황할 법도 한데, 자객도 동요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다.
자객은 날렵하게 몸을 낮추더니, 허리춤의 다른 주머니를 하나 더 꺼내 노란색 가루를 공중에 확 뿌렸다.
신기하게도 파란색과 노란색 가루가 만나자 소금처럼 딱딱한 결정이 되어 바닥에 후드득 떨어져 버렸다. 서로 상쇄되서 사라지는 해독제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이제 자객의 허리에 달린 주머니 중에 남은 것은 다섯 개.
‘하나씩 막으면 아직 다섯 개나 더 남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자객은 주머니를 한 손에 두 개씩 들더니, 총 네 개의 주머니를 한꺼번에 뿌려 버렸다.
파라라락―!
푸슈슈슈슉―!
일부는 바닥을 향해, 일부는 공중으로 날아갔다.
바닥을 녹이며 눈이 따가울 만큼 지독한 연기를 뿜어내는 것은 아무래도 유황(硫黃)과 비슷한 종자인 것 같았고, 공중에 뿌려진 것은 메뚜기를 닮은 비황석과 한눈에 봐도 독이 잔뜩 발려 있는 듯한 살벌한 철질려였다.
저것들 중에 단 하나라도 몸에 닿으면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게 되리라.
장기린은 죽창을 휘둘러 그것들을 하나하나 옆으로 쳐 내며, 뒤에 있는 운찬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주의했다.
암기는 쳐 내고, 유황은 바람으로 걷어 낸다.
일련의 행동을 반복하며 공격을 막아 내고 나자, 유황 연기를 걷어 낸 주방의 입구엔 자객이 그 섬뜩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장기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전히 죽은 생선처럼 칙칙한 눈빛이나, 그에 담긴 격렬한 감정만은 진짜였다.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나 강렬한 감정을 품는지 의아할 정도로, 운찬에게 혹시 부모님이 원수진 일이 있진 않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살기 어린 시선이었다.
“그우…….”
괴성을 흘리며 마지막 주머니를 집어 드는 자객.
하지만 자객이 그것을 사용하기 전에, 장기린은 폭이 이 장이나 되는 주방을 한 걸음에 가로질러 이미 자객의 코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이제 됐다.”
무박자.
그리고 자연체의 움직임이다.
일절 예비 동작이 없는 움직임으로 상대의 틈을 파고든다. 그리고 상대가 항복을 하거나 처참한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도록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바로 장기린의 방식.
우득!!
소리와 함께 자객의 오른쪽 손목이 부러져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죽창을 휘돌려 이번엔 왼쪽 종아리를 노렸으나, 자객은 그 공격을 피해 냈다.
“으…… 으……!”
자객은 깃털 같은 몸놀림으로 물러서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입을 쩍 벌리고 부러진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하필이면 손목이 부러진 것은, 가장 처음에 손가락이 부러졌던 손이다. 울혈로 퍼렇게 물든 그의 오른손은 처참했다.
“갸핫……!”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왼손의 단검으로 집념의 공격을 시도하는 자객.
장기린은 아예 양다리를 부러뜨려서 더 이상의 반항을 봉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죽창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자객은 전혀 상상치도 못 했던 엉뚱한 행동을 했다.
들고 있던 왼손의 단검으로 난데없이 자신의 오른팔을 푹 찌른 것이다.
피슉―!
강 하구의 둑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퍼렇게 울혈이 나 있던 오른쪽 손에선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장기린은 황당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과거에 하후돈은 화살에 맞은 눈알을 뽑아서 씹어 먹었다지만, 그래도 자신의 몸을 서슴없이 찌르는 놈은 대체 어떤 종자인가.
자객은 팅팅 부은 팔에서 피를 빼고, 부러진 손목까지 제자리로 맞추더니, 마지막 남은 주머니를 잡고 양손으로 ‘팍!’ 뜯어 버렸다.
츠츠츠츠―.
새하얀 가루가 자객의 발밑에 떨어진다.
뿌옇게 솟아오르는 연기.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시야를 왜곡시키는 기묘한 연기가 자객의 몸을 순식간에 가려 버렸다.
시야가 가려지는 것은 물론이고, 장기린이 기척마저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보니 보통 연기가 아니었다.
‘혹시 도망치는 건가……?’
놀란 장기린이 재빨리 죽창을 앞으로 찔렀으나 손끝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가래가 잔뜩 낀 목소리가 기분 나쁜 말을 중얼거렸을 뿐이다.
“방.해.하지…… 마라. 내. 소중한…….”
그 뒤에 뭔가 두 글자를 더 중얼거렸으나, 워낙 작고 불분명한 목소리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장기린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추적해 주방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지만, 이미 그곳엔 개미 새끼 하나 찾을 수 없는 적막만이 감돌 뿐이었다.
장기린은 눈썹을 찌푸린 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몸놀림이군.”
전력을 다해 달린 그는 목소리가 끝날 때쯤 이곳으로 튀어 온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놓쳤다.
어렴풋이 담장 너머로 사라지는 자객을 본 듯도 했으나, 이미 손쓸 도리도 없이 멀어졌으니, 따라간다고 한들 붙잡을 리는 요원했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아온 장기린의 기억에도 저 정도로 몸놀림이 빠르고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는 자객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항주에 와선, 얼마 전에 우모침을 입으로 뿌리는 무서운 놈도 만났지만, 지금 만난 자객에 비하면 그건 송사리나 다름없었다.
강하고 뛰어난 ‘살인자’이자 ‘사냥꾼’이다. 지금처럼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준비하고 장기린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그도 섣불리 장담할 수가 없었다.
“저런 놈이 운찬을 노리다니…….”
이유가 무엇일까.
뭔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장기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죽창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남은 것은 무너져 버린 벽과 폐허나 다름없게 어질러진 주방. 그리고 충격을 받아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운찬뿐이다.
“신년 벽두부터 이게 무슨 일인지…….”
아무래도 올 한 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파란 만장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장기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자객이 물러가고 얼마 뒤, 휘연이 폐허나 다름없는 주방의 모습을 보며 한 말이었다.
그녀는 아연한 얼굴로 난장판이 되어 있는 주방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암기들이 벽에 줄줄이 박혀 있고, 주방의 집기들은 박살이 나거나 우그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이걸 깨끗이 치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암담할 지경.
게다가 운찬이 입을 꾹 다물고 구석에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으니, 그녀로선 의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다가 큰소리가 나서 설마 하고 나와 봤는데, 주방이 이 지경이 되었을 줄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벽에 박힌 암기 중의 하나를 건드리려고 했다.
“안 돼! 만지지 마!”
장기린이 큰소리를 내자, 휘연은 화들짝 놀라 손을 뒤로 뺐다.
“독이 발려 있어. 아마 만지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극독일 거다.”
“그런……! 독이라니……. 그럼 이건 누군가를 죽이려고 했던 흔적인 거예요?”
“그래, 맞아.”
“대체 누굴……?”
장기린이 눈짓을 하자, 휘연은 황급히 질문을 멈추고,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잔뜩 겁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떠는 사람은 이 주방에 한 사람밖에 없었다.
“어째서……?”
“그건 나도 모르겠어.”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제발 알려 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다.
장기린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운찬을 노리는지. 운찬을 죽여서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풍운객잔의 주방 일을 멈추게 하려고?’
운찬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운찬을 죽여서 얻을 만한 이익은 그 정도가 다다.
물론 장기린이나 객잔 식구들에게 있어서는 그것도 큰일이겠지만…… 남들이 보기엔 극히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그런 것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아마 휘연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운찬을 응시하더니,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객이 왔던 건가요?”
“아아, 그랬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나요?”
휘연이 묻는 것은, 그녀가 이미 장기린이 홍화객잔에서 왔다는 옥승이란 놈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녀는 옥승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냐는 것을 묻고 있을 것이다.
“대단한 놈이었어.”
“……그 정도였어요?”
“아아, 얼굴 허옇던 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휘연의 얼굴이 걱정과 긴장으로 굳어진다.
장기린도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다.
정면으로 싸웠기에 압도했을 뿐이지, 자객으로서의 능력만 본다면 그는 이제껏 장기린이 보아 온 인간들 중에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능력이 있었기에 장기린의 공격을 버텨 내고, 마지막엔 유유히 도망치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할 수록, 운찬을 노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졌다.
대체 그런 능력을 지닌 자가 뭐가 아쉬워서 운찬을 노린단 말인가.
“누군가에게 고용된 거겠죠? 혹시 청풍객잔이나 홍화객잔 쪽이 아닐까요?”
“글쎄…….”
물론 장기린도 그쪽으로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조금 전 자객의 태도가 상당히 사적인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방해하지 마라. 내 소중한…… 이라고 말했었지?’
방해라…….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이었을까?
“내 느낌으론 개인적인 감정으로 온 것 같았어. 누군가에게 고용된 느낌이 아니었다.”
“그……래요?”
“아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
장기린은 구석에 있는 걸레를 하나 집어 들고 그걸로 벽에 박힌 암기들을 하나씩 뽑아 우그러져서 못쓰게 된 솥에 집어넣었다.
극독이 발려 있는 암기다. 괜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그가 직접 처리해서 어디 땅속 깊이 묻어 두는 게 좋을 듯했다.
“휘연, 너는 휴랑 아칠과 아팔을 깨워서 주방을 좀 정리해 둬. 난 운찬을 좀 진정시켜야겠어.”
휘연은 알겠다는 듯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아칠과 아팔이 있을 별채로 갔다.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을 텐데도, 상황을 파악하고 이쪽을 배려해 주는 점이 바로 휘연의 특별한 점이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서 이쪽이 편하도록 잘 처신해 주는 점.
머리가 좋은 여자가 집안에 있으면 평생이 편안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
“자, 운찬. 이제 일어나라.”
팡!
소리가 나도록 등짝을 한 대 후려쳐 주자, 운찬은 그제야 정신을 좀 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포에선 벗어난 듯 보이지만, 여전히 눈빛이 탁했다.
“자, 자객은 어떻게……?”
“도망쳤어. 그보다 이리로 와라. 이젠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장기린은 운찬의 팔목을 꽉 붙들고 성큼성큼 주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객잔 식구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좁은 복도를 지나, 손님들이 앉는 탁자에 운찬을 앉혔다.
운찬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장기린에겐 익숙한 얼굴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전쟁터에 끌려온 어린 병사들. 그 아이들이 첫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고 나면, 꼭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랐냐? 진정이 안 돼?”
“……예.”
운찬은 여전히 덜덜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도 넌 운이 좋은 거다. 죽지도 않았고, 상처도 거의 없어. 무슨 이유로 자객이 왔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너에게 해코지를 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손톱을 다 뽑아 놓거나 몸에 몇 번이고 단검을 찔러 넣었을 수도 있었어. 어쩌면 배를 갈라놓고 내장을 보여 주면서, 이렇게 해 놓으면 언제 죽는지 아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
“……!!”
“자신의 피를 본 것도 아니고,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이 다치거나 죽은 것도 아니다. 그 정도면 운이 좋은 거야. 안 그러냐?”
운찬은 그런 상황을 상상했는지, 눈 밑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임신이라도 한 것처럼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욱! 우욱……! 우우욱―!”
“…….”
장기린은 그런 운찬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지금 장기린이 굳이 잔혹한 예를 든 것은 운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인간은 본래 적응력이 뛰어난 존재다.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안 좋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만 하면, 작금의 어려움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고 공포를 이겨 낼 수 있다.
“하아……. 하아…….”
아니나 다를까. 운찬은 제대로 토하지도 못하고 헛구역질만 잔뜩 했지만, 그래도 격한 감정이 싹 해소된 듯한 얼굴로 제정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구역질을 한 탓에 눈은 벌겋고, 눈물과 콧물도 조금씩 흘러나와 있다.
운찬은 피곤해서 눈 밑이 축 처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죽는 줄…… 알았어요.”
“처음은 아니지 않나?”
“물론 그렇지만……. 그래도 지난번과는 달랐어요. 이렇게 직접 눈앞에서 겪은 것은 처음이니까…….”
탁자 위에서 깍지를 끼고 있는 운찬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지난번이라는 것은, 장기린이 처음 운찬을 만나 구해 주었을 때 철우에게 죽을 뻔했던 것을 뜻했다.
그때는 실질적으로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마 그때는 이런 식의 직접적인 공포는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칼날이 이쪽을 노린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라고 느꼈어요. 간신히, 정말 운 좋게 몇 번 공격을 피하고, 마지막엔 단검을 머리 위로 확 쳐들고 내려다보는데…….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 통하고, 게다가 그 얼굴은 또 얼마나 무섭게 생겼는지…….”
운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긴, 더럽게 생기긴 했지.”
“하하…….”
장기린은 피식 웃었으나, 운찬은 웃는 척을 할 뿐 진심으로 웃지 못했다.
운찬은 다시금 자객의 그 끔찍한 얼굴이 생각나는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장기린은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 옆을 지켜 주었다.
“뜨거운 물을 좀 가져왔어요.”
그때 휘연이 양손으로 받쳐야만 들 수 있는 나무 대접에 김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물을 담아 가지고 왔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식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로 보였는데, 그 안에는 곱게 접은 새하얀 천이 담겨 있었다.
원래 몸에 따뜻한 기운이 닿으면 진정이 되는 법.
그 천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진정을 하라는 의도인 듯했다.
“잘했어.”
장기린이 낮게 칭찬을 하자, 휘연은 기쁜 듯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나무 대접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아무 말 없이 주방 쪽으로 떠나간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라는 휘연의 배려였다.
“자, 이걸로 얼굴을 좀 닦아. 마음이 진정될 거다.”
“예에…….”
운찬은 입을 꾹 다물고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천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약간이지만 생기가 돌아온다. 한눈에 봐도 표정이 노곤해지며,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진정이 됐어?”
“네…….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장기린은 고개를 푹 숙이는 운찬에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됐어. 그보단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자세히 듣고 싶은데.”
“…….”
“내키지 않겠지만, 이건 중요한 이야기다. 어디서부터 일이 시작된 건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자세히 얘기해. 그래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
운찬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천천히 그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잠을 자려고 침상에 들어갔다가 아무래도 내일 일이 걱정이 되어서 주방으로 나온 일. 그리고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창고를 한바탕 뒤지고, 다시 주방으로 와서 요리를 시험해 볼 준비를 했던 일.
등불이 갑자기 꺼지고, 바닥 밑에서 단검이 불쑥 튀어나왔던 일.
운 좋게 피하고 조리대 위로 도망쳤더니, 이번엔 바닥을 박살 내며 튀어나와 단검을 뿌려 댄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까이 다가와 단검을 내리찍으려고 했을 때, 장기린이 벽을 박살 내며 들어와 그를 구해 준 일까지.
운찬은 여전히 목소리가 떨렸고, 가끔 기억해 내기가 쉽지 않은 듯 심하게 더듬거렸지만, 그래도 차근차근 일어났던 일들을 모조리 설명했다.
장기린은 운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의문이 가는 점을 발견했다.
“잠깐, 처음에 운 좋게 단검을 피했다고?”
“네. 정말 운이 좋았어요. 썩은 사과를 밟고 미끄러진 덕분에 발을 찔리지 않았거든요.”
“……그래?”
장기린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귀신이나 요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괴한 얼굴을 가지고 있던 자객은, 분명 급수로 나눈다면 ‘특(特)’ 중에서도 특급에 해당되는 실력자였다.
그 실력은 전장에서 악귀라고 불리던 장기린을 상대로 겨우 손목 하나 부러진 채 유유히 탈출했다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실력자가 운찬의 발을 찌르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인지 의심스러워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봐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것이다.
‘썩은 사과를 밟고 넘어진 덕분에 운 좋게 피했다? 그 뒤엔 뒤로 엉덩방아를 찧는 덕분에 단검이 머리 위로 지나갔고? 아니지, 그 정도의 실력이면 날아가는 벌도 단검으로 쏘아 맞출 텐데. 겨우 그 정도 움직임에 공격을 실패할 리가 없어.’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공격을 실패했다는 뜻이다.
장기린은 대체 그럴 만한 이유가 뭐가 있을지 궁리했다.
‘위협……?’
위협.
죽이진 않으면서 상대에게 겁을 주기 위한 행동.
장기린이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 보는 사이,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휘연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뛰어왔는지 살짝 볼이 상기되어 있다.
휘연은 초조한 듯 장기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와 보셔야겠어요. 휴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문제라니?”
장기린이 놀란 만큼 운찬도 놀랐는지, 크게 뜬 두 눈이 접시처럼 동그랗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못하네요. 처음엔 그저 깊이 잠들었나 보다 생각했는데…… 아칠과 아팔이 뺨을 때려도 일어나질 못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휘연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분명 운찬을 습격했으니, 휴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장기린은 그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휴가 잠자고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방 안은 상당히 복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송년회 때 선보였던 의상이나 가발, 그리고 화장 도구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중심에 펼쳐져 있는 얇은 모포 하나와 그 위에 차곡차곡 쌓아져 있는 검패(劍牌)였다.
‘과연, 특기로 선보이려고 했던 것은 도박 실력이었나?’
운찬의 인생이 요리라면, 휴의 인생은 도박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특기인 것이다.
장기린도 도수(賭手)가 되려면 얼굴에서 가면을 몇 번씩이나 바꾸는 변검사 못지않게 손이 빠르고 정교해야 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화려하게 선보일 만한 기술도 많을 테니, 그런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기절……했군.”
장기린의 눈썹이 불쾌하게 찡그려졌다.
휴는 앉아서 손에 검패를 몇 개 쥔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앞에서 울상이 된 아칠과 아팔이 아무리 어깨를 흔들고 뺨을 때려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아칠, 아팔.”
“네?”
“가서 물을 좀 떠 와. 온몸을 적실 수 있을 만큼.”
짧고 단호하게, “네!”라고 대답한 두 사람이 빠른 발걸음으로 뛰어 나간다.
장기린은 휴의 몸을 침상 위에 바로 눕히고 목과 손목의 맥을 짚어 보았다.
의술은 모르지만, 사람의 몸에 대해서는 잘 아는 편이다. 맥이 평소보다 느리고 깊게 뛰고 있었다.
“어때요? 잠이 든 건 아니죠?”
옆에서 묻는 휘연의 말에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잠든 게 아니야. 기절했다.”
“정말요……?”
“그래. 원인은…… 독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당버섯 과의 생독.
코밑의 검은 반점과 눈꺼풀 아래의 충혈된 혈선으로 알 수 있었다.
장기린은 휴의 명치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예전에 임가촌의 목장을 구해 냈을 때와 같은 원리다. 강력한 기를 순환시켜서, 한 번에 몸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방법.
장기린은 망설이지 않고, 손끝에 힘을 주고 명치를 내리쳤다.
파앙―!
소리와 함께 휴의 몸이 고등어처럼 펄쩍 뛰었다.
눈을 감고 있지만 장기린의 예민한 감각은 휴의 몸속을 세세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명치를 통해 흘러 들어간 커다란 힘이 도도한 강물처럼 휴의 몸을 한바탕 휩쓸어 낸다. 오장육부와 수족까지 세세하게 훑은 뒤, 마지막으로 위와 식도를 통해 역류한다.
“쿨럭……!”
휴는 기침과 함께 거무튀튀한 핏덩이를 토해 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는 못한 모양이지만,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 건 분명해 보인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휘연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은 건가요? 휴는 괜찮나요?”
“아아, 독은 다 빠져나왔어. 이제 정신을 차리기만 하면 돼.”
“다행이다…….”
휘연은 안심한 듯 손을 가슴 위에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장기린은 깊어진 눈빛으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휴를 내려다보았다.
해독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휴가 들이마신 독도 치사량은 아니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뒀더라도, 아마 하룻밤 정도만 잠들어 있었다면 충분히 정신을 차리고 깨어날 수 있는 정도의 양이었던 것이다.
당연한 추론이겠지만, 아마 휴에게 독을 먹인 것도 운찬을 죽이려 했던 자객의 소행일 터.
그렇다면 당연히 의문이 든다.
휴에게 먹인 독의 양이 치사량보다 훨씬 적었던 것도, 운찬의 발을 찌르지 못하고 실패했던 것처럼, 단순한 ‘실수’였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장기린은 운찬의 이야기를 들으며 떠올랐던 생각이 확실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젠 확실해. 위협이다. 그 자객은 두 사람에게 겁을 주러 왔던 거야. 죽일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 그렇다면 왜 겁을 주는 거지? 어째서? 어째서 칼로 내리치는 연기를 하거나, 독을 먹여서 하루 동안 잠들어 있게 만드…….’
빛이 번쩍였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이 장기린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옆에서 휘연과 운찬이 놀라는 모습을 보니, 그런 심정이 얼굴에 다 드러난 모양이었다.
휘연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저기, 객주님, 뭔가 알아내셨나요?”
장기린은 선뜻 대답하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했다.
휴, 운찬.
객잔의 식구들 중에 습격을 당한 사람은 이 두 사람뿐이다.
그리고 운찬의 경우엔 미수로 끝났지만, 휴의 몸 상태로 볼 때, 자객은 하루 동안 다른 일을 못 하게 쓰러져 있는 것을 노렸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러 방향으로 뻗어 있던 생각의 가지들이 하나로 합일되었다.
“휘연,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네?”
“운찬, 너도 마찬가지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다 같이 모여 있어.”
“예? 하지만, 객주님……!”
두 사람은 이해가 안 가는지 의아한 얼굴이었다.
장기린은 마침 물을 떠온 아칠과 아팔에게도 방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해 준 뒤, 곧장 객잔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청월루.
불과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그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