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29화 (27/686)

第二十八章 ― 연모자객(戀慕刺客)

항주 금선로가 밤늦게까지 사람들로 붐비는 것은 이미 유명하지만, 그래도 해가 뜰 시간이 다 되어 가니 거리는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은 없고, 객잔들의 입구에 걸린 불도 꺼진 곳이 많았다.

장기린은 텅 비어 있는 금선교를 지나, 청월루의 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다.

문을 박살 내고 싶은 심정을 꾹 억누르며 다섯 번쯤 더 두드리자, 그제야 안쪽에서 잠을 자다가 나왔는지 신경질이 잔뜩 난 얼굴의 하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무슨 일이쇼?”

“철우를 불러 주시오.”

불문곡직, 다짜고짜 하는 말에 하인은 당황한 듯 눈을 끔뻑거렸다.

“처, 철우 님은 왜……?”

“불러 주시오. 풍운객잔에서 왔다고 하면 알 거요.”

“풍운객잔……?”

하인은 뭔가 들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풍운객잔에서 왔다는 말에 안색이 싹 변하더니,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일단 안으로 들어오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접객실로 안내받아 자리에 앉아 있자, 일다경쯤이 지난 뒤에 철우가 나왔다.

사자처럼 사방으로 뻗친 머리.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머리를 긁적거리는 모습을 보니 철우 또한 한참 자다가 나온 듯했다.

“어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난 하인이 풍운객잔에서 누가 왔다기에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소.”

장기린은 철우의 말을 끊어 버렸다.

철우를 알게 된 뒤, 말을 끊어 버린 것은 이번이 처음.

철우는 덩치처럼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내 장기린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웃음기를 띠고 있던 얼굴에서 표정이 점점 사라져 간다.

철우의 얼굴이 마치 처음 청월루 앞에서 주먹다짐을 했던 그때처럼 차갑고 냉철하게 변했다.

“무슨 일이 있나 보군.”

“우리 객잔 식구들이 암습당했소.”

“뭐? 암습……?!”

“운찬과 휴. 두 사람이 당했소.”

“뭐……!! 설마 죽은 건가?”

“아니, 죽지는 않았소. 하지만 상당히 큰 충격이었지. 암습자는 눈꺼풀이 없고 나병 환자 같은 얼굴을 가진 자객이었소.”

“……!!!”

철우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린다.

“그게…… 정말인가……?”

장기린은 그의 눈빛이 흔들리기 직전, 마치 설마했던 것을 결국 마주치고 만 듯한 아연한 표정을 짓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누군지 아나 보군.”

“…….”

“아니, 분명히 알고 있었어.”

막연했던 추측이 확신으로 변해 간다.

장기린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게 이상했지. 운찬과 휴가 철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평소라면 버럭 소리치며 혼낼 사람이, 오히려 두 사람을 부추겨서 일을 크게 만들었고. 송년회의 마지막에는 왠지 천장을 쳐다보면서 뭔가를 경계하고 있었고.”

“……이봐.”

“생각할수록 뭔가를 노리고 우리를 불렀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데…….”

장기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을 하면서 그의 생각도 정리되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철우는 이미 그런 상황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심각한 일이다. 위험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굳이 자신의 식구들을 끌어들인 거라면…….

“그렇다면 이건, 고의로 함정에 빠뜨린 것이오.”

가슴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담아 말한다.

철우는 “끄응.”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억울하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이봐. 이야기를 좀 들어 보라고. 난 함정에 빠뜨린 게 아냐.”

“…….”

“크흠, 일단 진정하고 앉아 보라고. 내가 차근차근 설명해 주지. 생각해 봐. 내가 왜 풍운객잔 식구들을 함정에 빠뜨리겠어? 너희가 다치길 원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당연히 그럴 리가 없잖아!”

장기린은 아무 말 없이 철우를 응시했다.

이유는 모른다. 철우의 성격으론 그런 짓을 할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진 단서만으로는 철우가 일부러 그들을 끌어들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일 터.

“만약 그렇다면…….”

철우를 지그시 노려보던 장기린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 나른한 것처럼 허리를 약간 굽히고, 팔짱을 낀 채 철우를 탐색한다.

그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건 적룡기마대 시절 그가 포로를 문책할 때의 버릇.

실제로 그의 몸에선 장군으로서의 위압감이 뿜어지고 있었다.

“설명해 보시오.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인가. 그리고 자객의 정체는 누구인가.”

철우는 위압감을 내뿜는 장기린을 보며 놀란 듯 시선이 흔들렸다.

잠시 후, 작게 한숨을 내쉰 철우가 장기린의 정면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물게 허리를 꼿꼿이 세운 성실한 자세로, 그는 차근차근 그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객의 이름은 이망(二望). 육 년 전 멸문을 당한 살혼부의 특급 살수다.”

“살혼부?”

“아, 그런 쪽은 모른다고 했었지. 말하자면 자객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놈들의 총본산 같은 곳이었지. 일세의 대협을 죽여서 무림인들의 공분을 사 멸문당하긴 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그 누구나 죽일 수 있는 곳이라고 자기들끼리 떠들어 대면서 자부심이 대단한 곳이었지. 심지어 황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다나 뭐래나.”

“……오만 방자한 놈들이었군.”

“뭐, 그렇지. 그러니 멸문을 당한 거지.”

장기린은 ‘흐음.’하고 감탄성을 냈다.

황제조차 죽일 수 있다고 떠벌리는 놈들이라니, 그 정도면 구족이 멸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자객은 원래 명성이 알려지기 힘든 법인데…… 특이하게 이망은 원래부터 유명했었어. 그놈은 자기가 죽인 놈의 이마에 ‘이망(二望)’이라고 자기 이름을 새겨 놓거든. 게다가 감정적으로 일을 맡기도 하고, 청부가 없는데도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죽이기도 하고. 그러니 소문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하지. 한때는 일이 커져서 북경에서 추살령이 떨어진 적도 있었어.”

철우는 별종 중의 별종이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튼 이망은 살혼부가 멸문당했을 때 운 좋게 살아남은 유일한 자객이었는데……. 그런 놈이 갑자기 청월루에 들어온 거다. 그리고 지박령이 붙듯이 낭화의 곁에 딱 붙어 버린 거야.”

“낭화……?”

장기린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이 이야기에서 설마 낭화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추호도 예상치 못했다.

“그래, 낭화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이망이라는 자객 놈은 낭화의 곁에 딱 붙어 버렸어. 육 년 전이니까, 낭화가 딱 열아홉이 되던 해였지. 곁에 붙어 있다는 건, 함께 산다거나 뭐 그런 뜻이 아니고……. 아니, 의외로 이망은 단 한 번도 낭화의 앞에 나타난 적이 없어. 그저 낭화가 있는 곳 근처의 천장이나 벽 너머 같은 데에서 은밀하게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단 한 번도 앞에 나온 적이 없다고?”

“믿기지가 않지? 나도 그렇지만 엄연한 사실이야. 낭화는 이망의 얼굴조차 모를걸? 그런데 어떻게 이망이 곁에 있는 걸 알았냐면 말이지……. 크흠! 낭화와 함께 밤을 보낸 놈들이 하나씩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

철우는 무거운 얼굴로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지. 그런데 세 사람째 죽어 나가니까, 이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게 된 거다. 게다가 터무니없게도 이망 그자는 여전히 자기가 죽인 놈의 이마에 자기 이름을 새겨 놓는데……. 그나마 죽은 놈들이 다 명문가의 자식 놈들이라서 추문에 휩싸이지 않게 하려고 쉬쉬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그때 사단이 크게 났을 거야. 그쪽 가문에서 분풀이라도 하려고 했다면, 청월루는 이미 간판을 내렸어.”

“잠깐! 그럼 사람들이 낭화의 일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 거요?”

“아니, 모를 리가 있나. 이 바닥이라는 게 생각보다 좁아서 그런 쪽 소문은 삼 일 안에 쫙 퍼진다고. 화류계에서 좀 논다는 인간들 중에 낭화와 동침하면 죽는다는 걸 모르는 놈은 없어.”

장기린은 어느새 철우의 말에 온 정신을 집중해 듣고 있었다.

낭화에게서 어딘가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이런 과거를 가지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 속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낭화는 그 뒤로……?”

철우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단 한 번도 사내와 동침을 하지 않았어. 아, 물론 손님들 중에서도 동침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지. 다들 목숨은 아까우니까 말이야.”

“……그걸 왜 가만히 두는 거요?”

“엉? 뭐라고?”

“청월루 입장에선 크나큰 손해일 텐데? 어째서 그런 일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놔두냐는 말이오.”

철우는 모르는 소리 말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가만히 있었겠어? 당연히 그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청월루가 발칵 뒤집어졌지. 낭화의 방 주변을 천장이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싹 뜯어내 버리고, 본채 건물을 거의 무너뜨리다시피 하면서 이망을 잡으려고 했었단 말이야.”

“아…….”

“하지만 결과는 예상이 되지? 당연히 못 잡았어. 그놈은 이름만 특급 살수인 게 아닌 거야. 황제도 죽일 수 있는 놈이라던데, 우리 같은 놈들한테 잡힐까.”

철우는 자조하듯 고개를 저었다.

“이래 뵈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다고. 우리 총관님은 가진 재산과 인맥을 다 털어서 검선을 초빙하기까지 했었지.”

“검선……?”

“아, 그것도 역시 모르나? 그런 사람이 있어. 무림에서 최고의 칭호를 받는 오선(五仙) 중에 한 사람. 멀리 구양세가의 사람인데, 특별히 부탁해서 초빙해 왔던 거야. 아무리 특급 살수인 이망이라도 초절정 이상의 고수인 검선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니까.”

장기린이 워낙 무림 쪽에 지식이 없다 보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철우의 말투만으로도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무림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사람을 데려오려면 대체 어떤 인맥과 자금을 써야 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실패했다는 거요?”

“……그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장렬하게 실패했지. 이건 거의 전설적인 이야기인데……. 그때 그 검선 어르신이 이망을 잡겠다고 보름 정도 낭화와 함께 지냈어. 낭화가 식사를 할 때든, 접객을 하며 일할 때든, 그리고 심지어 잠을 잘 때도 근처를 지켰는데, 그분은 이망의 기척을 찾지 못했지. 그런데 그렇게 지내며 보름째 되던 날, 그분에게 작은 상자가 하나 배달되었다.”

“상자……?”

“그 안엔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이 나비 모양 장신구와 함께 잘라져서 들어 있었다. 그걸 봤을 때의 검선 어르신의 표정이란…… 육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가 않는군.”

철우의 얼굴에선 얼핏 경외감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 경외감이 향하는 대상이 검선인지 이망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는 정말로 그때의 기억을 선명하게 가지고 있는 듯, 외워 두었던 문구를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머리카락 밑의 상자 바닥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없지만, 당신과 관련된 사람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억울한 사람은 죽이지 않을 테니, 이쯤에서 만족하고 돌아가십시오.’라고 말이야.”

장기린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이야기를 들을 뿐인 장기린도 이렇게 흥분이 되는데, 당사자인 검선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머리카락과 장신구의 주인은 검선의 손녀였던 거다. 즉, 이망은 자신이 죽일 수 없는 상대에게, 그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이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결국 검선 어르신은 돈을 모두 돌려주고 돌아갔다. 마지막엔 ‘평생 검을 닦아 왔건만, 지킬 수 있는 것은 내 몸 하나뿐, 가족조차 지키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셨었지.”

무림에서 검술로는 최고라고 칭송받는 자가, 고작 자객 나부랭이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의 기분은 어땠을까.

장기린으로서는 알 듯 모를 듯한 기분이다.

이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다. 그걸 새삼 확인한 느낌이었다.

“그럼, 그걸로 끝이었다는 건가? 더 이상 해 본 것 없어?”

“이봐, 쉽게 생각하는데, 천하의 검선이 실패한 이상 다른 방법이 있을 수는 없는 거다. 게다가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이망 덕분에 좋은 점도 있었어.”

“좋은 점……?”

“이망 덕분에 낭화의 가치가 더욱 올라간 거다. 항주삼화에 뽑히게 된 것도 바로 그때쯤이야. 낭화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함께 술 한잔을 마시기 위해 천금을 내놓겠다는 자들이 줄을 이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장기린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절대로 함께 밤을 보낼 수 없는 미녀다. 그것도 만약 동침을 하게 되면 죽이려고 달려드는 흉악한 자객이 붙어 있는 여인이다.

피하면 피했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는 것이 당연할 텐데, 그런데 어째서 오히려 몸값이 오를 수가 있는 것일까?

한데 철우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원래 사내놈들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것보다, 손이 닿지 않는 꽃을 더 좋아하는 법이지. 나만 그러면 모를까,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미녀라는 게 사내들의 마음에 더 불을 지피는 모양이야. 뭐, 일견즉통이라는 별명이 생길 만큼의 재지(才智)가 빛을 발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 그래서 청월루는 낭화와 이망 사이의 관계에 상관하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다. 다행스럽게도 이망은 동침만 하지 않으면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았고, 그 외엔 딱히 사고를 치지도 않았으니까.”

장기린은 왠지 변명하는 듯한 철우에게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리고 오히려 몸값을 높게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냥 두고 보자?”

“뭐, 분명 그런 점도 있다. 부인하진 않아.”

“……뭐, 좋소. 그래서?”

“그래서라니……?”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빠졌잖소.”

장기린은 냉정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어째서 우리를 끌어들였는가? 운찬과 휴는 왜 습격을 당했는가? 그리고 당신은 우리가 습격당할 거란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가?”

“그럴 리가 없지!”

‘쿵!’하고, 철우는 억울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난 풍운객잔 식구들을 이런 일에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 숙수 아가랑 남궁 아가가 습격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지금까지 이망은 낭화와 동침한 사내만 죽였단 말이다. 그런데 걔들이 뭘 했다고 암습을 해!”

“…….”

“이봐, 나도 지금 누구 못지않게 놀랐다 이거야. 이제껏 없었던 일이 일어났어. 만약 이망이 갑자기 미쳐서 낭화와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도 죽이려고 한다면…… 그땐 낭화가 손님을 아예 못 받게 될지도 몰라. 나로서는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장기린은 철우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심각하게 굳은 표정. 고민이 많은 듯 복잡한 눈빛.

거짓말을 하는 자의 눈은 아니었다.

“믿어 달라고. 적어도 이 철우 님은 죽이려는 상대는 두 주먹으로 때려죽이지, 괜히 거짓말을 하며 음흉하게 굴지 않아.”

“……알겠소.”

“응? 믿어 주는 건가?”

“그래, 이제 믿겠소.”

철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장기린은 팔짱을 끼고 추궁을 하는 자세에서, 다시 평소의 편안한 자세로 돌아왔다.

“알려 줄 게 있소.”

“음?”

“운찬과 휴는 죽지 않았소.”

“그건 아까 말한 것 같은데?”

철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이망이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해야겠지.”

“음? 죽일 생각이 없었다니?”

“운찬은 일부러 공격을 실패해서 겁을 주려고 했던 것 같고, 휴는 그저 하루 동안 기절해 있을 만큼의 독을 먹였소.”

“뭣! 어째서……?”

“그게 나도 궁금하오. 하지만 방금 이망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알 것 같군. 그는 운찬과 휴가 낭화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 한 거요.”

“아……!”

“오늘은 운찬과 휴가 낭화에게 각자 특기를 보여 주기로 한 날이니까.”

장기린은 확신했다.

이망의 행동은 모두 낭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운찬과 휴를 하루 동안 못 움직이게 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분명 그것 역시도 낭화와 관련이 있을 터.

생각해 보면 오늘이 바로 두 사람이 자신들의 특기를 낭화에게 선보이기로 한 날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갑자기 왜? 지금까진 함께 술을 마시는 상대에겐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고. 오직 동침을 한 상대에게만 해를 가했었는데, 갑자기 왜 변한 거지?”

“…….”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이망의 심경 변화. 그것의 원인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장기린은 계속해서 이망의 이상행동과 낭화를 연관시켜 보았다.

운찬과 휴를 고립시키려는 이망의 행동. 항상 낭화를 음지에서 지키려는 듯이, 아니 그녀를 가질 수 있는 사내들을 질투하듯이 살행을 저지르던 이망.

‘설마…….’

그런 것들을 반복해서 생각하자, 뭔가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듯했다.

장기린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일단 청월루 전체를 수색하지. 낭화 주변의 경계도 강화하고. 그리고…… 쩝, 아무래도 오늘 하기로 한 행사는 취소해야겠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해하는 철우.

장기린은 그런 그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행사는 속행하는 게 좋겠소.”

“……이봐, 위험할 수도 있어.”

“이망이 원하던 것이 행사가 취소되는 일이었을 거요. 혹시 오늘은 객잔에 손님이 없는 날이지 않소?”

“그렇긴 한데…….”

철우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이망이 노리는 바가 바로 그거였을 거요. 하나 있는 행사까지 취소시켜 낭화를 혼자 있게 만드는 것. 뭔가 특별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

낭화와 관계된 남자는 모조리 죽여 버리는 위험한 놈이 바로 이망이다. 그런 놈이 특별한 뭔가를 준비하는 것이 좋은 일일 리가 없을 터.

철우는 그제야 장기린이 생각하는 바를 이해하고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 말은……!”

“행사를 취소시키면, 이망을 도와주는 꼴이 된다는 거요. 특이한 이상행동. 갑작스런 변화. 아마…… 이망은 이제 조용히 지키기만 하는 걸론 성이 안 차는 것일 수도 있겠지.”

장기린은 속으로 복잡한 마음을 바로잡았다.

평범한 생활을 하려면, 어쩌면 이런 일과 관계되지 않아야 할지도 모른다.

도망치고, 안전한 방법을 찾고.

의리보다는 가족의 안전을 생각하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일 테니까.

지금도 그렇다. 굳이 이망에게 보복을 받을지도 모르는 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저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무시하고, 가족이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게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한 사람의 목숨일지도 모른다.

잠깐이지만, 어제 잠시 보았던 낭화의 모습.

화려하고 아름다우면서, 어딘가 쓸쓸하고 괴로워 보이던 눈빛을 떠올린다.

그녀를 버릴 것인가?

가족을 위해 그녀가 희생될지도 모르는 것을 외면할 것인가?

만약 그것을 외면하야 낭화가 죽임을 당했을 경우, 자신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평생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장기린은 마음을 굳혔다.

“이망을 잡을 기회는 어쩌면, 오늘뿐일 수도 있소.”

“…….”

짧은 시간, 철우의 눈빛이 수십 번 변화한다.

덩치와 달리 여우처럼 머리가 민활한 철우. 그는 지금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낭화에게 어떤 위기가 닥친 것인지. 그리고 지금 장기린이 어떤 각오로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인지.

잠시 후, 결론을 내린 그는 손을 모으며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위험하지만 최선을 다해 지킬 테니, 부디 행사에 참석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포권. 처음으로 듣는 철우의 경어.

장기린은 마주 포권을 취해 주었다.

“물론,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겠소.”

☆ ☆ ☆

혹시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움직이기 싫어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운찬과 휴는 예정대로 청월루에 가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적극적으로 찬성을 하고 나왔다.

핏기가 없었던 얼굴을 붉히면서 잔뜩 흥분하는 모습을 보니, 반대로 안 가겠다고 했다면 큰일 났겠다 싶을 정도였다.

“다행이다! 제가 밤새 궁리했던 요리를 선보이지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구요! 이번에야말로 휴를 이길 수 있는 비장의 요리인데……!”

“크흠! 대단한 자신감이시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야말로 밤새 만들어 낸 화천월지(花天月地), 영상개화(嶺上開花)의 한 수를 보일 수 있으니, 무척이나 다행입니다.”

장기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너희 둘 다 동경이나 한 번 들여다보고 말해라. 얼굴 꼴이 어떤지 알고는 있는 거냐?”

그 말에 ‘앗!’하고 놀라며 각자 경쟁하듯이 동경을 들여다보는 두 사람.

그들은 하나뿐인 동경을 들여다보려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시체처럼 핏기가 없다느니, 눈 밑이 시커멓게 죽어 있다느니 하는 그런 말들을 서로에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얼굴 상태를 알게 되었다.

현재는 뜨거운 물에 먼저 씻겠다고 툭탁거리는 중이다.

“이건 뭐…….”

얼굴은 쓴웃음을 짓고 있지만, 왠지 마음은 따스해지는 광경이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녀석들이 왜 이리 어린애처럼 구는 건지. 아들을 둘 낳아서 키우면 이런 광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후훗.”

그리고 그런 생각은 휘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휘연은 새색시처럼 다리를 곱게 모은 채 장기린의 옆에 앉아서 그런 두 사람을 뿌듯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객주님, 어째서 행사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신 거예요?”

“음?”

“사실 두 사람이 다치고 힘든데, 그런 행사에 굳이 참석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평소의 객주님 같으면 오히려 먼저 나서서 말릴 것 같아서요.”

영명한 두 눈동자를 반짝이며 묻는 휘연.

장기린은 속으로 흠칫 놀랐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사실 거기엔 이유가 있어.”

“어떤 이유요?”

휘연은 그가 운찬이나 휴에게 알리지 않기를 원한다는 점을 눈치챘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어제 왔던 자객이 청월루와 관련이 있거든.”

“……네에?!”

“쉿! 청월루가 고용했다는 뜻이 아니야. 그 자객이 멋대로 청월루 근처를 서성이는 모양이니까. 게다가 만약에 오늘 우리가 청월루에 가지 않으면, 한 여자가 억울하게 죽게 될 거야.”

“한 여자……요?”

“응.”

“그 여자가 누군데요?”

여기서 휘연의 눈빛이 한층 강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기린은 아마 그녀가 죽음이란 단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낭화.”

“……낭화라고요?”

“그래, 낭화. 자객은 그녀의 주변을 계속 맴도는 모양이야. 운찬과 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서까지 막으려고 했던 걸 보면, 분명 오늘 뭔가를 계획하고 있어. 우린 그걸 막아야 하고.”

“흐응…….”

휘연은 어쩐지 탐탁지 않은 듯한 콧소리를 냈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에요. 아무것도.”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어째 분위기가 묘하다.

장기린은 다시 한 번 물어봤다.

“뭐야, 왜 그러는 거지?”

“아뇨. 그냥, 꽤나 열심히 한다 싶어서요. 어제 ‘처음 본 여자’인데.”

“…….”

“그러고 보니 어제 오면서 왜 낭화가 객주님을 보면서 웃었는지에 대해서도 대답을 듣지 못했네요.”

대화가 이 정도에 이르렀을 때, 왠지 모를 죄책감과 한기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사내가 아니다.

장기린도 그동안 지내면서 그 정도 눈치는 볼 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그렇죠. 객주님은 그런 분이죠.”

“……가지 말았으면 좋겠어?”

장기린이 그렇게 말한 것이 어지간히 불쌍해 보인 모양이었다.

휘연은 ‘풋!’하고 작게 웃더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 듯한 얼굴로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에요. 가야죠. 무고한 여인이 죽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면 그건 객주님이 아닌 걸요.”

“……그런가?”

“네, 그런 거예요.”

감히 반박할 수 없는 목소리로 단언하는 휘연.

그녀는 생긋 웃더니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객주님, 약속 시간이 언제라고 했죠?”

“미시(未時:오후 11시∼1시) 말이니까, 한 시진쯤 남았어.”

“아, 그럼 슬슬 준비해야겠네요.”

“벌써?”

휘연은 뭘 모른다는 듯 질책하는 눈빛을 보냈다.

“여인은 준비할 게 많답니다, 객주님. 그런 점은 모른 척해 주셔야 해요.”

“그런가?”

“네. 아아, 춘절이라 할 일이 많은데……. 대청소도 해야 하고, 집안에 복(福) 자도 붙여야하고……. 이런저런 일들이 많은데, 청월루 때문에 일단 미뤄야겠네요.”

“뭐, 춘절은 사흘이니까. 시간은 충분하지.”

“마음 놓으면 안 돼요. 그러다 보면 일이 한도 끝도 없이 쌓이는 법이라고요.”

휘연은 단호하게 충고한 뒤 몸을 돌렸다.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는 듯해서, 장기린은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정말로 한 시진 동안 준비하는 건가?”

“네.”

“……여인은 힘들군.”

“어머나, 그걸 알아주시니 고맙네요. 하지만 평소엔 그렇게까지 하진 않아요. 오늘은 져선 안 되는 상대가 있으니까 특별한 거예요.”

장기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져서는 안 되는 상대?”

“그런 사람이 있어요.”

휘연은 뽀얀 얼굴로 생긋 웃을 뿐, 결국 누구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 ☆ ☆

미시가 되어 청월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철우가 잔칫상을 성대하게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제에 이어 두 번째 연회임에도 불구하고, 차려 놓은 음식이 더욱 화려해진 것처럼 보인다.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다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장기린으로서는 그중의 반 이상이 이름도 모르는 고급 요리들 뿐인 것이다.

이망의 일로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은 처음부터 연회에 참석할 낭화를 의식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철우가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장기린이 식구들을 이끌고 연회장으로 들어가자, 철우가 웃는 얼굴로 나와 환영해 주었다. 특히 운찬과 휴에게는 어깨를 두드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그 말을 하며 운찬의 오른쪽 발을 지그시 응시한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운찬과 휴는 격려를 받았음에도 도리어 압박감을 느낀 듯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해야 하나?”

“음,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신년이다. 새로운 해가 시작된 것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앞으로 나와 철우에게 예쁘게 인사하는 휘연.

그 뒤로 운찬과 휴, 그리고 아칠과 아팔도 각각 철우에게 신년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어머나, 언니. 오늘은 더 예쁘네요. 얼굴색 너무 뽀얗다―! 분첩은 어디서 샀어요? 금선로에 있는 방물상? 아니면, 서호 쪽에 있는 남금상회?”

한편, 휘연은 연회장에 미리 나와 있던 기녀들에게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기녀들이 꼭 참석할 필요가 없는데도, 그녀들은 딱히 할 일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쪽 행사에 흥미를 느낀 것인지, 상당히 많은 수가 연회에 참석해 있었다.

얼핏 봐도 마흔이 넘는 숫자.

그녀들은 재잘거리며 휘연을 둘러싸고는 각자 칭찬의 말과 함께 그녀의 치장 비법을 물었다.

꼭 어미 새 주변에 몰려 있는 새끼 새들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나이는 오히려 휘연이 어린 편이지만.

‘하지만 확실히 휘연이 가장 눈에 띄는군.’

가족이라거나 가장 많이 봐 온 얼굴이라서가 아니라, 지금의 휘연은 말 그대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밝은 노란색을 좋아하는 것은 여전하다.

하지만 평소의 가벼운 경장 차림과는 달리 오늘은 언제 맞췄는지 모를 아름다운 비단 예장이었다. 소맷자락이 바닥까지 닿고, 치마가 등 뒤로 날개옷처럼 흘러내리는 화려한 의복. 얼굴에는 평소에 쓰지 않는 하얀색 분칠을 하고, 머리를 금색 봉황잠으로 틀어 올린 그녀는, 어느 나라의 공주님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환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만하면 한 시진의 치장이 아깝지 않다.

두 시진이나 세 시진이 걸렸더라도 용서가 되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장기린은 처음 그녀가 치장을 마치고 나왔을 때, 한참 동안이나 시선을 떼지 못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멍하니 쳐다보고 만 것이다.

장기린은 지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애써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리느라 노력하는 중이었다.

“여어―. 차세대 항주제일화가 될 뻔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거야 명불허전이군. 이봐, 잘 지키라고. 아마 오늘 모습을 내보이면, 항주의 모든 사내들이 진 소저를 노릴 것 같으니까.”

철우는 슬쩍 장기린의 옆에 와서 조용히 말한 듯했지만, 워낙 우렁우렁한 목소리인지라 아무리 작게 말해도 휘연과 기녀들에게까지 들린다.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는 장기린의 귀로 휘연의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뭐하나요? 객주님은 쳐다봐 주지도 않으시는데. 여기까지 오는 내내 제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시던데요?”

“뭐야? 이런! 왜 그러는 거야? 혹시 저 모습이 취향에 안 맞는 건가?”

“그런가 봐요. 애써 준비했는데, 아까워서 어쩌죠?”

“이것 참. 안 되겠구먼. 이봐, 진 소저. 풍운객잔에서 나와서 우리 청월루로 오는 게 어때? 이렇게 냉대를 받고도 그곳에 있고 싶은 거야?”

드물게 투정을 부리는 휘연과 그에 맞춰 과장스레 말하는 철우의 목소리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장기린은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줬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않은가. 신경을 써야 할 곳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철우가 깨달아야만 했다.

다행히 철우는 한 번 껄껄 웃더니, 그걸로 농담을 마무리했다.

“파하! 재밌구먼. 뭐, 아무튼, 신년을 함께 보내게 돼서 기쁘다고. 오늘은 백 총관님의 허락도 맡았기 때문에 술도 좋은 게 나올 거야. 기대해도 좋아.”

철우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가슴을 팡팡 때렸다.

그사이 연회장은 분위기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칠과 아팔은 귀엽다며 즐거워하는 기녀들에게 꽉 붙들려 있었고, 휘연 또한 한 무리의 기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즐거운 교성이 터져 나온다.

운찬과 휴는 어딘가에서 특기를 선보일 준비를 하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경계는 완벽하게 준비해 뒀어.”

조용히 연회장의 벽에 등을 기대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철우가 가까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장과 바닥에는?”

“준비되어 있어. 이미 동생 놈들을 쫘악 풀어서 감시하고 있다.”

“이망 정도의 실력이면, 조용히 쓰러뜨리고 잠입할 수도 있지 않소?”

“아니, 그럴 것 같아서 주기적으로 다섯 명씩 서로를 확인하기로 되어 있지. 반 각에 한 번, 서로에게 연락이 안 되면 즉시 신호를 보내기로 되어 있다.”

항상 생각했던 것이지만, 역시 철우는 외모와 달리 철저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의 대비라면 군부대가 부럽지 않은 경계망이지 않은가.

“하지만 반 각이란 시간이 애매한 듯한데. 이망이라면 그 시간 안에 모조리 죽일 수도 있지 않겠소?”

“뭐, 그럴 수도 있긴 하지. 그렇지만 이 이상의 경계망은 만들 수 없다. 이게 한계라고.”

“하긴.”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이쯤에서 만족해야 한다. 나머지는 장기린과 철우가 보충할 수밖에.

짝! 짝!

중요한 대화는 다 끝났다고 판단했는지, 철우가 박수를 쳤다.

모두의 시선이 모여든다.

철우는 성큼성큼 걸어가 연회장의 주연석으로 올라섰다.

“자, 그럼 이제 때가 된 것 같으니, 오늘의 가장 큰 행사를 시작하자고. 어이 숙수 아가, 남궁 아가. 준비는 다 됐냐?”

입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운찬과 휴가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비장한 각오가 느껴졌다. 오늘만큼은 무승부로 끝내지 않고 승리를 쟁취하려는 생각일 것이다.

청월루 산하의 노점 취식권과 특실에서 낭화와의 술자리라는 어마어마한 상품이 걸려 있으니까.

솔직히 오늘 새벽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힘이 나느냐고 묻고 싶어지지만, 장기린은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든 없든.

사내놈들은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면 일단 눈길이 가고 관심이 가는 법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상대는 낭화다. 두 쪽 달린 사내라면 목숨을 걸고 덤비는 것이 당연한 여인이었다.

“와 주셨네요.”

잠시 후, 철우가 안쪽 방에서 호위하듯 데리고 나온 낭화는 연회장의 사람들에게 살짝 눈인사를 한 뒤, 가장 먼저 장기린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살짝 입꼬리만 올려서 만드는 아름다운 미소.

화려한 붉은색의 옷감. 인상이 짙으면서 우수에 찬 미모.

어제와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어쩐지 오늘은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것처럼 상당히 초췌해 보였다. 얼굴이 가냘프고 피곤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지쳐 보이는 낭화가 마치 와 주셔서 다행이라는 듯 처연하게 인사를 건네자, 장기린은 순간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말았다.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이 여인이 어린 시절부터 겪고 있는 상황, 고초, 그리고 지금 이망 때문에 받을 죄책감까지.

그녀가 오늘 새벽에 일어난 일을 철우로부터 전해 들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 때문에 억울하게 다치고, 게다가 그런 흉폭한 자가 항상 자신의 근처에서 몰래 지켜보며 언제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고 하면…….

아마 그 누구든 열에 아홉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의연하게 견디고 있는 것이지.’

장기린은 낭화의 그런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녀는 이망의 존재를 알고, 그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지금까지 자신의 품위를 유지해 왔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 것이다.

장기린은 그녀의 짐을 조금 덜어 주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은 안심할 수 있도록 격려를 한마디 해 줘야 했다.

“오늘만큼은, 안심하고 즐겨.”

무심코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말이다.

고개를 들고 보자 낭화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얼굴이 굳어 있었다.

장기린은 민망함을 느끼고 헛기침을 했다.

“크흠, 신년이니까. 그리고 오늘처럼 모두가 함께 모이기는 힘들 테니까. 오늘 같은 날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즐겨야 하지.”

“…….”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어. 그러니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말고, 저 녀석들에 대한 심사만 제대로 하면 돼. 냉정하게 평가해 줘.”

잠시 굳어져 있었던 낭화는 이내 어제의 그 얼굴을 상당 부분 되찾은 듯 보였다. 입가엔 은은한 미소. 짙은 눈썹 아래로는 그 무엇이든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빛까지.

그녀는 “네.”라고 대답하며 장기린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여성스러운 종종걸음으로 주연석에 올랐다.

그녀는 운찬과 휴를 불렀다.

“두 분, 특기는 모두 준비되셨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모두가 듣기에 충분한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예.”

“네.”

대답하는 두 사람의 얼굴은 마치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비장했다.

낭화는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주연석 위에 올리고, 그 자신은 다른 기녀들처럼 밑으로 내려왔다.

운찬과 휴, 두 사람은 밑에서 툭탁거리는 사이 순번을 미리 정해 두었는지, 휴가 먼저 앞으로 나왔다.

모두의 박수 소리와 함께 경연은 시작되었다.

낭화를 앞에 두고, 휴가 보여 준 특기는 다름 아닌 도박의 기술.

휴는 상아로 만든 고급 검패들을 바닥에 주욱 늘어놓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패를 섞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손 위에서 검패가 날아다녔다.

분명히 일(一) 자 패였던 것이 어느 순간 만(卍) 자 패로 변하고, 오른손에 쥐어 있던 세 개의 패가 갑자기 두 개로 변하고, 하나로 변하더니, 갑자기 다섯 개의 패가 꽃이 피어 나오듯 튀어나온다.

손가락에 신이 들린 것 같은 솜씨였다. 마치 예악의 달인이 악기를 연주하듯 검패들이 유려하게 뒤섞일 때마다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오는 묘기가 선보여진다.

이각이라는 시간이 숨 쉴 틈도 없이 흘러갔다.

마침내 만화(晩花)라는 극상의 패를 뽑아 낭화에게 건네면서 휴의 묘기는 끝이 났다.

모두가 열렬히 박수를 칠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 도수들의 손이 빠르다는 것을 듣기만 했지, 이런 식으로 직접 그 능력을 본 것은 처음인 것이다.

“대단하네요.”

낭화마저 순순히 감탄하고, 휘연과 아칠, 아팔은 모두 상기된 얼굴로 휴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장기린은 어땠냐면…… 휴의 묘기를 보기는 했지만, 혹시 주변에 이망이 움직이는 기척은 없는지 신경 쓰느라 공연을 집중해서 감상하지 못했다.

“와아아―!”

휴가 주연석에서 내려오고, 이번엔 운찬이 그 자리로 나왔다.

미리 말을 해 둔 것이 있었는지, 근처에 있던 하인 두 사람이 뭔가가 잔뜩 들어 있는 나무 바구니를 들고 운찬에게 가져다 주었다.

운찬이 꺼내는 것을 보니 도마나 칼, 식기 같은 각종 요리 도구와 땅콩, 호두와 같은 견과류였다.

“앗!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하인 두 사람 중 한 명이 주연석에서 내려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장기린을 향해 넘어지고 말았다.

나이가 어린 소년.

이제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싶은 소년은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한 볼을 발갛게 붉히고 있었다. 넘어지면서 뭔가에 부딪쳤는지 왼쪽 손등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데도 아픈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기녀들이 많은 자리에서 대차게 넘어진 것이 어지간히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조심해.”

“네…… 네!”

바닥에 머리를 찧을 뻔한 것을 장기린이 붙잡아 주며 한마디하자, 소년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후다닥 뒤로 물러난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장기린은 그 소년을 보며 문득 아칠과 아팔이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딱. 딱. 딱. 딱.

잠시 하인 소년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사이, 운찬은 요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운찬의 손에 들린 것은 두께가 넓적한 사각형의 요리용 식칼.

운찬에게 다른 조리 기구는 전혀 필요 없는 것처럼 보였다. 호두와 땅콩은 칼날의 옆면으로 꾹꾹 눌러 잘게 부쉈고, 과일의 껍질을 깎을 때는 커다란 식칼의 칼날로 잘도 결을 잘라 냈다.

휴의 묘기 못지않은 칼 솜씨다.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 어느새 재료들이 각각 손질되어 그릇에 담기고, 소금과 꿀을 이용해 간을 맞추는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커다란 무를 하나 꺼내더니 신기에 오른 칼 솜씨로 무에 조각을 새겨 넣기 시작한 것이다.

조각의 대상은 바로 낭화.

화려한 옷을 입고 우아한 몸놀림을 보이는 미녀가 운찬의 손끝에서 재탄생되고 있었다.

“꺄―, 예쁘다!”

“그보다 저거 맛있을 것 같아. 보기만 해도 입맛이 당기지 않아?”

휴의 특기가 기녀들의 감탄을 자아냈다면, 운찬의 특기는 열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모두가 들뜬 눈빛으로 운찬의 손끝을 바라본다.

운찬은 새하얀 그릇에 음식을 담고, 그 위에 새빨간 과즙을 뿌리는 것으로 요리를 마무리했다.

“이름은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땅콩과 호두, 벌꿀을 섞어 맛을 내고, 그 위에 상큼한 석류 과즙을 뿌린 입가심용 간식이에요.”

무로 조각한 낭화는 그릇의 옆에 장식으로 세워졌다.

낭화는 저금으로 조심스레 요리를 들어 맛본 뒤, “아……!”하고 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맛있어요. 특히 이 단맛과 고소함, 그리고 적절한 짠맛의 조화가 절묘해요.”

“감사합니다.”

운찬은 드물게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낭화의 시식이 끝난 뒤, 운찬은 미리 만들어 두었던 요리들을 기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녀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 이제 승자를 결정해야겠죠?”

낭화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주연석으로 올라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주연석으로 오르려다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몸을 비틀거렸다.

“아……!”

장기린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부축하려다,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가까운 거리긴 하지만, 낭화의 곁에는 다른 기녀들이 더 가까이 있었다. 그녀들이 알아서 부축을 해 주고 있는데, 굳이 그가 나서는 것은 눈에 띄는 짓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잠깐의 동요도 눈에 띄었는지, 뒤쪽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

싸늘한 눈빛으로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휘연.

장기린은 뒷목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두 분 모두 멋진 특기를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승자를 결정하기 전에, 생각의 시간을 조금 가졌으면 해요. 워낙 쟁쟁하여 조금 숙고하여 결정하고 싶습니다. 괜찮을까요?”

낭화의 시선이 주연석 아래에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운찬과 휴를 향한다.

두 사람은 “네, 뭐…….”“괜찮습니다.”라는 대답들을 했다.

“철우 공께선?”

그다음으로 낭화가 쳐다본 곳은 철우.

철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승낙의 뜻을 밝혔다.

“그럼, 일각 후에 뵙겠습니다.”

낭화는 연회장의 모두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한 뒤, 여성스러운 발걸음으로 따로 마련된 별실을 향해 걸어갔다.

장기린은 그 걸음걸이를 보자 그녀가 정말로 숙고할 시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몸이 안 좋아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긴, 일견즉통이라 불리며 고관대작들의 고민거리에도 대답을 척척 해내는 그녀가 겨우 운찬과 휴 두 사람 중의 승자를 정하는 데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녀는 당장 잠시의 휴식이 필요할 만큼 몸이 약해져 있는 것이다.

‘확인해야 돼.’

장기린이 주목한 것은 그녀가 그렇게 약해진 ‘이유’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생기가 있었던 여인이, 하루 만에 중병에 걸린 환자 저리 가라 할 만큼 병약해져 버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휴에게 그랬듯이 독이 주입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툭―!

“음?”

그래서 낭화에게 가 보려고 하는데, 빠른 걸음으로 장기린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

볼살이 통통한 앳된 얼굴.

운찬이 주연석에 오를 때 나무 바구니를 갖다 준 뒤 넘어져서 부끄러워했던 바로 그 하인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살짝 볼을 붉힌 채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으나, 어쩐 일인지 지금의 그 소년은 말문이 막혀 버릴 만큼 냉막한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꺅.”

“뭐니, 너?”

소년은 불평을 토해 내는 기녀들을 밀어제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옆으로 아칠과 아팔이 다가와 있었다.

“객주님! 객주님!”

“객주님은 누가 이긴 것 같으세요? 강 숙수님? 아니면 휴 형?”

아칠과 아팔은 “휴 형이 더 멋있었어!”라거나, “그래도 강 숙수님이 반응이 더 좋았어!”라고 하며 툭탁거렸다.

“글쎄, 결과는 낭화만 알겠지.”

두 사람을 다독거리며 잠시 시간을 지체한 사이, 어느새 그 하인 소년은 연회장을 빠져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장기린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전투가 일어나기 전날 묘하게 기분이 고양되는 것처럼. 암습이 일어나기 직전에 신경이 곤두서며 예민해지는 것처럼.

장기린은 연회장 입구에 서서 덩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철우에게 다가갔다.

“이상한 점은 없소?”

철우는 장기린을 흘깃 쳐다본 뒤, 덩치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니, 아직은 아무 일도 없어. 천장이랑 바닥이랑, 벽에 숨어 있는 아가들이랑도 계속 신호를 주고받고 있고.”

“그렇……소?”

“그래. 아무래도 밤이 되어야 움직이지 않나 싶은데.”

철우는 이망이 밤에 찾아올 거라는 것에 거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크게 부릅뜬 눈에 박력을 담아 덩치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덩치들은 그 명에 따라 수족처럼 움직이고.

낭화의 주변은 그야말로 철통같이 경비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잠깐.’

그때, 장기린은 위화감을 느꼈다.

철통같이 경비되고 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던가?

철통에 집어넣은 것처럼, 아무도 다가갈 수 없도록 마치 고위 관료나 황족을 경호하듯 철저히 주변을 차단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철우는 낭화가 있는 방 주변에 거미줄을 쳐 놓은 상황이다.

벽 사이. 천장. 바닥.

그야말로 사방에 사람을 심어 놓고 대기하고 있다. 암습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 모르게 낭화 주변에 접근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

‘하지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 두었던가?’

연회장에서 이어져 있는 별실.

낭화는 그곳에서 쉬고 있고, 연회장 주변의 경호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기녀나 하인 들은 이미 연회장 안에 있기 때문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 단지 다가가서 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낭화에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인……!’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위화감의 정체.

장기린은 볼이 통통했던 소년 하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얼굴은 분명 그 소년과 동일하다.

하지만 그게 그 소년 본인이 확실한가?

만약 본인이라면, 어째서 기녀들을 밀치려고 내뻗은 손에 주연석에서 넘어지면서 났던 손등의 상처가 보이지 않았던가?

“큰일이다!”

장기린은 단말마의 외침을 토해 내며 곧장 몸을 날렸다.

놀란 철우가 이유 불문하고 그의 뒤를 따른다.

철우가 움직이자 그 주변의 덩치들도 움직이고, 그 여파로 연회장 모두의 시선이 그들을 향한다.

“길을 열어!!”

철우가 위압감을 내뿜으며 외치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기녀들이 마치 난파되는 배에서 도망치는 쥐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길을 열어 주었다.

장기린은 그사이를 질주했다.

굳게 닫힌 별실의 문을 보자 마음이 조급해진다.

안일했다. 조금 더 긴장하고, 그녀에게 신경을 쏟았어야 했던 거다.

철우의 대비가 철저하다고 마음을 놓을 것이 아니라, 이망이 얼마나 대단한 자객인지를 생각했어야 했다.

“낭화!”

옆으로 여는 문을 발로 박차고 들어갔다.

한순간에 열리는 시야.

단정하게 정돈된 별실의 풍경이 보인다. 청월루 특유의 녹빛 벽지와 황금으로 장식된 상감. 붉은빛 단청으로 둘러싸인 곳.

분명 사방에선 철우의 수하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을 테지만, 모두 눈뜬 장님이나 다름없다.

이미 이곳에 있었다.

눈앞의 정면. 별실의 중앙.

그곳에 요괴보다 두려운 얼굴을 가진 자객이 장기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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