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32화 (30/686)

第三十一章 ― 백화남매(百花男妹)

“자―! 제가 자랑하는, 춘절 종합 음식입니다!!”

한참이나 주방에 틀어박혀 맛있는 냄새를 풍기던 운찬은 마침내 신시(晨時:오후3∼5시)가 다 되었을 때, 커다란 쟁반에 음식을 잔뜩 담아 가지고 나왔다.

“와아―!”

아칠과 아팔의 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

워낙 먹을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이었지만, 이번은 특히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팥을 속에 넣은 만두인 두포(豆包)와 설떡인 연고. 쌀로 만든 엿인 미화당에, 튀긴 과자인 유각(油殼)까지.

춘절에 먹을 수 있는 모든 간식이 한데 모여 있으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오늘은 특히나 그 위에 물엿을 듬뿍 뿌려서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일 만큼 달콤해 보였다.

“와아―, 맛있어 보이네요.”

옆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휘연도 단 음식이 기꺼운지 한껏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미화당을 하나 집어먹으려다, 문득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장기린과 눈이 마주치자, 미화당을 그에게 건넨다.

“아니, 난 괜찮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하나 드세요. 강 숙수님이 기껏 만드셨는데요.”

“그렇지만…….”

“객주님이 안 드시면 저도 못 먹는다구요. 자, 어서요. 아―.”

애교 있게 눈웃음을 지으며 미화당을 들이미는 휘연.

이런 식으로 나오는 휘연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리고 받아먹자, 휘연은 새끼 새를 배불리 먹인 어미 새처럼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맛있으세요?”

“아아, 맛있어.”

“와, 그럼 저도…….”

휘연도 미화당을 하나 집어 들더니 입안에 쏙 집어넣고는 한껏 행복한 표정이 되었다.

몸까지 부르르 떨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보통 길거리에서 사 먹는 미화당은 너무 딱딱하거나 너무 물컹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운찬이 만든 것은 딱 좋게 탄탄해서 바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장기린도 이거라면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인 것이다.

“춘절 음식을 보니까, 이제야 신년이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나네요.”

유각을 와작와작 씹어 먹으며 감회 어린 표정을 짓는 휴.

“아아, 확실히, 이번 연말엔 특히나 많은 일들이 있었지.”

팔순 먹은 노인네처럼 한숨을 내쉬며 추억에 잠기는 운찬.

“휴우―.”

“후우…….”

두 사람은 복을 뭉텅이로 떨궈 내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 너희. 한숨 많이 쉬면 복이 나간다?”

운찬과 휴는 보란 듯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나갈 테면 나가라죠.”

“낭화 소저 앞에서 난리는 다 부리고, 선택도 못 받은 저 같은 놈은 죽어야 됩니다.”

“암, 살 가치가 없죠.”

“사내의 의기가 부러졌으니, 더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값싼 의기냐!’라고 외쳐 주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장기린의 입장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재주는 운찬과 휴가 구르고, 돈은 장기린이 챙긴 것이다. 장기린의 입장에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즐거우셨을까요?”

“특실은 엄청 좋았을 겁니다.”

“분명 차려진 음식도 최고급이었겠죠.”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과의 술 한잔에 비할까요?”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가 길어질수록 장기린의 헛기침 소리도 늘어만 갔다.

“강 숙수님, 휴.”

“네, 누님.”

“예?”

휘연은 곧장 대답하는 운찬과 휴를 향해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만하세요.”

“넵!”

“예!”

운찬과 휴는 대번에 침몰했다.

어쩌면 이 객잔에서 가장 위에 군림하는 사람은 진휘연일지도 모른다.

장기린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딸랑― 딸랑―

“어?”

“어라?”

대문이 열리며 방울 소리가 나자, 입가에 물엿을 잔뜩 묻힌 채 설떡을 집어먹던 아칠과 아팔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춘절의 삼 일째 되는 날.

마지막 연휴인만큼 객잔은커녕 동네의 가게도 영업을 하지 않는 날이었다.

게다가 대문에 휴업(休業)이라고 큼직하게 써 붙여 놓았는데, 누가 문을 열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어머나, 춘절 음식을 드시고 계시네요?”

들어온 것은 마치 남자처럼 바지에 장포를 입은 미인이었다.

어깨까지 오는 짧은 머리. 그림을 그린 듯한 미인은 아니지만, 지적인 눈매에 계속해서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법한 아담한 체구의 여인이었다.

운찬과 함께 앉아 있던 휴가 그녀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아!”

양팔을 벌리고 자신의 동생을 향해 달려가는 휴.

남궁연은 놀랄 만큼 민첩한 몸놀림으로 그런 휴를 깔끔하게 피해 낸 뒤, 오라비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춘절 음식이 차려진 탁자에 털썩 앉았다.

“맛있겠다―! 장 가가, 저도 먹어도 돼요?”

“아아, 그래.”

장기린은 힐끗 휘연의 안색을 살폈으나, 그녀는 전과는 달리 남궁연이 가가라고 불러도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웃는 얼굴로 남궁연에게 간식을 권해 주며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었다.

‘하긴, 호칭에 구애받지 않겠다고 했었지.’

휘연은 얼마 전에 앞으로 호칭은 호칭일 뿐이니 신경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보다는 객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 장기린에게 일을 도와주는 시간을 늘려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장기린은 승낙했다.

‘어째서 갑자기 마음이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여인의 마음은 어렵다. 숫자가 세 배나 차이 나는 적군과 싸우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 장기린은 생각했다.

“그런데 장 가가. 객잔에는 별일이 없나요?”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남궁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글쎄. 별일은 없었는데.”

“혹시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수상한 사람……?”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 보인다.

이쯤 되면 뭔가 큰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요새 도적 떼라도 유행하는 것일까?

장기린은 남궁연의 속을 짐작하기 위해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자객이 한 번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어제의 일이죠? 그것 말고요.”

남궁연이 지부를 맡고 있다는 뇌안각은 과연 대단했다. 이망이 들어왔던 것은 몇 사람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는데, 어느새 그것도 알고 있는 듯했다.

‘청월루에 세작이 있나?’

그 사실을 알고 있으려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어머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시면, 부끄러워요.”

“…….”

갑자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몸을 비트는 남궁연.

장기린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내못지 않게 호탕하고 호쾌한 여장부인 그녀지만, 가끔 이렇게 여인으로서의 반칙도 사용할 줄 아는 모양이다.

“…….”

주변의 시선.

특히 멀리서 남궁연을 끌어안으려고 했던 자세 그대로 굳어져 있던 휴의 시선이 따가웠다.

남궁연은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우리 뇌안각의 세작이 어디에 있나를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런 건 비밀이거든요.”

“……이젠 생각까지 읽는 건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사고(思考)의 흐름 정도는 읽을 수 있지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하고 놀라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하셨다구요. 그런데도 눈치 못 채면, 뇌안각에서 일할 생각 버려야죠, 뭐.”

남궁연은 남자처럼 씩 웃더니, 두포를 하나 집어 들고 호쾌하게 한입 베어 물었다.

“오―! 맛있다. 팥이 되게 부드럽네요? 다른 곳의 두포는 하나같이 속에 팥이 씹혀서 까끌까끌하던데.”

음식에 대한 칭찬이 나오자, 운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하하! 알아주시는군요! 그건 제가 만든 특별히 ‘부드러운’ 두포입니다. 팥을 곱게 간 다음 채반으로 한 번 걸러 내는 것이 비결이지요.”

“적당히 달콤 짭짜름한 게, 간도 딱 맞아요. 역시 요리 경연의 우승자다운 솜씨네요.”

“으하하! 부끄럽습니다!”

말로는 부끄럽다고 하지만, 허리에 손을 얹고 의기양양하게 웃는 운찬.

하나같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놈들뿐이라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런데 그 수상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장기린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처음 그 말을 물었을 때의 남궁연의 표정이 심각했던 것이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으음, 말해 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는 이야기에요. 특히, ‘평범하게’ 살려는 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해선 안 되겠네요.”

“…….”

“혹시 허름한 몰골의 남자가 혼자서 찾아오면, 되도록 상대하지 마세요. 뭐 들은 바로는 객잔에 찾아올 일은 거의 없다지만, 세상일은 또 모르는 거니까요.”

남궁연은 남은 두포를 마저 먹어 치운 뒤, 큼직한 유각도 하나 집어 들고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먹성도 좋은 아가씨다.

보통 여인네들처럼 음식을 깨작거리며 내숭을 부리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을 듯했다.

“자, 그럼 저는 할 말도 다 했으니…….”

자리에서 일어서는 남궁연.

바쁜 와중에 풍운객잔을 걱정해서 경고해 주러 온 것이 분명했다.

장기린은 그렇게 생각하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운찬.”

“네?”

“춘절 음식 남은 거 있어?”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백 단인 운찬이다.

“물론이죠.”

운찬은 씩 웃더니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가 춘절 간식들을 종류대로 담은 주발을 가지고 왔다. 여인 혼자서는 사흘 이상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푸짐한 양이었다.

아칠과 아팔은 주발에 담긴 간식을 대나무 그릇 속에 넣어 포장해 주었다.

“에고, 이런 걸 바란 건 아닌데, 받아 가도 될지 모르겠네요.”

남궁연은 쑥스러워했지만, 선물을 받아 기쁜 듯 환하게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뇌안각만 아니면, 더 잘해 줄 수 있을 텐데.’

남궁연은 장기린의 과거를 조사해 보려고 했던 여인이었다.

그런 점만 아니면, 휴의 동생인데다 성격까지 좋은 그녀와는 좀 더 가깝게 지내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자, 간식들 다 먹었으면…… 이제 청소를 좀 해 볼까?”

장기린은 모두를 선동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년의 명절인 춘절.

춘절에는 명절 음식을 먹고, 복(福) 자를 거꾸로 붙이는 도복 의식을 한 뒤, 대청소를 해야 하는 거라고 휘연에게 들었던 것이다.

장기린은 이제 ‘평범한’ 행사는 절대로 빼먹지 않겠다고 다짐한 몸이었다. 대청소가 귀찮다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아칠과 아팔이 재빨리 도도도 뛰어가더니 각종 청소 도구들을 가지고 돌아온다.

‘대청소라는 것은…… 평소에 청소하지 못하는 처마 밑이나 마룻바닥 틈 같은 곳까지 청소하는 날이라고 했던가?’

장기린은 그렇다면 자신은 처마 밑을 닦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물에 적신 걸레를 하나 집어 들고 기쁜 마음으로 힘차게 외쳤다.

“자, 그럼, 시작하자!”

☆ ☆ ☆

쭉 따라가면 항주에 도착하게 되는 대로(大路) 위를 일남 일녀가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일남 일녀라기보다는 일인일소(一人一小)라고 부르는 게 좋을 두 사람이었다.

본래는 고급이었음이 분명한 백의가 걸레짝이나 다름없이 헐어 버린 쪽은 나이가 이립에 가까운 노숙한 청년이었고, 초췌하지만 나름대로 깨끗한 화복을 입은 여인은 이제 고작 열 살이 조금 넘었을 법한 소녀였던 것이다.

“헥. 헥. 헤엑…….”

소녀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 복날의 개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자그마한 어깨는 축 늘어졌고, 울상이 된 표정처럼 양 갈래로 땋아 둔 머리는 아무렇게나 뻗쳐 있었다. 이제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하는 젓가락 같은 다리는 더 이상 걷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화매(花妹). 그러게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말했잖아?”

노숙한 인상의 청년은 유순하고 온유한 목소리처럼 순박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청년은 도저히 더 이상 소녀의 고생을 못 보겠다는 듯 손을 내밀었으나, 이번에도 소녀는 고집스럽게 손을 뿌리쳤다.

“헥, 헥…… 괘, 괜찮아요.”

“화매. 그러지 말고 업혀.”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고 했어요. 헥, 헥, 어떻게 다 큰 숙녀가 백주에 사내의 등에 업힐 수가 있나요?”

“……화매. 우린 남녀 사이가 아니라, 남매 같은 사이잖아?”

청년은 ‘열두 살 소녀는 숙녀라고 부르지 않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화를 내기에 다른 이유를 댈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록 조심해야 하는 거예요!”

“그, 그치만 십 리(十里)라고. 우린 십 리나 걸어왔어. 이젠 슬슬 고집을 꺾는 게 좋지 않을까?”

힘든 건 소녀인데, 청년이 업어 주겠다고 애원하는 듯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소녀는 어디까지나 단호했다.

“십 리면 다 왔군요. 이제 곧 항주가 보이겠어요.”

“화매. 다리가 떨리고 있어.”

“기, 기뻐서 그런 거예요. 걷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소녀는 경련하는 다리를 숨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고집을 부릴수록 괴로워지는 것은 청년 쪽이다.

청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화매. 이게 혹시 집으로 돌려보낼까 봐 이러는 거면,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아도 돼.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 않아도, 이젠 돌려보내지 않아.”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소녀는 먼 곳을 쳐다보며 시치미를 뗐다.

“그치만 봐 봐. 길의 초입에서 만났다면, 당장 돌려보내려고 했겠지만, 이미 항주에 더 가까이 와 버린 상황이라고.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어떻게 화매한테 그냥 돌아가라고 하겠어?”

“…….”

“돌아가더라도 할 일을 마치고, 내가 직접 데려다 줘야 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긴장 풀고 내 말을 좀 들어줘.”

구구절절 옳은 말이며, 진심으로 소녀를 걱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소녀는 가문에서 가출을 했고, 혹시나 약한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돌려보낼까 싶어서 이렇게 강한 척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청년이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지만, 소녀는 곤란해하며 먼 곳만 바라본다.

맞는 말이라고 해서 넘어가기엔 소녀의 자존심이 너무나 셌다.

“구양가의 자식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아요. 저는 이번 여행에서 백 오라버니의 신세는 지지 않을 거예요.”

“화, 화매!”

“그러니 그런 줄 아세요. 저는 항주까지 저 혼자 힘으로 갈 테니까요.”

그러면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소녀, 구양화의 다리는 안쓰러울 만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청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구양화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그의 도움을 받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런데 하늘의 도우심인가.

청년은 길가에 버려져 있는 손수레를 발견했다. 바퀴가 약해져서 덜컹거리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짐을 싣고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다.

‘이거다!’

청년은 자신의 소매로 수레의 짐칸 부분을 깨끗이 닦아 내고, 그 위에 등에 메고 있던 봇짐을 얹어 두었다.

덜컹! 덜컹!

일 장에 한 번씩 덜컹거리는 손수레는 금세 앞서 걸어가던 구양화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청년은 헛기침을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크흠, 이거 참, 곤란하네. 괜찮은 손수레를 주웠는데, 봇짐을 얹어 놓자니 너무 흔들려서 곤란한걸?”

“…….”

“이거 떨어질까 봐 자꾸 뒤돌아보려니까 힘든데…… 누구 도와줄 사람 없으려나?”

구양화의 귓가가 마치 고양이처럼 쫑긋거린다.

하지만 절대로 옆을 먼저 쳐다보지 않는 게 너무나 그녀다워서 청년은 큰소리로 ‘하하’ 웃고 말았다.

“뭐가 우스운 거죠?”

구양화는 볼을 붉힌 채로 마치 시비를 걸 듯이 말을 걸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화매. 다만 내가 좀 곤란한데, 도와주지 않겠어?”

“……무슨 일인데요?”

“손수레에 실은 봇짐이 떨어질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이거든. 화매가 수레에 올라타서 봇짐을 좀 잡아 주면 안 될까? 그러면 나는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청년은 제발 부탁한다는 듯한 애처로운 표정으로 소녀에게 사정했다.

구양화는 홱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하, 할 수 없네요. 백 오라버니의 일이니, 도와 드려야죠.”

사실은 그녀도 한계에 도달해서 힘들었던 것이다.

청년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야? 고마워.”

“하여간, 오라버니는 어설퍼요. 항상 이렇게 빈틈이 많으니까, 제가 오라버니를 혼자 보낼 수 없는 거예요.”

“그래. 항상 난 화매의 도움을 받지.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어.”

소녀는 못 이기는 척 수레에 올라타서 봇짐을 꽉 끌어안았고, 청년은 싱글싱글 웃으며 수레를 끌고 간다.

애초에 소녀 때문에 여정이 지체되었을 뿐인지라, 청년이 수레를 끌고 가기 시작하자 항주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마침 춘절의 마지막 날인지라, 항주의 입구엔 대시(大市)가 열려 있었다.

연휴의 마지막 날.

다음날부터 시작하는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열린 시장이었다.

평소처럼 화려한 먹거리나 볼거리는 없지만, 상해 쪽에서 들어온 식 재료나 싱싱한 채소들이 모인 것은 확실히 한 번쯤 구경할 만한 광경이었다.

특히 이렇게 가문 밖으로 나온 것은 처음인 구양화에겐 대시의 모습이 너무나도 신기해 보였다.

그동안 값어치 있는 줄도 몰랐던 채소들이 돈으로 거래된다. 게다가 구양화가 이제껏 평생 보아 온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으니, 구양화로서는 별세계에라도 온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이다.

“화매. 구경은 다 했어?”

“아, 응. 뭐, 별로 볼 거는 없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걸음을 옮기는 내내 시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청년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평소의 시장은 좀 더 재미있는 곳이야. 기묘한 묘기를 부리는 차력사들도 많고, 달콤한 당과나 특이한 먹거리를 파는 시전 상인들도 많거든.”

“다, 당과도요?”

“응. 하지만 오늘은 아직 연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없네. 아마 다음번 대시에선 구경할 수 있을 거야.”

구양화는 당과라는 이야기에 동요를 감추지 못했지만, 애써 표정을 숨기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가고 싶다면, 한 번쯤 구경을 가죠.”

청년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러자고 말했다.

구양화는 엄한 가문에서 자란 탓에 간식을 먹지 못했지만, 사실 단것이라면 사족을 못쓸 정도로 좋아하는 소녀였다.

아무리 화가 나도 당과 하나면 해결이 될 정도다.

청년은 이번 대시에 당과를 파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에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자, 그럼 가자, 화매. 이제 슬슬 객잔에 방을 잡아 둬야 해.”

“객잔인가요.”

“응. 연휴라서 영업하는 곳이 있을지 모르겠네. 혹시 영업을 안 하면 문제인데, 큰일이야.”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 사이에서 혹시 서로를 잃어버릴까 봐 손을 꼭 맞잡은 상태다.

그런데 갑자기 구양화가 걸음을 멈춰 세우더니 입을 딱 벌렸다.

“어?!”

소녀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화매, 왜 그래?”

“어, 없어요.”

“뭐가?”

“전낭이…… 없어졌어요.”

구양화는 그녀가 항상 전낭을 묶어 두는 소맷자락을 펼쳐 보이며 당황해했다.

전낭의 끈은 뭔가 날카로운 것에 잘려 나간 상태였다. 혹시나 해서 몸 구석구석을 뒤져 봤지만, 전낭은 사라져 있었다.

청년이 신음을 흘리듯 말했다.

“아무래도 배수(排手)에게 당한 것 같아.”

“배수……요?”

“사람 많은 곳에서 남의 전낭을 슬쩍하는 도둑놈이야.”

청년은 당황해서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큰일이네. 그게 우리 전 재산이었지?”

“……네.”

“나는 이제 동전 몇 개밖에 없는데…… 이대로라면 하룻밤 자기도 힘들겠어.”

구양화가 기죽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다.

사실 구양화가 청년과 합류했을 때, 그녀는 원래 돈 살림은 여자가 하는 거라며 청년의 전낭을 뺏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을 잃어버렸으니, 그녀로서는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청년은 기죽은 구양화의 모습을 보며 당황하다가, 이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화매의 잘못이 아니야. 나쁜 건 배수인걸.”

“……오라버니.”

“화매. 저기 저 커다란 대문 보이지? 저기가 대륙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라는 금선로의 입구야. 내가 어떻게든 돈을 찾아볼 테니, 저 대문 앞에서 기다려 줘. 알겠지?”

청년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인파가 몰려 있는 대시를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 시장은 아직 한창이다. 잘 찾아보면 구양화의 전낭을 가져간 배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으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구양화는 이내 눈을 한 번 쓱 비빈 뒤, 청년이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 대문 옆으로 갔다.

금선로라는 명패가 박혀 있는 대문은 십 리 밖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문(門)이었다.

구양화는 문의 기둥에 등을 기대고 괜히 바닥에 있는 돌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결국 오라버니에게 폐를 끼쳤네.”

그것은 소녀의 계획과는 아주 많이 어긋나는 일이었다.

원래 순진해 빠져서 미덥지 못한 오라버니를 지키기 위해 따라나선 여행이다. 그녀가 짐이 되는 상황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책에서 보니까, 배수가 털어 간 주머니를 되찾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힘들다던데…….”

전낭에 들어가 있는 돈은 꽤나 큰 액수였지만, 이미 잃어버린 것에 집착하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보단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더 중요하다.

소녀는 어떻게 하면 오라버니에게 끼친 폐를 만회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가장 급한 건…… 일단 잠자리야. 잘 수 있는 방이 가장 급해. 하지만 방을 구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은 내가 잃어버렸고…….’

구양화는 자신의 몸을 뒤져서 혹시 돈이 될 만한 패물이라도 있는지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패물은커녕 동전 한 푼 찾을 수 없었다.

소녀는 자신의 조숙함과 냉정한 판단력을 원망했다. 가출해서 가문을 빠져나오기 전에, 그녀는 혹시 부잣집 소녀처럼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전낭을 제외하곤 모조리 그녀의 시중을 들던 하녀의 옷으로 갈아입었던 것이다.

‘이제 돈이 될 만한 건…… 아아, 없어! 없어! 옷이나 신발을 벗어 줄 수는 없잖아!’

지금 상황에선 하나뿐인 옷과 신발이다. 돈도 없는 마당에 함부로 넘겨줄 것이 아니었다.

“아! 맞다.”

그 순간, 소녀는 생각해 냈다.

그녀가 즐겨 보던 무림영웅록 삼 권에서, 가진 걸 모두 잃어버린 주인공이 너무나 배가 고파서 객잔에서 무전취식을 해 버리고, 결국 그 돈은 직접 일을 해서 갚았던 것이다.

“역시, 책은 인생의 스승이라더니, 무림영웅록엔 모든 게 다 있다니까?”

구양화는 즐거워져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는 항상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주인공이 했는데, 그녀가 못 할 리가 없다.

주인공이 몸을 써서 돈을 갚았다면, 그녀도 몸을 써서 돈을 갚을 수 있다.

“자, 그럼 어느 객잔으로 가야 할까……?”

구양화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솔개처럼 금선로에 즐비한 객잔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장 마음에 드는 고급스럽고 예쁜 객잔들을 찾았지만, 이내 그런 객잔들은 돈도 그만큼 많이 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소녀의 눈에 띈 곳이 있었다.

거리에 즐비한 객잔들 중에서 가장 저렴하고 수수해 보이는 곳. 커다란 대죽을 반으로 쪼개서 벽을 만든 점이 인상적이었는데, 얼마 전에 새로 지었는지 외관이 깨끗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왠지 모르게 끌리는 곳이었다.

소녀는 오늘은 그곳에서 지내야겠다고 마음을 정하며, 현판에 적힌 객잔의 이름을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었다.

“풍. 운. 객. 잔.”

소녀는 빙긋 웃으며 객잔을 향해 또박또박 걸어갔다.

아마 어설프고 착해 빠진 오라버니는 한참 동안 시장을 헤매다가, 결국 전낭은 찾지 못하고 어깨가 축 처져서 돌아올 것이다.

그 안에, 현명한 동생인 그녀는 객잔 주인과 타협을 봐서 잘 곳을 구해 놓는 것이다.

그리고는 기죽은 오라버니에게 ‘짠!’하고 그녀가 해낸 성과를 보여 준다.

구양화는 그때의 기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자연히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랄, 라랄. 라라―.”

콧노래도 절로 흘러나왔다.

“흐음, 청소도 쉬운 일이 아니군.”

장기린은 처마 밑을 걸레로 닦으며, 그동안 아칠과 아팔이 얼마나 까다로운 일을 해 왔는지 새삼 깨달았다.

청소라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먼저 먼지가 쌓인 곳이 없도록 구석구석 깨끗이 털어 내고, 그다음 물에 적신 걸레로 닦아 내야 하는 것이다.

청소하는 법도 장소에 따라 다 달랐다.

창쪽은 마른 걸레로 닦아야 했고, 창틀은 말총으로 만든 먼지떨이, 바닥은 기름을 섞은 물로 닦아야 하는 등등이다.

아칠과 아팔이 미리 시범을 보이며 가르쳐 줬지만, 솔직히 장기린은 그걸 다 그대로 실천할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청소를 열심히 해 둬도, 얼마 안 가서 다시 더러워지겠지.’

장기린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기껏 노력해서 청소해 놓은 보람도 없이, 며칠만 지나면 다시 먼지가 까맣게 쌓여 버린다. 그만큼 허무하고 끝없는 일거리가 어디 있을까?

‘이런 걸 아칠과 아팔은…… 매일같이 하고 있는 거군. 이참에 월봉을 올려 줘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처마 밑으로 내려오던 장기린은, 문득 대문 앞에서 평소와 다른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아칠과 아팔 또래로 보이는 소녀 한 명이 대문을 멍하니 쳐다보며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누구지?’

아직 어리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형이고, 피부는 고생 한 번 안 해 본 것처럼 새하얗다. 부잣집 딸이라는 점은 쉽게 추측이 가능했다.

다만 왜 객잔 앞에서 저렇게 멍하니 서 있는 건가 하는 점은 알 수가 없었는데……

소녀는 장기린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이봐요.”

“음?”

“이 객잔에서 일하나요?”

존댓말을 쓰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는 고압적인 말투.

장기린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늘 휴업이라는 거, 진짜예요?”

소녀는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아, 진짜다.”

“으으……!”

소녀는 장기린의 대답을 듣자 머리를 움켜쥐며 괴로워했다.

“왜 그래?”

“아! 맞다! 당신!”

소녀는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손가락으로 장기린을 척하니 가리켰다.

“객주님을 소개해 줘요.”

“……뭐?”

“객주님을 소개해 줘요. 자세한 얘기는 그분과 할 테니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하는 소녀. 애써 강한 척을 하고 있지만, 소녀의 눈동자에선 왠지 모를 절박함이 감돌고 있었다.

‘재미있군.’

장기린은 어째서 소녀가 절박한 걸까 궁금해졌다.

그는 두말하지 않고 객잔의 문을 열고 소녀를 안내했다.

“들어와.”

“어……? 당신 마음대로 사람을 들여보내도 돼요?”

“아아, 괜찮다.”

소녀는 미심쩍은 얼굴을 했지만, 딱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순순히 장기린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문이 닫힌 뒤, 장기린은 툭 던지듯 말했다.

“내가 여기 주인이거든.”

“……예에―?!”

장기린은 그 외침에서 예전 운찬의 모습이 떠올라 웃어 버렸다.

“으으…….”

소녀의 손이 머뭇머뭇 접시를 향하려다 움츠러든다.

“으으으…….”

다시 한 번 용기를 내 보지만, 헛수고.

소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 아예 몸까지 휙 돌려 버렸다.

“자, 그러지 말고, 하나 먹어 보렴.”

“…….”

“언니가 주는 건데, 정말로 안 먹을 거야?”

휘연이 물엿이 잔뜩 묻은 미화당 한 개를 집어 직접 건네주자, 소녀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소녀는 처음 춘절 음식을 권했을 때 괜찮다며 사양했었다.

그 뒤로 계속 체면을 지키려는 듯 버티고 있었지만, 달콤한 향기를 내뿜는 물엿 앞에서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는 중이었다.

“자, 아아―.”

“으, 아―.”

결국 함락되고 마는 소녀.

소녀는 입안 가득 미화당을 집어넣고 씹은 뒤, 꿈결 속을 헤매는 것처럼 몽롱한 표정으로 변했다.

“맛있나 보네.”

휘연이 재밌다며 웃을 만큼 소녀의 표정은 솔직했다.

“더…….”

“응? 뭐라고?”

“하나 더…… 먹으면 안 될까요?”

한 번 무너지더니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휘연이 아예 소녀를 무릎에 앉혀 놓고 미화당을 하나씩 입에 넣어 주자, 소녀의 얼굴이 점점 더 행복하게 변했다.

“나, 언니가 좋아요.”

결국 도도했던 소녀는 미화당 몇 개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휘연이 빙긋 웃으며 왜 이곳에 왔냐고 묻자, 소녀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오라버니가 걱정되어서 왔어요.”

“오라버니?”

“네, 워낙 착해 빠지고 순박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만날 속는 사람이거든요. 내가 없으면 어디 가서 항상 사기만 당할 거예요.”

“좋은 사람인가 보네?”

“그렇긴 해요.”

휘연의 말에 소녀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오라버니는 여기 항주에 사는 거야?”

“아뇨. 같이 여기까지 왔어요.”

“항주에? 왜?”

“오라버니는요, 성격은 착해 빠졌지만, 무공이 대단하거든요. 무당파라고 아세요?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문파인데.”

무당파라는 말에 장기린의 몸이 움찔했지만, 휘연과 소녀 두 사람 모두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튼, 오라버니 말로는 아주아주 나쁜 사람이 있는데, 오라버니가 그 사람을 잡아야 한데요.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죽을 거라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으음, 그래? 오라버니가 대단한 일을 하는구나.”

“네. 착해 빠지긴 했지만, 능력은 있는 오라버니예요.”

소녀는 거기까지 말한 뒤, ‘핫!’하고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까, 깜빡했어요. 오라버니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머, 그래? 그럼 어서 가 보렴.”

“그런데 그전에…….”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장기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기, 저랑 오라버니는 오늘 잘 곳이 필요해요.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없을까요?”

“신세? 아, 혹시 돈이 없는 건가?”

“……배수한테 전낭을 다 도둑맞아서……. 하지만 일을 해서 갚을게요. 저는 잘하는 일이 많거든요.”

장기린은 소녀의 눈에서 느껴지던 절박함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돈이야 한 번쯤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문득 이 당돌한 부잣집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일? 어떤 일을 할 수 있지?”

휘연이 옆구리를 쿡 찌른다.

장기린은 괜찮다는 눈짓을 보낸 뒤, 소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뭐든지? 청소나 빨래 같은 것도?”

“……네. 하지만, 저기……. 그래도 가장 잘하는 걸 시키는 게 이득일 거예요.”

장기린이 그 잘하는 게 뭐냐고 묻자, 소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난(蘭) 치기라고.

“큭!”

장기린은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옆을 보니 휘연도 몸을 비스듬히 돌리고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크흠! 좋아. 하룻밤 재워 주지. 대신 난은 꼭 쳐야 한다.”

“그, 그럼요! 빚을 남기는 건 가문의 수치예요. 대가는 꼭 지불할 거예요.”

소녀는 기쁜 기색이 만연하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럼, 오라버니를 데리고 이곳으로 올게요!”

“아아, 그래.”

가벼운 발걸음으로 밖으로 뛰어가는 소녀.

장기린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소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휘연 또한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소녀의 자취를 쫓았다.

“악……!”

그런데 갑자기 소녀의 비명이 들려왔다.

장기린은 눈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는 문을 열고 나서던 중에 뭔가에 부딪쳤는지 엉덩이를 땅에 대고 넘어져 있었다.

휘연이 얼른 달려가 소녀를 부축해 주었다.

“괜찮니? 다치진 않았어?”

“으윽! 네. 괜찮아요.”

휘연은 소녀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녀가 무엇에 부딪쳤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뭐야, 휴업이 아니었나?”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

하지만 어쩐지 휴업이길 바랐다는 듯한 말투였다.

“누구……시죠?”

휘연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소녀를 등 뒤로 숨기고 사내를 경계했다.

얼굴을 가리는 죽립을 쓰고, 평범한 황토색의 장포를 걸친 건장한 사내였다.

마치 누군가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치수가 맞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드러난 팔뚝엔 마치 쇠사슬 같은 걸로 칭칭 감았던 것 같은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뭐,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새끼가 있는 건 건드리지 않으니까.”

“네……?”

“상관없는 사람이니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야.”

짐승처럼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은 사내는 그걸로 끝이라는 듯 몸을 돌리려고 했다.

별로 관심 없다는 듯. 그보다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뒤돌아서지 못했다.

그가 뒤돌아서려는 순간, 안쪽에서 장기린이 나왔던 것이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장기린은 어쩐지 얼어 버린 것처럼 굳어 있는 휘연을 보며 걱정스럽게 묻고, 대문 앞에 서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는 죽립을 쓰고 있다.

장기린은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두 사람 모두 서로를 한눈에 꿰뚫어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자는, 나와 동류(同類)다.’

라고.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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